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 준-91화 (89/141)

< 기후거래소-16 >

수잔의 자동차는 페라리 하이힐로 불리는 ‘페라리힐’이었다.

스포츠카 페라리힐은 앞부분이 낮고, 뒷부분은 하이힐처럼 솟은 디자인이었다.

오렌지 시티에서 페라리힐을 소유한 오너는 수잔뿐이었다.

페라리힐은 돈이 많다고 소유할 수 있는 차량이 아니었다.

자격이 필요했다.

수잔은 파라엔진 개발로 인류에게 ‘건강’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했고, 비로소 자격을 얻었다.

준의 도움으로 프로메타 제약회사의 특허를 우회하고, 성능도 업그레이드했지만, 세상은 준보다 그녀를 주목했다.

굿데이가 나서기 전, 그녀는 홀로 프로메타를 상대해야 했고, 목숨을 잃을 뻔했던 위기도 여러 번이었다.

거리는 한산했다.

기생파리가 나대는 세상에서 한가하게 산책하거나 조깅 하는 사람은 없었다.

드문드문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히잡패션으로 온몸을 가렸다.

수잔의 페라리힐을 본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페라리힐의 유니크한 디자인이 눈길을 끌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수잔이 평상복 차림으로 루프를 연,

오픈카로 운전했기 때문이었다.

“저러다가 구더기 밥 되면 어쩌려고 ···.”

파라엔진이 기생파리에 효과가 없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페라리힐이 스마트 주차하고, 수잔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아무런 보호구 없이 중앙도서관으로 걸어갔다.

“미아시스에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요!”

마주 오던 학생이 말했다.

그는 머리 전체와 얼굴, 목 부위까지 가리는 투명 가면을 쓰고 있었다. 미아시스는 구더기증을 뜻했다.

“여기는 안전해요.”

그녀는 눈썹 끝 부위를 톡톡 쳤다.

구조 자기장 탐색기로 주변 10m 이내에 기생파리가 없다는 것을 렌즈로 확인했다.

구조 자기장은 MRI보다 더 정밀하게 신체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고, 모든 전자기파를 왜곡하는 은폐슈트까지 감지했다.

기생파리가 초파리처럼 작다고 해도, 탐지기를 피할 순 없었다.

수잔 어깨에는 카이와 유진 악마가 합작으로 만든 로봇 말벌이 앉아 있었다.

로봇 말벌은 기생파리를 탐색, 추적해서, 고전압 충격으로 태워죽였다.

도서관에 들어선, 수잔은 사람들이 히잡패션을 버리고, 평소처럼 앉아서 책을 읽는 것을 보았다.

준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는 항상 같은 자리에 있었다.

“준 대표님 WHO(세계보건기구)에서 변종 기생파리 유전자 지도를 공개했어요.”

수잔은 준 어깨 위에도 로봇 말벌이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준의 어깨는 깔끔했다.

‘안전장치도 없이?’

그녀는 사방에서 꽂히는 날카로운 시선을 느꼈다.

도서관 번호들의 눈빛이었다.

그녀들은 독서 중인 준에게 말 거는 수잔이 미웠다.

‘키도 조그마한 게! 꼬리를 치네!’

수잔은 번호들의 생각이 빤히 보였다.

같은 여자로서 쉽게 읽혔다.

수잔은 ‘이때다!’ 싶어서, 평소보다 더 다정하고, 친절하고, 사랑스럽고, 친한 것처럼, 소곤거렸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준 대표니이임. 이번 일은 저랑 대표님이랑만 해결할 수 있사와요. 유전자 지도에 인위적인 조작 흔적은 없지만, 유아생식 섹터에서 이상한 꼬임이 보여요. 준 대표님이라면, 한눈에 알아보실 거예요.”

수잔은 엉덩이를 흔들면서, 말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키 작다고 무시하는, 모든 연놈에게 준과 친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노출하고 싶었다.

누가 알겠는가! 준이 아담 사이즈를 좋아할지!

준의 이상형에 관한 정보는 알려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수잔은 기생파리 전염병을 준과 함께 해결하면서,

세상만 구할 게 아니라,

남자 친구와 남편까지 해결하고 싶었다.

준과 함께라면, 그동안 키 작다고 무시당했던 모든 서러움과 슬픔을 만회하고도 남는다.

“준 대표님의 아이를 낳고 싶습니다.”

쿵!

3층 열람실에서 준과 수잔을 구경하던,

여학생이 손에 든 책을 놓치면서,

떨어진 책 소리였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수잔과 준은 강력한 자석처럼 모든 이의 시선을 끌어들였다.

줄리아는 펜을 움켜쥐었다.

지금이라도 수잔의 정수리에 펜을 꽂고 싶었다.

아주 깊숙이!

그녀는 ‘왜 네가 준의 아이를 낳아!’라고 강력하게 따지고 싶었다.

쫘-악, 철-썩!

파도가 바위 치는 소리가 났다.

에바가 수잔의 뺨을 때린 것이었다.

슈퍼노바 처방이었다.

번호들은 그녀들이 맞은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녀들도 에바의 처방을 받았었다.

예외 없이 모두.

그래서 수잔의 느낌을 너무너무 잘 알았다.

뺨에 손자국이 선명한 수잔은 눈을 깜빡거렸다.

“지금 무슨 일이 있었어?”

그녀는 모든 것을 확실하게 기억했지만, 너무 창피해서 기억을 잃은 것처럼 행동했다.

번호들도 그랬었다.

“그냥, 그럴 때가 있어. 준 회장님 옆에 서면, 자기도 모르게 이상한 세계에 빠져. 치료법이 없는 게 아니니깐, 너무 걱정 마.”

에바는 방금 날렸던,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수잔은 레즈인 에바가 왜 준의 오른손이 되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내가 온 이유는 ···. 기생파리의 유전자 지도를 ···.”

“수잔!”

에바가 턱으로 출구를 가리켰다.

수잔은 조용히 도서관 밖으로 나갔다.

에바가 수잔 어깨에 팔을 둘렀다.

“수잔 ···. 네가 뭘 하든 상관 안 해. 기생파리 전염병을 해결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 하지만 ···.”

에바는 수잔의 어깨를 꽉 잡았다.

레즈다운 엄청난 힘이었다.

“준 회장님을 귀찮게 하지 마. 준 회장님이 무엇을 할지는 준 회장님이 결정하실 거야.”

“기생파리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구더기에 시달리고 있어.”

“그게 뭐! 그게 준 회장님 탓이야? 굿데이가 구더기 키워? 수잔, 잘 생각해봐. 굿데이에서 뭘 배웠지?”

“모든 것은 준의 뜻대로 ···.”

“그래. 그런데 왜 네 뜻대로 하려 해!”

수잔은 의기소침해졌다.

솔직히 그녀 혼자 기생파리를 해결할 자신은 없었다.

파라엔진도 준의 손길이 닿지 않았다면, 프로메타 버전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준 대표님이라면 ···. 정말 쉽게 해결할 거 같은데 ···.”

그녀는 가련한 표정으로 에바를 쳐다보았다.

“준 회장님이 지금껏 해온 걸 잘 생각해봐. 그분은 이미 충분히 하셨어. 그 누구도 그분에게 그 무엇도 요구할 수 없어! 수잔은 작지만 똑똑하니깐, 무슨 말인지 잘 알 거야.”

“콕 짚어서 작은 걸 말해야 해? 그냥 똑똑하다고 말해도 되잖아!”

“작아서 똑똑한 거 아니었어?”

*

상위 0.01%만이 다니는 로열로드는 완벽한 방역 시스템을 자랑했다.

에밀리는 로열로드를 따라, 쇼핑하고 여행도 했다.

그녀는 준이 누구 아이일까? 고민해야 했다.

그 당시 그녀가 만났던 남자는 모두 세 명이었다.

데이빗을 빼고도 그랬다.

기생파리는 추운 곳을 싫어했고, 네팔 안나푸르나는 안전한 장소로 통했다.

에밀리는 안나푸르나 마몽에서 지냈다.

마몽은 히말라야를 오르는 산악인들이 고도 적응할 때, 쉬어가는 마을이었지만, 기생파리가 유행하면서 로열로드 휴양지가 되었다.

추운 곳이었지만, 그 때문에 안전했고, 인생에 한 번 히말라야를 봐야 한다면, 지금이 딱 좋았다.

에밀리의 머리 위에는 동전 크기의 무소음 드론 세 대가 항상 떠 있었다.

‘파리잡이’로 불리는 소형 드론은 혹시나 모를, 기생파리나 모기를 공격하도록 만들어졌다.

그녀는 에어스크린으로 변호사의 보고를 받았다.

“그이가 사인하지 않는다고요?”

“네. 부군께서는 이혼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이유가 뭐죠?”

“제가 보기에는 ···. 모르겠습니다.”

변호사는 데이빗이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려다가, 그만뒀다.

그는 수많은 이혼을 보면서, 사랑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TV 쇼에 나가서도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다.

사랑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 믿음이었다.

믿음이 깨지면, 아무리 열렬히 사랑해도 결혼이 깨진다.

“원하신다면, 작전을 넣을 수도 있습니다.”

“그게 뭐예요?”

“제가 이 바닥에서 인정받는 이유죠. 부군에게 여자를 붙이는 겁니다. 그분이 다른 여자에게 빠지면, 이혼은 쉬워집니다.”

“재밌겠네요.”

“그럼 ···. 그렇게 하겠습니다.”

통화는 끊어졌다.

비메모리 에어스크린 통신이었다.

외부 도청도 되지 않았고, 녹음도 되지 않는다.

발코니에서 안나푸르나 산봉우리가 보였다.

방금 깨진 유리처럼 날카로웠다.

에밀리의 친구 캐더린이 보낸 메시지가 도착했다.

‘15시 파티 시작. 올 거지?’

캐더린도 에밀리와 비슷한 나이였지만, 안티에이징 의학의 힘으로 파티를 즐겼다.

그녀는 파티에서 새로운 남자를 만나는 것을 ‘남자 사냥’이라고 표현했다.

젊은 남자들은 늘 똑같았다.

경험 많은 캐더린과 에밀리에게는 정말이지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혹시 ···. 나에 대한 소문 들은 거 없어?’

에밀리가 메시지를 보냈다.

‘무슨 소문?’

‘그냥 이것저것.’

‘없는데 ···.’

거짓말이 분명했다. 없을 리가 없다.

‘거짓말. 캐더린! 친구로 남고 싶으면, 솔직히 말해. 마지막 기회야.’

‘몰라.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캐더린은 끝까지 선을 넘지 않았다.

에밀리는 늘 그랬듯이 그냥 넘어가려 했다.

그러다가, 데이빗도 그랬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데이빗도 숱하게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에밀리는 데이빗이 그녀를 속였다고 생각했다.

사실이 그랬다.

그녀도 데이빗을 속였지만, 데이빗도 그랬다.

‘처음부터 준이 친아들이 아닌 것을 알았다고? 그런데 그걸 지금 와서 이야기해?’

그녀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정말 무서운 남자네. 내가 사람을 잘 못 봤어. 순수한 줄 알았는데 ···. 아주 못됐어!’

논리적으로는 앞뒤가 안 맞았지만, 감정적으로는 그녀의 느낌이 진실이었다.

삐-삐-삐

머리 위에서 경고음이 들렸다.

에밀리는 모기거나, 바퀴벌레라고 생각했다.

마몽은 추운 곳이었지만, 실내에는 모기와 바퀴벌레, 그리고 개미와 좀나방 같은 벌레가 있었다.

[턱밑에서 미세 경련이 감지되었습니다. 미아시스가 의심됩니다. 정밀 검진을 추천합니다.]

“예민하긴, 화가 나서 얼굴을 찡그린 거야.”

에밀리는 턱밑을 매만졌다.

침을 삼키듯, ‘꿈틀꿈틀’했다.

삐-삐-삐

[왼쪽 가슴에서 미세 경련 감지. 미아시스 확률 87%. 의료진을 호출했습니다. 고

객님은 위치를 지켜주십시오.]

에밀리는 곧바로 격리되었다.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그녀는 믿기질 않았다.

로열로드로만 다녔는데, 감염되다니!

“파리잡이들이 24시간 지키고 있었는데, 어떻게 미아시스가 생길 수 있어요!”

뭔가 잘못 된 것이 분명했다.

“미아시스는 피부접촉만으로도 전염됩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성충 파리가 아닌, 구더기가 몸 밖으로 나와 다른 숙주로 옮겨가는 케이스도 보고되었죠. 중요한 것은 ···.”

닥터는 고해상도 의료 스크린을 띄웠다.

에밀리의 몸이 투사된 이미지였다.

평소였다면, 탄탄하고 군더더기 없는 윤곽이 눈길을 끌었겠지만, 이번 포인트는 그게 아니었다.

그녀 몸속으로 구더기들이 헤집고 다녔다.

모두 21마리였다.

“스물한 마리라고요? 처음 검사할 때에는 다섯 마리라고 했잖아요! 한 시간도 안 됐다고요!”

“로그값이 높네여. 그만큼 빨리 증식하죠.”

< 기후거래소-16 > 끝

ⓒ 캔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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