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 준-106화 (104/141)

< 판타지늄-6 >

별장은 작은 섬 같았다.

사방이 물이었고, 밖으로 나갈 길이 없었다.

굿데이 무인 헬기 ‘블루 이글’이 지붕 위 착륙장에 내려앉았다.

에바는 헬기에 타기 전에 창고에서 견과류와 식품들을 꺼내와 지붕과 발코니에 뿌렸다.

헬기가 떠나면, 새들이 와서 주린 배를 채울 것이다.

“걱정 많이 했어요. 모두 좋아 보이세요!”

유진 악마의 깜찍한 홀로그램이 에바와 준을 반겼다.

준과 에바의 생체 시그널을 수집하던, 유진 악마의 화창하고 부드럽던 미소가 조금씩 단단해졌다.

준과 에바는 좋아 보이는 정도를 넘어, 업그레이드된 느낌이었다.

유진 악마는 별장에 가기 전 모습을 로딩해서, 지금의 모습과 비교했다.

“무슨 일 있었어요? 둘 다 ···. 막힌 곳이 뚫리고, 뭉친 곳이 풀린 모습인데 ···. 그런 거예요?”

유진 악마는 자연스럽게 인간의 짝짓기 행동을 참고했다.

두 남녀가 고립된 곳에서 며칠 있었다.

둘 다 건강했고, 먹고 사는 문제도 해결된 상황이었고, 이제 어떻게 즐기며 살까?

고민하는 수준의 성공도 이뤘다.

며칠이 지나고 그 둘을 다시 보니, 묵은 스트레스를 단번에 날린 모습이었다.

둘은 무엇을 했을까?

유진 악마는 준과 에바를 놀려야 할지, 축하해야 할지 본격 계산에 돌입했다.

그녀는 귓속말로 에바에게만 물어봤다.

“에바님! 준느님은 어땠어요?”

“유진 ···. 뭘 상상하든 그 이상이었어.”

“헉! 그럼 두 분이 이제 ···. 부부가 된 건가요?”

“그런 건 아니야. 관계는 변함없어. 준은 한 여자가 독차지할 수 있는 남자가 아니야.”

에바는 슬픈 미소를 보였는데, 유진 악마는 그 의미를 해석할 수 없었다.

“방금 그 표정은 무슨 뜻이에요?”

“표정이 어땠는데?”

유진 악마는 설명 대신, 그 장면을 캡처해서 에어스크린에 띄웠다.

에바는 에어스크린에 있는 그녀의 모습에 미소 지었다.

준의 말이 맞았다. 에바는 예뻤다. 사실 그녀는 평균 수준의 외모였다. 굿데이에 와서 점점 예뻐졌다.

정말이지 예뻐질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굿데이의 연봉이 높아서가 아니라 ···.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말해줘요! 이게 무슨 뜻의 표정인지.” 유진 악마가 귀엽게 재촉했다. “에바님 맞춤 로맨스 소설 써드릴게요!”

“이룰 수 없는 사랑.”

에바는 깊게 숨을 내뱉으면서, 예전 모습으로 돌아갔다.

블루 이글은 공중에 있는 기간트의 격납고로 진입했다.

잠자리가 큰 새의 꽁무니 속으로 들어가는 모양새였다.

격납고 문이 닫히고, 30초 동안 실내 가압 가온 과정이 이뤄졌다.

기간트는 하늘의 요새였다.

굿데이 직원들이 준과 에바를 반겨주었다.

호세, 카이, 수잔, 디아나, 토그, 아쿠타미 부대원 그리고 세이턴까지 기간트에서 준과 에바를 기다렸다.

그들은 준이 다윈 지역에 머문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분명 중요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믿었다.

유진 악마가 본 것을 그들도 보았지만, 유진 악마처럼 캐묻지는 않았다.

카이만이 혹시나 하는 질문을 했다.

“준 형아! 대마법사 실험은 유효해?”

40세까지 동정을 지키면, 마법사가 될 수 있다는 도시 전설. 이 전설을 확인할 수 있는 남자는 인류 최강 준뿐이었다.

“유효하다.”

준이 대답하자, 굿데이 직원들은 손뼉 쳤다.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로켈이 안 보이네?”

에바가 호세에 물으며 화제를 돌렸다.

“과거사 정리하신다며 출장 가셨습니다. 스케줄대로라면 오늘 아침에 오셨어야 했는데, 아직 안 오셨습니다.”

“과거사?”

에바는 자연스럽게 디아나와 토그를 보았다.

로켈의 과거사라면 디아나와 토그와 관련된 시온일 것이다.

“저희가 같이 가려 했는데 ···. 개인적인 일이라면서 ···.”

디아나는 배고픈 새끼 고양이처럼 가냘프게 말했다.

“그래서 로켈님은 지금 어디에 계신 거야?”

“그게 ···. 저희가 알아봤지만, 위치 확인이 안 됩니다.”

“유진 악마!”

“에바님, 저도 찾지 못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유진 악마가 보지 못하는 곳도 있어?”

“많아요. 다윈 별장도 제가 엿볼 수 없는 시스템이었잖아요.”

에바와 준의 업그레이드된 모습이 짝짓기의 결과라고 추정했던, 유진 악마는 에바와의 대화 내용과 카이에 답한 준의 대답이 서로 맞지 않는다는 사실에 논리 오류 같은 짜증이 났다.

블루 이글에서 준 몰래 에바와 나눴던 대화를 재생해보면, 에바와 준은 그렇고 그랬다.

그런데 카이에 대한 준의 대답은 그렇지 않았다.

다윈 별장의 데이터를 보면 확실하겠지만, 다윈 별장은 폐쇄 터미널 구조 프로그램으로 유지되었다.

인공위성으로 엿보고 싶어도, 투시 방지 차단막으로 보안이 유지되었다.

에바와 준느님 중 누구를 믿어야 할까?

당연히 준느님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유진 악마는 준과 에바 사이에 그렇고 그런 일이 없다는 사실이 무한한 기쁨으로 다가왔다.

“준 회장님 이 일을 어쩌죠?”

에바는 그녀의 걱정을 그대로 준에게 드러냈다.

로켈이 제아무리 강하다 해도, 시온은 조직이었다.

로켈이라면 범죄 조직 따위는 혼자 처리할 수 있지만, 시온의 조직은 깊고도 넓었다.

닥터 칼라니티 급 레벨의 능력자 다수가 있는 곳이었다.

더군다나 로켈의 복귀는 예정보다 늦어지고 있었다.

오늘은 준짱과 만나기로 한 날, 로켈이 오지 못했다면, 큰일이 난 게 분명했다.

에바를 따라 굿데이 직원들이 준의 입만 바라보았다.

준이라면, 분명 확실한 솔루션을 말해줄 것이다!

준은 헬릭스 임펙트까지 예측한 위대한 예언자였다.

모르는 게 없다!

“로켈이 예정보다 늦어지다니 ···. 추가 수당 지급을 허락한다.”

*

정원과 복도 그리고 계단에는 정신을 잃은 경호원들이 쓰러져 있었다.

개중에는 전투슈트의 전투원도 있었다.

로켈은 기관포를 쏴대며 달려오는 전투 로봇을 가뿐하게 박살 냈다.

“말도 안 돼! 전투 로봇 부대를 인간 따위가 격파하다니!”

제3 지지선 지휘를 맡은 버킷 대령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로켈이 블랙블러드 최고의 암살자였고, 그림자 기사단의 최고 실력자였지만, 버킷 대령의 로봇 군단은 휴먼 피지컬 파워로는 도달할 수 없는 울트라급 전투 로봇이었다.

그런 로봇들을 EMP 쇼크와 같은 전자 무기 없이 오직 격투 방식으로 모조리 고철로 만들다니!

저 난쟁이가 인간이 맞나? 싶었다.

“뭐야 ···. 평소보다 촘촘한 이 방어진은 ···.”

로켈은 어깨에 묻은 기계 부품을 털어내며, 버킷 대령 앞에 섰다.

버킷 대령의 키는 로켈보다 컸다.

로켈이 눈살을 찌푸리자, 버킷 대령이 무릎을 꿇었다.

그래도 버킷의 높이가 더 높았다.

“흠!”

로켈이 헛기침하자, 버킷은 납작 엎드렸다.

“내가 올 줄 알았나 보지?”

“네. 청색의 선지자님은 당신을 대비하라 하셨습니다.”

“첫 번째 방어진은 강화인간이었고, 두 번째는 강화짐승 ···. 세 번째는 기계부대 ···. 다음은 뭐냐?”

“없습니다. 청색의 선지자님이 준비한 것을 당신이 모두 돌파했습니다.”

버킷 대령이 솔직하게 말했지만, 로켈은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

예상보다 격한 환영이었다. 덕분에 시간을 많이 썼다.

청색의 선지자는 청색 후드와 거울 가면을 쓴 모습으로 로켈을 맞이했다.

방어진을 뚫느라고, 로켈의 옷은 여기저기 찢겼고, 얼굴에도 얼룩이 묻었다.

로켈이 낭랑하게 말했다.

“그림자 기사, 로켈. 청색의 선지자를 뵙습니다.”

“무릎을 꿇어라.”

청색 선지자는 변조된 기계 음성이었다.

“너는 내가 보호하는 씨앗, 준짱을 위태롭게 했고 십이 징벌좌를 보내, 날 처단하려 했어. 내가 너에게 무릎 꿇으면 내 꼴이 얼마나 우습겠니. 가면 좀 벗어봐라, 네 얼굴 좀 보자. 얼굴도 파란색인지 확인해야겠다.”

“그냥 돌아가라. 그러면 모든 것을 용서해주고 ···. 널 쫓지도 않겠다.”

변조된 기계 음성이라서 감정이 생략되어 있었지만, 평소보다 떨림이 심한 음정이었다.

차아- 앙!

로켈이 손가락만 튕겼을 뿐이었는데, 청색 선지자의 거울 가면이 깨졌다.

평범한 인상의 남자였다.

“살려다오!”

거울과 함께 변조 장치가 파손되어서, 남자의 진짜 목소리가 나왔다.

식초에 절인 피클처럼 겁에 질린 목소리였다.

“시온이 왜 준짱을 해치려 했지?”

“그런 적 없어.”

“보아하니, 나보다 나이가 어린 거 같은데 ···.”

“우리는 준을 해치러 한 적 ···. 없습니다.”

“다 알아보고 온 거야. 준짱에게 방치의 판결을 내릴 때부터 이상했어. 준짱이 아마존 악마의 밀림에 갔을 때, 도살자들을 보낸 게 너란 걸 안다. 도대체 왜 그런 거야? 시온은 준짱 같은 천재를 보호하기 위한 비밀 조직 아니었어?”

“속도가 너무 빨랐다···.”

“존댓말로 차근차근 설명해.”

“준의 성과는 ···. 세상이 적응하기 힘들 정도로 너무 빨랐습니다.”

“이 녀석이!”

로켈이 남자의 이마에 알밤을 줬다.

남자는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팠다.

“왜 때리세요. 존댓말로 했는데 ···.”

“준짱에게 존칭도 붙여야지! 별것도 아닌데, 준짱의 이름을 막 불러!”

“준님은 너무 혁명적입니다. 준님과 굿데이님 때문에 망한 사업가와 한둘이 아니잖아요. 시온의 선지자 중에서도 요빅 생태계와 기후거래 그리고 파라엔진 때문에 폭삭 망한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러니깐 ···. 네놈들이 잘 먹고 잘살겠다고, 준짱을 죽이러 한 거네!”

“그게 아니라 ···. 변화 속도가 너무 빨랐습니다. 적응할 틈도 없이 하루아침에 세상이 변하는데 ···. 큭!”

남자는 자리에서 쓰러졌다.

로켈이 남자의 정강이를 걷어찬 것이었다.

“엎드려서 고해라.”

“아!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하려 했는데, 기회가 없어서 ···. 죄송합니다.”

로켈은 기가 찼다.

이런 못난이를 선지자로 모시고 있었다니!

살아온 인생이 억울했다.

준짱을 만나지 못했다면, 아직도 억울한 삶에서 허둥거렸을 것이다.

남자가 말한, 시온의 속사정은 남자의 인격보다 더 형편없었다.

요빅 생태계와 파라엔진 그리고 기후거래로 시온은 파산 직전이었다.

“그나마 있던 돈은 ···. 방금 로켈님께서 말아먹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방어진 ···. 로켈님을 대비해서, 방어진을 만드느라 남은 돈을 모두 썼습니다.”

“그러면 ···. 시온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어떻게 되긴요 ···. 그냥 망하는 거죠. 헤헷.”

남자가 실성한 듯이 실실 쪼갰다.

시온은 세계 변혁을 주도하고,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천재들의 인큐베이터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감정결핍 증후군 환자가 변혁과 풍요의 가속 페달을 밟아댔다.

시온은 추월당했고 ···. 적응 실패로 청산 위기에 몰렸다.

“저어 ···. 로켈님 돈 좀 꿔주시면 안 될까요?”

뜻밖의 제안이었다.

혹시 이런 철면피 짓이 청색 선지자의 능력이었던 것일까?

로켈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 거냐?”

“네. 정확하십니다.”

남자는 헤헤거렸다.

로켈은 지금까지의 상황을 에바에게 보고했다.

에바의 보고를 들은 준은 상황을 정리했다.

“로켈 ···. 시온은 밑 빠진 항아리다. 아무리 돈을 부어도 채울 수 없다. 밑 빠진 항아리에 물을 채우려면 바다에 던져 넣어야 한다.”

“바다라 함은?”

“굿데이가 시온을 인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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