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 준-84화 (82/141)

< 기후거래소-9 >

국제회의는 치열했다.

UN 사무총장 장기문은 몇 번이고 격한 발언을 중지시켜야 했다.

격한 발언의 진원지는 주로 북미 대륙 국가였다.

유럽연합의 앙리 백작은 헬파이어를 ‘중화’한다고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북미 대표들은 중화된 헬파이어가 북미대륙의 ‘슈퍼 무더위’로 재탄생한다며 비판했다.

북미대륙의 슈퍼 무더위.

앙리 백작은 알 수 없는 노릇이라고 주장했지만, 굿데이의 예측 데이터는 유럽연합 오퍼레이션이 북미 대륙의 재앙임을 분명히 했다.

“확실히 해두겠습니다! 캐나다는 유럽연합의 기후 오퍼레이션을 선전포고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드디어 전쟁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회의장이 술렁거렸다.

캐나다 몬트리올은 ‘북아메리카의 파리’였고, 캐나다 정치계와 경제계는 프랑스 인맥으로 촘촘했다.

북미의 친유럽 세력인 캐나다가 유럽연합에 경고를 날리다니!

국제 회의장의 각국 대표는 어쩌면 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캐나다는 기후 온난화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국가였다.

기후 온난화는 추운 캐나다를 따듯하게 하고, 여러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캐나다 와인이 프랑스 와인보다 맛있어지는 날이 머지않았던 것이었다.

앙리 백작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기후 오퍼레이션은 전쟁 무기가 아닙니다. 헬파이어가 작렬할 걸 뻔히 아는데,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겁니까! 유럽이 불지옥으로 변하는데, 가만히 있으라는 겁니까? 유럽 연합은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기후에너지 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후오퍼레이션은 주권 행사입니다.”

앙리 백작도 악에 받쳐 있었다.

국제회의 분위기가 ‘유럽은 가만히 있어라! 그냥 조용히 죽어라!’ 쪽으로 흘렀다.

조금이라도 물러서면, 불구덩이 속으로 떨어질 판이었다.

“굿데이의 인과율 분석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헬파이어의 87%는 스톡홀름의 봄 날씨 이식에 따른 것입니다. 스톡홀름 오퍼레이션이 헬파이어를 불러온 겁니다. 앙리 백작님은 오퍼레이션으로 헬파이어를 중화한다고 지랄하는데, 굿데이 예측 인과율을 보십시오! 더 사나워진 헬파이어가 북미대륙을 불태울 겁니다! 유럽연합의 대응은 파이어 드래곤을 북미로 보내는 꼴입니다!”

“북미대륙에 솔루션을 제공하겠습니다.”

앙리 백작은 북미대륙을 달래려 했지만, 북미 대표들은 악어처럼 대응했다.

그들은 앙리 백작이 무슨 말을 하든, 물어뜯었다.

“솔루션 제공이요? 우리더러 기후에너지 주권을 당신네에게 맡기란 겁니까?”

“그럼 어쩌자는 겁니까!”

“우리에게도 독자적인 기후 오퍼레이션 권한을 보장하십시오!”

“독자적인? 기후 오퍼레이션 기술을 그냥 내놓으란 말입니까?”

앙리 백작의 콧수염과 왼쪽 눈썹이 위로 지그시 올라갔다.

그의 목에는 핏줄이 불거졌다.

국제 회의실에는 기업인과 학계 인물들도 참석했다.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졌고, 회의실 안으로 안전요원들이 자리 잡았다.

난투극이 걱정되는 상황이었다.

준과 에바도 참고인 자격으로 와 있었다.

에바는 준이 자랑스러웠다.

고성이 오가면서, 사람들의 표정이 꼬이고 뭉쳐졌다.

오직 준만이 평온했다.

놀라운 평정심을 가졌거나, 회의 결과를 이미 알고 있는 것이리라.

“준 회장님 어떻게 될 거 같아요?”

“모두 갖게 된다.”

“뭘요?”

“기후 오퍼레이션.”

“그렇군요. 그래서 준 회장님께서 기후 오퍼레이션 기술에 관심이 없으셨군요. 만들어봤자, 주권의 이름으로 압류당할 테니깐요.”

에바도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오퍼레이션은 탐스러웠지만, 저주가 깃든 테크닉이었다.

유럽연합이 아닌, 일개 기업에 불과한 굿데이가 오퍼레이션 기술을 개발했다면 ···. 군사기밀로 분류되어, 정부에게 헌납해야 했을 것이다.

유럽연합이라는 배경이 있었기에 스톡홀름 오퍼레이션이 가능했다.

앙리 백작은 사방에서 십자포화 공격을 당했다.

한국, 중국, 일본, 북미 대륙, 남미 심지어 그린란드까지도 오퍼레이션을 탐냈다.

입맛에 맞는 기후조작은 향기로운 커피만큼이나 매력적이었다.

유럽연합의 입김이 작용하는 아프리카 연합만 이곳저곳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앙리 백작은 기후 오퍼레이션에 정당성을 부여하려, 기후에너지 주권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지만, 기후에너지 주권 개념이 오히려 그를 괴롭혔다.

회의장의 분위기는 오퍼레이션을 공유화해야 한다는 쪽으로 흘렸다.

“날강도들!”

앙리 백작이 이를 갈았다.

기후 오퍼레이션은 세계에서 제일 큰 유럽 입자가속기를 쉴새 없이 돌리고, 엄청난 연구 자금을 쏟아부어서 완성해낸 기술이었다.

기후 거래소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망상에 불과한 허튼짓이라는 평가를 받았었다.

온갖 비난과 조롱을 견뎌내면서, 간신히 완성해냈는데 ···. 사방에서 그 기술을 훔쳐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빼앗아 갈 태세였다.

준은 회의장의 사람들을 보면서, 어쩜 저렇게 생각이 짧을까? 놀라웠다.

앙리 백작이 이를 갈았지만, 이번 회의는 유럽연합에 이로웠다.

오퍼레이션을 오픈하면 ···. 모든 국가가 저마다의 이유로 멋대로 기후조작에 손댈 것이다.

국가단위의 행동을 통제할 방법이 필요해진다.

앙리 백작이 그토록 꿈꿨던 기후거래소가 교통정리를 맡으면 된다.

‘화낼 일이 아닌데 ···.’

준은 바짝 달아오른 앙리 백작을 보며, 중얼거렸다.

다 알면서도 연기하는 걸까? - 그렇게 생각하기엔 앙리 백작의 연기가 너무 리얼했다.

UN 사무총장 장기문이 준에게 질문했다.

“굿데이의 예측은 얼마나 정확합니까?”

“이곳에 오신 분들이 모두 모일 정도로 정확합니다.”

“예측 결과를 공개했을 때, 이런 상황을 예상하셨습니까?”

국제 회의실의 모든 사람이 준의 입만 쳐다보았다.

그는 참석자 중에서 가장 젊었고, 가장 부유했으며, 가장 파워풀했다.

준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과연!’

사방에서 가느다란 탄식이 새어나왔다.

“죄송하지만, 직접 대답해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음성 기록과 문서기록으로 남길 수 있습니다.”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이것보다는 신사적인 토론이 될 거로 기대했습니다.”

담담한 준의 대답에 기자와 학자들이 웃었다.

기자석에 있는 리처드는 흐뭇했다.

그는 편파적인 굿데이 전문기자였고, 이 점을 늘 자랑스럽게 여겼다.

리처드는 여러 TV 쇼에 나가서, 굿데이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이야기하곤 했다.

TV쇼 출연은 출연료도 챙기고, 에바에게 귀염도 받는, 적절한 알바였다.

“혹시 ···. 이번 회의 결과도 아십니까?”

장기문 UN 사무총장은 설마 하는 심정이었다.

일순간 회의장이 조용해졌다.

이번 회의의 발단은 굿데이의 예측 결과 공개였다.

헬파이어 - 40도 무더위가 유럽을 뜨겁게 달굴 것이다!

헬파이어 예측 결과만으로 유럽 왕실 기상청은 오퍼레이션을 준비 중이었다.

헬파이어의 유럽 기상청의 대응 - 북미 대륙에 50도가 넘는 불볕더위가 나타날 것이다.

이 예측만으로 북미대륙 대표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타도 유럽연합을 외쳤다.

결국, 모든 발단은 굿데이였다.

“ ···. 결론을 알고 있습니다.”

준이 대답하자, 사방에서 웅성거렸다.

‘준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 사람들은 소름을 공유했다.

준은 참고인 석에 앉아 있었지만, 준이 입을 연 순간부터 모든 것은 준을 중심으로 재편성되었다.

“확신하십니까?”

“확신까지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알고 있습니다.”

“미래를 보고 오신 겁니까?”

UN 사무총장은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했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준은 신비로운 존재였다.

“사무총장님. 이곳에서의 저의 역할은 끝난 것 같습니다. 허락해주시면 집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장기문 사무총장은 준을 집으로 보내줘야 마땅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준이 집으로 가면, 세상의 중심도 준을 따라 바뀔 것 같았다.

“돌아가셔도 좋습니다만 ···. 준 회장님이 알고 계신 이번 회의의 결론을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혹시 직접 말씀하셔서, 결론이 바뀌거나 그런 거라면 ···.”

“그렇지 않습니다. 기후 오퍼레이션은 국가 단위로 행해지게 됩니다. 국가는 독립적인 기후에너지 주권을 가집니다.”

앙리 백작은 힘없이 양팔을 내렸다.

모든 것은 준의 뜻대로.

준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었다.

‘망했어!’

그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감았다.

“국가 단위의 오퍼레이션 충돌을 막는, 기후거래소가 설립됩니다.”

앙리 백작의 눈이 활짝 떠졌다.

그의 눈에는 준이 구세주처럼 보였다.

오퍼레이션 기술 따위야 누가 가지든 상관없었다.

기후 거래소를 장악하는 자가 모든 것을 가진다.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앙리 백작뿐이 아니었다.

각국 대표와 기업가들의 눈도 번뜩거렸다.

“각국의 이익을 우선하는 기후중앙은행 제도가 일반화됩니다.”

준은 기후거래제도의 핵심을 정확하게 끄집어냈다.

이제 기후가 돈이다.

회의실의 사람들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준이 말한 것보다 더 나은 결론이 보이지 않았다.

만일, 준이 말한 것보다 못한 결론을 내린다면, 회의 참가자들은 엄청난 비난을 받을 것이다.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사무총장은 그래서는 안 되는 줄 알았지만, 의석에서 일어서 준에게 허리를 굽혔다.

정치 경력이 전혀 없는 애송이에게 국제 정치계의 거물인 장기문이 허리를 숙인 것이었다.

박수가 터져 나왔고, 환호성이 이어졌다.

준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처럼, 묵묵 담담하게 사무총장에게 답 인사를 하곤, 회의실을 나왔다.

에바는 놀라운 준을 껴안고 키스를 날리고 싶었지만, 허벅지를 꼬집으면서, 꾹 참았다.

준은 나오는 도중 이네즈와 마주쳤다.

이네즈의 눈에는 경탄이 가득했다.

“언제 한 번 ···. 놀러 가도 될까요?”

그녀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수줍게 물었다.

많은 사람이 지켜보고 있다는 점에서 공개 고백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에바가 나섰다. 이런 잡것들은 그녀의 몫이었다.

“준 회장님의 길을 막지 마. 굿데이는 가르칠 시간도, 놀아줄 시간도 없어.”

루이스 상원 의원은 퇴장하는 준을 보며 군침을 흘렸다.

준의 이용가치는 무궁무진했다.

막말로 준이 대통령 선거에 나온다면, 게임은 그것으로 끝난다.

준이 직접 나올 필요도 없었다.

준의 지원만 받아도, 에바의 마케팅 능력만 빌려도 당선은 확정적이었다.

‘내 정치 생명을 걸고, 저 새끼에게 충성해야겠군.’

그는 다시금 결심했다. 그리고 걱정했다. 그의 딸 잔느는 타도 굿데이를 외치며 잠적했다.

그의 딸이었지만, 욕이 절로 나왔다.

‘미친년. 건들 걸 건들어야지. 준은 이미 신격화된 존재야. 준에게 지랄 떠는 건 신성모독이야.’

루이스 상원 의원이 뒤에 서 있는 비서에게 신호하자, 비서가 루이스 상원 의원에게 머리를 낮췄다.

“잔느를 찾아라. 사고 치기 전에.”

*

문지기는 앞에 나타난 사나이의 정체를 한 번에 알아봤다.

“마스터 왕리.”

문지기가 고개를 숙였다.

바쿠무의 그랜드마스터 - 왕리.

왕리는 한때 그림자 기사였지만, 시온이 로켈을 스카우트하자 시온을 나왔다.

“닥터 칼라니티를 만나러 왔다.”

“자격이 있으십니까?”

문지기는 형식화된 예절로 왕리를 대했다.

“내가 누군지 알지 않느냐?”

“벌써 과거의 명성에 기대는 퇴물이 되신 겁니까?”

문지기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문지기 아르코는 러시아 특공무술 시스테마의 달인이었다.

왕리는 아르코의 투기를 쉽게 읽어냈다.

“병신이 되어도 원망하지 마라.”

실버 나이프, 왕리는 그대로 손을 날렸다.

예비 동작 없이 날리는 손은 총알보다 빨랐다.

투닥- 탁탁.

아르코의 반응은 총알보다 더 빨랐다.

그는 몸을 돌려, 팔꿈치로 왕리의 턱을 노리고, 왼발 로우킥으로 발등을 밟았다.

어깨, 골반, 손등, 손끝 공격도 동시에 이뤄졌다.

융단폭격에 버금가는 접근전이었다.

왕리가 조금만 물러섰다면, 아르코의 공격을 모두 흘려보내고 반격 가능했겠지만 ···. 왕리는 자존심을 앞세웠다.

그는 물러서지 않고, 아르코의 모든 공격을 맞받아쳤다.

승부는 순식간에 끝났다.

왕리의 다리가 부러진 것이었다.

“실망입니다.”

문지기 아르코는 경멸의 눈빛으로 왕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냈다.

자격 미달의 방문자를 ‘처리’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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