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후거래소-7 >
유진 악마는 굿데이의 세금과 비용뿐 아니라, 공공기관 공문서까지 처리했다.
행정, 세금, 법률, 거래 내용은 통신 프로토콜처럼 정해진 형식이 있었다.
한마디로 자동화가 가능한 분야였다.
추출데이터를 형식에 맞추면, 모든 업무가 가능했다.
가끔 그녀가 결정하지 못하는 문서가 접수되기도 했다.
유럽 왕실 기상청에서 위탁교육을 의뢰한 것이었다.
유진 악마는 0.00000001초 정도 고민하다, 규정에 따라 호세로 넘겼다.
호세는 30분간 고민했다.
‘ ···. 이러한 이유로 유럽 왕실 기상청 기후모형 분석과의 직원들은 기후예측 능력 개발 향상을 위해 굿데이 노하우를 배우고자 합니다. 교육비는 원하시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호세는 고민한 보람도 없이, 로켈에게 넘겼다.
로켈은 1분 만에 에바에게 넘겼다.
에바는 로켈과 호세 그리고 유진 악마를 방으로 불러들였다.
“왜 이런 게 내 앞에 왔지? 굿데이가 유치원이야?”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거절 답장은 유진 악마가 써. 그리고 호세와 로켈은 반성문 쓰고.”
“네.”
유진 악마는 기죽은 모습으로 사라지고, 호세와 로켈은 주춤거렸다.
“저어 ···. 교육생 프로필은 보셨습니까?”
로켈은 지뢰에서 뇌관을 꺼내듯이, 극히 조심스러웠다.
“받지도 않을 교육생 프로필은 왜?”
에바는 간단하게 에어스크린을 띄워서, 프로필을 확인했다.
유체역학과 기후학에서 찬란한 경력을 쌓은 ‘여성’이었다.
에바의 눈빛이 바뀐 것은 이네즈의 사진을 보고 나서였다.
이네즈는 딱, 에바 스타일이었다.
“유진 악마!”
에바가 부르자, 기죽은 모습의 유진 악마가 스르르 나타났다.
“거절 답장 보냈습니다.”
“무슨 일을 그렇게 빨리해! 잠깐 기다려봐. 준 회장님 뜻을 여쭤봐야지.”
“알겠습니다. 아직 유럽왕실 기상청에서 확인하지 않았으니깐, 답장은 홀딩 하겠습니다. 그런데 ···. 왜 갑자기 ···?”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말이 있잖아.”
에바는 먹잇감의 냄새를 맡은 포식자 같았다.
눈치로 보건대, 그녀도 이네즈를 가르치고 싶어 했다.
“MIT와 하버드 그리고 킹스덤에서도 위탁 교육 의뢰했는데, 검토하시겠습니까?”
“세세한 내용은 필요 없고, 신청자들 사진만 보내. 호세와 로켈 ···. 적절한 판단이었어요.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요.”
“저어, 그러면 ···. 반성문은?”
“스킵하세요.”
에바는 시계를 봤다.
준이 킹스덤 도서관에 있을 시간이었다.
*
젊어서 성공하고, 노벨상도 받고, 아쉬울 게 없는 남자가 도서관 구석 자리에서 책을 본다.
이게 말이 돼?
길버트의 상식에 따르면 말이 되지 않는다.
성공한 젊은 남자는 예외 없이 여자를 밝히고, 모험과 스릴을 추구했다.
말이 되지 않는 정답 ···. 리미트리스 준은 책을 읽었다.
준의 주변에는 도서관 번호로 불리는 여자들이 자리를 잡았다.
아름다운 그녀들은 준과의 인연으로 똑똑해지기까지 했다.
준을 따라 공부하다 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되었다.
책을 읽는 준의 모습은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었다.
논문을 준비 중인 학생들은 생각이 막힐 때면, 중앙도서관에 와서 준을 감상하다 갔다.
준을 보는 것만으로도 막힌 벽이 뚫리곤 했다.
리미트리스 준 - 기후예측모형, 요빅 생태계, 파라엔진의 창시자.
길버트는 편한 자세로 준을 바라보았다.
보기만 해도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잘 지냈어?”
길버트의 머리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에바였다.
그녀는 탈모가 시작되는 길버트의 가운데 머리를 보고 있었다.
에바의 시선을 느낀 길버트가 빙그레 웃었다.
“이상해. 당뇨와 고지혈증 그리고 무좀과 감기에도 효험이 있는 파라엔진이 왜 탈모에는 효과가 없지?”
“나이 때문에 빠지는 건 효과가 없지만 ···. 자가면역에 의한 원형 탈모에는 효과가 있어. 아직 봐줄 만해.”
“피부과에 다니고 있거든. 파라엔진도 못 고치는 걸, 피부과에서는 고칠 수 있대. 파라엔진이 만병통치약이라는 소문은 너무 과장된 거야.”
“과장된 거 맞아. 하지만 결국에는 만병통치약이 될 거야. 파라엔진의 ‘건강 지능’이 진화할 테니깐.”
길버트는 대화 내용이 전문적인 지점에 이른 것을 느꼈다.
그는 선택해야 했다.
계속 파고들 것인지, 아니면 ···.
“내 탈모를 구경하려 온 건 아닐 테고, 무슨 일로 온 거야?”
에바는 시선으로 대답했다. 그녀는 준을 바라보았다.
길버트는 아주 큰 일이 생겼다고 짐작했다.
에바는 준의 생활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애썼다.
독서 중인 준을 찾아왔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사건이 터졌다는 뜻이었다.
무슨 일일까? 파라엔진? 아니면 기후거래?
파라엔진과 기후거래는 시대의 소용돌이였다.
굿데이의 요빅 생태계는 자원과 식량 그리고 에너지 가격을 터무니없이 낮췄다.
굿호세의 ‘소득 중심 시스템’은 요빅 생태계 때문에 가능했다.
요빅 생태계가 자리 잡지 못했다면, 아직도 환경을 갉아먹었을 것이다.
‘에바가 요빅이나 굿호세 때문에 준을 찾아왔을 리 없어. 그 둘은 아주 잘 돌아가고 있으니깐. 파라엔진과 기후거래 때문이라는 건데 ···.’
길버트는 파라엔진보다 기후거래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했다.
파라엔진은 기술 집약적인 내용이었지만, 기후거래는 기술보다 정치적인 내용이 중요했다.
에바는 굿데이에서 정치와 인맥의 핵심이었다.
그녀가 나섰다는 건 ···. 정치 함량이 풍부한 기후거래일 것이다.
국가와 기업들은 유럽 연합의 기후 오퍼레이션 기술을 확보하려고 몸부림을 쳤다.
어느 나라가 자국의 기후를 다른 조직에 맡기려 하겠는가!
더불어 굿데이의 기후 예측 능력을 카피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지금도 기후 예측 능력은 돈이었지만, 기후거래가 시작되면 예측 능력은 권력이 된다.
“기후거래 때문에 온 거지?”
추리를 끝낸 길버트는 에바가 놀라워하리라 기대했다.
“맞아.”
에바는 놀라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짜증스러워했다.
길버트의 추리 따위는 처음부터 관심도 없었다.
“내가 준을 불러줄까?”
“아니. 기다릴 게.”
그녀는 뇌파 통신으로 준에게 메시지를 던졌지만, 번번이 튕겨 나왔다.
책을 읽는 준의 집중력을 뚫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준이 책을 덮고 자리에 일어선 것은, 에바가 온 지 한 시간이 넘어서였다.
준이 책을 덮자, 도서관 전체에서 작은 실바람이 나왔다.
준이 책을 읽는 동안 도서관은 자동차 밑에 숨은 새끼 고양이처럼 잔뜩 웅크렸다.
그만큼 준의 존재감은 강렬했다.
‘준 회장님. 처리하실 일이 있습니다.’
그제야 준의 머릿속에서 에바의 목소리가 들렸다.
준은 소리 나지 않게 걸으며, 에바에게로 갔다.
“커피 한잔 하면서 좀 걸을까?”
“네. 준 회장님.”
길버트는 보았다.
에바가 웃는 것을.
방금 길버트가 본 표정은 에바가 오직 준에게만 보여주는 표정이었다.
도서관의 번호들과 줄리아는 가슴을 졸였다.
‘에바는 좋겠다. 나도 저렇게 웃고 싶다.’
에바는 행복했다.
옆에는 그녀가 가장 존경하는 준이 있고, 앞으로 할 이야기는 ···.
“유럽 왕실 기상청에서 위탁교육을 의뢰했어요. 받아주는 게 좋겠습니다.”
“교육 내용은?”
“기상 예측입니다. 장기 예보의 정확도를 99.99%까지 끌어올리고 싶어 합니다.”
“아직 타키를 길들이지 못했어.”
몽골어로 야생마를 뜻하는 타키는 기후예측모형의 별명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에바는 경쾌했다.
스노우캣 커피가 무척 맛있었고, 준과 함께 걷는 게 너무나 좋았다.
그리고 그녀는 준을 상대로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동안 준과의 대화는 일방적이었다.
준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고, 꿰뚫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준도 의아해했다.
‘알고 있는데도 ···. 위탁교육을?’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준 회장님.”
그녀는 아주 좋은 기회라는 식이었다.
가르치면서 배운다?
“혹시 ···. 여자냐?”
“네.”
에바는 숨기지 않았다.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타키에 관한 거라면 ···. 스스로 깨우쳐야 해. 우리는 기후예측모형을 공개했고, 푸리에 구조 방정식도 알렸어. 내가 그녀를 가르친다 해도, 그녀도 나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할 거야. 세상의 지식에는 그런 레벨이 존재해.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앞으로 나갈 수 없는 곳이 있지. 태양의 중력에 사로잡힌 지구처럼 맴돌 뿐이야.”
에바는 준이 무슨 말을 하는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말하는 준의 모습이 너무나 멋졌을 뿐이다.
준은 체념과 한계,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게 그야말로 기가 막혔다.
준이 그녀의 몸을 탐낸다면, 기꺼이 내주고 싶을 정도였다.
‘나도 잘 배웠다가, 써먹어야지!’
“죄송합니다. 준 회장님. 제 욕심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준의 뜻대로 ···. 그녀는 기꺼이 따랐다.
“그녀 이름이?”
“이네즈입니다.”
“초대해라.”
“네?”
“굿데이는 기회가 있을 때 챙긴다.”
*
‘초대’라는 형식이었다.
앙리 백작은 고대문자를 해독하듯이, 굿데이의 꿍꿍이를 고민했다.
‘초대라니.’
이네즈는 유능했다.
중국, 미국, 러시아 심지어 호주에서도 그녀를 스카우트하려 했다.
그녀가 유럽 왕실 기상청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이유는, 그녀의 모형을 돌릴 수 있는 슈퍼컴퓨터와 기후 오퍼레이션 때문이었다.
기후 예측은 오퍼레이션과 결합할 때 막강해진다.
오퍼레이션이 없는 기후 예측은 ‘우산을 쓸 것인가? 말 것인가?’ 수준에서 처리되지만, 오퍼레이션이 가능한 기후 예측은 ‘어떻게 살 것인가?’로 확장된다.
앙리 백작은 최악을 상상해야 했다.
굿데이가 이네즈를 노리는 거라면 ···.
이네즈는 기후 예측뿐 아니라 오퍼레이션 개발에도 참여했었다.
그녀는 오퍼레이션 핵심 기술을 안다.
오퍼레이션 핵심 기술이 굿데이로 흘러간다면 ···.
유럽 연합은 너무나 많은 것을 잃게 된다.
“맡겨 주십시오. 저는 가우스우먼입니다. 유럽은 저의 고향입니다.”
이네즈의 당당한 모습을 본, 앙리 백작은 맡기고 싶었지만, 최근 너무나 안 좋은 소문을 들었다.
시온의 그림자 기사였던 로켈이 굿데이에 흡수당했다는 소문이었다.
“이네즈. 굿데이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한다면 어떻게 할 거지?”
“저에겐 유럽이 목숨보다 중요합니다. 그들의 제안을 거절하겠습니다.”
“준은 ···. 여자를 홀리는 악마야. 도서관 번호들도 그렇고, 페루 전 대통령 자미에의 딸, 제인도 그를 신봉한다더군.”
“저에게 준은 질 좋은 데이터베이스에 불과합니다. 필요한 정보만 빼내겠습니다.”
“이네즈 ···. 준이 자네에게 청혼한다면 어쩌겠나?”
“준이요? 정말요?”
이네즈의 눈이 두 배로 커졌다.
“초대는 거절하겠네.”
앙리 백작은 몸을 뒤로 빼며, 마음을 굳혔다.
그는 기후 예측 능력을 높일 다른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앙리 백작의 가장 큰 실수는 이네즈로 하여금 상상하게 했다는 것이었다.
‘준이 나에게 청혼을?’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이네즈는 그것을 상상하고 말았다.
그녀는 당찬 여자였고, 앙리 백작의 명령을 거역하고, 개인 자격으로 굿데이로 향했다.
오렌지 시티 공항에는 디아나가 마중 나와 있었다.
라틴어로 요새를 뜻하는 아르크스 리무진은 웅장했다.
“숙소는 정하셨나요?”
디아나는 운전석에 앉았지만, 자동 운행 시스템으로 운전되었다.
그녀가 운전석에 앉은 이유는 이네즈가 편하게 VIP석에 앉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아뇨.”
이네즈는 오렌지 시티에 온 이상, 모든 것을 굿데이에 맡길 생각이었다. 그래야, 준과의 접촉 횟수가 많아질 것 같았다.
“얼마나 머무실 거죠?”
“아직 모르겠어요. 초대를 받아서 온 거예요. 스케줄이 어떻게 되죠?”
“스케줄 같은 건 없어요. 하고 싶은 게 있으시면, 도와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