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후거래소-19 >
데이빗은 2층에 매단 밧줄을 잡아당겼다.
황소를 매달아도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 단단했다.
유서를 의자 위에 올려놓고, 와인을 마셨다.
에밀리가 죽으면, 따라 죽을 결심이었다.
서랍에는 권총이 있었다.
셔츠 윗주머니에는 독약이 들었다.
에밀리를 떠나보내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생각도 있었다.
새 인생이 행복할 수도 있다.
어쩌면 ···. 이번에는 친아들을 키우게 될지도 모른다.
에밀리가 없는 세상 ···. 그 무엇도, 그 누구도, 그 어떤 세상도 에밀리를 대신 할 수 없다.
데이빗은 그녀를 죽여도 좋다는 허락을 던졌다.
그녀와 이혼할 바엔, 꼭 헤어져야 한다면, 이혼보다는 죽음이 낫겠구나. 생각했다.
이혼보다는 죽음 ···. 이것이 데이빗의 결론이었다.
소식을 가져온 것은 디아나였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사모님께서는 급성 미아시스에 감염되셨습니다. 31 마리의 구더기가 위험한 곳에 자리 잡았습니다. 수술은 ···.”
데이빗은 기적을 바라는 마음으로 끝까지 들었다.
그는 이미 에밀리가 죽었다고 여겼다.
프란츠가 그렇게 하겠노라 약속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하는 것은 준에게 옳은 것이라고!
데이빗도 동의했었다.
준의 어머니가 난잡한 여자라는 사실에 널리 알려지기 전에, 정리하는 것이 옳다고 여겨졌다.
“ ···. 성공적으로 잘 마쳤습니다. 지금은 마몽 의료센터에서 쉬고 계십니다. 아주 건강하세요.”
디아나는 활짝 웃었다.
데이빗은 어리둥절했다.
“에밀리가 살아 있다고?”
짧은 질문이었지만, 그림자 기사였던 디아나는 단번에 상황을 눈치챘다.
화사했던 그녀 미소에 서리가 내렸다.
“사실 ···.” 디아나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 ···. 사모님께서는 살해 위협을 당하셨습니다. 다행히 ···. 우리가 구해냈습니다. 현재로서는 모든 위험이 사라졌다고 보고 있습니다만 ···. 이 일에 대해서 아시는 게 있으신가요?”
“범인은 누구였지?”
“수술 집도 의사였습니다. 사노요코라는 여의사였습니다. 아시는 분이신가요?”
“처음 듣는 이름이야. 나랑 친한 일본인은 없어. 그 의사가 왜 에밀리를?”
디아나는 데이빗의 집에 오기 전에, 모든 것을 말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었다.
데이빗에게 숨길 이유가 없었다.
“사노요코는 하수인에 불과합니다. 그녀에게 청부살인을 한 인물은 프란츠였습니다.”
“프란츠 ···. 익숙한 이름이군. 우리 부부에게 참 잘해줬는데 ···. 프란츠는 경찰서에 있나?”
“굿데이는 스스로 할 일을 경찰에게 미루지 않습니다.”
“그렇군. 프란츠가 왜 에밀리를 죽이러 한 건가?”
“두 분 ···. 이혼 준비 중이셨죠?”
디아나는 노련하게 훅치고 들어갔다.
데이빗의 표정이 와르르 무너졌고, 때늦은 미소가 끌려 나왔다.
때늦은 미소는 대표적인 거짓 미소였다.
거짓말을 하거나, 뭔가 숨겨야 할 때, 본능적으로 나오는 시그널이었다.
“왜 아내를 죽이려 했죠?”
디아나는 기회를 주지 않고, 성큼 다가갔다.
“ ···. 준에게 말하지 말게. 오늘이 끝나기 전에 명예롭게 죽겠네. 이혼할 바엔 ···.”
“아쉽네요.”
“뭐가?”
“이곳에 에바 님이 계셨어야 했는데 ···.”
“에바가 오면 뭐가 달라지나?”
“미리 밝히겠습니다. 오리지널이 최곱니다. 제가 직접 본 것은 몇 번 없지만 ···.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그게 무슨 ···.”
- 철썩
데이빗 머리가 휙 돌아갔다.
왼쪽 콧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에바가 처방했다면, 쌍코피가 기본이었겠지만 ···.
디아나는 한쪽 구멍 코피로도 만족했다.
처음치곤 비슷하게 흉내 낸 거 같아서, 으쓱했다.
그녀는 데이빗 셔츠 주머니에 있는 약봉지를 꺼냈고,
2층에 숨겨놓은 밧줄과 서랍에 있는 권총을 압수했다.
유언장도 쉽게 찾아냈다.
유치할 정도로 짧은 유언이었다. - ‘그녀 없인 못살아.’
“아니! 준 회장님처럼 훌륭한 아들을 두신 분이 이게 뭐예요! 아내를 청부살인하고, 자살하려 하다니! 죽으면 다인가요! 우리 준 회장님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으시겠어요! 준 회장님의 반쪽인, 당신 DNA가 부끄럽지도 않아요!”
“준에겐 내 DNA가 없어.”
데이빗은 흐르는 코피를 막았다.
디아나에게 따귀 맞은 건, 억울하지 않았다.
억울한 건 ···. 준이 친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디아나가 알았더라면, 방금 따귀 파워가 조금은 부드럽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었다.
한 대 맞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이왕이면 정상참작된 따귀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준 회장님도 알고 계신가요?”
디아나는 데이빗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자네가 나라면, 아들에게 그런 걸 물어볼 수 있겠나? 넌 나의 친아들이 아닌데, 그걸 아느냐고?”
*
에바와 로켈은 프란츠의 죽음을 보며, 복잡미묘했다.
프란츠는 나름 준에게 충성했다.
그 충성의 결과가 에밀리 죽이는 것으로 꼬였지만, 충성심만큼은 의심할 수 없었다.
이곳에 오면 죽을 줄 빤히 알면서도, 프란츠는 저항하지 않았다.
살겠다고 몸부림쳤다면, 죽음을 늦출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에바와 로켈은 프란츠를 이해했다.
그들도 준을 위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에바와 로켈은 준도 이해했다.
프란츠는 어머니의 목숨을 위태롭게 했다.
‘앞으로 조심해라.’라는 경고 정도로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에바는 다음이 그녀 차례라고 짐작했다.
그녀는 프란츠가 준의 부모님을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사실을 파악했을 때, 그녀는 부모님을 직접 관리하거나, 프란츠를 관리했어야 했다.
준의 약점이 될 지도 모를 부모님을 제삼자에게 맡기는 것은, 명백한 관리 소홀이었다.
로켈은 긴장하는 에바의 모습이 처음이었다.
“이상합니다. 프란츠 정도 되는 인물이 그렇게 터무니없는 일을 혼자 꾸미다니 ···. 준짱이 허락할 리는 없지만, 우리 쪽에게 먼저 물어보는 게 보통인데 ···.”
로켈은 에바를 의심했다.
프란츠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었다.
준의 어머니와 관계된 일을, 독단적으로 결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 에바에게 보고한 걸까?
에바의 표정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순간 로켈의 머릿속에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데이빗.
아리송했던 모든 퍼즐이 한 번에 들어맞았다.
프란츠는 최후의 순간에도 데이빗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비밀을 혼자 품고 무덤까지 가져간 것이다!
프란츠가 지키려던 비밀이었다.
로켈은 방금 깨달은 진실을 못 본 척하기로 했다.
그의 스마트워치에 암호화된 메시지가 반짝였다.
- 데이빗이 에밀리의 청부살인을 허락했음. -
디아나였다.
‘아! 젠장!’
로켈은 지뢰를 밟은 느낌이었다.
디아나가 알아냈다.
혼자 알고 끝내려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 어쩔 수 없이 에바에게 보고해야 하고 ···. 에바는 준짱에게 알릴 것이다.
‘콩가루 집안 되는 거 한순간이구먼.’
“방금 디아나에게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준짱의 아버지에게 어머니의 소식을 전하던 중 ···.”
“알고 있다.”
준이 로켈의 말을 끊었다.
준은 이미 알고 있었다.
에밀리의 성향, 데이빗의 성격, 프란츠의 충성심을,
미래 방정식에 넣으면 쉽게 나오는 결과였다.
유진 악마가 알아내기 전부터, 준은 알고 있었다.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그리고 오래전부터 악순환을 끊기 위한 준비를 해왔다.
프란츠의 죽음은 그 시작이었다.
“로켈.”
“준짱 말씀하십시오.”
“밟아라.”
“분부 기다렸습니다.”
로켈은 팔짝 뛰어서, 프란츠의 가슴을 밟았다.
죽었던 트리탄도 밟아서 살려냈던 로켈이었다.
리드미컬하게 다섯 번 밟아대자, 프란츠가 깊은 기침을 했다.
‘쿨럭!’
생명은 돌아왔지만, 정신은 아직 도착하지 못했다.
“내가 할 게.”
에바가 나섰다.
그녀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듯이, 프란츠의 뺨을 휘갈겼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노래의 제목은 ‘돌아오라! 정신이여!’였다.
프란츠는 거칠게 호흡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기가 어디지?’
에바와 로켈 그리고 준이 보였다.
“프란츠. 오늘이 그날이다.”
준이 모세의 길잡이를 빼서, 프란츠에게 건넸다.
“그날이라뇨?”
프란츠는 반지와 준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네가 다시 태어난 날. 오늘 너는 너의 죄를 위해서 죽었고, 다시 태어났다. 이제 너에겐 죄가 남아 있지 않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 반지는 받을 수 없습니다. 모세의 길잡이에는 전설이 있습니다. 구세주가 오면 반지가 찬란하게 빛납니다. 저는 죽기 전에 기적을 보았습니다. 이 반지는 준 회장님의 것입니다.”
“받아.”
“받을 수 없습니다. 모세의 길잡이는 준 회장님의 것입니다.”
새로 태어난 프란츠는 고집이 좀 셌다.
“내가 구세주라면 이런 반지가 필요하겠어? 내가 전설을 따라야 해? 아니면 전설이 나를 따라야 해?”
프란츠는 반지를 받았다.
“준 회장님. 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 아까 준 회장님께서 반지를 꼈을 때, 휘황찬란한 빛이 났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가르쳐주십시오.”
에바도 로켈도 궁금했다.
“모세의 길잡이는 원시적인 판타지늄이다.”
“판타지늄?”
프란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신감응금속 판타지늄은 최근에 알려진 물질이었다.
인간의 정신에 따라 파장과 모양 그리고 성질이 변하는 금속.
판타지늄은 최근에 개발된 물질이었고, 모세의 길잡이는 2천 년이 넘는 유물이었다.
판타지늄이 과거에도 있었단 말인가?
“프란츠.”
“네. 준 회장님.”
그는 고개를 숙였다.
“우리 모두 비겁한 역사에서 살아남은 후손이다. 사람을 미워하지 마라.”
*
데이빗은 네팔 안나푸르나 마몽 공항에 도착했다.
마몽의 공기는 차갑고 신선했다.
깊은 산 속 옹달샘을 떠 마시는 기분이었다.
병풍처럼 늘어선 안나푸르나의 봉우리는 하늘을 떠받들었고, 몇몇 봉우리는 구름 위에 떠 있었다.
준이 함께했다.
“그러고 보니 ···. 오랜만이구나. 우리 둘이 여행하는 건 ···.”
데이빗은 손에 쥔 봉투를 꽉 움켜잡았다.
“네. 아버지.”
준은 늘 그랬듯이 대답이 짧았다.
준은 가끔 생각한다.
그가 정상적인 아이로 태어났다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더 많은 것을 누렸을 것이라고.
돌이켜보면, 부모님에게 모자람 없는 사랑을 받았지만, 돌려주진 못했다.
준이 부모님에게 주고 싶어도, 그에겐 사랑이 없었다.
책을 통해 ···. 문학적으로, 종교적으로, 심리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만, 자연스럽게 샘솟진 않았다.
에밀리는 준과 함께 온 데이빗을 외면하지 않았다.
아들 앞에서는 사이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이건 선물이요.”
데이빗이 서류봉투를 건넸다.
봉투 안에는 데이빗이 서명한 이혼 서류가 들어 있었다.
에밀리는 침을 삼키고, 병실 안에 준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
“준도 아나요?”
“6개월 후 날씨도 알아맞히는데, 이까짓 것도 모를 것 같소?”
“준에게 뭐라고 했나요?”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여자라고 했소.”
“왜 그런 거짓말을?”
“거짓말이 아니오! 당신은 좋은 엄마이고, 최고의 아내요. 그 누구도 당신을 대신 할 수 없소. 건강해서 정말 다행이오.”
데이빗은 에밀리의 이마에 키스하고, 병실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