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 준-93화 (91/141)

< 기후거래소-18 >

준은 구더기 전염병이 대수롭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것이 구더기든, 감기든, 불의의 사고든 ···. 죽음은 피할 수 없다.

미아시스는 새로운 형태의 죽음에 불과했다.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공허감까지 극복한 준에게 미아시스는 평범함의 연장이었다.

준이 도서관에서 고민하고, 연구하는 것은, 죽음을 대신하는 그 무엇이었다.

준의 미지근한 반응과 달리, 굿데이는 평소보다 바빠졌다.

특히 굿호세 계열 컴파니가 그랬다.

굿호세는 회원들이 원하는 물건을 3D 프린터로 제작, 공급했다.

굿호세의 마케팅 문구는 ‘이 멍청아! 중요한 건, 일자리가 아니라, 소득이야.’였다.

일자리는 소득에 이르는 중간 단계에 불과했고, 기술력이 발달하면, 생략 가능했다.

굿호세를 중심으로 소득 중심 시스템이 가동되었다.

‘소득 중심 시스템’과 ‘일자리 중심 시스템’은 기생파리 등장으로 그 차이가 확실하게 드러났다.

일자리 중심 경제는 곧바로 침체에 빠져들었지만, 소득 중심 경제는 침체에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바쁘게 돌아갔다.

소득 중심 경제 구성원들은 다른 사람을 도왔고, 뭔가 하려 했다.

그들은 일자리 경제 사람들과 생각 자체가 달랐다.

야비한 경쟁을 거부했고, 가치 있는 일을 하려 했다.

뺏는 것이 아니라, 나누려고 했다.

직업은 일자리 개념보다 역할로 해석되었다.

굿호세는 엄청난 속도로 로봇 말벌을 생산했지만, 접근 가능한 치료법은 확보하지 못했다.

최선의 치료법은 수술로 구더기를 빼내는 것이었지만, 수술을 시작하면 구더기들이 발광하듯이 뇌와 심장의 생명 중추 부위를 공격했다.

에밀리는 저온 챔버에서 잠에 빠졌다.

체온을 낮추면, 구더기 활동을 늦출 수 있었다.

닥터 사노요코는 게스톤 스코프로 에밀리 몸속에 있는 구더기 위치를 확인했다.

챔버가 공중으로 떠올랐고, 가느다란 꼬챙이 모양의 로봇 팔이 챔버 안으로 들어갔다.

31마리의 구더기.

다섯 마리는 동맥을 타고,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세 마리는 이미 뇌에 자리 잡았다.

마치 구더기들이 에밀리의 생명을 인질로 삼은 것 같았다.

최선을 다해도 성공을 장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에밀리는 깨어나서는 안 된다.’

수술실에 들어서기 전, 닥터 사노요코가 받은 메시지였다.

사노요코는 편안하게 실패할 생각이었다.

수술은 의료로봇이 담당했다.

그녀는 의료용 에어스크린에서 'Yes'라는 버튼만 누르면 된다.

구더기 좌표를 확인하는 것도 그녀의 몫이었다.

그녀는 좌표를 살짝 바꿨다.

바꾼 좌표는 호흡중추 영역이었다.

‘의도적인 살인 의도가 감지되었습니다. 닥터 사노요코의 자격을 박탈합니다.’

의료용 에어스크린 화면이 바뀌었다.

화면에 나타난 유진 악마가 사노요코를 노려보았다.

수술실 시스템은 이미 유진 악마에게 넘어가 있었다.

사노요코는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유진 악마가 누군지 모르지만, 유진 악마 밑에 있는 굿데이 로고는 알아보았다.

굿데이 핫라인이 가동되었다.

파루시아와 헬하운드, 요빅 생태계 시즌, 영하 70도의 강추위로 노르웨이에서 수천 명 사망자가 속출할 때에도 핫라인은 발동하지 않았다.

사하라 숲에 기생파리가 하늘을 뒤덮을 때에도 침묵했던 핫라인이었다.

핫라인을 깨운 것은 ···.

“준 회장님 어머니의 목숨이 위험합니다.”

에바가 바짝 붙었다.

준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는 시간 낭비를 하지 않았다.

“현재 상황은?”

“미아시스 제거 수술 중입니다.”

에바는 에어스크린을 띄워, 저온 챔버에서 마취된 에밀리를 보여주었다.

구더기의 위치가 좋지 않았다.

수술이 순조롭게 진행되어도, 성공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유진.”

“네!”

준이 말하자마자, 유진 악마의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수술 전에 티록신 5ml 주입.”

“알겠습니다.”

티록신이 주입되자, 구더기의 활동이 멈췄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구더기 제거 수술의 성공 가능성이 낮은 이유는 수술 도중에 구더기가 발광하며 움직이기 때문이었다.

구더기가 정지상태로 있으면, 수술 성공률은 놀라울 정도로 높아진다.

가만히 있는 구더기를 제거하는 것은, 여드름을 짜는 것처럼 쉬웠다.

에밀리가 정신 차릴 때, 준이 곁에 있었다.

준은 곧바로 어머니가 있는 네팔 안나푸르나 마몽으로 왔다.

“엄마.”

에밀리는 꿈이라고 생각했다.

감정 결핍 증후군 준은 지금처럼 따듯한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준? 내 아들?”

준을 본 에밀리는 이상하게 눈물이 들끓었다.

자랑스러운 나의 아들 ···. 내 새끼 ···. 준이 노숙자 연습한다며, 굶었던 옛일이 생각났다.

“밥은 먹었니?”

“네.”

“뭐 먹었니?”

“핫초코요.”

“그런 건 ···. 밥이 아니야. 씹는 걸 먹어야지.”

“그렇게 할게요. 엄마.”

준은 어머니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에바는 병실 밖에서 다섯 시간이나 기다렸다.

준은 어머니가 다시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병실을 나왔다.

“모든 것을 준비해놨습니다.”

*

닥터 사노요코는 침대에 묶여 있었다.

정신병자 전용 침대였다.

그녀는 있는 힘껏 변명했다.

“몰랐습니다! 그녀가 당신 어머니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

“거짓말.”

준은 사노요코의 얼굴에서 비대칭, 미세표정, 목소리 변화, 입술 경련과 같은 거짓말 징후를 읽었다.

이런 징후가 없더라도, 그는 사노요코의 머릿속을 환히 보았다.

“너는 나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래서 수고비를 더 높게 불렀어. 누가 사켰지?”

“몰라요. 다크웹으로 의뢰받았어요.”

거짓이 아니었다.

“준짱. 나머지는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준 뒤에는 로켈이 있었다.

로켈은 사노요코를 가혹하게 고문하고, 죽일 계획이었다.

감히 준짱의 어머니를 해치려 하다니!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로켈.”

“네! 준짱.”

“배후를 알아내라.”

“알겠습니다.”

로켈은 지체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준 곁에 있는 에바가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준 회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평소에 챙겼어야 했는데 ···.”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가져와라.”

“네.”

에바는 은빛 상자를 가져왔다.

그 안에는 에밀리의 몸에서 꺼낸, 구더기가 들어 있었다.

“잠깐만! 나는 아는 걸 다 말했어! 제발 살려줘요!”

“기회를 준다.”

준은 은빛 상자를 가볍게 흔들었다.

사노요코는 조용해졌다.

“이 구더기를 네 입에 부을 거다. 구더기가 파고들기 전에 잘게 씹으면, 넌 살 수 있다.”

“그런 ···.”

사노요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준이 바로 구더기를 입안에 쳐넣었기 때문이었다.

사노요코는 사정없이 맷돌처럼 마구 씹어댔다.

준은 약속을 지켰다.

침대의 구속장치를 풀렸다.

사노요코는 서둘러 입안을 소독액으로 헹궈내고, 거울로 입안을 들여다보았다.

혀와 잇몸으로 파고드는 구더기가 보였다.

그녀는 재빨리 손톱으로 구더기를 뽑아내고, 응급실로 달렸다.

분명 몇 마리가 몸 안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재빨리 제거하면 살 수 있다.

구더기만 제거하면 된다!

예전과 같은 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희망은 열리지 않았다.

복도 끝 문이 잠겨 있었다.

폐쇄 13병동은 공식적으로 텅 빈 곳이었다.

*

굿데이의 토끼굴에 있는 수잔은 에밀리의 수술 과정을 리뷰했다.

수술 전 티록신을 투여한 것이 주효했다.

티록신은 갑상샘 호르몬으로 곤충의 변태 호르몬과 같은 계통이었다.

티록신 농도 증가는 구더기로 하여금 변태를 준비했고,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역시 준 대표님이셔. 어떻게 임상시험도 하지 않고, 이런 걸 알아냈지?”

수잔은 티록신 요법을 각 의료기관에 전송했다.

티록신 요법은 구더기의 무성 번식에도 효과적이었다.

그녀는 파라엔진의 건강 지능에 티록신 요법을 추가했다.

이제 파라엔진을 이식받은 사람은 구더기증 자가치료가 가능했다.

구더기가 몸 안에 들어오면, 티록신이 자동 분비되어, 구더기를 변태의 길로 안내했다.

변태를 준비하는 구더기는 무성번식도 하지 않고, 얌전한 고치가 되었다.

*

프란츠는 블랙 오팔로 만든 반지 알을 만지작거렸다.

모세의 길잡이.

“이 반지는 방황하는 사람에게 가야 할 길을 알려주지.”

“그 반지가 너에게 뭐라고 하지?”

로켈이었다.

“늘 똑같지. 그냥 받아들이라는 군···. 준을 위한 일이었어. 준이 어렸을 땐, 에밀리는 좋은 엄마였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온갖 추문에 휩싸일 거야. 데이빗과 이혼하려고도 했고 ···. 준에겐 어머니가 없는 게 나아.”

“날 이해시키려고 노력할 필요 없어. 준짱에게 잘 말해봐.”

로켈이 앞장섰다.

프란츠는 조용히 로켈을 따랐다.

그는 오렌지 시티의 어둠을 다스리는 조직 보스였지만, 굿데이의 상대가 되지 않음을 잘 알았다.

로켈이 프란츠를 데려간 곳은 외진 곳의 낡은 건물이었다.

예전에 누네즈의 딸, 카멧을 가뒀던 곳이었다.

프란츠는 죽음을 각오했다.

그 죽음이 고통스럽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는 최후변론을 하듯 말했다.

그리고 강조했다.

모든 것은 준을 위한 것이었다고.

준의 대답은 간단했다.

“세상 평판보다 어머니가 더 중요하다.”

프란츠는 모세의 반지를 뺐다.

“이 반지는 심판의 도구입니다. 잘 써주십시오.”

그는 끝까지 데이빗이 은근히 허락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죽음과 함께 비밀로 가져갈 생각이었다.

“준 회장님. 프란츠를 용서해주십시오.”

에바가 나섰다.

한 자리에 있는 로켈이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제가 준 회장님 부모님에게 소홀했습니다. 그 이유는 ···. 프란츠가 두 분을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직접 어르신을 챙겼어야 했는데 ···. 프란츠에게 미룬 셈입니다. 제가 챙겼더라면 ···. 이런 일은 ···.”

다른 이유도 있었다.

프란츠는 오렌지 시티의 어둠을 지배하고 있다.

그가 사라지면, 그의 빈자리를 차지하려면, 조직 다툼을 피할 수 없다.

“어머님은 나를 보석이라고 하셨다. 나에게 젖을 물려주셨고, 밥을 해주셨으며, 돌봐주셨다. 나의 모든 것은 그분의 것이기도 하다.”

준은 모세의 길잡이를 손가락에 꼈다.

블랙오팔에서 오로라 같은 빛이 방출되었다.

“말도 안 돼!”

가장 놀란 사람은 프란츠였다.

모세의 길잡이는 전설이 깃든 성물이었다.

구세주가 반지를 끼우면, 모세의 길잡이가 빛을 내리라는 전설이었다.

‘어떻게 저런 일이!’

프란츠는 거듭 놀랐다.

그는 모세의 길잡이 전설이 사실인지 확인하려고, 반지를 정밀하게 조사했었다.

독침과 같은 몇 가지 장치가 있었지만, 스스로 빛을 내는 기능은 없었다.

프란츠는 반지의 빈 곳에 작은 섬광탄을 숨겨놓고,

사용한 적이 있지만,

반지로 하여금 직접 빛을 내게 하지는 못했다.

에바와 로켈도 한껏 놀랐지만, 준은 담담했다.

“프란츠 죽어라.”

준의 손끝이 프란츠의 이마에 닿았다.

프란츠는 총에 맞은 것처럼, 머리가 뒤로 넘어갔다.

“많이 변하셨군요. 예전에는 시체 치우는 게 귀찮다며, 트리탄을 살려 보내셨죠?”

로켈이 프란츠의 목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맥이 없었다.

하지만 ···. 심폐소생술을 지금 한다면, 살릴 수도 있다.

로켈은 슬쩍 준의 눈치를 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