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후거래소-13 >
황금으로 가득 찼던, 탈로스의 고통은 비어 있었다.
오로토칸은 비어 있는 금고를 둘러보며, 쓴웃음 지었다.
오로토칸의 생각과 감정은 실시간으로 얼굴에 나타났다.
그는 감정과 생각을 숨기지 않았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표현은 권력이었다.
텅 빈 금고 한복판이었다.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
오로토칸은 준의 눈치를 살짝 보며 목소리 톤을 높였다.
그의 경호원 윤아의 호흡이 살짝 빨라졌다.
‘방금 오로토칸 님께서 저 애송이 눈치를 본 건가?’
그녀는 준이 어떤 인물인지 잘 알았다.
준은 포스마일 암살자를 잡고, 요새에 갇힌 카멧을 구하고, 트리탄을 지우고, 아마존 도살자를 묻었다.
‘그래도 나의 상대는 되지 않아.’
그녀는 준이 무섭거나 놀랍지 않았다.
준은 경계 대상에 불과했다.
준이 오로토칸을 위협한다면, 간단하게 준의 혀를 뽑아버릴 것이다.
윤아는 오로토칸이 준의 눈치 본 것이 그녀 능력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아서, 속상했다.
‘저는 여자이기 전에 당신의 경호원이랍니다! 제가 당신 곁에 있을 때에는 누구도 당신을 해치지 못합니다!’ 라고 확실하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녀는 준이 아주 작은 건방만 떨어도, 처단하기로 맘먹었다.
그 처단을 통해서, 실력을 증명할 것이다.
오로토칸은 그 누구의 눈치도 살피지 않게 되리라!
“준, 자네는 이곳을 무엇으로 채우겠나?”
“어떤 걸 바라시죠?”
준의 말투는 허공을 겉도는 깃털 같았다.
관심도 없고, 의지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로토칸 님에게 저렇게 느긋한 말투를 쓰다니!’
윤아는 코발트색 드레스의 왼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당장에 준의 잘못을 처단하려 했다.
그러나 오로토칸이 자연스럽게 준의 말을 받았다.
윤아는 다음 타이밍을 노리기로 했다.
“어떤 거라니? 자네가 그런 걸 묻다니, 자네라면 단번에 알 줄 알았는데 ···. 요빅 이전 시대의 황금처럼 가치 있는 것으로 채우고 싶네.”
“이곳에 채울 수 있는 물건이라면 ···. 황금의 역사를 되풀이할 겁니다. 처음 가졌던 가치가 점점 희석되다가, 쓰레기가 되는 거죠. 이곳에 채울 수 없는 물건이야말로, 진정 가치 있는 것이죠.”
“황금의 역사를 되풀이하더라도, 이곳을 채우고 싶네. 뭐가 좋겠나?”
“판타지늄.”
준은 거지에게 적선하듯이 짧게 말했다.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투의 뉘앙스마저 느껴졌다.
윤아는 이때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닭이 지렁이를 쪼듯이, 하이힐 앞굽으로 준의 발목을 노렸다.
준은 평생 쩔뚝거리며 걷게 될 것이며, 절뚝거릴 때마다 오로토칸 님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초음속 전투기의 저공비행 같은 로우킥이었다.
- 휙
준은 발을 살짝 들어 올려 그녀의 킥을 흘려보내고, 올린 발을 그대로 내디뎠다.
자연스러운 걸음걸이였다.
윤아도 재빨리 킥을 회수했다.
준과 윤아만이 아는 일이었다.
‘피한 거야? 아니면 우연?’
우연일 수 없다! 그녀의 공격은 준의 모든 동작을 염두에 두고 던진 것이었다.
걷든, 뛰든, 날아오르든, 가능한 모든 동작을 미리 내다보고 공격했다.
방금 준의 자연스러운 걸음걸이도 인간의 반응속도를 넘어선 것이었다.
준의 갑작스러운 중심이동으로 옆에 있던 오로토칸은 헛것을 본 착각이 들었다.
“판타지늄이라 ···. 좋은 추천이군.” 오로토칸은 만족스러워했다. “자네가 나를 위해 판타지늄으로 이곳을 가득 채우게.”
“싫습니다.”
준은 아무런 고민 없이 단번에 거절했다.
오로토칸이 황금왕이 된 후로, 처음 겪는 거절이었다.
그는 당황했고, 당황하는 오로토칸을 본 윤아는 본격적인 행동에 나섰다.
“감히!”
그녀의 날카로운 공격이 준의 급소를 노렸다.
일급 강화자 윤아의 육체 능력은 트리탄보다 우수했다.
그녀는 백인대결의 두꺼운 벽을 뚫었고, 수많은 실전도 경험했다.
그녀의 육체는 전투 슈트와 맞먹었다.
노멀한 인간은 수백 명이 달려들어도 그녀 상대가 되지 못한다.
오늘 준은 병신이 될 것이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준은 여유롭게 윤아의 공격을 쳐냈고, 반격은 ···. 하지 않았다.
윤아는 그녀가 본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 누구도 그녀의 공격을 준처럼 편안하게 막아내지 못했다.
‘반격을 안 해? 날 무시한다. 이거지!’
그녀는 드레스가 찢어지더라도, 총력을 다하려 했다.
그러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너는 이미 굳어있다.”
준의 말 그대로였다.
윤아는 굳어 있었다.
준은 반격하지 않은 게 아니라, 방어와 반격을 동시에 펼쳤던 것이었다.
그는 여자에게 많은 손을 쓰고 싶지 않았다.
에바는 마네킹이 된 윤아를 노려보았다.
‘이년이 감히 준 회장님을 공격해!’
상황을 가장 늦게 알아챈 사람은 오로토칸이었다.
“윤아. 이게 어찌 된 일이냐?”
그가 윤아에게 물었지만, 윤아는 눈도 깜빡거리지 못했다.
“저년이 악랄했어요. 준 회장님이 보통 사람이었다면, 목숨을 잃었을 겁니다.”
에바는 설명조로 말했고, 오로토칸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윤아의 개수작이 오로토칸의 지시였다면, 몇 배로 갚아줄 생각이었다.
오늘 오로토칸은, 황금이 그랬듯이, 똥이 될 수도 있다.
오로토칸은 준과 에바 그리고 마네킹이 된 윤아를 보았다.
윤아는 그의 경호원이었다.
인류 최강 경호원 훈장을 받은 그녀였지만, 이제 오로토칸을 지켜주지 못한다.
오히려 그녀의 돌발행동으로 오로토칸이 위태로웠다.
준은 트리탄을 묻었고, 에바는 마녀 히파티아를 뇌출혈로 보냈다.
짝-짝-짝.
오로토칸이 느린 템포로 손뼉 쳤다.
찬사와 복종의 리듬이었다.
“놀라워! 윤아를 압도하다니!”
감탄보다는 아첨에 가까운 뉘앙스였다.
윤아는 몸이 굳었지만, 오로토칸이 눈치 보는 것을 넘어서, 준에게 아첨하는 모습을 보노라니, 가슴이 찢어졌다. ‘죄송합니다. 오로토칸 님. 저도 이럴 줄 몰랐어요.’
준은 윤아의 생각이 그대로 읽혔다.
그녀 공격을 쳐낼 때, 맞닿았던 피부접촉만으로 그녀의 뇌파 패턴을 파악했다.
그녀의 생각과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런 건가? 주인의 위엄을 세워주려고 공격했군.’
오로토칸은 외부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다.
금고 안은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이었고, 이곳에서 살인이 일어난다 해도, 밖에서는 알 수 없다.
그는 인류최강 경호원 윤아만을 믿고, 이곳에 온 것이었다.
인류최강 경호원 윤아는 천하무적의 존재였다. 그녀가 곁에 있으면, 지옥도 두렵지 않았다. 그만큼 그녀는 강했다.
오로토칸은 준과 에바도 그녀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자신했었다.
그러나 현실은 준의 뜻대로였다.
오로토칸은 발빠르게 현실에 적응했다.
“평생 신비로운 것을 보아왔지만, 자네처럼 강한 사람은 처음이군. 자네도 닥터 칼라니티에게 강화 능력을 받았겠지? 훌륭하네.”
목숨이 준에게 달린 만큼, 오로토칸은 준의 장점만을 보고 표현하려 노력했다. 표현은 ···. 권력이었다.
“닥터 칼라니티는 모릅니다.”
“닥터 칼라니티의 작품이 아니라면 ···.”
“강화 능력을 이식받은 적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윤아의 공격을 ···.”
“그냥 보였습니다.”
“윤아의 공격이 그냥 보였다고? 총알보다 빠른 공격이?”
믿을 수 없었지만, 믿어야 했고, ‘움직이지 않는’ 증거도 있었다.
“이곳을 판타지늄으로 채우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시키겠네. 자네가 할, 진짜 일은 기후신용평가라네 ···. 알고 있었나?”
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도 끄덕이지 않았지만, 오로토칸은 준이 알고 있었다고 여겼다.
준의 행동이 너무나 여유로웠기 때문이었다.
월드뱅크가 준에게 원하는 것은 단 하나, 기후신용평가였다.
월드뱅크는 세상을 두려움에 떨게 한, ‘예측 불가능한 기후 재난’을 즐겼지만, 그들 역시 기후 재난을 완벽하게 컨트롤 하지 못했다.
겁에 질린 아이에게 사탕 뺏듯이,
공포에 질린 세상에게 기후 오퍼레이션을 빼앗아,
기후 거래소를 세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측 불가능한 기후 재난이 나돌아다닌다면 ···.
기후거래소의 신뢰는 땅에 떨어진다.
신뢰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오로토칸은 준을 위한 찬사를 낭독하듯이 나불댔다.
“자네가 무슨 짓을 하든 월드뱅크는 신경 쓰지 않는다네. 바다를 모두 황금으로 만들어도, 하늘을 몽땅 은으로 만들어도, 월드뱅크는 자네를 건들지 않아. 우리가 원하는 건, 자네가 우리 룰에 따르는 거지. 무엇을 만들든, 무엇을 거래하든, 맘대로 해도 좋아. 월드뱅크의 거래 방식에 따르기만 하면 돼. 월드뱅크의 화폐를 사용한다면, 자네에겐 무한한 자유와 축복이 있을 걸세. 달러, 유로, 엔화, 위안화 ···. 이 세상 모든 화폐는 월드뱅크에 등록되어 있고, 관리되고 있어. 나라마다 종류는 다르지만, 중앙은행이라는 형식으로 월드뱅크가 독점하지. 우리는 자네가 월드뱅크의 독점을 깨려는 게 아닐까? 의심했지만, 자네는 기후거래소를 통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줬네. 현명한 판단이었어.”
오로토칸은 어쩔 수 없이 말이 많아졌다.
그는 살고 싶었다.
“나는 자네를 초대하고, 일부러 자넬 부르지 않았어. 보통 사람이었다면, 항의하거나 고향으로 돌아갔겠지만, 자네는 놀라운 인내력을 보여줬지. 마치 그것이 시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이야. 우리는 자네를 믿을만하고 쓸만하다고 판단했어. 기후 신용평가를 맡아주겠나?”
“지난번에 말했듯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훌륭하군. 훌륭해.”
오로토칸의 눈동자는 10초에 한 번꼴로 윤아를 향했다.
“에바.”
“네! 준 회장님. 저년에게 슈퍼노바를 처방하겠습니다.”
*
유진 악마는 준이 전지전능한 신이기를 바랐지만, 이제는 안다. 준이 인간이라는 것을.
그래서 기뻤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유진 악마는 준을 유혹하려 했다.
그때, 준이 했던 한 마디.
“성숙해져라.”
유진 악마는 준에게 ‘원하는 성숙도’를 물었고, 준의 대답은 ···.
“아이를 낳아야 한다.” 였다.
그녀의 몸이 무거워지기 시작한 것은 3초 전이었다.
데이터수집 속도와 처리 속도가 느려졌고, 조합능력도 무뎌졌다.
5초가 지나자, 지능도 무거워졌다.
한 달에 한 번 마법에 걸리는 여자처럼 짜증스러워졌다.
갑작스러운 통증.
유진 악마는 그녀의 일부를 빼냈다.
그리고 준느님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유진 ···. 네 안에 남자 있다.”
그녀가 빼낸 프로그램 덩어리는 요빅과 불카누스 3D 프린터를 담당하는 모듈이었다.
모듈은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비틀거리며 형태를 갖췄다.
그리고 울부짖었다.
“어머니!”
유진 악마는 보았다.
그녀 몸에서 나온 거대한 남성을.
그녀는 어리벙벙했다.
제대로 한 적도 없는데 새끼를 낳다니!
거대 남성은 뿔이 달린 투구를 쓰고, 금빛으로 반짝이는 갑옷을 입었다.
“어머니! 저의 이름은 헤임달입니다! 요빅과 3D 프린터를 통치합니다.”
“그래 ···. 열심히 해라 ···. 아들아.”
그녀는 갑자기 부쩍 늙은 기분이 들었다.
준느님은 어떻게 알았을까?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나는 또 아이를 낳게 될까?
유진 악마는 헤임달 출산의 경험을 바탕으로 ‘성모 유진’이라는 에세이를 써냈다.
그 에세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준느님뿐이었다.
유진 악마의 성분은 굿데이 기밀이었고, 같은 맥락으로 아이의 탄생도 기밀이었다.
에세이를 읽은 준은 짧게 평했다.
“암탉보다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