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 준-85화 (83/141)

< 기후거래소-10 >

아르코는 주저 없이 왕리의 목을 그었다.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잡것들을 쫓아내거나 치우는 것이 문지기의 임무였다.

청소부를 시켜 왕리를 치우려 할 때, 아르코의 머릿속에서 닥터 칼라니티 목소리가 들렸다.

‘왕리를 들여보내라.’

칼라니티의 뇌파 음성이었다.

아르코는 다리가 부러지고, 경동맥에서 피를 뿜는 왕리를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대충 죽이는 건데 ···.

“알겠습니다.”

아르코는 왕리의 다리가 부러지고, 경동맥이 잘렸다는 것을 보고할 필요가 없었다.

닥터 칼라니티라면 아르코의 눈으로 통해 모든 것을 보았을 것이다.

‘닥터 칼라니티 님이 처음부터 들이라고 하셨으면, 왕리가 병신이 되진 않았을 텐데 ···.’

아르코는 재빨리 손을 써서, 출혈을 막고 다리뼈를 대충 맞춰냈다.

그리고 스키마를 주사했다.

스키마는 파라엔진의 블랙마켓 버전이었다.

왕리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수치심으로 몸을 떨었다.

문지기 따위에 발리다니!

‘내가 이렇게 약했던가!’

최고의 그림자 기사였던, 왕리는 살아났다는 기쁨보다 분노가 더 컸다.

젠장! ···. 티티카카 호수에서 난쟁이 로켈에게 패배한 후로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그가 닥터 칼라니티를 찾아온 이유는 ···. 더 강해지기 위함이었다.

왕리는 문지기 아르코를 노려보았다.

“응급처치로 시간만 조금 벌었습니다. 당신에게 남은 시간은 30분도 되지 않습니다. 닥터 칼라니티 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어서 들어가십시오.”

아르코는 냉정했다.

그는 사사로운 감정 없이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었다.

왕리는 아르코와 다시 겨루고 싶었지만, 몸 상태가 최악이었다.

스키마를 주입받았지만, 스키마도 간신히 왕리의 생명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닥터 칼라니티에게 치료를 받지 못하면, 무난하게 죽고 말 것이다.

왕리는 쩔뚝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여인이 그를 맞이했다.

“잔느라고 합니다. 불편하시면 제 어깨를 지팡이로 삼으려도 됩니다.”

왕리는 피를 많이 흘렸고, 다리뼈가 부러진 상태였지만, 여인의 어깨에 의지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팡이는 필요 없다.”

“알겠습니다.”

잔느는 고양이처럼 걸어갔다.

왕리는 절뚝거리며 그녀를 따라갔다.

작은 정원 몇 개를 지나자, 유리로 만든 식물원이 보였다.

열대우림처럼 식물이 꽉 들어찬 식물원이었다.

닥터 칼라니티는 작은 전정 가위로 화초의 덧난 곳을 정리했다.

“그림자 기사 왕리, 닥터 칼라니티 선지자를 뵙습니다.”

왕리가 무릎을 꿇었다.

“상처가 심하군.”

칼라니티는 갈색 넝쿨의 잎사귀를 따서, 상처 위에 뿌려주었다.

사나운 고통으로 욱신거리던 상처에 청량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왜 찾아온 건가?”

“로켈과 승부를 냈습니다 ···.”

왕리의 말은 더 들을 필요 없었다.

일그러진 그의 표정이 모든 것을 알려줬다.

“보기 좋게 패했군.”

“그의 강화 능력이 저를 앞서 있었습니다. 저에게 로켈을 능가하는 강화 능력을 이식해주십시오! 로켈이 블랙블러드의 암살자였을 때, 그는 제가 맡은 씨앗을 많이 짓밟았습니다. 그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닥터 칼라니티 님이시여! 저를 도와주소서.”

“둘의 관계는 잘 알고 있다. 로켈은 시온을 등졌어. 응징자가 필요하던 참이긴 한데 ···. 로켈이 자네가 있는 곳에 와서, 승부를 청했겠지?”

“알고 계셨습니까? 놈은 제가 혼자 수련하는 티티카카 호수의 로스 섬을 찾아왔습니다. ”

“짐작했을 뿐이다. 로켈이 왜 널 찾아왔다고 생각하느냐?”

“그 난쟁이는 악마입니다. 자신을 높이고, 남을 낮추면서 기쁨을 느끼는 ···.”

“멍청이!”

“네?”

“로켈은 은밀하게 나를 찾고 있었다.”

“로켈이 닥터 칼라니티 님을?”

“내가 굿데이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한 거지.”

“로켈은 미쳤군요! 감히 선지자이신 닥터 칼라니티 님을 적대시하다니!”

“아니. 놈의 판단은 정확했어. 멍청한 건 너다. 로켈은 네놈이 승부에서 패하면, 나를 찾아올 거란 사실을 알고, 널 자극한 것이다.”

“그럴 리 없습니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미행은 없었습니다.”

“미련한 것 ···. 세상이 바뀐 지가 언젠데 ···.”

칼라니티가 왕리의 이마에 손을 대자, 왕리의 왼쪽 어깨에서 빨간빛이 반짝거렸다.

“로켈이 너에게 추적기를 심어놨다.”

왕리는 수치심으로 얼굴이 빨개졌다.

로켈에게 패배한 것도 억울한데, 되려 놈에게 이용당하다니!

“닥터 칼라니티 님이시여! 저의 강화능력을 업그레이드해주시면, 제 목숨을 걸고 로켈을 ···.”

“네놈을 어디에 쓸지는 내가 정한다. 좋은 거름이 되어라.”

“네?”

왕리는 뼈가 부러진 다리의 통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상처와 피부밑으로 꾸물거리는 움직임이 보였다.

닥터 칼라니티가 상처에 뿌려준 것은 나뭇잎 조각이 아니었다.

‘좀비웜’이라는 구더기였다.

식물원에 있는 좀비웜이 왕리에게 몰려들었다.

왕리는 몸부림쳤지만, 잉크가 물에 퍼지듯, 수많은 좀비웜은 왕리의 몸속으로 꾸역꾸역 기어들어갔다.

왕리의 몸 전체가 들쑥날쑥 움직였다.

“닥터 칼라니티 님! 살려 ···.”

“좋은 거름은 떠들지 않는다.”

닥터 칼라니티와 잔느는 살아 있던 사람이 구더기 밥이 되어, 좋은 거름이 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왕리는 5분 만에 ‘물질전환’ 되었다.

“잔느. 왕리의 마지막 눈빛을 보았느냐?”

“네. 아름다웠습니다.”

*

UN 국제회의가 끝난 후, 앙리 백작은 유럽 왕실 기상청의 기후 오퍼레이션 기술을 공개했다.

구조 자기장으로 탄소와 메탄, 산소와 수소의 에너지 상태를 미세하게 조종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거 뭐야? 특허권 약탈이잖아!”

에바의 짧은 식견으로도 유럽 기상청의 오퍼레이션 원리가 굿데이의 구조 자기장을 응용한 것이 환히 보였다.

게스톤 스코프의 대표 한나는 굿데이의 구조 자기장 기술을 사용하려고, 에바에게 성심성의껏 몸 바쳐야 했다.

공개 게시판에는 에바와 같은 의견이 무진장 쌓였다.

“준 회장님은 알고 계셨어요?”

에바가 물었지만, 준은 대답할 가치를 못 느꼈다.

구조 자기장은 요빅의 입자가속기를 입자 농축기로 사용할 때 바탕이 되는 기술이었고, 전자기파를 은폐 왜곡하는 은폐슈트를 디텍팅하는 측정 원리이기도 했다.

“에바 ···. 챙긴 후에 흥분해라.”

준이 말하자마자, 에바는 스탠리에게 유럽 왕실 기상청에서 특허료를 받아내도록 지시했다.

“준 회장님! 이건 특허료만 받고 끝낼 문제가 아니에요! 국제회의에서 기후 오퍼레이션 기술 공개가 합의되지 않았으면, 유럽 기상청은 평생 비밀로 했을 놈들입니다! 제가 직접 가서 다시는 우리 기술을 훔치지 못하도록, 교훈을 새겨주겠습니다.”

“에바 ···. 48시간 주겠다.”

준 답지 않은 묘한 뉘앙스였다.

준은 에바가 흥분한 이유의 98%가 이네즈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원천 기술이 공개된 지금, 굿데이가 태클을 걸면, 기후 오퍼레이션 자체가 불법이 된다.

기후 오퍼레이션이 불법이 되면, 유럽은 속수무책으로 헬파이어를 맞이해야 한다.

유럽 왕실 기상청은 최악의 사태를 피하려고,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

···. 이네즈는 에바의 것이었다.

이네즈는 준이 기후예측모형의 결과 선택 과정을 끝까지 같이 하지 못했다. 그전에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굿데이 직원들은 ‘결과 선택 과정’을 끝까지 함께했었다.

고등학생인 카이도 해냈다.

카이는 준 형아가 머릿속으로 해내는 것을 왜 데이터 룸에서 재현해서, 직원들이 경험하도록 한 이유를 몰랐다.

이제는 안다.

그 한 번의 경험으로 굿데이 직원들은 기후에 대한 의미와 감각을 익혔다.

그들은 모두 노벨상 수상자였고, 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기후란 무엇입니까?’ 라는 간단한 질문부터, ‘기후거래제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는 복잡한 질문에 답해야 했다.

경험 있는 굿데이 직원에겐 쉬운 질문이었다.

기후는 과거였고, 기후거래제도는 미래였다.

오퍼위성의 설계도가 공개되었다.

오퍼위성의 탄소 자석은 굿데이의 개발품이었다.

이네즈는 다시 한 번 에바의 것이 되었다.

굿데이의 주문량과 의뢰가 늘어났다.

각국 정부가 공개된 유럽 왕실 기상청의 오퍼위성과 컨트롤 타워를 굿데이에 제작 의뢰한 것이었다.

준과 카이는 업그레이드된 오퍼위성과 컨트롤 타워를 설계했다.

모든 과정은 데이터 룸에서 이뤄졌고, 로켈과 호세, 수잔과 디아나 그리고 아쿠타미 노가다 부대와 세이턴도 함께했다.

설계에 참여하지 못해도, 보기만 해도 배우는 게 많았다.

준만 봐도 똑똑해진다는 말이 있던데 ···. 사실이었다.

준만 봐도 예뻐진다는 말이 있던데 ···. 사실이었다.

유럽 기상청의 오퍼 위성으로 전 세계의 기후를 오퍼레이션 하려면 5만 개의 위성이 필요했지만, 굿데이가 새로 디자인한 오퍼위성을 사용하면 361개로 충분했다.

361이라는 숫자는 19의 제곱이었고, 19의 제곱은 원을 정사각형으로 근접시킬 때 나오는, 바둑판의 꼭짓점 개수였다.

앙리 백작은 기술을 공개해도 기술적 우위를 유지할 거로 여겼지만, 오산이었다.

기후 오퍼레이션 시장이 열리고 굿데이가 등장하자, 유럽 천재들이 모여 만든 ‘원천기술’은 낡은 것이 되고 말았다.

미국은 루이지애나로 접근하는 허리케인을 먼바다로 쫓아냈다.

중국은 태평양 비구름을 고비사막으로 끌고 와, 농경지로 개조하는 작업을 계획했다.

중동지역 국가들도 사막을 농경지로 개간할 꿈에 부풀었다.

오퍼위성과 컨트롤 타워를 손에 넣은 국가들은 기후에너지 주권의 단맛을 알아버렸다.

굿데이가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탓도 있었지만, 본디 지구는 기후 자원이 풍부한 곳이었다.

준은 국제회의에서 각국의 기후 오퍼레이션을 중재할, 기후중앙은행과 기후거래소를 예언했지만, 국가들은 기후 중앙은행과 기후거래소 없이도 기후 오퍼레이션을 즐겼다.

오퍼 위성과 컨트롤 타워만 있으면, 지나가던 개도 마른하늘에서 비를 내릴 수 있었다.

이집트에 예측하지 못한 모래 폭풍이 발생했다.

3층 높이의 모래가 쌓여서, 도시 활동이 멈췄고,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이집트는 가끔 모래 폭풍이 도시를 휩쓸었지만, 이번처럼 강력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집트 정부는 굿데이에 모래 폭풍 발생원인을 밝혀달라고 의뢰했지만, 굿데이는 거절했다.

굿데이는 주로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측한다.

이미 일어난 일의 원인을 밝히는 것은, 기상청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집트 정부는 굿데이에 의뢰하기 전에, 이미 내부적으로 원인을 밝혀냈다.

굿데이에 의뢰한 이유는 원인 규명에 공신력을 더하기 위함이었다.

모래 폭풍의 주된 원인은 ···. 루이지애나로 접근하는 허리케인을 먼바다로 쫓아냈기 때문이었다.

이집트의 도시를 삼킨, 거대 모래 폭풍은 쫓겨났던 허리케인의 후예였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갑작스러운 폭우로 도시 전체가 물에 잠겼다.

사망자도 많이 나왔다.

기상청은 폭우를 예측하지 못했지만, 원인은 찾아냈다.

호주의 밀림 프로젝트가 원인이었다.

호주 정부가 그레이트샌디 사막 일부에 밀림을 이식하려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국제 재판소에 기후 관련 사건이 빗발쳤다.

*

“기후 재난을 예측해주십시오.”

일본 대사는 간곡하게 부탁했다.

굿데이가 기후 재난을 예측해주면, 오퍼레이션 능력을 갖춘 일본 기상청이 ‘예방’할 수 있었다.

유럽 기상청의 오퍼레이션은 30일의 준비 시간이 필요했지만, 굿데이 버전의 오퍼레이션은 일주일의 준비 시간만 필요했다.

준비 시간의 의미는 예측 못 한 기상재난이 닥치면, 최소 일주일을 이후에나 대응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오퍼레이션이 작동되기 전, 일주일 동안은 참고 견뎌야 했다.

도쿄는 갑작스러운 토네이도로 고층 빌딩 수십 채가 꺾이고 말았다.

재산피해와 인명피해는 끔찍한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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