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후거래소-17 >
유럽연합 기후거래소 ‘네오 올림포스’는 인공기후를 공급받았다.
인공기후를 공급받지 않는다면, 그리스 올림포스 산 봉오리에 자리 잡은 ‘네오 올림포스’는 지독하게 추웠을 것이다.
열대낙원을 재현한, 네오는 신들의 도시였다.
앙리 백작과 이네즈도 이곳에서 지냈다.
네오는 그들의 일터였고, 거주지였다.
이곳에도 기생파리 감염자가 발생했지만, 정확한 격리와 적절한 방역이 이뤄졌다.
네오는 오렌지 시티와 더불어 미아시스 청정지역으로 인정받았다.
이네즈는 오라클 부서를 맡았다.
오라클은 기후거래의 영향을 예측하는 부서였다.
이제 날씨는 자연적인 변화가 아니었다.
거래의 결과였고, 그 효과를 추정하고 계산해야 했다.
오라클이 바로 그런 일들을 해냈다.
그녀는 사하라 숲 프로젝트가 성공할 거라 믿고, 그 가치를 기후채권 700억 탄소달러로 평가했다.
기후채권 700억 탄소달러는 순식간에 팔려나갔다.
대부분 각국의 기후 중앙은행이 사들였지만, 개인이나 기업이 사들인 액수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사하라 숲 지역에 기생파리가 메뚜기떼처럼 출현했다.
사람들은 사하라 숲을 구더기 지옥이라 불렀다.
앙리 백작은 네오 올림포스에서 가장 높고 화려한 바벨탑 108층을 사무실로 사용했다.
“오라클의 평가 능력을 의심받고 있어. 어떻게 하면 좋겠나?”
그는 발밑으로 올림포스와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두루미 일곱 마리가 능선을 넘고 있었다.
“사하라 숲을 살리려는 방역활동이 ···.”
“헛소리!”
앙리 백작은 이네즈의 말을 잘랐다.
기후 오퍼레이션 기술이 공개될 때,
이네즈가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에,
굿데이와 큰 다툼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이네즈가 에바에게 몸 대주지 않았다면,
에바가 유럽연합을 벗겨 먹겠다고 덤볐다면,
큰 위기를 겪었을 것이다.
이네즈는 그간의 업무능력과 ‘희생’을 인정받아,
오라클 부서장이 되었다.
기후거래 내용을 경제 가치로 환산하는 오라클의 영향력은 그야말로 막강했다.
오라클의 막강함은 오직 정확한 계산으로 유지된다.
그들의 계산이 엇나가면, 기후거래 참여자들은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다.
“굿데이의 사하라 숲 프로젝트 신용평가가 어땠지?”
“투자 부적합이었습니다.”
“그래. 바로 알고 있군. 그런데도 너는 사하라 숲 프로젝트 가치를 700억 탄소달러로 계산했어.”
“오라클의 계산은 정확했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구더기 파리 때문에 ···.”
“굿데이의 신용평가 내용을 봤나?”
“네.”
“봤다면, 구더기를 예상하지 못했다는 소리는 못할 텐데.”
앙리 백작은 경멸 띤 노여움으로 이네즈를 노려보았다.
굿데이의 신용평가 보고서에는 사하라 숲에 신종 전염병 가능성을 매우 높다고 강조했다.
이네즈와 전문가들은 그래 봤자, 조류독감이나 낙타독감이겠지. 하고 넘어갔다.
말라리아와 황열 같은 바이러스 질환은 파라엔진으로 가볍게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하필, 그 신종 전염병이 체외기생충의 최강자 구더기였다니!
굿데이는 구더기 전염병을 예측했을까?
예측했다.
굿데이가 나열한, 발생 가능성이 있는 신종 전염병 중에는 미아시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죄송합니다.”
이네즈는 할 말이 없었다.
“앞으로 오라클의 최종 결과는 굿데이의 승인을 받도록.”
“네? 그건 ···. 그렇게 되면, 오라클의 독립성이 보장받지 못합니다.”
“독립성? 지금 시장에서는 오라클을 없애고, 가치 평가를 굿데이에 넘기라고 압력 넣고 있어! 유럽연합 핸드들도 가치 평가 작업을 굿데이로 이전하는 게 어떻겠냐고 한다고! 오라클이 굿데이로 넘어가면, 네오 올림포스 심장이 빼앗기는 거야! 굿데이에게 최종 승인받으면서, 그들의 노하우를 모조리 훔쳐!”
앙리 백작이 강조했다.
만들 수 없다면, 훔쳐라!
*
데이빗은 에밀리가 좋아했던 장미밭에서 처음 보는 벌레를 봤다. 몸은 검은색과 노란색의 말벌이었는데, 날개가 보라색이었다.
굿데이의 파리잡이.
데이빗은 어제 뉴스에서 파리잡이를 처음 봤다.
실제로 보니 더 작고 오묘해 보였다.
어제 뉴스는 리처드의 블로그 기사를 재탕한 것이었다.
굿데이의 파리잡이를 세상에 알린 것은 늘 그랬듯이, 리처드였다.
파리잡이는 기생파리만 킬링하는 곤충 드론이었다.
최첨단 기술이 집약된 파리잡이는 오렌지 시티를 지키는 수호말벌이었다.
오렌지 시티에도 미아시스 환자가 발생했었지만,
역학 조사 결과,
오렌지 시티에서 감염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감염되어 도시에 들어온 것이었다.
파리잡이는 오렌지 시티에 침입한 기생파리만 잡아 죽이는 게 아니라,
잠재적 환자까지 식별해서 질병 통제 본부에 알렸다.
오렌지 시티 내부 감염은 0명이었지만, 사망자는 다섯 명이었다.
모두 외부에서 감염되어 오렌지로 온 사람이었다.
세 명은 의료진이 손도 대보지도 못하고 숨졌고,
두 명은 구더기 제거 수술 중 사망했다.
몸속을 기어 다니던 구더기가 심장 혈관을 막고, 뇌를 망가트렸기 때문이었다.
거리 히잡 패션이 사라졌다.
불카누스는 여왕벌처럼 무수히 많은 파리잡이 말벌을 생산했고, 로봇 말벌의 날갯짓 소리는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안녕하세요.”
깜찍한 여자였다.
표정 동작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
무뚝뚝한 데이빗이었지만,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네. 안녕하세요.”
그는 저 여자를 예전에 어디서 만났더라? 생각해봤지만, 기억에 없었다.
저렇게 사랑스러운 여자라면, 그냥 쳐다만 봤어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제 이름은 타나예요.”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데이빗은 에밀리가 떠나 있어서, 외롭고 힘들고 지쳐 있었다.
타나는 그런 데이빗을 손쉽게 요리했다.
한 시간 만에 함께 식사했고, 그날 밤에는 같은 침대에 있었다.
상처받은 남자는 다루기 쉬운 사냥감이었다.
그녀는 깊게 잠든 데이빗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소문은 사실이었다.
준은 데이빗의 친아들이 아니다.
그녀는 선물이었다.
프란츠가 준에게 주었던, 선물.
그때 준은 선물의 포장지를 뜯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봐도 놀라운 자제력이었다.
이 세상이 어떤 남자가 나랑 단둘이 있는데, 내 몸에 손대지 않고 밤을 지새울 수 있을까?
오직 준뿐이었다.
준의 아버지도 너무 쉽게 넘어오지 않았던가!
타나는 증거로 남길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이 이혼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녀는 데이빗 집을 나오면서, 스마트워치로 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선물은 아직도 외로워요.’
늘 그랬듯이 답장은 오지 않았다.
타나는 자동차에 타고, 목적지를 홈으로 설정했다.
“아가씨.”
뒷좌석에서 묵직한 남자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타나는 화들짝 놀랐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뭐예요!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놀라지 마세요. 제 말대로 하면 안전합니다.”
남자는 손바닥을 보여주었다.
손바닥에는 흉터가 새겨 있었다.
프란츠의 조직원의 징표였다.
프란츠 조직원들은 서열이 높을수록 큰 흉터를 가진다. 그들에게 흉터는 계급장과 같았다.
“프란츠 님이 보냈군요. 일 이야기라면 내일 낮에 해요.”
“지금 해야겠습니다. 당신 폴더에 있는 사진이 다른 곳으로 퍼지기 전에요.”
“사적인 사진이에요.”
“다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무슨 아르바이트를 하든 간섭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 우리가 관리하는 인물을 흠집 내는 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폴더의 비밀번호를 알려주시죠.”
남자는 점잖게 말했다.
타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요청을 거절하면, 흉터를 얻거나 목이 잘려 죽을 것이다.
*
프란츠는 확실한 솔루션을 알고 있었다.
에밀리가 죽으면 된다.
그러면 소문도, 추문도, 앞으로 있을 민망함도 묻을 수 있다.
안나푸르나 마몽의 의료시설로 구더기 제거 수술을 받다가 죽으면 ···. 세상은 에밀리의 죽음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 그가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에밀리는 데이빗의 아내였고, 준의 어머니였다.
데이빗은 평생 속일 수 있지만,
준은 차원이 다른 상대였다.
‘내가 다른 집안 문제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우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했다.
그가 준에게 신경 쓰는 이유는 간단했다.
굿데이는 프란츠의 가장 확실한 돈줄이었다.
그리고 준은 ···. 세상의 중심이었다.
준의 주변이 무탈하고 평온해야 세상도 그렇게 된다.
준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건 ···. 중요했다.
무엇보다 프란츠는 준에게 빚이 있었다.
그는, 트리탄의 부하 로베르의 사주로, 누네즈의 딸 카멧을 납치했었다.
준이 카멧을 구해냈다.
준이라면 납치 사건의 배후에 프란츠가 있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그러나 준은 프란츠를 살려뒀다.
누네즈는 페루 대통령이 되었고, 카멧도 귀빈으로 격상되었다.
지금이라도 준이 옛일을 들춘다면, 프란츠는 속절없이 매장된다.
준은 결코 옛일을 들추지 않을 것이다. - 프란츠는 그렇게 믿었다.
그 믿음에 따라, 프란츠는 준에게 충성했다.
그는 데이빗과 에밀리를 안전하게 보호했고, 그 둘의 사생활까지 지켜주었다.
“데이빗. 에밀리가 미아시스에 걸렸소.”
프란츠는 보안 통신으로 사실을 알렸다.
“지금 어딨습니까?”
“히말라야.”
“ ···. 아내를 만나러 가겠습니다.”
“데이빗. 구더기 제거 수술은 위험하오. 생존율이 50%라고 하더군요. 제거 수술이 시작되면, 구더기들이 발광한다더군요. 수술로 죽게 된다면 ···. 한 번 생각해 보시오.”
프란츠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 한 번 생각해보는 것으로 충분했다.
데이빗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에밀리가 죽는다?
그렇게 된다면 ···. 그의 상상력은 아내의 죽음 이후를 그려내고 있었다.
“나는 ···. 아내를 사랑합니다.”
“사랑에는 여러 가지가 있죠.”
“확률이 50%라고요.”
“네팔의 의료시설이라면 ···. 50%도 되지 않겠죠.”
“마지막으로 그녀를 만날 수 있을까요?”
마지막이라는 표현이 결정적이었다.
“그녀가 원치 않을 겁니다. 가야 할 사람은 그냥 보내주는 게 좋소.”
*
수잔은 종일 투덜거렸다.
준이라면 구더기 전염병의 진짜 원인을 밝혀낼 것이고, 심플한 치료법도 만들어낼 것이다.
그러나 준은 미아시스에 대한 놀라울 정도로 무관심했다.
파리잡이 로봇 말벌을 만들어낸 것도 카이와 유진 악마였다.
준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재능에는 책임이 따라! 우리 준 대표가 너무 말랑말랑해진 거 아니야!”
그녀는 에바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투덜거렸다.
에바가 있었다면, 처방이 날아왔을 것이다.
처음 직원들은 못 들은 척했다.
저러다 말겠거니, 했다.
그러나 수잔은 집요한 여자였다.
그녀는 구더기 전염병의 비밀을 풀려고 했지만,
큰 벽에 가로막혔고, 그 때문에 더 초조하고 짜증스러웠다.
“준 대표님이 한 번만 봐주면, 그냥 다 풀릴 텐데! 너무해!”
“수잔.”
로켈이 목소리를 깔았다.
수잔은 똑똑했고, 로켈이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쉽게 넘겨 짚었다.
“모든 건 ‘준의 뜻대로’라는 거지. 준은 이 세상에 빚이 없고, 하고 싶은 것을 할 권리가 있다는 거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나는 구더기 전염병의 비밀을 알아. 누가 어떤 목적으로 기생파리를 날렸는지 알아.”
“······.”
수잔은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준짱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한 거야. 나는 항상 준비하고 있어. 준짱이 무슨 일을 하려 할 때, 내가 도움되도록. 정보를 모으고 훈련하고 있지. 여기 있는 호세도 그렇고, 카이도, 아쿠타미 부대도, 세이턴도 항상 준비하고 있어. 그런데 넌 지금 뭐하는 거지?”
로켈의 눈빛은 평소와 다르게 매서웠다.
“미안 ···. 사실 나도 너희와 같아. 기생파리의 유전자 지도를 분석하면서 ···. 준비하고 있었어. 그런데 ···. 분석이 너무 어려워. 그래서 ···. 쫑알댔어. 앞으로 조심할 게. 내가 잘못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