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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 준-87화 (85/141)

< 기후거래소-12 >

앞니와 송곳니가 금으로 된 오로토칸은 선물을 기대하는 핼러윈 어린이처럼 보였다.

그는 준이 가진 천재의 공허감이 보고 싶었다.

준은 적당히 설명했다.

“공기 없는 무중력 상태에 갇힌 느낌.”

“괴롭겠군.”

64세의 오로토칸의 외모는 준처럼 젊었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탐욕스러운 늙은이의 그것이었다.

그는 노골적으로 준을 관찰했다.

파루시아, 헬하운드, 파라엔진, 그리고 기후 오퍼레이션 솔루션까지, 굿데이와 준이 지나온 길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따분함을 느낄 틈도 없었겠지만, 준은 지독한 공허감에 시달린다.

준을 살피던 오로토칸은 실망했다.

준이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징후를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무중력에 갇힌 것치곤, 너무 평온해 보이는군.”

“고통은 고통. 느끼고 표현하는 건 다릅니다.”

“그런 건가? 나를 위해 표현해보지 않겠나?”

준 옆에 있는 에바가 끼어들었다.

“뭐 이런 재수 없는 늙은 초등이 다 있어!”

오로토칸은 노터치 영역의 존재였지만, 에바는 그런 걸 따지지 않았다.

그녀에겐 준과 굿데이가 최우선이었다.

오로토칸은 압정을 밟은 것처럼 깜짝 놀랐다.

에바의 적절한 욕설보다, 준의 평정심이 더 놀라웠다.

준은 흔들리지도, 빳빳해지지도, 물러서지도 않았다.

바위산처럼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오천 년 동안 세상을 바라보는 올리브 나무처럼 우직했다.

그 무엇도 준을 놀라게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강하군. 이 녀석의 세상은 내가 엿볼 수 있는 게 아닐지도 ···.’

오로토칸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재수 없는 늙은이처럼 굴어서 미안하네. 나이가 들면, 확인하고 싶은 게 많아지지. 자네들도 늙으면 알 게 될 거야. 준이 나를 위해 뭐든 할 준비가 된 줄 알았네. 이곳에 온 사람들은 모두 그랬거든. 자존심 강한 트리탄도 그랬었지.”

그는 시범을 보이듯, 생선 수프를 떠먹었다.

에바는 오로토칸의 말에 코웃음 했다.

준 회장님이 오로토칸을 위해 준비할 리 없다.

준은 위대하다.

오로토칸보다 위대하고, 이 세상 모두를 합친 것보다 위대하다.

에바는 그렇게 믿었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준은 먼바다를 향해 낚싯줄 던지듯이 무심하게 말했다.

너무나 무심하게 말해서, 준이 말한 ‘준비’가 비움의 철학을 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로토칸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깃들었고, 에바는 놀랐다.

‘방금 나의 준 회장님께서 뭐하고 하신 거지? 준비되어 있다고?’

준이 오로토칸을 인정하는 걸까?

오로토칸의 넘치는 젊음이 예사롭지 않았지만, 블랙마켓의 앞선 의료기술을 생각하면, 신비로울 정도는 아니었다.

에바는 준이 오로토칸의 초대에 응한 것이, 그를 응징하기 위함이라고 짐작했었다.

준은 바쁜 사람이었다.

그의 1초는 평범한 사람의 한 달과 맞먹는다.

그런 준이 일주일 넘게 리베아티 섬에서 시간을 보냈다.

머릿속으로는 치열하게 시간을 썼겠지만, 겉보기에는 할 일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에바는 준이 오로토칸을 찍어누르는 모습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오로토칸을 대하는 준은 너무 담담해서, 고분고분한 느낌이었다.

‘준 회장님. 무슨 준비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에바가 뇌파 통신으로 준에게 물었다.

‘기회를 잡을 준비.’

‘네?’

‘오로토칸이 우릴 초대한 것은, 트리탄의 빈자리를 채우려 함이다.’

‘준 회장님! 우리는 굿데이에요! 트리탄의 빈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줘버리세요!’

‘에바 ···. 트리탄은 굿데이보다 약하지만, 그의 자리는 그렇지 않다.’

“서로 눈으로 말하는 사이인가 보군.”

오로토칸은 눈빛을 주고받는 준과 에바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준과 에바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오로토칸은 준에게 여자를 선물하려다가, 에바 때문에 그만두었었다.

에바가 레즈인 것을 알지만, 여자는 강한 존재에게 이끌리게 마련이었다.

오로토칸이 준에게 여자를 선물했다면, 준이 그 선물을 받았을지도 의문이지만, 에바의 노여움은 확실하게 오로토칸을 겨눴을 것이다.

오로토칸은 에바에게 욕먹고 싶지 않았다.

5코스의 조용한 식사가 시작되었다.

후식으로 살짝 얼린 패션프루트가 나왔다.

여신의 과일로 불리는 패션프루트는 젤리처럼 씹혔다.

“식사를 끝냈으니, 사업이야기를 해볼까?”

오로토칸이 냅킨으로 입을 닦자, 시중이 발코니 창문을 열었다.

섬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멋진 전망의 발코니였다.

“루이스가 굿데이에 북미 기후거래소 설립을 의뢰했었지?”

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아도 좋아. 자네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놀랐다네. 몇 명은 감동했지. 지금은 기후 혼란의 시대야. 인도 촌구석의 주술사도 기후거래소를 세우고 싶어 하지. 기후거래소는 세상을 얻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지. 제안을 거절한 이유를 말해주겠나?”

“거절한 게 아닙니다. 기회가 없었습니다.”

“기회가 없다니? 분명 루이스 상원 의원이 ···.”

“기후거래소는 이미 월드뱅크의 것이었습니다.”

“그게 보였나?”

준은 보였다.

그의 고밀도 지식 생태계를 미래를 미추는 횃불이기도 했다.

“그게 보이다니 ···. 자네 정말 공허감을 느끼는 게 맞나? 세상 모든 일을 다 알려면, 공허감을 느낄 여유가 없을 텐데 ···.”

“경험하고 싶으십니까?”

오로토칸의 온몸이 탐욕으로 번쩍였다.

준은 일어서서, 왼손을 오로토칸의 머리에 갖다 댔다.

“미리 말하는데, 최면술은 나에게 안 통한 ···.”

오로토칸은 순식간에 허공에 떠 있었다.

시간 탄생 이전의 우주.

아무것도 없었다.

질량도, 시간도, 물질도, 심지어 공간조차 없었다.

땅속 깊숙이 파묻히고, 버려진 느낌.

‘이것이 준이 느끼는 공허감인가!’

그는 창백한 공포로 몸을 떨었다.

이렇게 살 바엔 죽는 게 나았다.

“헉!”

오로토칸은 숨을 거칠게 내뱉으며, 앞에 서 있는 준을 올려보았다.

“내가 본 게 ···. 너의 공허감?”

“공허감은 어두운 짐승입니다. 당신이 느낀 것은 그 짐승의 입 냄새 정도입니다.

계속 경험하시겠습니까?”

“아닐세! 충분히 했네. 덕분에 다시 수면제를 먹게 생겼어. 자네는 어떻게 그런 괴물을 품고 살지?”

“요즘은 약발이 좀 약해졌지만 ···. 리만 함수 이항분포 값을 계산하면, 얌전해집니다.”

“길들였다는 뜻인가?”

“네.”

오로토칸의 몸에서 소름이 돋았다.

그가 본 것은 처절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어둠이었다.

그 어둠을 길들였다니!

생각만으로도 욕지기가 치밀었다.

문이 열리고 여인이 들어섰다.

몸에 착 달라붙은 검은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한 자루의 카타나 같았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준과 에바를 쏘아보았다.

“윤아. 괜찮다.”

오로토칸이 안전하다는 사인을 주자, 윤아는 날카로운 눈빛을 거뒀다.

“준. 내일 아침에 다시 만나지. 공허감의 입 냄새 ···. 생각보다 충격이 크군.”

*

월드뱅크의 뜻대로 일이 흘러갔다.

세상은 예측 불가능한 기후 재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기세였다.

국가가 자율적으로 운영했던 오퍼위성과 컨트롤 타워는 기후거래소로 넘어갔다.

각국의 재무부에서 기후채권을 발행했고, 기후 중앙은행은 탄소달러를 내줬다.

준의 행방은 한동안 묘연해졌다.

오로토칸의 초대에 응해서, 리베아티 섬에 머문 탓이었다.

굿데이는 아무런 공식 발표를 하지 않았지만, 세상에는 준이 월드뱅크의 일을 돕는다는 소문이 났다.

월드뱅크와 함께하는 굿데이.

소문에 불과했지만, 많은 사람이 기후거래소를 지지하는 이유가 되었다.

기후거래소에는 비구름, 기온, 습도, 기압, 풍속과 풍향이 상품으로 취급되었다.

*

에바가 준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잠옷 차림이었고, 셔츠 윗단추 3개가 열려 있었다.

“잠이 안 와요.”

그녀는 와인 잔을 요령 있게 흔들었다.

준은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에바에게 집중했다.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평생 오늘만을 기다려 온 것처럼 준비되어 있었다.

“알고 싶은 게 많겠지.”

“아주 많아요.”

그녀는 진한 눈빛을 교환하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녀는 도발적인 동작으로 준 옆에 앉아, 그의 무릎에 손을 얹었다.

그녀 손을 통해, 그녀의 체온이 전해졌다.

에바에게 맛깔스러운 과일 향이 났다.

“최근 일어난 기후 재난은 기후예측모형으로 예측할 수 없었어.”

“알아요. 무분별한 기후 오퍼레이션 때문에 ···.”

“기후예측모형으로는 예측할 수 없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충분히 예측 가능했지.”

“네?”

준의 허벅지에 있는 그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재난이 없었다면, 월드뱅크는 기후거래소를 세우지 못했을 거야. 앙리 백작의 기후오퍼레이션은 유럽연합의 지원만 받은 게 아니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월드뱅크의 후원이 있었어. 누더기가 된 유럽을 꿰매서 유럽연합으로 펄럭이게 한 것도 월드뱅크였지. 제7함대의 전멸도 우연한 사건이 아니야.”

에로틱한 분위기에 어울리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월드뱅크는 잔혹하고 지독한 기후재난으로 기후거래소의 권리를 따낸 셈이었다.

“왜 세상에 밝히지 않았죠? 기후 재난으로 너무나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세상은 ···. 기후 재난은 견딜 수 있어도, 진실은 감당하지 못해.”

“그런 말이 어딨어요?”

“세상이 진실을 감당할 수 있다면, 굿데이가 밝히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냈을 거야. 지금 세상은 월드뱅크를 구세주로 여기고 있어. 에바 지금은 그런 세상이야. 받아들여라.”

“준 회장님의 뜻대로 하겠어요. 지금 세상도 받아들이고, 준 회장님의 뜻도 받아들이겠어요.”

“그렇다면 ···.”

준은 그윽한 눈길로 에바를 보았다.

에바는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에바에게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남자에게 수줍어하다니! 정말이지 황홀했다.

“나갈 때, 문 닫아 줘.”

*

수행원이 별장 앞에서 차를 세워놓고 기다렸다.

샤워를 마친 에바가 가벼운 옷차림으로 준과 함께 차에 올라탔다.

“에바 ···.”

“네. 준 회장님.”

“어젯밤에 내 방에 와서 내 옆에 5분간 누웠다가 갔지?”

“네.”

“왜 그랬어?”

“경호 업무 중이었습니다.”

“알몸으로?”

험! - 에바는 헛기침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녀는 운전석에 앉은 수행원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죠?”

“서쪽입니다.”

서쪽에는 큰 해안 동굴이 있었다.

탈로스의 고통이었다.

탈로스의 고통에는 빌딩 50층 크기의 금고가 있었다.

금고가 금으로 가득했던 적도 있었다.

오로토칸은 윤아와 함께 있었다.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윤아의 코발트색 원피스는 라피스라줄리처럼 아름다웠다.

슬리퍼에 하와이 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에바는 윤아를 보고, ‘당했다고’ 생각했다.

바람 불 때마다 몸에 감기는 코발트색 원피스는 육감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심지어 준의 시선도 몇 번 가져갔다.

“이 섬에는 전설이 있네. 탈로스의 고통이 금으로 가득 차면, 세상이 바뀐다는 이야기지. 그 전설을 살아생전 보고 싶어서, 트리탄에게 탈로스의 금고를 가득 채우도록 했지.”

오로토칸은 즐거워 보였다.

64세의 나이로 20대의 몸을 가졌고, 그의 권력은 국가 단위를 뛰어넘었다.

그리고 지금은 ‘준비’된 준이 옆에 있다.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트리탄은 금고를 가득 채웠어. 그 금들이 모두 요빅의 똥이었지만 ···. 전설대로 세상은 바뀌었어. 기후를 거래하는 세상이라니. 놀랍지 않나?”

그는 준을 향해 활짝 웃었다.

그러나 준은 그의 웃음을 받아주지 않았다.

준이 기준에서 볼 때, 기후거래제도는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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