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후거래소-6 >
로켈은 무릎을 펴며 일어섰다.
선지자의 명을 받는, 야베스 통신 중에 똑바로 서는 것은 무례한 짓이었다.
청색 선지자의 홀로그램에 신경질 같은 잡음이 일었다.
청색 선지자의 거울 가면에 로켈 얼굴이 정면으로 비췄다.
전쟁터의 악귀, 블랙블러드 최고의 암살자, 시온의 그림자 기사 ···. 놀라운 경력을 가진 로켈이었지만, 그의 얼굴은 따분할 정도로 평범했다.
키 작은 사람에겐 살기 어려운 세상이다.
독해지지 않으면, 오래전에 전쟁터를 뒹구는 구더기 밥이 되었을 것이다.
독기 충만한 로켈은 고성능 폭탄이었다. - 작지만 위력적이다.
그는 충실하게 시온을 섬겼다. 그것이 옳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최소한 지금까지는 그랬다.
퍼뜩 스치는 생각 - 준짱은 이 모든 것을 미리 알았던 걸까?
에바가 굿데이 정규직을 제안하던 때가 생각났다.
굿데이 직원이 되지 않았다면, 로켈은 청색 선지자 앞에 똑바로 서지 못했을 것이다.
굿데이가 그를 자유케 하려는 찰나였다.
“청색 선지자여. 당신의 말씀은 시온의 뜻입니까?”
“의심의 역병에 걸린 너의 모습이 가련하구나.”
“시온은 씨앗을 보살펴 세상을 이롭게 합니다. 준짱은 세상을 이롭게 할 분입니다. 그를 지키는 것이 저의 임무입니다.”
“그 임무를 준 것이 시온이고, 거두는 것도 시온이다. 명에 따르라.”
로켈은 고통스럽게 눈을 감았다.
청색 선지자의 명을 어기고, 준 곁에 남는 것이 과연 준에게 도움이 될까? 오히려 준과 굿데이에 해가 되지 않을까?
멀지 않은 기억 속에서 준짱의 목소리가 울렸다.
‘로켈! 느낌을 따라가라.’
시체들의 숲.
준이 말하기 전까지, 그림자 기사 로켈은 준 이외의 다른 사건에는 손대지 않았다.
씨앗에 집중하여 케어하는 그림자 기사의 룰이었다.
‘세상 모든 것이 흘러가게 놔둬라. 오직 씨앗만을 품어라.’
이것이 그림자 기사의 노래였다.
준은 씨앗 주제에 로켈로 하여금 그림자 기사단의 룰을 벗어나게 했다.
‘느낌을 따라가라고 ···.’
로켈은 준이 바로 옆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 이런 ···. 이런 ···. 로켈의 얼굴에 아지랑이 같은 미소가 어른거렸다.
청색 선지자는 로켈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열꽃 같던 로켈의 미소가 큰 웃음으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로켈은 배를 움켜잡으며 웃음에 시달렸다.
“미쳤느냐?”
“하아 ···. 미친 게 아니라 ···. 이제 알았습니다. 씨앗은 준이 아니라 ···. 저였습니다. 아! 내가 이렇게 멍청하다니! 처음부터 준은 나를 씨앗으로 ···.”
뭐냐? 우냐?
거울 가면 때문에 청색 선지자의 표정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선지자는 황당함의 극치를 맛보는 중이었다.
선지자는 은밀히 로켈의 정신 감정 결과를 확인했다.
‘의지가 매우 강하며, 임무 집중력이 우수함. 장애물 제거에 주저함이 없으며, 살인에 대한 거부감도 없음. 판단력이 빠르며 ···.’
로켈은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였다.
로켈을 웃기는 것도 울리는 것도, 그에게 고통 주기도 쉽지 않다.
그런 로켈이 실성한 사람처럼 웃고 울다니!
‘칼라니티의 판단이 맞았어. 로켈을 저 지경으로 만들다니! 준은 정말 위험한 놈이야.’
“로켈! 참회의 시간으로 새롭게 태어나라!”
“좆-까!”
웃다 울다 다시 웃으며 대답하는 로켈은 술 취한 듯 행복해 보였다.
솔까, 카카오 치차 한잔했다. 달달하니 맛있었다.
니기미, 제조 비법을 알고 나니, 누네즈 할머니 입 냄새가 났다.
그중에서도 가장 밥맛인 것은, 준을 떠나라고 나불대는 청색 선지자였다.
제인에게 들었던 말을 선지자에게 그대로 전해주고 싶었다. 느낌 그대로 ···.
“퍼렁아! 너 진짜 재수 없어.”
“감히!”
“굿데이를 건드는 자, 박살 난다.”
로켈의 눈빛이 변했다.
거울도 꿰뚫어볼 듯 강렬한 눈빛이었다.
청색 선지자는 서둘러 야베스 통신을 끊었다.
*
수잔은 모두에게 감사의 말을 했다.
“오늘을 평생 잊지 않을게요. 카카오 치차만 빼고요.”
“수잔 누나! 오늘 일은 다 잊고 카카오 치차만 기억하는 거 아니에요? 딸꾹!”
얼굴이 벌게진 카이가 나불댔다.
카이는 세이턴과 어깨동무를 하며 헤헤거렸다.
세이턴도 술에 취해 있었다.
세이턴은 카이의 얼굴을 핥았다.
알로에처럼 끈적거리는 침이 얼굴을 뒤덮었지만, 카이는 행복해 보였다.
“누가 쟤들에게 술 먹였어!”
“누가 먹였겠어요. 지들이 챙겨 먹은 거죠.”
직원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에바에게 몰렸다.
에바의 처방 한방이면 모든 것이 정리된다.
“에바 님 놔두시죠. 오늘은 경사스러운 날입니다.”
로켈이었다.
로켈의 얼굴은 웃음과 울음을 오가면서 활짝 펴져 있었다.
평소보다 10년은 젊어 보였다.
장래 희망을 정한 중학생 같았다.
눈꼬리와 턱밑으로 눈물 자국이 보였다.
로켈은 건포도 쿠키가 놓인 탁자 위에 올라섰다.
“오늘부로 저는 시온에서 탈퇴했습니다.”
장엄하게 말했건만, 그 무게를 제대로 느끼는 사람은 디아나와 토그 그리고 에바와 준뿐이었다.
나머지 직원들은 시온이 무엇인지 몰랐다.
똑똑한 수잔은 결혼 중매 사이트가 아닐까? 추리했다.
“시온에서 준짱 곁을 떠나라 했지만, 거절했습니다.”
“굿데이를 위한 일입니까?”
디아나가 목청을 높였다.
로켈이 시온을 떠나면, 그녀도 결정해야 했다.
계속 로켈을 따를지, 아니면 로켈을 떠나 시온으로 돌아가야 할지.
“디아나. 미안하다. 굿데이를 위한 선택이 아니었다. 준짱과 굿데이는 내가 없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시온이 나를 징계할 테고, 그 과정에서 준짱과 굿데이가 힘들어질 거다. 시온을 탈퇴하고, 굿데이를 선택한 이유는 ···. 오로지, 나를 위한 것이었다. 나는 준짱이 좋고, 굿데이가 좋다.”
“로켈 님! 로켈 님을 따르겠습니다. 로켈 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 저를 위해서요! 저도 굿데이가 좋습니다. 로켈 님도 좋고요.”
디아나가 무릎을 꿇었다.
토크도 ‘피자!’라는 외침과 함께 무릎을 꿇었다.
“준짱. 시온에게 버림받은 저희를 받아주시겠습니까?”
로켈이 탁자 위에 무릎 꿇었다.
에바, 수잔, 호세, 아쿠타미, 카이와 세이턴의 시선까지 준에게 집중되었다.
준의 침묵이 길어졌다.
유진 악마 홀로그램이 홀연히 나타났다.
그녀도 준의 대답이 궁금했다.
감정결핍 준은 철저하게 이익을 우선한다.
로켈의 쓰임새는 시온과의 관계에서 나왔다.
로켈은 시온의 정보망을 이용할 수 있었고, 시온의 도움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로켈 그 자체보다, 중계자의 역할이 컸다.
로켈이 시온을 탈퇴하면, 시온의 특화된 서비스를 포기해야 한다.
“로켈 ···. 시온에서 잃은 게 있다면, 굿데이에서 찾아라.”
준은 로켈은 받아주었다.
“고맙습니다.”
“고마워 마라. 널 위한 게 아니라, 굿데이와 날 위한 것이다. 넌 쓸모가 많다.”
*
노르웨이 오슬로는 하얀 지옥이었다.
굿데이의 예측으로는 영하 70도의 강추위가 일주일 정도 이어졌지만, 열흘이 지나도 강추위가 계속되었다.
굿데이의 예측이 틀린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없었다!
원망의 눈초리는 스웨덴 스톡홀름에 봄 날씨를 이식한 유럽기상청으로 쏠렸다.
유럽기상청이 날씨에 손대지 않았다면, 굿데이의 예측대로 일주일만 춥고 끝났을 것이다.
노르웨이는 한마음 한뜻으로 유럽기상청을 비난했다.
그들도 앙리 백작에게 기후거래를 제안받았다.
그러나 노르웨이 의회는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노르웨이를 분노케 하는 것 중 하나는, 스웨덴은 얀 린드홀름 의장의 만년필로 기후거래를 값을 치렀다는 것이었다.
앙리 백작의 쇼맨십이었지만, 그는 얀 의장의 제안대로 만년필 하나만 받았다.
노르웨이의 강추위는 한 달 넘게 계속되었다.
너무 추워서 사람이 죽어도 장례식을 못 치를 정도였다.
“어떻게 아무도 모를 수가 있지!”
앙리 백작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걸어 다녔다.
유럽 기상청의 책임자들이 모인 자리였다.
그들의 노벨 햇살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세계는 유럽기상청의 기술력이 굿데이의 예언을 뒤집는 것을 보았다.
굿데이를 이겼다! - 그들 스스로 그렇게 평가했다. 지금껏 굿데이를 이긴 조직과 인물은 없었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긴 게 아니라 서로 할 일을 한 것에 불과했다.
굿데이는 정확하게 예측했고, 그 덕분에 유럽기상청은 기후 오퍼레이팅 타이밍을 가졌다.
굿데이의 정확한 예측은 불변의 진리였다.
굿데이는 틀리지 않았다.
틀린 것은 ···. 노벨 햇살 오퍼레이팅 이후를 예측했던, 유럽기상청의 예보였다.
유럽기상청은 노벨 햇살의 영향으로 노르웨이의 강추위가 일주일에서 삼 일로 짧아질 것이라고 떠들었다.
“모든 시뮬레이션이 강추위 축소를 ···.”
기후모형 분석과의 이네즈 과장이었다.
그녀는 위대한 수학자,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의 계보를 잇는 천재였다.
가우스와 같은 독일 중부의 니더작센 주 브라운슈바이크에서 태어났고,
가우스처럼 그녀 아버지도 막노동꾼이었다.
그녀는 어머니와 삼촌의 도움으로 공부할 수 있었는데, 이것도 가우스와 똑같았다.
그녀의 별명은 ‘가우스우먼’이었다.
“집어치워! 시뮬레이션 따위에는 관심 없어! 나에게 필요한 것은 정확한 예측이야! 굿데이는 요빅을 만들고 굿호세를 경영하고, 파라엔진까지 손대면서도 6개월 후 날씨를 정확하게 예언하고 있어! 굿데이가 몇 명인 줄 알아! 똥개까지 합쳐서 16명이야! 그런데 기후모형분석과의 직원은 모두 몇 명이지?”
“40명입니다.”
“너희가 알리바바와 40명의 월급도둑이냐! 굿데이보다 많은 인원으로 굿데이가 하는 일 중 고작 하나만 하는데도, 굿데이보다 못하다니!”
앙리 백작은 머리카락까지 빨개지는 듯 보였다.
노르웨이 정부는 국제 재판소에 유럽기상청을 고소했다.
스웨덴은 여러 국가의 눈치를 보느라,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
기후 오퍼레이팅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정확한 예측력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굿데이가 절실했다.
회의실은 무덤처럼 조용했다.
노벨 햇살이라는 작은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기후거래라는 전쟁에서는 패배했다.
“세상은 기후 오퍼레이팅이 가능하다는 걸 봤어. 모든 국가가 기후 오퍼레이팅 개발을 시작하겠지. 기후거래소 설립이 하루 늦어지면, 경쟁자가 열 명씩 늘어나. 정확한 예측방법을 찾아내!”
“미래 예측은 신의 영역입니다.”
“굿데이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굿데이는 어떻게 예측하는 거야!”
“굿데이에는 준이 있습니다.”
“준이 신이냐!”
그 누구도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백작님. 준이 처음으로 예측한 것은 파루시아입니다. 파루시아의 뜻은 ···.”
“나도 안다. 재림예수 ···. 그래서 준이 재림 예수라도 된다는 거야?”
이번에도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믿을 수가 없군.”
앙리 백작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유럽연합은 세계에서 가장 큰 입자가속기를 가졌고, 가장 뛰어난 기상 위성과 수학 천재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기후모형 분석과는 천재들의 천재들만 모인 곳이었다.
분석과장 이네즈만 해도, 여자로 환생한 가우스라는 칭송을 받는다.
그런 인재들이 준을 대하는 태도는 ···. 흡사, 신 앞에 선 평신도 같았다.
“방법이 없을까?”
앙리 백작은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저를 굿데이로 보내주십시오. 제가 준의 방법을 배워오겠습니다.”
이네즈가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