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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 준-101화 (99/141)

< 판타지늄-1 >

“가족 문제에 다른 사람이 끼는 거 아니야.”

듀크는 에바가 끼는 걸 원치 않았다.

그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제삼자가 반갑지 않았다.

누가 봐도 준에게 사기 치려는 모습인데,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의자 목 받침대에 머리를 기대며, 몸을 뒤로 젖혔다.

아무것도 숨길 게 없다는 몸짓이었다.

이런 몸짓을 적절하게 섞으면 상대를 쉽게 설득할 수 있었다.

거짓말하면서 진실된 몸짓을 보여주는 것은 사기꾼의 기본 기술이었다.

듀크의 논리는 간단했다.

내가 너에게 생명을 주었으니, 빚을 갚아라.

준도 에바를 부르다가, 그만두었다.

에바의 ‘슈퍼노바’는 삼류 사기꾼에겐 너무 과분했다.

슈퍼노바가 약효를 발휘하려면,

카이와 수잔 레벨이 적당했고,

최소한 트리탄의 부하였던 특급 설계사 찰스 정도는 되어야 했다.

레벨 이하에게 처방되는 슈퍼노바는 그냥 폭력이었다.

에바의 시간당 일당은 듀크의 일 년 교도소 수입을 저 멀리 뛰어넘는다.

교도소의 수형자일지라도 ‘작업 장려금’ 명목으로 수입이 발생했다.

듀크는 한 달 200달러의 작업 장려금을 받았지만, 에바는 숨 한 번만 쉬어도, 200달러 이상을 벌었다.

수입이 인격이나 능력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에바와 듀크의 차이는 너무 컸다.

준이 에바를 부르지 않은 또 하나의 이유는 ···. 가족 일에 외부인의 판단이나 도움을 청하고 싶지 않았다.

“빚을 갚으라는 거죠? 그게 어떤 빚이죠?”

“생명의 빚이란다. 아들아. 나는 나의 생명을 너에게 나눠 준거란다.”

듀크는 목청을 떨며 제법 거룩하게 말했다.

준은 그가 상대했던 그 어떤 것보다 큰 건수였다.

혼신의 힘을 다해, 제대로 사기 치고 싶었다.

세팅도 나쁘지 않았다.

아빠와 아들의 관계라니!

이건 신이 주신 기회였다.

“그런 거라면 ···. 갚겠습니다.”

준은 믿음직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듀크의 눈이 번쩍했다!

굿데이의 회장 준이 분명히 말했다.

빚을 갚겠다고!

“오오오!”

입술을 둥글게 말고, 원숭이처럼 소리를 냈다.

준이라면 한 번 뱉은 말을 주워담을 리 없다!

맘껏 기뻐해도 된다!

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생물학적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새삼 데이빗의 위대함이 사무쳤다.

데이빗은 감정 결핍증 증후군 저능아 아들과 함께 수없이 밤샘 했다.

사실 ···. 에밀리는 준을 살짝 포기하려 했다.

그것이 준을 위한 일이라고 여겼다.

저능아인 준을 밤새워 공부시키는 건, 학대일지도 모른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데이빗은 포기하지 않았다.

공부는 ···.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엉덩이로 하는 것이다.

그는 공부도 노래와 춤처럼 재능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공부를 재밌어하고, 잘하는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도 기본적으로 엉덩이에 군살이 배기도록 시간을 투자해야, 비로소 재능이 꽃피어난다.

데이빗은 준이 수학문제를 풀면서, 몇 시간 동안 끙끙거리며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봤다.

그 정도 가능성이면 충분했다.

준에겐 재능이 있고, 언젠가는 꽃필 것이다.

데이빗은 스스로 거름이 되고 비가 되고, 태양이 되고, 그늘이 되기로 했다.

그 결과가 리미트리스 준이었다.

데이빗은 준이 성공한 후에도 준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사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준은 파루시아 시즌에 집을 담보로 빌려준 데이빗의 돈을 몇백 배로 갚았다.

그리고 딱 한마디 덧붙였다. - “세금도 제가 냈어요.”

감방으로 돌아간 듀크는 방방 뛰는 가슴을 진정하지 못했다.

‘이러다가 심장병으로 죽는 게 아닌지 몰라!’ 라고 생각하며, 호쾌하게 웃어댔다.

“우하하하!”

교도소에서 큰 소리 내면 안 되지만, 교도관들은 듀크를 그냥 뒀다.

오히려 감방 중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으로 옮겨주었다.

듀크가 준의 친아버지라는 소문이 난 것이었다.

듀크는 한 시간 후에 작은 엽서를 받았다.

편지지에는 준의 자필로 직접 쓴 글귀가 적혀 있었다.

- 돌려드립니다. 생명의 빚. 방금 것이어서 아주 신선합니다. -

마침표가 있는 자리에는 작은 물방울 모양의 얼룩이 묻어 있었다.

준의 정액이었다.

- 아버지에게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저는 아버지에게 정자 한 마리를 빚졌지만, 더 많이 묻혀서 돌려드립니다. -

편지지에서 밤꽃 냄새가 났다.

듀크의 손이 떨렸다.

홀츠 교도소를 나온 준은 다윈의 카카두 국립공원 근처 별장으로 갔다.

며칠이라도 혼자 지내고 싶었다.

호주에 오기 전, 일주일 치의 기후 신용평가를 끝냈다.

기후 신용 평가를 해주면, 상당액의 탄소달러를 벌지만, 돈이 목적이 아니었다.

기후 신용 평가는 기후 예측보다 더 어려운 작업이었다.

처음 기후 예측모형의 결괏값을 추려낼 때에는,

열흘 넘게 매달려서

특정일의 특정 지역의 날씨를 간신히 알아냈지만,

이제는 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유진 악마와 같은 슈퍼컴퓨터도 족히 하루는 걸리는 작업이었다.

어느덧, 준에게 기후예측은 따분한 일이 되었다.

준은 기후예측 모형을 야생마 타키라고 불렀다.

그는 기후예측 모형 타키를 길들이지 못했지만,

타키의 논리와 행동 그리고 변덕을 이해했다.

곤충학자가 하늘소를 길들이진 못하지만, 하늘소를 이해하는 것과 같았다.

준과 곤충학자의 차이는 준은 기후예측 모형 타키를 창조했다는 것이었다.

준에겐 훈련하고 단련할 그 무엇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기후 신용 평가였다.

자연적인 기후에 올림포스의 기후 오퍼레이션이 더해지면서, 예측 복합도와 난이도는 헬 수준이었다.

준이 바라던 바였다.

“밤하늘의 별자리가 멋지네요. 술 한잔 어때요?”

에바였다.

그녀 말대로 하늘에는 은하수가 펼쳐져 있었다.

달이 밝았는데도 엄청나게 많은 별이 보였다.

도시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장관이었다.

“에바는 남자랑 술 안 마시잖아.”

“네. 남자가 치근덕거리는 게 너무 싫어요. 혹시 저에게 치근덕거릴 건가요?”

“오늘은 ···. 그럴까? 해.”

준은 이렇게 말하면, 에바가 다른 곳에 가서 놀 거로 생각했다. 세상의 절반은 여자다.

“그래요? 빨리 한잔해요!”

그녀답지 않게 서둘러 잔에 와인을 채우고, 준에게 건넸다.

평원 끝에서 주머니 늑대의 가냘픈 울음소리가 들렸다.

“여자가 여자를 좋아할 때 ···. 따라오는 비극이 뭔 줄 알아요?”

에바는 대담하게 준의 무릎 위에 앉았다.

그녀에게서 레몬처럼 싱그러운 냄새가 났다.

“아이를 가질 수 없어요. 준 ···. 오늘 당신의 아이를 갖겠어요.”

그녀는 오늘 인생을 걸었다.

“에바 ···.”

준은 와인 한 모금을 마셨다.

준이 와인을 마실 때, 그의 손등이 에바의 가슴을 스쳤다.

준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에바는 자지러질 뻔했다.

그만큼 준의 손길은 곡사포처럼 강력했다.

준은 와인 잔을 탁자에 놓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에바 너 ···. 달팽이 같다. 거기가 축축하다.”

“오늘은 그런 말을 해도 ···. 부끄러워하지 않을 거예요.”

“음 ···. 달팽이라면, 촉수가 여기쯤이겠군.”

준은 에바의 가슴골에 손가락을 넣었다.

에바는 준의 손가락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손가락에 더듬이 촉수가 닿은 달팽이가 집 안으로 몸을 숨기듯이, 정신을 잃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침대에 누워 있었다.

창문으로 밝은 햇빛이 들어왔다.

에바는 서둘러 이불을 들쳤다.

실망스럽게도 다 입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분명히 준은 내 가슴에 손가락을 댔어. 날 가지려 했어? 아닌가?’

그녀는 헷갈렸다.

그렇다고 준에게 물어보기도 좀 뭐했다.

일단 준이 가지려고 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뭐가 문제였을까? 왜 다 입고 있는 걸까?

왜 정신을 잃었던 걸까?

‘준은 내가 정신을 잃을 거란 걸 알았을까?’

알았을 것이다. 준은 뭐든 다 안다.

그렇다면 ···. 한 가지만 남는다.

에바는 준을 감당하지 못한다.

손가락만으로도 정신을 잃는다.

기후 예측도 해내는 준이 여자의 오르가슴을 모를 리 없다.

자미에의 딸 제인이 떠올랐다. 침팬지 같던 그녀는 준이 손길이 닿자, 절정을 느꼈고 ···. 그 후 아름다운 여인이 되었다.

만일, 이 세상 여자들이 준의 손끝만으로도 정신을 잃는다면 ···.

에바는 준에게 경험이 없는 이유가 그를 감당할 여자를 만나지 못해서가 아닐까?

싶었다.

“그런 건가요? 준 회장님?”

에바는 용기를 내서 물었다.

“그건 잘 모르겠고 ···. 에바는 달팽이야.”

그녀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러나 에바는 물러서지 않았다.

“저 말고 다른 여자들도 달팽이인가요? 그래서 준 회장님의 손이 닿으면 달팽이가 숨듯이 정신을 잃게 되나요?”

“그런 게 왜 알고 싶어?”

“여자는 남자의 욕망을 욕망하니깐요!”

“에바는 레즈잖아? 레즈가 그런 말 해도 돼?”

“준 회장님이 원하신다면, 레즈를 포기하겠어요!”

“포기하지 마!”

준은 에바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그 순간 에바는 구원받았다.

*

잔느는 정면에 있는 큰 거울을 보았다.

거울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오렌지 색 죄수복 차림이었다.

그녀가 보는 것은 그녀의 모습이 아니라, 거울 뒤편에 있는 누군가였다.

거울 뒤에는 국가 안전국 소속 관료가 있었다.

잔느는 루이스 상원 의원의 딸이었고,

선데이의 회장이었으며,

닥터 칼라니티를 직접 만나기도 했다.

그녀는 사면을 조건으로 닥터 칼라니티에 대한 정보를 넘기기로 했다.

생체 금속 정보량을 이용한 기생파리 조작은 국가 안전에 위험한 기술이었다.

국가 안전국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했다.

더군다나 생체 금속 정보량 기술은 닥터 칼라니티와 준 그리고 어쩌면 ···. 잔느만 알고 있는 신생 기술이었다.

굿데이가 생체 금속 정보량에 대한 내용을 모두 공개했지만, 거의 모든 국가와 연구소는 그것을 검증할 능력도 응용할 실력도 없었다.

여기서 잔느의 가치가 돋보였다.

그녀에게 생체 금속 정보량 경험이 있다면, 시간과 비용을 단축하고, 다른 국가와 조직을 앞설 수 있다.

취조실에 남자가 들어왔다.

갈색 구두, 양복바지, 하얀 셔츠 ···. 넥타이는 매지 않았고, 시계와 반지도 없었다.

가슴에 단 신분증에 적힌 이름은 핵터 그라시아였다.

“핵터?”

잔느가 아는 남자였다.

핵터는 잔느와 함께 의회에서 인턴과정을 밟았었다.

“내가 지원했어.”

그는 왼손을 펴 보이며 활짝 웃었다.

그리스인 특유의 근신 걱정없는 미소가 압권이었다.

“언제부터 국가안전국에서 일했어?”

“네가 내 청혼을 거절했을 때 ···. 막나가자는 심정이었거든.”

“옛날보다 더 근육질 몸매인데 ···. 그렇게 막산 거 같진 않네.”

“겉보기만 그래. 속은 골병이 들었어. 굿데이 파라엔진을 이식하지 않았으면, 가슴막염이나 간염에 걸렸을 거야. 위생이 좋지 않은 곳에서 일했거든.”

“거기가 어딘데?”

“튀니지.”

“거긴 프랑스 영향을 많이 받아서 빵이 맛있어. 과일 넣은 바게트 먹어봤어?”

“내가 근무했던 곳은 수돗물도 안 나오는 곳이었어. 양의 피를 그냥 마시는 곳이었지. 파라엔진이 없었다면, C형 간염에 걸렸을 거야.”

핵터는 수줍게 웃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줄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상대는 잔느였다.

제대로 풀렸다면, 에바와 같은 거물이 됐을 여자였다.

에바는 준의 도움으로 컸지만,

잔느는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듯이,

혼자 힘으로 선데이를 일으켜 세웠고, 닥터 칼라니티도 직접 만났다.

닥터 칼라니티는 신비로운 인물이었다.

그런 자가 잔느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그만큼 그녀가 뛰어나다는 증거였다.

핵터는 정보부 요원답게 죄수인 잔느를 통제해야 했지만, 잔느는 통제당할 여자가 아니었다.

준이나 닥터 칼라니티 레벨이라면 가능할까?

< 판타지늄-1 > 끝

ⓒ 캔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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