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 준-80화 (78/141)

< 기후거래소-5 >

준은 독립 국가라는 맛깔스러운 미끼를 물지 않았다.

미끼 속에 있는 날카로운 미늘이 보였다.

앞으로 다가올 기후거래 시대 - 모든 국가는 기후 확보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 기후가 없으면 국가도 없다.

모든 것은 기후거래소가 결정한다.

앙리 백작이 소득 없는 미팅을 끝내려 하자, 에바가 나섰다.

“우리에게 뭘 원하시는 거죠? 뭘 원하시기에 독립 국가자격을 주시려는 거죠?”

앙리 백작은 준의 눈치를 힐끔 봤다.

준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준의 존재감은 만날 때마다 점점 거대해졌고, 지금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심오했다.

준이 파루시아를 예측하기 전부터 유럽연합은 기후거래를 연구해왔다.

기후 온난화가 무난히 진행되면, 유럽의 80% 영토가 사하라 사막처럼 변한다.

유럽 국가는 파산하고, 시민들은 기후 난민이 된다.

기후 온난화를 막으려고 탄소배출권 같은 시스템을 도입한 것도 유럽연합이었다.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미국은 뒤늦게 탄소배출권을 인정했는데, 급할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캐나다와 러시아는 불모지에 불과한 북쪽 영토를 농경지로 개간할 기회를 얻는다!

기후 온난화로 모두가 힘든 시기를 보내겠지만, 유럽연합의 시련은 극복 불가능할 정도로 가혹한 수준이었다.

탄소배출권 따위로는 기후 온난화 속도를 조금 늦추는 정도였다.

확실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카드는 기후조작뿐이었다.

유럽연합이 망하면 앙리 가문도 많은 것을 잃게 된다.

“새로운 걸 바라지 않습니다. 지금 하시는 일 중에서 한 가지에 집중하셨으면 합니다.”

“우리가 무엇에 집중할지는 준 회장님이 결정해요.”

“당연히 그러셔야죠. 기후거래가 성립하려면, 정확한 기후예측이 필요합니다. 가뭄 든 나라에 비를 오게 하면, 그 영향으로 다른 나라가 가물어질 테니깐요. 그런 상관관계를 명확하게 예측해야 제대로 된 가격을 매길 수 있죠.”

“유럽 기상청이 있잖아요.”

“기후거래는 미래 날씨를 사고팝니다. 멀리 예측할수록 상품이 많아지죠. 유럽 기상청의 99.9% 예측 범위는 닷새 이내입니다. 굿데이가 두 달 전에 스톡홀름의 강추위를 예측하지 않았다면, 봄 날씨를 이식하지 못했을 겁니다. 기후 오퍼레이트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기후 오퍼레이트는 최소 한 달 전부터 작업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한 달 이후의 기후 예측을 정확하게 하는 곳은 굿데이뿐이죠.”

“그런 이유였나요?”

에바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녀는 독립 국가 옵션을 받아들이고 싶었다.

인공섬이든 무인도든 신생국가로 시작할 수 있다면, 가능성은 활짝 열린다.

‘준은 왕이 되고, 나는 여왕이 되고 그야말로 환상이었을 텐데.’

올림포스 봉우리를 요구하는 무리한 조건을 내걸지 말고, 독립 국가를 챙겼어야 했다.

올림포스는 준의 욕심이었다.

앙리 백작의 설명을 듣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기후거래와 기후예측.

‘그랬어. 그랬던 거야. 역시 준이 진리야.’

그녀는 깨달았다.

기후거래가 시작되면, 기후예측은 독립 국가를 뛰어넘는, 초법적인 권력이 된다.

예측 없이는 거래도 없다.

고대 그리스가 신의 말씀을 전하는 오라클을 섬겼듯이, 세계는 굿데이를 섬기게 될 것이다.

준이 굿데이를 독립 국가로 만들면, 처음에는 맘껏 재량을 펼치겠지만, 결국에는 기후거래소를 따르는 강대국에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된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굿데이의 재산은 다른 국가와 기업들이 꿀꺽 삼킬 것이다.

준과 굿데이 직원들은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거나, 기후거래소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게 된다.

굿데이가 엄청난 수익을 내고, 새로운 경제 생태계를 일궜지만, 아직 약하다.

냉혹한 국제정세에서 볼 때, 굿데이는 부모님 앞에서 재롱떠는 갓난아기에 불과했다.

앙리 백작의 독립 국가 제안은 굿데이를 확실하게 빼앗으려는, 꼼수에 불과했다.

스케일이 너무 커서 눈에 띄지 않았을 뿐이었다.

에바의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노련한 협상가였고, 전략가였다.

경험만 놓고 본다면, 준보다 훨씬 넓고 두텁다.

그런 그녀도 앙리의 노림수를 보지 못했다.

“앙리 백작님 ···. 굿데이의 기후예측 능력이 탐나서, 독립 국가 자격을 주시는 거라면 ···. 굿데이를 가로채려는 미끼가 아닙니까?”

에바의 태도에서 찬바람이 일었다.

“미끼라뇨! 아닙니다. 굿데이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보장하려는 겁니다. 유럽 기상청에는 인재가 많지만, 푸리에 구조방정식 기후예측모형을 다루지 못합니다. 정확한 장기예보가 받쳐주지 않으면, 기후거래는 반쪽짜리가 되죠.”

앙리 백작은 간청하는 눈빛으로 준을 바라보았다.

간절하게 바라보았건만, 준은 다 안다.

*

오랜지 시티로 돌아온 굿데이는 수잔을 위한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수잔은 유명인이었다.

그녀는 국가 권력과 거대 제약회사에 맞서, 인류 건강을 지켜낸 수호자였다.

“감동인데.”

호세는 생크림 케이크를 한입 먹었다.

그의 입술에 크림이 묻었다.

“호세 아저씨, 정말 맛있죠?”

케이크를 먼저 맛본 카이였다.

“내가 말한 감동은 케이크가 아니라 ···. 노벨상이 결정되었을 때도 파티 없이 지나갔는데 ···.”

호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준은 노벨상 수상을 축하하지 않았지만, 수잔의 무죄 석방은 축하했다.

준의 시간은 다른 사람과 다르다.

준의 1분은 보통 사람의 1년 이상의 가치를 가진다.

그런 준이 시간을 내서 파티를 열었다는 것은, 보통 사람이 몇십 년을 봉사한 것과 맞먹는 사건이었다.

세이턴과 호세를 살릴 때에도 준은 그의 모든 시간을 쏟아부었다.

‘이 은혜를 어찌 다 갚는다 ···.’

호세는 입술에 묻은 생크림을 혀로 핥으면서, 위를 보았다. 고인 눈물을 삼켜야 했다.

흥청망청 노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모두 즐거웠다.

굿데이 직원들은 최소 9천9백9십만 달러의 갑부들이었다.

파티의 주인공 수잔은 준 옆에 붙어서 끊임없이 아부를 흔들었다.

“어쩜 준 대표님은 드시는 모습도 그렇게 기품이 흘러넘쳐요! 광고 모델보다 더 맛있게 드시는 거 같아요. 체리를 집으실 때, 준 대표님의 손끝이 밝게 빛났답니다. 체리는 수줍어서 더 붉어지고요.”

준을 위한 아부이기도 했지만 ···.

수잔은 준에게 아부할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이 맛에 종교인들이 신을 섬기는구나! 싶었다.

그녀는 에바의 눈치를 보며 은근히 스킨십도 했다.

남자 중에는 수잔 같은 아담 사이즈를 좋아하는 취향도 있다.

어쩌면 ···. 준도 그럴지 모른다.

‘준 대표님의 취향이 아담 사이즈라면, 이 한 몸 바치겠나이다 ···. 취향이 아니더라도 바치겠나이다 ···. 바치게 해주소서.’

그녀는 눈웃음 지으며, 눈을 연신 깜빡거리며 남모르게 애걸했다.

준은 그러거나 말거나 페이스를 지켰다.

에바, 로켈, 호세, 카이, 아쿠타미, 디아나, 토크, 세이턴과 수잔까지 모두 그가 품어야 할 사람들이었다.

준은 아주 오래전에 결정했다. - 너희와 끝까지 간다.

잘못된 판단은 이들을 지옥으로 내몰게 된다.

준이 독립 국가에 손댔다면, 이들은 모두 기뻐했을 것이다.

굿데이의 시민으로, 공무원으로, 기업인으로, 군인으로, 저마다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굿데이는 강대국의 침략을 받아, 멸망했을 것이다.

굿데이의 멸망과 함께 기후거래소의 독재적인 통치가 시작됐을 것이다.

준에겐 시나리오가 환히 보였다.

너무 빤한 스토리라서, 이렇게 유치한 속임수를 쓴 앙리 백작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준 이외의 모든 인간이 한심했지만, 가끔 잊고 있다가, 앙리 같은 인물을 만나면 다시 떠올린다.

호세와 아쿠타미 부대는 준을 위해서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다.

카카오 치차였다.

누네즈 가문 비법으로 만든 초코릿 술 - 나이 드신 여자의 침으로 발효한 초코릿.

“누네즈 대통령님께서 직접 빚으셨습니다.”

준은 놀라지 않았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 호세였고, 그런 누네즈였다.

직원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준이 선택했던 초코릿 술!

그 맛이 궁금했다.

비법을 아는 준은 직원들에게 권하기도 뭐하고, 안 주기도 뭐했다.

좋은 호세는 시키지도 않는 짓을 했다.

모두의 잔에 카카오 치차를 따르고, 잔을 높이 들었다.

“준 회장을 위하여!”

“준 대표님의 위하여!”

“준짱을 위하여!”

“준느님을 위하여!”

“준 형아를 위하여!”

카이도 잔을 높이 쳐들었지만, 에바에게 술잔을 빼앗겼다.

“에바 누나! 나는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초콜릿을 마시는 거야!”

“널 위해 준비했어.”

에바는 카이에게 아이스 코코아 잔을 주었다.

“원샷!”

직원들은 동시에 잔을 비웠다.

“준짱. 왜 안 드십니까?”

로켈은 의아해했다.

뒤에 있는 다른 직원들도 궁금해했다.

“이번에는 내 뜻이 아니었다.”

준은 나머지 내용은 뇌파 통신으로 모두에게 밝혔다.

누네즈 가문의 카카오 치차 비법.

진실은 항상 고통스러운 법.

유진 작가가 수잔을 위한 서시를 발표했다.

아는 게 많아 슬픈 짐승이여.

프로메타 욕심 무거워.

키가 자라지 못했다네.

독방에서 작은 가슴 콩닥 일 때,

후회는 하지 않았다.

준에게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여자가 되어.

오늘 밤, 기쁜 짐승이 되리라!

모두 술에 취한 것일까? 박수갈채가 터져나왔다.

“브라보!”

호세와 아쿠타미 부대원들이 가장 열렬했다.

수잔은 괜스레 부끄러워했지만, 은근히 오늘 밤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로켈은 잠시 자리를 비웠다.

스마트 폰에 시온의 메시지가 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문을 걸어잠그고 창가에 스마트 폰을 올려놓았다.

스마트 폰은 야베스 모드가 되었다.

야베스는 시온이 개발한 양방향 통신 시스템으로 군사용 암호를 사용했다.

스마트 폰에서 홀로그램이 피어올랐다.

청색 테두리 후드를 입은 청색의 선지자였다.

로켈은 규칙에 따라 무릎 꿇었다.

“그림자 기사 로켈, 청색의 선지자를 뵙습니다.”

“로켈, 오로토칸의 뒤를 쫓고 있나?”

“네.”

“이유가 무엇이냐?”

“그의 프로메타 제약회사 미래전략 팀장 헤리가 준과 에바를 해하려 했습니다. 헤리를 처단했지만, 그의 배후인 오로토칸을 주의 관찰하고자 합니다.”

“오로토칸은 노터치 영역에 있는 자다. 추적을 중단해라.”

로켈은 입술을 깨물었다.

시온의 판결 때문에 준짱을 한 달간 방치해야 했다.

그 결과가 어땠던가!

제인에게 ‘재수 없어!’라는 소릴 들어야 했다.

엄청난 모멸감을 느껴야 했다.

그 모멸감보다 더한 것은 준짱에게 충성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었다.

“로켈.”

“네. 말씀하십시오. 청색의 선지자님.”

“칼라니티의 뒤를 쫓느냐?”

“그렇습니다.”

“그분은 나와 같은 선지자이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에게 능력을 받은 랜달이 준의 목숨을 노렸습니다. 그것도 방치의 시절에 말입니다.”

“무엄하다! 감히 노터치의 영역에 있는 자와 선지자의 뒤를 캐다니! 너의 모든 임무를 박탈한다. 준을 떠나 참회의 시간을 시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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