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 준-104화 (102/141)

< 판타지늄-4 >

더글라스 수상은 글레빌 총재가 내민, 블랙카드를 우두커니 보았다.

법률적으로 더글라스 수상은 기후 중앙은행 총재를 선임하는 임명권을 가진다.

더글라스 수상이 글레빌 총재보다 윗선이지만, 기후자본주의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은 기후 발권력이었고, 화폐를 찍어내는 발권력은 중앙은행의 고유 권한이었다.

결국 이것저것 다 따져보면, 최고 권력자의 트로피는 기후 중앙은행의 것이었다.

“다윈 비구름 옵션거래가 얼마나 중요하길래.”

더글라스는 블랙카드를 짚었다.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블랙카드를 받지 않고 다윈 비구름 옵션거래를 금지한다면, 세계 기후 은행의 뜻을 거역하게 된다.

세계은행의 뜻을 거역하고 무사했던 정치가가 있었던가? 한 명도 없다.

“일이 잘못됐을 때, 제물로 삼을 희생양은 있나?”

투자 파산 등급 거래였다.

더글라스 수상에겐 빠져나갈 구멍이 절실했다.

“굿데이가 가장 적합한 후보였는데, 준 녀석이 빈틈을 보이지 않았습니다만 ···. 올림포스의 오라클이 나설 겁니다. 다윈 비구름 옵션가치를 정한 게 그들이죠.”

“오라클? 사하라 숲 프로젝트 기후 채권으로 평판이 안 좋던데.”

“그래서 이번 기회가 중요한 겁니다. 올림포스는 기후 신용평가를 직접 하고 싶어 합니다.”

굿데이의 기후 시장 장악력이 하루가 다르게 커지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굿데이가 ‘올림포스 기후 거래를 믿을 수 없다!’라고 선언하면, 올림포스는 망하고 만다.

준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굿데이를 젖히는 것은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도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럼, 성명을 발표하겠네.”

더글라스 수상이 직접 카메라 앞에 섰다.

그는 호주 기후중앙은행을 지지하고,

올림포스 기후 거래소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다윈 비구름 옵션거래를 금지하지 않겠노라! 발표했다.

기자가 굿데이의 예측대로 대재앙이 발생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올림포스의 기후 오퍼레이션 능력은 기후 재난을 예방하고 통제하는 기술입니다. 예측된 재난이 현실이 되도록 방관하지 않습니다.”

더글라스 수상은 노련한 폭탄 돌리기 선수였다.

그는 모든 책임을 올림포스로 넘긴 셈이었다.

세계 기후 은행이 정치가에게 바라는 딱 그 수준이었다.

앙리 백작은 올림포스에서 가장 똑똑하고 뛰어난 엘리트들을 불러모았다.

그들은 각 분야에서 최고로 인정받는 천재들이었다.

모인 인물 중에는 오라클의 이네즈도 있었다.

“전쟁이다. 굿데이의 투자파산 등급은 기후 거래 제도의 근간을 뒤흔드는 도발 행위야! 어느 누가 투자파산 등급에 투자하겠어! 너희가 할 일은 전쟁에서 이기는 거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태양의 위치를 바꾸더라도! 굿데이의 예측한 재앙은 생겨나서는 안 돼!”

앙리 백작 눈에 핏발이 섰다.

이번 기회에 굿데이를 앞질러야 했다.

전력만 놓고 보면, 올림포스가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기후오퍼레이션이 가능한 오퍼 위성을 얼마든지 동원할 수 있었고, 굿데이의 예측 시뮬레이션도 있었다.

오퍼 위성을 추가로 운영하면, 예측된 재난 따위는 얼마든지 상쇄할 수 있다.

올림포스의 엘리트들도 같은 판단이었다.

이번만큼은 굿데이가 조금 과했다.

투자파산 등급이라니!

그냥 투자 부적합 등급만 매겼어도, 경고 효과는 충분했다.

굿데이의 기후 신용 평가가 공개되고, 호주에서 크고 작은 시위가 일어났다.

다윈 비구름 옵션거래를 중지하라는 요구였다.

호주 정부와 기후 중앙은행 관계자들은 옵션거래를 차단한다고 재난을 막는 것이 아니라고 설득했다.

“굿데이 평가 보고서에도 옵션거래 봉쇄가 재난을 예방한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굿데이에 직접 확인한 건가요?”

“최종 답변은 받지 못했지만, 올림포스에 의뢰했습니다.”

“올림포스라뇨? 왜 굿데이에게 직접 확인하지 않죠?”

“기후 관련 업무는 올림포스를 거쳐야 합니다. 굿데이의 신용 평가는 올림포스의 용역을 받아 이뤄집니다.”

“뭐예요? 굿데이의 확인을 받은 게 아니네? 정부는 다윈 비구름 거래를 중지하라! 중지하라!”

*

준은 투박한 선으로 그려진, '번개 인간'을 감상하며 악어 튀김을 맛봤다.

번개 인간 밑으로 고래, 악어, 야자수, 유칼립투스 나무, 악어, 캥거루, 벌거숭이 인간이 어지러이 널렸다.

5만 년 전 그려진, 번개 인간은 강한 비구름의 의인화였다.

그림을 통해 5만 년 전 호주 원시인의 삶을 보고 느낀다.

갑자기 들이닥친 폭우가 두려웠다.

천둥 번개가 하늘을 찢었다.

악어까지 쓸어버리는 엄청난 비가 무서웠다.

살아남았지만, 두려움은 계속된다.

날뛰는 두려움은 생명을 얻어, 진화하듯이 정교한 거짓말이 된다.

이야기가 완성되자, 두려움은 축제가 되었다.

즐거움이 되었다.

즐거움 ···. 암각화가 그 증거였다.

준이 두려움과 공허감을 길들이지 못했다면, 준도 두려움에게 생명을 주었을 것이다.

거짓말을 해댔을 것이고, 듀크처럼 사기 쳤을지도 모른다.

준은 듀크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듀크는 나쁜 게 아니라 ···. 그저 약한 것뿐이다.

듀크는 거짓에 의지해야 할 정도로 약하다.

거짓의 후예들 ···. 종교, 과학, 그리고 미래.

준은 과학이 진실이라 믿지 않았다.

과학은 진실과 진리를 찾는 과정 중에 잠깐 스치는 풍경에 불과했다.

준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언젠가는 인류도 깨닫게 될 것이다.

진리와 진실은 찾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임을.

새와 파충류가 가까운 관계인 건 알았지만, 맛까지 비슷할 줄이야!

준이 먹고 있는 악어 튀김은 숙성된 닭고기 같았다.

“준 회장님. 아주 맛있네요!”

에바는 악어 껍질 부위를 좋아했다.

악어 껍질은 돼지 껍데기처럼 쫄깃했다.

악어고기는 닭고기보다 늦게 익어서,

초벌 튀김을 길게 하고,

한 번 더 튀겨야 제맛이 났다.

부위에 따라 생선이나 삼겹살 같은 맛이 나기도 했다.

그녀는 즐거웠다.

준과 함께 휴가 온 기분이었다.

그녀의 착각이었겠지만, 신혼여행 느낌이었다.

느낌만으로도 무지하게 설레고 그냥 좋았다.

에바가 속도를 냈다.

“악어 고기는 식으면 맛없어요!”

“식을 기회를 주지 마.”

“그럴 거예요. 그런데 왜 안 드세요?”

“충분히 먹었어.”

준이 직접 한 튀김이었지만, 그는 두 조각만 먹었다.

나머지는 에바의 것이었다.

그녀는 마지막 조각을 먹으면서, 조금 놀랐다.

평소 식사량과 같은 양이었다.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준이 에바의 식사량을 아는 걸까?

굿데이 경전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모든 것은 준의 뜻대로.’

준이 서둘러 호주로 왔을 때, 친아버지 듀크 때문인 줄 알았다.

그러나 요 며칠 준의 행동은 듀크와 관계없었다.

“준 회장님. 올림포스가 일곱 오퍼 위성을 이곳으로 이동시켰습니다. 다윈 비구름 옵션거래에 따른 재난 방지 프로그램입니다. 그리고 ···.”

그녀는 올림포스에서 요청해온 의뢰를 전했다.

“그들은 다윈 비구름 옵션거래로 예측되는 대홍수를 차단하는 방법을 원합니다.”

에바는 갓 뽑아낸 에스프레소에 우유를 넣어서, 준에게 건넸다.

준은 조용히 한 모금 마셨다.

“에바 ···. 내가 올림포스 라운드에서 푸리에 구조 방정식이 상상력의 영역을 다룬다고 했었지.”

“네. 매우 어려운 내용을 쉽게 설명했었죠.”

“기후 신용 평가는 상상력을 다루는 거야. 다윈 비구름 옵션을 투자파산 등급으로 정한 이유는 ···. 푸리에 구조 방정식의 상상력을 넘었기 때문이야.”

“준 회장님. 죄송하지만, 그렇게 말씀하셔도 저는 모릅니다. 올림포스가 원하는 것도 ···. 과정이 아니라 결론입니다. 대홍수를 막는 방법만 알려주면 ···.”

“그걸 모르겠어.”

“네?”

에바의 눈이 동그래졌다.

‘방금 준이 모른다고 한 거 맞나?’

준은 조용히 커피를 마셨다.

마치 그것이 자신의 할 일이라는 듯이.

“저어 ···. 준 회장님 ···. 다윈 대홍수를 막는 방법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모르시는 건가요? 거래하든 안 하든 대홍수가 필연이라는 뜻인가요?”

“지금까지 내가 다뤄왔던 인과율은 원인이 결과를 만들었어. 그런데 ···. 다윈 비구름 옵션은 그게 통하지 않아. 결과는 정해져 있고, 원인만 바뀌었어.”

다시 한 모금.

멀뚱멀뚱하게 쳐다보던 에바가 준의 커피를 빼앗아서, 단번에 마셔버렸다.

“결과가 정해져 있고, 원인만 바뀐다고요?”

“그런 거 같아. 푸리에 구조 방정식이 다루는 상상력의 영역을 벗어나면, 말도 되지 않는 게 많더라고. 나의 고밀도 지식 생태계가 초라할 정도였어.”

“준 회장님.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지구.”

“네 맞아요! 지구 중에서도 대홍수가 예측된 바로 그곳 다윈 지역이에요! 이곳에 재난이 닥친다면, 안전한 곳으로 서둘러 ···.”

갑자기 준이 에바를 껴안았다.

깜짝 놀란 그녀는 하던 말을 멈췄다.

온몸이 화끈 달아올랐다.

준과 단둘이 있는 별장이었고,

악어 튀김이 곁들어진, 신혼여행 같은 분위기였다.

안전한 곳으로 가기 전에 할 일이 있다면, 해야 하지 않을까?

“약속해줘.”

준은 그녀 어깨를 잡고 얼굴을 정면으로 보았다.

“주인님 ···. 뭐든.”

그녀는 홀린 듯이 말했다.

그녀 얼굴은 홍당무 같았다.

“다시는 내 커피 빼앗아 먹지 마.”

준은 눈물까지 글썽였다.

“다른 건 없나요?”

“있어야 해?”

에바는 대답 대신 준의 입술에 키스했다.

정말이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웁!”

준은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에바의 혀를 맛봤다.

방심한 탓이었다.

푸리에 구조 방정식을 뛰어넘는 미지의 세계를 연구하느라, 주변에 소홀했다.

에바는 첫 경험으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여자였다.

오히려 에바와의 경험은 앞으로 있을 모든 경험을 합친 것보다 강렬할 것이다.

준은 두려움과 공허감, 감정, 욕망, 심지어 숨 쉬는 것까지 컨트롤하고 길들였지만, 에바의 접촉에서 오는 느낌은 또 달랐다.

이런 느낌이라면 ···. 가끔은 주변에 소홀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준은 에바의 몸을 더듬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

“에바?”

에바는 정신을 잃었다.

완전히 혼절한 상태였다.

준과의 키스는 그 정도로 강력했다.

준의 손끝만으로도 정신을 잃었던 그녀였다.

지금 그녀의 상태는 ···. 목숨이 위험했다.

로맨틱한 키스가 심폐소생술의 인공호흡으로 변했다.

에바는 이틀이 지나서야 깨어났다.

눈을 뜬 그녀가 처음 한 말은 ‘죽어도 여한이 없다.’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여자라서 행복해요.’

창밖에서 끊임없이 북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소리죠?”

그녀는 간신히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앉았다.

쿠르르 쾅쾅!

마치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져 내렸다.

“푸리에 구조 방정식 저편에 있는 세상 ···.”

에바는 스마트 워치를 확인하고, 그녀가 이틀 동안 정신을 잃은 것을 알았다.

세상에! 키스 한 번 했다고, 정신을 잃고 세상이 이렇게 변하다니!

그녀는 놀랍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했다.

누가 뭐래도 준의 첫 키스는 에바의 것이었다. - (혀를 넣은 키스)

달에 깃발을 꽂은 느낌이었다.

산소 부족으로 정신을 잃긴 했지만 ···.

에바는 스마트 워치 에어스크린을 띄워서 그동안의 일을 파악했다.

다윈 비구름 옵션거래는 이뤄졌다.

올림포스는 오퍼 위성을 동원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고,

총력을 다해 재난 방지에 주력했다.

거래 23시간까지는 올림포스가 성공한 듯 보였다.

그러나 24시간이 되자, 나선형 먹구름이 다윈 지역에 나타났다.

오퍼 위성이 기후 오퍼레이션을 시도했지만, 나선형 먹구름의 성장을 막지 못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