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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 준-103화 (101/141)

< 판타지늄-3 >

두 남자는 사냥개처럼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은 수상 관저 경호실 소속 요원이었다.

“따라오시죠.”

“제 몸이 필요한 일도 아닌데, 통신 채널로 하죠. 그게 더 빠르죠.”

준은 더글라스 수상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굿데이의 회장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부평초가 아니었다.

요원들은 당황했다.

멋진 헬기와 함께 나타나서 더글라스 수상의 요청이라고 하면, 모두가 따라 나섰다.

그러나 준은 ···. 귀찮아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표정을 한 줄로 요약하면 ···. ‘냉큼 꺼져라!’였다.

요원들은 특수 부대 출신이었고,

약간의 무리수를 써서라도,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 그들의 사고방식이었다.

“호주의 안위가 걸린 문제입니다. 임의동행에 응하지 않으시면, 절차에 따라 강제 동행하겠습니다.”

준은 졸린 눈으로 요원들을 보았다.

준의 몸에 손대려던, 요원이 움찔하며 멈췄다.

겉보기에 준은 별거 없었지만, 보이지 않는 오라가 넘쳐 흘렸다.

요원은 공포의 쓰나미에 떠밀려, 뒷걸음질쳤다.

‘방금 뭐였지? 내가 저 애송이에게 겁먹어?’

그는 조심스럽게 준을 살폈다.

확실히 준에겐 비범함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었다.

‘건들면 죽는다.’ 수준이 아니라, ‘건들면 죽지도 못한다.’ 급 포스였다.

그의 본능과 경험은 합창하듯이 목청을 높였다.

‘준을 건들지 마라!’

힘으로 할 수 없다면 ···.

“호주에서는 호주 법을 따라 주십시오.”

요원의 목소리가 떨렸다.

호주에서는 호주의 법을 ···. 이보다 더 강력한 홈그라운드 룰은 없었다.

제아무리 오만한 로마인도 호주에 오면 호주의 법을 따라야 한다.

준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준은 어쩔 수 있었다.

“법을 바꿔요.”

요원들은 짙은 흙먼지 바람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흰개미 집을 뭉갠, 헬기가 프로펠러 속도를 올렸다.

요원들은 서로 눈치를 봤지만, 방법이 없었다.

“후회할 겁니다!”

“살고 싶으면, 걸어가요.”

“뭐?”

“걸어서 돌아가라고요. 저쪽 너른 바위에 착륙했다면, 좋았을 텐데 ···.”

준은 아쉬웠다.

그는 헬기 심부름꾼을 예상했고,

헬기가 자연 작품을 파괴하지 않도록,

때맞춰 유령 전사들의 묘지를 지나는 중이었다.

헬기 조종사가 자연 친화적인 인물이었다면,

절대로 흰개미 집 위에 착륙하지 않았을 것이다.

날리는 흙바람에는 흰개미도 섞여 있었다.

요원들은 빈손으로 헬기에 올라탔다.

“준은?”

헬기 조종사가 물었다.

“전화로 하겠대.”

“더글라스 수상님은 직접 얼굴을 보고 대화하는 걸 좋아하시는데 ···. 그렇게 말했어.”

“그 말도 했어.”

“그러니깐 뭐래?”

“대꾸도 안 해. 졸린 눈으로 우리 말을 씹었어.”

“억지로라도 끌고 와!”

“그게 ···. 완력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어. 우리가 실력행사를 했으면, 보기 좋게 뻗었을 거야.”

“그 정도야?”

“그 이상이야. 그리고 우리더러 걸어가랬어.”

“왜?”

“그래야 살 수 있다고 ···. 그리고 또 뭐랬더라? 아기가 벌레를 밟지 않는 건 벌레에게도 중요하지만, 아이에게도 중요하다며, 헬기를 두고 걸어서 돌아가라고 강조했어.”

“미친놈이군.”

조종사는 레버를 잡아당기며, 헬기를 띄웠다.

헬기는 신경질적인 흙바람을 일으키며, 절벽 너머로 사라졌다.

준은 사라지는 헬기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더글라스 수상의 행동과 헬기의 등장까지 모두 예측했지만, 인간의 어리석음까지 꿰뚫지 못했다.

짓이겨진 흰개미 집이 그 증거였다.

헬기 조종사는 등이 따끔거리고 가려웠다.

흰 개미 병정개미가 그의 피부를 물어뜯었다.

의자에 몸을 비벼대자,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시원한 느낌은 오래가지 않았다.

하품이 나고, 졸음이 미친 듯이 쏟아졌다.

귓속에서는 아련한 폭포 소리가 들렸다.

병정개미의 모노아민 독이 모세혈관을 타고, 심장과 뇌까지 전달된 것이었다.

준은 절벽 뒤에서 전해오는 굉음을 들었다.

‘걸어가라고 말해줘도 소용이 없네.’

인간이 왜 인간의 말을 안 듣는 건지 ···.

*

보고를 받은 더글라스 수상은 얼빵한 미소를 보였다.

준이 부름에 응하지 않았고, 준을 데리러 간 헬기는 추락했다?

“준이 헬기에 탔다면?”

“추락 헬기에 생존자는 없었습니다. 준도 목숨을 잃었겠죠.”

“준이 나와의 만남을 거절한 이유가 ···. 헬기에 타기 싫어서였나?”

“만남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 직접 만나서 대화하는 것보다 통화하는 것이 낫다고 했답니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요원들이 모두 사망했다고 하지 않았나?”

“숨지기 전에 보고한 내용입니다.”

“···. 순직자들에게 2계급 특별승진과 훈장을 주고 성금도 챙겨주게. 글레빌 기후 중앙은행 총재는?”

“지금 오고 있습니다.”

글레빌 중앙은행 총재는 두툼한 서류철을 들고 나타났다.

그는 더글라스 수상의 아날로그 취향을 존중했다.

더글라스 수상은 디지털 자료보다는 종이 냄새가 물씬 나는 아날로그 스타일을 좋아했다.

글레빌은 캥거루처럼 우울한 인상의 60대 남자였다.

상체는 마르고 하체가 두툼한 캥거루 같았다.

그는 ‘투자 파산 등급’의 의미부터 설명했다.

“그렇게 위험한 거라면 ···. 다윈 비구름 옵션거래는 포기하는 게 낫지 않나?”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굿데이는 거래 위험성을 경고했지만, 해결책은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음 ···. 역시 준을 불러왔어야 하는데 ···.”

더글라스 수상이 깊은 한숨을 내쉬자, 비서가 요령 좋게 에어스크린을 띄웠다.

스크린에는 요리하는 준의 모습이 비쳤다.

준은 튀김옷을 입힌 악어 고기를 기름에 튀기며, 간장소스를 만드는 중이었다.

“준 ···. 내 말 들리나?”

‘잘 들립니다.’

준은 요리하는 손을 쉬지 않았다.

더글라스 수상은 황당했지만,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없었다.

“이곳에 글레빌 중앙은행 총재님이 계시네.”

‘알고 있습니다. 두툼한 서류를 가져오셨죠?’

“그걸 어떻게 아나?”

‘다윈 비구름 거래에 관한 내용이죠?’

“정확하네. 다윈 비구름이 거래되면, 정말로 대홍수가 일어날까?”

‘네.’

“거래를 중지한다면, 재난을 막을 수 있나?”

‘중지하실 건가요?’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야지.”

‘그렇다면 ···. 거래 중지에 대한 신용 평가를 해봐야겠군요.’

“그 말은 ···. 재난을 막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건가?”

준이 대답하기도 전에, 글레빌이 끼어들었다.

“준! 나는 호주 기후 중앙은행 총재라네! 거래중지에 대한 예측이 없나?”

‘없습니다. 분석을 요청하시려면, 올림포스에 의뢰해주세요.’

“투자 파산 등급의 거래가 정상적으로 이뤄질 확률은 얼마인가?”

‘평가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평가서에 몇으로 되어 있죠?’

“잠깐 기다리게.”

글레빌은 서둘러 서류를 뒤졌다.

준은 튀김을 건져내고, 곧바로 간장 소스를 뿌렸다.

촤!!!! 감탄사 같은 소리가 났다.

“25%로 되어 있군. 열 번 중 네 번은 재난사고 없이 거래가 이뤄진다는 뜻이겠지?”

‘정확하게 보셔야죠. 25% 미만으로 쓰여 있습니다.’

준은 공기업과 정치 조직의 웃대가리 능력이 평균 이하라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들에게도 남다르게 뛰어난 능력이 있었는데,

그것은 일이 잘못되었을 때,

변명하거나 남 탓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약점을 감추고,

남의 약점을 들춰내는데에도 천재적인 재능을 뽐냈지만,

일단 위기의 순간이 터지면, 너무나 무력했다.

준이 더글라스 수상의 초대에 응했다면,

이후 발생하는 모든 재난을 책임지는 묘한 올가미에 걸렸을 것이다.

“그렇군. 확실히 25% 미만이라고 되어 있군. 준 자네라면 어떻게 하겠나?”

드디어 올가미가 드리워졌다.

‘보고서 맨 밑에 쓰여 있는 그대로입니다. 굿데이는 평가만 할 뿐 판단하지 않습니다.’

“굿데이의 공식 의견이나 입장을 묻는 게 아니라, 자네 개인 의견이 듣고 싶네.”

‘없습니다.’

너무 당당해서 묻는 쪽이 미안할 정도였다.

“준 ···. 시간이 얼마 없네. 20시간 후면 거래가 시작되네. 그 전에 해결책을 찾아야 해. 우리를 도와주게.”

올가미는 서서히 다가왔다.

감정이 풍부했다면, 뭐라도 하려고 했겠지만, 준은 더글라스 수상과 글레빌 총재의 꼼수가 환히 보였다.

인간 DNA에 박혀 있는 협동에 대한 본능.

정치인들은 그 본능을 자극해서, 이득을 챙기는데 능숙했다.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저는 당신과 같은 편입니다.’

감정결핍 증후군 준은 이러한 수법이 15살 때부터 지겹게 느껴졌지만, 이상하게도 정상적인 사람은 평생 당하면서도 깨닫지도 못했다.

조금만 생각해도, 금방 알 수 있는 일인데도 그랬다.

‘세계 기후 은행 조직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굿데이는 올림포스 기후거래소의 산하 조직입니다. 정식으로 의뢰해주세요.’

“나는 굿데이나 올림포스에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닐세. 준 자네에게 부탁하는 걸세.”

더글라스는 노련했다. 이렇게 말해놓고, 나중에 일이 틀어지면 굿데이와 준을 싸잡아 탓할 것이 분명했다.

‘굿데이의 원칙과 독립을 지키는 게 제 일입니다. 제가 흔들리면, 굿데이도 흔들립니다.’

“준! 이천오백만 호주인에겐 자네가 필요하네.”

준은 본능적으로 더글라스 수상이라는 인물이 기회가 오면, 호주와 시민들을 팔아넘길 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글라스가 호주를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책임회피라는 ‘궁극의 목적’이 숨겨져 있었다.

준은 궁극의 목적을 까발려야 대화가 끝나겠구나 싶었다.

준이 해줄 말은 하나뿐이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됐대요?’

통신은 중단되었다.

더글라스 수상과 글레빌 총재는 서로 눈치만 보았다.

“일단 해서는 안 되는 것부터 골라내지.”

더글라스 수상은 선택 사항에서 다윈 비구름 옵션거래를 지웠다.

“더글라스 수상님. 우리가 탄소달러 적자국가인 건 아시죠? 우리나라의 안정적인 기후를 확보하려면, 1조 2천억 탄소달러가 필요합니다. 다윈 비구름을 취소하면, 일부 지역의 기후 공급이 부족해집니다.”

“재난을 빤히 알면서, 악마와 거래하겠다고?”

“수상님과 제 입장이 조금 다른 게 ···. 저는 우리나라 탄소달러 균형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게 기후 중앙은행의 첫 번째 목표죠. 이 목표가 지켜지지 않으면, 우리나라는 기후 빈민국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글레빌 총재! 다윈 비구름은 투자 파산 등급 거래요. 그 상품을 시장에 내놔도, 아무도 손대지 않을 거야. 차라리 거래를 포기하는 게 ···.”

“투자자는 있습니다.”

글레빌의 눈빛이 달라졌다.

“있다고요?”

“투자 부적합 등급 거래는 올림포스 기후거래소와 세계 기후 은행에서 직접 사들입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올림포스는 직접 기후오퍼레이션을 합니다. 재난이 예측된다면, 그 재난을 막을 오퍼레이션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다윈 비구름 옵션을 시장에 내놓고, 재난을 예방할 보험을 사들이는 것입니다. 이미 앙리 백작과 모든 것을 조율해놨습니다.”

“그렇다면 ···. 왜? 준에게 도움을 청한 겁니까?”

“그가 가진 카드를 확인해야 했습니다. 지금까지 굿데이는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기후 예측에는 독보적인 존재였죠. 이번 다윈 비구름 거래가 성공하면, 굿데이가 하지 못한 것을 우리가 해낸 것이 됩니다.”

더글라스 수상은 글레빌 총재가 말하지 않았지만, 말하려 하는 내용을 알았다.

굿데이의 기후 신용평가에도 불구하고,

다윈 비구름 옵션거래가 성공적으로 이뤄지면,

기후 권력을 강화할 수 있다.

지금은 굿데이의 눈치를 봐야 하는 형편이었지만,

앞으로는 그럴 필요도 없었다.

“글레빌 총재 ···. 우리라는 말을 쓰려면, 나도 뭔가 얻는 게 있어야 하지 않을까?

수상인 나는 다윈 비구름 거래를 그냥 놔둘 수 없는 처지거든. 이번 거래를 걱정하는 유권자가 많아.”

글레빌 총재는 대답 없이 조용히 블랙카드를 내밀었다.

추적 불가능한 1억 탄소달러가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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