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후거래소-23 >
닥터 칼라니티는 준의 발표 영상을 지켜보았다.
준은 아이큐 75의 감정결핍 증후군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노련했다.
가장 놀라운 것은 ···.
‘저놈이 생체 금속 정보량을 알고 있다니.’
생각할수록 놀라울 뿐이었다.
생체 금속 정보량 ···. 닥터 칼라니티도 최근에 알았다.
평생 강화 생물학만 연구했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고귀한 지식이었다.
그런데 고작 애송이에 불과한 녀석이 알고 있었다니!
닥터 칼라니티는 괴물 앞에 선 것처럼, 몸이 떨려왔다.
‘파라엔진도 우연이 아니었어.’
그가 만들었던 스키마보다 굿데이의 보급형 파라엔진의 효능이 훨씬 뛰어났다.
‘이제 나도 퇴물인 건가? 시대가 바뀌는 건가? 감정도 없는 저 비릿한 녀석 때문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준과 굿데이 때문에 얼마나 많은 기업과 조직이 무너졌던가!
당장 금을 포함한 원자재 시장만 해도 그랬다.
요빅 생태계가 자리를 잡은 후, 땅을 파대던 광업이 몰락했다.
영상은 무릎 꿇은 잔느가 오열하는 것으로 끝났다.
“로켈이 아르코를 물거품으로 만들었습니다.”
목소리가 들렸지만,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닥터 칼라니티의 그림자 경호원 마가크였다.
“로켈이? 그의 강화 능력으로는 아르코의 상대가 되지 않았을 텐데.”
“로켈은 강해졌습니다. 굿데이의 힘입니다.”
“아르코를 꺾을 정도의 강화능력이라니! 놀랍구나.”
닥터 칼라니티는 아르코를 잃은 것보다, 굿데이의 새로운 면모를 본 것이 더 놀라웠다.
잔느가 준 앞에 무릎 꿇은 것도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년은 항상 강한 쪽에 붙어먹었다.
“시온의 척살대가 움직였습니다.”
“부질없는 짓이다.”
“네?”
“로켈이 블랙블러드에서 시온으로 왔을 때, 블랙블러드는 로켈을 지우려고 했다. 그 결과를 아느냐?”
“블랙블러드가 사라졌습니다.”
“그래 ···. 시온도 이제 끝물이군.”
“닥터 칼라니티 님! 명을 내려주십시오. 제가 굿데이를 몰살시키겠습니다.”
“왜?”
닥터 칼라니티는 자세를 고치며, 옆에 있는 난초를 매만졌다.
“왜라뇨? 준은 닥터 칼라니티 님을 방해했습니다. 님께서 공들여 만든 기생파리의 정체를 만천하에 밝히고, 마구 욕했습니다.”
“기생파리의 정체를 밝히긴 했지만, 내 욕을 하진 않았어. 오히려 ···. 최고 실력자들이 나처럼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비난했지.”
“준을 그냥 두시면, 닥터 칼라니티 님의 권위가 서지 않습니다.”
“사람을 죽여서 얻는 권위라면, 충분히 누렸다. 마가크 ···. 준을 죽이고 싶으냐?”
“네. 간절히 바랍니다.”
“이유는?”
“저는 그냥 그놈이 싫습니다.”
*
준은 발표를 끝내고, 곧바로 깨달았다.
기생파리의 알파와 오메가를 정리해주었지만, 세상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했다.
기생파리 발생 원인인 생체 금속 정보량을 분석할 능력을 갖춘 곳도 없었다.
원인을 알려주면, 나머지는 국제적인 사법기관이 맡을 줄 알았는데 ···. 주위를 둘러보니, 나머지도 굿데이가 알아서 해결해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세상은 준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형편없었고, 나약했다.
준은 내가 이러려고 발표했나, 싶었다.
올림포스 라운드 발표가 끝나고, 곧바로 디너 파티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러시아의 보드카처럼 독한 술과 오메가 푸딩처럼 부드러운 음식을 번갈아 맛보며 즐거워했다.
기생파리가 기후거래와 관련 없다는 사실만으로 축하할 가치가 충분했다.
더군다나 잔느의 최종 솔루션도 공개되었다.
한마디로 ‘기생파리여 안녕!’이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만 하게!”
앙리 백작은 친근하게 굴었다.
그에겐 준에게만 보여주는 미소와 온화한 표정이 있었다.
이름 하여 ‘준, 너는 정말 특별해!’라는 표정이었다.
“고맙습니다.”
준은 토닉워터와 사과 주스를 섞은 칵테일을 마셨다.
“자네 ···. 달라졌군. 처음 만났을 땐, 머리만 좋은 천재였는데, 이제는 품격까지 갖췄어. 세상은 자네에게 빚을 졌어. 아니, 왜 그렇게 빤히 보나?”
“하실 말씀 있으시죠?”
“역시 알고 있었군. 올림포스 각료들은 자네에게 기생파리 사건을 자네가 맡아주길 원하네. 굿데이가 법 집행 기관은 아니지만 ···. 닥터 킬로만자로의 능력을 감당할 수 있는 조직은 굿데이뿐이라서 말이야.”
“거절하겠습니다.”
“아! 역시, 너무 무리한 부탁이었지.”
앙리 백작은 귀밑을 긁으며, 간신히 미소를 유지했다.
준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굿데이는 자선단체도 아니었고, 지구방위 사령부도 아니었다.
굳이 정의하자면, 생존 단체였다.
“그의 이름은 킬로만자로가 아니라, 칼라니티입니다.”
“그자를 본 적 있나?”
“없습니다.”
“그런데도 잘 아는 사람처럼 말하는군.”
“그와 저는 생체 금속 정보량이라는 지식을 알고 있으니깐요. 닥터 칼라니티는 블랙마켓에서 강화 능력을 팔고, 학계보다 앞선 기술력을 가지고 있죠.”
“학계보다 앞선 능력이라 ···.”
앙리 백작은 입맛을 다셨다.
학계보다 앞선 능력은 많은 걸 생각하게 했다.
천재의 외로움 ···. 앙리 백작은 준이 닥터 칼라니티에게 어떤 동질감을 느끼지 않을까? 싶었다.
준에게 학계는 스티븐 교수와 같은 뜻이었다.
“기생파리를 모두 수컷화해도 ···. 닥터 킬로만 ···. 아니 칼라니티가 다른 방법으로 이 세상을 해코지하지 않을까?”
“하겠죠.”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
“저와 굿데이는 항상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닥터 칼리니티에게 당하지 않을
겁니다.”
“나만 살겠다? 이건가?”
“나라도 살아야겠습니다.”
솔직한 대답이었지만, 그 솔직함이 앙리 백작의 감정을 자극했다.
“자네 ···.”
“앙리 백작님. 저들을 보세요.”
만찬을 즐기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모두 한 분야의 마스터들이었다.
“저들은 최고의 지위를 누리는 최고의 지성들이지만, 발전과 변화를 멈추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저들 밑에 있는 누군가가 뛰어난 아이디어를 가지고 뭔가 하려 한다면, 저들이 그 사람을 도울까요?”
“왜 돕지 않을 거로 생각하나?”
“예전에 앙리 백작님이 저를 스카우트하려 하셨죠? 그때 제가 앙리 백작님을 따라갔다면, 요빅을 만들 수 있었을까요? 앙리 백작님은 기존 경제 질서를 혼란스럽게 한다는 이유로, 프로젝트를 반대했을 겁니다.”
확실히 준의 말대로였다.
“그리고 지금 보세요. 기생파리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습니까? 모두 사업과 정책 이야기를 하며, 인맥 쌓기 놀이를 하잖아요. 기생파리에 대해서 고민하고, 해결하려는 사람들은 이 자리에 없습니다. 분명, 저들의 일인데도, 하지 않잖아요. 기생파리를 절실하게 해결하려는 사람은 ···. 지금 현장에서 환자를 돌보고, 연구실에서 기생파리를 해부하고 있죠. 학계에서도 누군가 생체 금속 정보량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냈을 겁니다. 그러나 말도 안 된다는 비난을 받고, 더는 연구하지 않았겠죠.”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네. 자네가 보기엔 나도 저들과 똑같나?”
“말미잘의 라이프 사이클을 아세요? 말미잘은 유충 시절에는 바쁘게 움직이며, 안전한 자리를 찾죠. 그리고 안전한 자리를 찾으면, 뇌를 소화해버립니다. 유충 시절에는 뇌가 있지만, 자리를 잡으면 뇌가 없어지죠.”
앙리 백작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기후거래소가 자리를 잡은 것은 준과 굿데이 덕분이었다.
확실히 준은 파루시아의 성공으로 평생 편하게 먹고 살 수 있었다.
그리고 헬 하운드 시즌으로 대대손손 먹고 살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후 준이 보여준 모습은 예전과 다름없었다.
오히려 더 치열해졌다.
“닥터 칼라니티를 담당할 조사팀이 만들어질 거야. 자문 역할 정도는 맡아주게.”
“거절합니다. 하지만 생체 금속 정보량에 대한 내용은 모두 공개하겠습니다.”
*
로켈은 빠른 걸음으로 한 시간을 걸었다.
올림포스 산 정상에 자리한 네오 올림포스의 밤하늘은 손에 잡힐 듯 선명했다.
기후 공급이 없다면 영하권 날씨겠지만, 기후 오퍼레이션으로 18.5도를 유지했다.
그는 광장에 멈춰 섰다.
“자. 여기서 조촐한 파티를 해볼까?”
그는 허공에 대고 말했다.
“그림자 기사 로켈. 시온을 배신한 죗값은 죽음이다.”
어둠 속에서 호리호리한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원숭이 가면을 쓰고 있었다.
“날 잡으러 혼자 왔을 리는 없고 ···.”
로켈의 말이 끝나기 전에, 반대쪽에서 호랑이 가면을 쓴 사람이 나타났다.
한두 명씩 나타난 가면들은 모두 열두 명이었다.
“십이 징벌좌가 모두 모였군. 동물원에 온 느낌이야.”
“로켈. 너에게 손을 쓰고 싶지 않다. 마셔라.”
토끼 가면의 여자가 극약이 든 갈색 물병을 던졌다.
“난 시온을 배신하지 않았다. 시온은 내가 보호하는 씨앗을 해치려 했다. 시온을 배신한 것은 시온이다. 너희도 요즘 느끼고 있을 텐데? 안 그래?”
“헛소리! 죽어라!”
토끼 가면이 깡충거리며, 공격해왔다.
십이 징벌좌는 시온의 암살 부대였다.
그들은 그림자 기사보다 더 뛰어났고 악랄했다.
로켈은 별로 움직이지도 않고, 토끼를 패대기쳤다.
토끼 가면은 반으로 쪼개졌고, 가면을 썼던 여인은 정신을 잃었다.
여인은 ···. 못생겼다.
설마 나머지 놈들도?
로켈의 짐작은 정확했다.
십이 징벌좌를 모두 쓰러트려 놓고 보니, 모두 못생겼다.
“우리의 비밀을 잘도 보았겠다. 결코, 살려두지 않겠다.”
호랑이 가면을 썼던 덩치 좋은 흑인이 휘청거리며 일어섰다.
“굿데이 이전 시대였다면, 너희 실력으로 통했겠지만, 이제는 세상이 바뀌었어. 아까 보니깐, 호랑이 너 코감기에 걸린 거 같던데? 약은 먹었니?”
로켈의 말투는 부드러웠다.
주먹을 쥔 흑인은 코를 훌쩍거리며, 혼란스러워했다.
십이 징벌좌를 동시에 상대한 로켈은 호흡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감기는 ···. 그냥 둬도 낫습니다.”
흑인은 주먹을 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패배를 인정한 것이었다.
로켈이 맘만 먹었다면, 모두 시체가 됐을 것이다.
십이 징벌좌는 로켈을 쉬운 상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일방적으로 로켈에게 당할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
“임무 실패한 징벌좌는 자살해야 하지?”
“그렇습니다. 저희를 위해 죽어주신다면, 감사요.”
“감사 안 받고 살련다. 돌아가면 모두 죽을 텐데 ···. 내 밑에서 일해보지 않을래?”
뜻밖의 제안이었다.
“혹시 저희를 살려둔 이유가 ···.”
“그래 맞다. 부러 먹으려고. 대우는 빵빵하게 해주지.”
“그러면 ···. 저희도 굿데이 직원이 되는 겁니까?”
“그건 두고 봐야지. 일단은 내 밑에서 일하는 걸로 하지.”
“저희가 무슨 일을 하게 됩니까?”
징벌좌의 말투가 공손해졌다.
*
오렌지 시티로 돌아온 준과 굿데이는 예전과 똑같이 생활했다.
늘 그랬듯이 리처드가 생체 금속 정보량에 대한 기사를 써냈다.
기생파리의 정체는 엄청난 이슈였다.
기사에는 닥터 칼라니티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
블랙마켓, 강화 생물학도 세상에 알려졌다.
교도소에 갇힌 잔느의 사진도 곁들어졌다.
루이스 상원 의원은 변호인 접견실에서 잔느를 만났다.
“지내는 건 어떠냐?”
“나쁘지 않아요. 여기가 수잔이 갇혔던 곳이라면서요?”
“그래.”
“저도 수잔처럼 될 수 있을까요?”
“꿈이 작아졌구나. 네 경쟁상대는 에바였잖아?”
“그랬었죠.”
잔느는 힘없이 웃었다.
“닥터 칼라니티의 정보를 넘겨주고, 사면받는 건 어떠니? 너에 대한 동정 여론이 있어. 네가 준에게 무릎 꿇고 우는 건 정말 잘한 거다. 그 영상을 본 사람은 널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단다.”
“아빠. 저는 준의 친아빠가 누군지 알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