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 준-86화 (84/141)

< 기후거래소-11 >

“미쓰이 타운은 높이 250m의 초대형 빌딩이었습니다. 안에 과수원과 채소밭도

있었고, 벚나무 산책로도 있었습니다 ···. 핵 방공호만큼이나 안전하고 튼튼하게 지어진 미쓰이 타운이 ···.”

나가미네 일본 대사는 안경을 벗으며, 손수건으로 눈시울을 닦아냈다.

토네이도는 나무 뽑듯이 미쓰이 타운을 하늘 위로 내던졌다.

천 명 이상이 숨졌고, 아직도 시체 발굴이 계속이었다.

일본은 재난재해 대비가 철저한 국가였다.

그러나 강력한 토네이도 앞에서 내진 설계 따위의 안전장치는 쓸모없었다.

도쿄에도 드문드문 토네이도가 발생하긴 했지만, 이번처럼 강력한 것은 처음이었다.

히로시마 원폭과 맞먹는 위력이었다.

“인과율을 따져보니, 러시아의 시베리아 그린벨트 프로젝트가 원인이더군요. 무분별한 기후 오퍼레이션으로 모두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종말이 왔다고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언제 괴물이 들이닥칠지 아무도 모릅니다. 굿데이가 우리 일본을 도와주셔야 합니다.”

나가미네 일본 대사는 코를 훌쩍였다.

간절했다.

사고가 터진 후에 원인을 밝혀봤자, 다 헛짓이었다.

예측 데이터를 바탕으로 ‘예방’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에바는 난처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도와드리고 싶어요. 많은 국가에서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굿데이의 입장은 홈페이지에 밝힌 것과 같습니다. 무분별한 오퍼레이션으로 미래 예측이 불가능해졌습니다.”

“불완전해도 좋습니다. 굿데이가 오라클을 해주신다면, 많은 이들이 맘을 놓을 겁니다.”

오라클은 기후예측모형 시뮬레이션과 준의 선택을 뜻했다.

“나가미네 대사님. 굿데이는 항상 오라클을 해오고 있습니다. 최근 예측 자료를 올리지 못한 것은, 오퍼레이션으로 유효 관측값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정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굿데이가 우리나라를 지켜본다는 분위기만 만드셔도 됩니다.”

나가미네 대사의 목적은 간단했다.

겁에 질린 일본 시민을 안심시키는 것이었다.

굿데이만큼 안심되고 믿음 가는 존재도 드물었다.

나가미네 대사는 법적으로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조건도 내걸었다.

“죄송합니다.”

에바는 깔끔하게 거절했다.

“에바 님 ···. 이 자료를 ···.”

나가미네 대사가 내민 것은 일본 외무성의 여직원 프로필이었다.

에바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소문 난 건가? 앞으로 조심해야겠어.’

그녀가 레즈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졌지만, 그 사실이 에바의 약점이어서는 안 되었다. 강점이어야 했다.

에바는 앞으로 여자를 멀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사실, 성욕 충족은 준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다.

준을 보기만 해도, 느낄 수 있었다.

“부디 이 늙은이를 위해서라도 ···.”

나가미네 대사가 넙죽 엎드렸다.

에바는 나가미네 대사의 진심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녀는 철저하게 준과 굿데이를 위한 선택을 해야 했다.

“굿데이는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준 회장님은 한 달 동안 잠을 주무시지 않고 계시죠. 정말이지 ···.”

그녀는 욕이 나오는 것을 참았다.

준은 기후 중앙은행을 통해서, 각국의 기후 오퍼레이션이 안정한 수준에서 관리될 거로 내다봤다.

그러나 현실은 아수라장이었다.

기후 오퍼레이션의 단맛을 본, 국가들은 멋대로 오퍼레이션을 내질렀고, 예측 불가능한 기상 재난으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일본만 하더라도, ‘삿포로 봄 프로젝트’를 밀어붙였다.

무분별한 기후 오퍼레이션은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기후 인플레이션을 가져왔다.

*

갑자기 어두워진 하늘이 불길했다.

제7함대의 기상 레이더에 ‘암세포’로 불리는 시그널이 잡혔다.

돌발성 용오름.

제7함대와 맞설 수 있는 전투력을 가진 국가는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최강 함대로 불리는 7함대였지만, 돌발성 용오름으로 최고 레벨의 경계태세를 취했다.

잠수함은 이미 깊은 바닷속으로 숨었지만, 항공모함과 구축함 그리고 이지스함은 회피 기동으로 용오름을 피하는 게 고작이었다.

“30년 동안 바다에서 생활했지만, 저런 괴물은 처음이군.”

이지스함의 해군 대위는 가장 아끼던 시가를 꺼내 물었다.

통제 본부는 금연 구역이었지만, 그런 걸 따지기에는 용오름의 규모가 너무 컸다.

시가가 절반 정도 타들어 갈 때, 항공모함 한 척이 사라졌다. 간신히 유지되던 통신도 끊겼다.

용오름 주변으로 번개가 끊이질 않았다.

세계 최강 해군력으로 평가받던 제7함대는 35분 만에 전멸했다.

높이 3km의 용오름과 500m의 거센 파도는 인간이 자랑하는 핵 보유 전력을 간단하게 집어삼켰다.

바다 밑으로 숨은 잠수함마저, 용오름에 잡혀 하늘 높이 날아오르다가 바다 위로 내팽개쳐졌다.

기상 재난은 끊이질 않았다.

세기말에서나 볼법한 대형 참사가 연이어 일어났다.

“돌파구가 필요합니다.”

루이스 상원 의원은 이례적으로 준을 찾아왔다.

유럽은 앙리 백작을 중심으로 기후거래소 설립을 거의 끝마쳤다.

루이스 상원 의원은 유럽 기후거래소에 따르고 싶지 않았다.

“유럽 기후거래소를 인정하는 것은 기후 주권을 포기하는 짓입니다!”

루이스는 힘주어 말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독자적인 기후거래소 설립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가 독자적인 기후거래소를 꿈꾸었다.

이 때문에 체계적이고 구속력 있는 글로벌 기후거래소가 자리를 잡지 못했다.

“굿데이가 기후거래소를 세우면 많은 국가가 따를 겁니다. 이건 저의 개인적인 뜻이 아니라, 의회와 대통령 각하의 뜻이며, 오렌지 시티 시민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준은 표정변화 없이 스노우캣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제7함대가 돌발성 용오름에 전멸당했다.

기후 거래소를 장악하는 자가 세계를 통치한다.

“준 회장이 해주셔야 합니다.”

루이스 상원 의원은 말 그대로 매달렸다.

NASA와 의회가 주축이 되어 북미 기후거래소를 설립할 수도 있지만, 맘이 놓이지 않았다. 굿데이가 조금만 거들어도, 북미 기후거래소에 엄청난 힘이 될 것이다.

“거절합니다.”

“준 회장!”

“루이스 상원 의원님. 기후거래소는 이미 정해진 자리입니다.”

“정해져 있다뇨?”

루이스 상원 의원은 코를 실룩거렸다.

준의 말대로 정해져 있다면, 제7함대가 수몰되기 전에, 자리가 채워졌어야 한다.

지구 멸망 시나리오가 버젓이 나도는 판국에, 자리가 정해져 있다니!

준의 눈에는 카오스로 가득 찬 이 세상이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준은 커피 한 잔을 다 마시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이스 상원 의원은 준의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한 달 후 세상이 바꾸는 것을 보았다.

월드뱅크가 나섰다.

월드뱅크는 전쟁과 재난 피해복구 자금과 개발 자금을 대주는 국제기관이었지만, 실제로는 각국 중앙은행의 아버지뻘 기관이었다.

월드뱅크는 기후 오퍼레이션이 경제 활동이며, 참혹한 기후 인플레이션을 막으려면, 중앙은행 제도가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월드뱅크는 간단한 루틴을 제시했다.

중앙은행은 기후중앙은행을 겸한다.

기후중앙은행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탄소달러’를 제공한다.

기후오퍼레이션은 탄소달러에 따라 시행한다.

탄소달러는 기후거래소에서 거래된다.

월드뱅크는 자본주의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자인 뱅커의 모임이었고, 정치가들은 그들의 결정을 거역할 수 없었다.

“음 ···. 처음부터 이렇게 될 자리였던가?”

루이스 상원 의원은 눈살을 찌푸렸다.

월드뱅크가 맘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이렇게 될 자리인 걸 몰랐던 게, 짜증스러웠다.

이럴 줄도 모르고, 의회의 정치가와 학자들은 열띤 토론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는 정치계와 국제 외교에서 잔뼈가 굵었지만, 준처럼 앞을 내다보진 못했다.

*

헤리는 명품 정장과 고급 승용차를 타고, 굿데이를 찾아왔다.

“파라엔진 효과가 좋더군요.”

그는 로켈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헤리는 프로메타 제약회사를 위해 일하다가, 에바의 슬랭파워로 큰 병을 얻었다.

그를 살린 것은 파라엔진이었다.

그가 내민 명함에는 월드뱅크 심볼이 찍혀 있었다.

“이런 명함쪼가리가 여기서 통할 것 같나? 겁이 없군.”

“저는 로켈 님에게 목숨을 빚졌습니다. 로켈 님이 자비를 베풀지 않았더라면 ···.”

헤리의 태도는 예전과 달랐다.

“감사인사를 하려 온 건 아닐 테고 ···.”

“월드뱅크 오로토칸 님께서 보내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굿데이를 직접 만나보고 싶어 하십니다.”

로켈은 놀라지 않았다.

오로토칸이 월드뱅크의 임원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카리브 리베아티 섬의 주인이자, 황금왕이었던 오로토칸은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월드뱅크의 숨은 실력자였다.

노터치의 영역에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헤리는 로켈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초대장을 건넸다.

리베아티 섬이 그려진 초대장이었다.

*

리베아티 섬 활주로에 기간트가 착륙했다.

준, 에바, 로켈, 호세, 수잔, 카이, 아쿠타미, 세이턴까지 모두가 함께 왔다.

준은 리베아티에 도착하자마자, 섬 전체가 기후 오퍼레이팅 되고 있음을 알았다.

내리쬐는 햇볕에 비해, 섬은 시원했다.

섬의 일교차는 5도 이내였지만, 구역별 온도 차이는 컸다.

해수욕을 즐기는 곳은 30도였지만, 산책로는 18도였고 습도마저 쾌적했다.

“괜찮을까요?”

에바는 걱정을 내비쳤다.

굿데이는 오로토칸에게 빅엿을 먹였다.

샤나이슈카 채굴권을 휴지로 만들었고, 프로메타 제약회사도 망하게 했다.

“에바, 우리가 아무리 날뛰어도 그에게 위협이 되지 않아.”

“네?”

“그는 모든 것을 가진 것보다 더 많이 가졌다.”

“그런 자가 왜 황금과 돈을 탐내나요?”

“에바 ···. 돈 때문에 내 곁에 있어?”

“어느 정도는요.”

“오로토칸도 그 정도다.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

에바의 귀가 쫑긋해졌다.

“시스템이다.”

준 일행은 리베아티 섬에서 가장 전망 좋은 별장에서 지냈다.

그들은 종일 섬에서 놀고 쉬었다.

하루가 지나기 전에 모두가 깨달았다.

노는 것보다 굿데이에서 일하는 게 더 재밌다는 것을!

“준 형아. 나 돌아가면 안 될까? 여기서 노는 것보다 ···. 공부하는 게 더 재밌어.”

“준 대표님. 저도 파라엔진 건강 지능을 보강해야 하는데 ···.”

“준 회장님. 굿호세 컴파니 일이 좀 남아 있어서 ···.”

“준짱. 시온에서 탈퇴한 후로, 정보력이 약화 되었습니다. 돌아가서, 정보망을 확충하고 싶습니다.”

“멍멍멍!”

준은 에바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녀도 리베아티 섬의 휴가는 밋밋한 맛일 것이다.

“준 회장님 저는 남겠어요. 해변에 예쁜 여자들이 많더라고요.”

직원들이 토끼굴로 돌아가고 일주일이 지나서야, 오로토칸이 저녁 식사에 준과 에바를 초대했다.

60대의 오로토칸은 20대처럼 젊어 보였다.

그는 얼굴만 아니라 몸까지도 젊음으로 충만했다.

준의 친구라고 해도, 믿어질 정도였다.

“자네가 지내는 별장은 트리탄이 지냈던 곳이라네.”

“알고 있습니다.”

“그렇겠군. 자네에겐 모든 것이 환히 보이겠지. 천재로 산다는 건 어떤 느낌이지?”

“공허합니다.”

“지금도 그런가?”

“지독하게 그렇습니다.”

오로토칸은 멋진 서커스를 본 것처럼 즐거운 표정이 되었다.

준의 공허감이 그의 즐거움인 것 같았다.

그의 웃음소리는 짝짓기철 까마귀처럼 요란했다.

“나는 천재가 아니라서, 자네의 지독한 공허감을 이해하지 못해.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자세히 설명해주겠나?”

오로토칸은 눈을 반짝였다.

식탁에는 생크림을 넣은 생선 수프가 세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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