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후거래소-4 >
스탠리와 수잔은 최종판결을 기다렸다.
방청석 관계자들도 숨을 죽였다.
리처드의 칼럼 기사와 루이스 상원 의원의 서포트로 무죄 판결이 확정적이었지만,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상대는 국가안전국이라는 권력 기관이었고, 프로메타 제약회사 법률팀도 스타급 라인이었다.
치열한 법률 싸움이었다.
국가안전국과 프로메타는 상황이 불리해지자, 시간 끌기 작전으로 나왔다.
치열한 법률 싸움이 길고 지루한 소모전으로 바뀌려 했다.
스탠리 법률회사가 총력전을 펼치지 않았다면, 재판 진행 속도가 피자 치즈처럼 늘어졌을 것이다.
판결을 앞둔 위험요소는 판사의 판단이었다.
법 훈련으로 단련된 판사일지라도 인간이었다.
프로메타 법률팀은 그럴듯한 억지 논리로,
파라엔진이 국가 존립과 시장경제에 위협이 된다고 주야장천 떠들었다.
그들은 고양이를 호랑이로 둔갑시킬 정도로 언변이 뛰어났다.
프로메타 법률팀과 국가안전국이 터무니없는 소리를 늘어놓을 때마다, 스탠리는 준을 생각했다.
재판은 스토리다.
피고 측이든, 원고 측이든 가장 그럴싸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자가 승리한다.
이번 재판 스토리의 핵심은 수잔의 유무죄 여부가 아니었다.
파라엔진.
파라엔진이 국가안전국과 프로메타 제약회사의 주장대로 위험한 것이라면, 수잔의 국가 반역죄는 그대로 굳어진다.
‘준은 정말 대단해.’
스탠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준은 이번 재판의 핵심을 정확하게 알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킹스덤 의료 센터와 협력해서 파라엔진 임상시험을 밀어붙였을 것이다.
파라엔진은 킹스덤 의료센터를 통해, 임상시험이라는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예후관찰이라는 절차가 남았지만, 임상시험은 페니실린 이후로 가장 성공적이었다.
만병통치약 - 파라엔진.
인체 재생력과 면역력을 최적화하는 파라엔진의 등장은 헬스케어 관련 주식을 패대기쳤다.
보조 건강식품 회사도 다른 일거리를 찾아야 했다.
헬스케어 관련주와 다르게 보험업종은 치솟았다.
의료비 감소로 보험회사 이익이 늘어날 전망이었다.
지방 정부들도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파라엔진을 반겼다.
지역 의료비 부담은 재난 상태에 가까웠다.
파라엔진으로 지역 의료비를 줄인다면, 재무상태 개선에 큰 도움이 된다.
파라엔진 효과를 얼추 계산해 본, 지역 정부는 백골에 살이 돋는 느낌이었다.
재판 과정에서 편이 나뉘었다.
파라엔진 상용화를 막으려는 헬스케어 그룹과 은근히 파라엔진 상용화를 바라는 수혜그룹.
판사가 판결문을 읽었다.
판사의 일은 ‘듣고 쓰고 읽기’의 연속이었다.
이중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쓰기였다.
판결문의 표현 하나, 단어 하나, 신중하게 정제되어 선택되었다.
판사의 고심이 깃든 판결문은 좋은 공부였고, 오랜지 시티 초등학교는 판결문을 학습 자료로 이용했다.
“ ···. 한 이유로 프로메타 제약회사의 증거 조작과 날조가 인정된다. 피고 수잔의 행동은 국가 반역죄로 볼 수 없다. 국가안전국과 프로메타 제약회사는 수잔에게 배상하라. 프로메타 제약회사 책임자들이 모두 사망했지만, 프로메타 법인은 ···.”
법원은 프로메타 제약회사에 엄청난 배상금과 벌금을 때렸다.
건강 향상 위해 노력해야 할, 기업이 파라엔진의 존재를 숨기고, 이를 알리려는 수잔을 반역죄로 몰아넣었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스탠리는 방아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습지보다 판결문을 더 많이 읽고 공부했다. 집안 분위기가 그랬다.
“아쉽네요.”
법원용 정장을 입은 스탠리는 시계를 보았다.
증거가 쌓였다고 해도, 상대는 국가 권력을 휘두르는 국가안전국이었다.
승리를 기뻐해야 마땅했지만, 원하는 것을 모두 얻지 못했다.
“판결이 일찍 나왔으면, 준 회장님과 함께 스톡홀름에 가셨을 텐데 ···.”
스탠리는 미안해했다.
“정말 꿈만 같아요.”
수잔은 벅차오르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어떤 판결이 나오든, 놀라지 않겠노라 결심했었다.
그리고 지금 그 결심을 지키고 있었다.
주위에서 환호 터져 나왔지만, 그녀는 휩쓸리지 않았다.
준을 알지 못했다면, 그녀 역시 환호하며 웃옷을 벗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준을 안다.
준의 존재에 비하면, 이런 판결 따위는 시시했다.
그녀의 인생이 걸린 것인데도 그랬다.
그만큼 준은 엄청났다.
행성 중력에 이끌려 위성이 된 혜성처럼, 그녀의 판단 기준은 준이었다.
이번 재판은 준이 시작한 일이었다. 실패할 리 없었다.
“달라지셨네요.”
“뭐가요?”
“무죄 판결이 나오면, 저에게 아부할 줄 알았어요. 세상에서 가장 능력 있는 변호사라고 노래할 줄 알았죠.”
수잔은 항상 그랬다. 스탠리가 증거를 가져올 때마다 호들갑을 떨며 그를 찬양했었다.
그랬던 그녀가 며칠 전부터 수녀가 된 것처럼 차분해졌다.
“스탠리는 세상에서 가장 능력 있는 변호사예요. 제가 말할 필요도 없죠. 아부하지 않은 건 ···. 준 대표님이 그러셨어요. 아부 좀 줄이라고 ···.”
“수잔의 아부는 불치병인 줄 알았는데, 준 회장님은 그걸 고쳤네요. 굉장하신 분이에요.”
스탠리는 초등학교 시절 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띨띨이가 이런 거물이 되다니!
EQ 결핍 저능아가 국가 권력을 능가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는 준이 예수보다 낫다고 여겼다.
예수는 로마 제국에 죽임을 당했지만, 준은 국가마저 이겨 먹었다.
가시면류관과 십자가는 유행이 지났다는 듯이, 준은 그만의 스타일로 수잔을 구원했다.
준이 예수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떤 세상이 되었을까?
방청객과 관계자들의 축하가 쏟아지는 바람에 그의 상상은 수증기처럼 사라졌다.
*
준은 파루시아 시즌에 깨달았다.
돈 버는 건 쉬운 일이라고.
세상에 흔하게 널린 게 돈이었다.
너무 쉬워서 웅크리고 있던 공허감이 고개를 들 정도였다.
정말 어려운 것은 만족하지 않고 돈을 뛰어넘는 것이다.
돈 버는 방법은 세 가지였다.
첫째 구걸하는 것이었고, 이는 어리석은 방법이었다.
둘째 일하는 것이었다. 이것도 어리석은 방법이었다.
일하는 것은 ‘몸으로 하는 구걸.’이었다.
셋째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었다.
돈이 굴러들어오는 시스템.
요빅이 그랬고, 유진 악마의 금융투자가 그랬다.
준은 돈 벌려고 일하지 않는다.
준이 하는 것은 시스템을 짜는 것이었다.
‘소득 제조기’ 굿호세를 만든 것도 ‘일자리 중심 경제 시스템’보다 ‘소득 중심 시스템’이 합리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일자리 중심 시스템은 노예 중심 시스템의 진화형에 불과했다. - 가진 자가 있고, 못 가진 자가 있고, 그 둘의 위치는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굿호세의 소득 중심 시스템은 일자리에 목메는 방식보다 나았지만, 최고의 시스템은 아니었다.
최강 시스템은 돈을 직접 찍어내는 중앙은행을 소유하는 것이었다.
자본주의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은 돈을 찍어내는 발권력이었다.
자본 논리로 따지자면, 대통령처럼 눈에 보이는 권력자들도 중앙은행이라는 마차를 이끄는 조랑말에 불과했다.
준의 고밀도 지식 생태계의 시뮬레이션이 옳다면, 세상 모든 사람이 ‘그들의 중앙은행’을 소유할 수 있다.
현 중앙은행은 강력한 독점 시스템이었고, 효율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인간적이지도 않았다.
중앙은행 마차를 끌고 수호하는 조랑말들 ···. 앙리 백작 역시 조랑말 중 하나였다.
그가 처음 준을 만났을 땐, 파루시아 시즌이 끝난 후였다.
그는 기후예측모형을 사들이고 준을 스카우트하려 했다.
“그때 저와 함께 일했다면, 기후거래소의 핵심인물이 되셨을 겁니다.”
앙리 백작은 준에게 격식을 갖추며, 상급자처럼 대했다.
준은 미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후거래는 요빅과 굿호세와 비교할 수 없는 메가 스케일이었다.
인간의 역사는 기후 변화와 함께했다.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었던 신석기 혁명이 가능했던 것은 그 시절에 빙하기가 끝나고 따듯한 후빙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무너졌던 결정적인 원인도 가뭄과 기근이었다.
예전에는 몰라서 당했지만, 이제는 알고 당하는 시대였다.
파루시아가 그랬고, 헬하운드가 그랬으며, 예티가 그랬다.
준이 앙리 백작과 한자리를 한 것도, 기후거래의 잠재력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유럽으로 오십시오. 유럽연합은 굿데이를 독립 국가로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헉! 숨 막히는 비명의 주인공은 에바였다.
굿데이를 모셔가려는 국가는 많았다.
외교관 면책 특권 같은, 초법적인 특혜를 제시한 곳도 많았다.
그러나 굿데이를 독립 국가로 인정한다니!
굿데이가 독립하면, 당장 세금이 사라진다.
최소 35%의 비용절감이 예상되었다.
그리고 아무런 터치도 받지 않고 원하는 사업을 맘대로 할 수 있다.
엘리트 범죄자들이 그토록 꿈꾸는 신생 국가 수립!
아프리카의 작은 국가가 아니라, 유럽 연합이 인정하는 독립 국가라니! 에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영토는?”
“바다의 인공섬입니다. 요빅을 만드는 굿데이의 기술력이라면, 육지에 새 영토를 가지는 것보다, 인공섬이 더 편하시겠죠?”
“그리스 일부를 영구 매입하겠습니다.”
앙리 백작은 급브레이크에 걸린 듯이 놀랐다.
준은 독립 국가에 대해서 놀라지 않았고, 바로 그리스 매입 카드를 뽑았다.
서슴없는 반응속도 - ‘독립 국가 옵션을 예상했던 건가?’
그리스는 재정적자 누적으로 구제 불능의 빚쟁이 국가였다.
그리스 정부는 세계의 갑부들에게 섬을 팔아서, 이자 빚을 갚았다.
섬을 판다고 해도, 영구적인 것은 아니었고, 영국이 홍콩에 했던 것처럼 임대 형식의 판매 방식을 취했다.
“ ···. 그건 제 권한 밖의 ···. 일입니다.”
앙리 백작은 더듬거렸다.
앞에 있는 애송이가 보통이 아닌 건 알았지만, 그리스 영토를 탐낼 정도의 야심가라니! 뜻밖이었다.
그는 준의 눈에서 흥미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준을 놓치면 안 된다!
“그리스의 어떤 섬을 원하십니까?”
“섬이 아닙니다.”
“그럼 ···. 도시?”
“도시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
앙리 백작은 장난인가 싶기도 했다. 그런 건가? 애송이의 장난에 놀아난 거였나?
“올림포스 산입니다.”
파직!
앙리 백작의 이마와 목에 핏대가 섰다.
올림포스 산은 유럽의 자존심이었다.
그러나 앙리 백작의 핏대가 선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건 ···. 기후거래소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습니까?”
앙리 백작의 눈빛이 달라졌다.
몰이 사냥당하는 짐승의 눈빛이었다.
“기후거래가 시작되면, 기후거래소가 국가 권력을 능가하게 됩니다. 굿데이가 독립 국가가 업그레이드되어도, 기후거래소의 결정에 따라야겠죠.”
“그래서 올림포스 산을 요구하는 겁니까?”
“봉우리 하나면 됩니다.”
“그곳에 신전이라도 지으려고요?”
“노아의 방주라고 해두죠. 기후거래가 시작되면, 그곳이 가장 안전할 테니깐요.”
앙리 백작의 눈 밑이 꿈틀거렸다.
에바는 왜 갑자기 분위기가 험악하게 변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양손을 꽉 마주 잡고, 기도하듯이 정신을 모았다.
‘준 회장. 뭔 일이야?’
에바의 뇌파 통신이었다.
아직 미약해서, 그녀의 뇌파를 캐치하는 것은 준뿐이었다.
‘알박기.’
‘알박기라니?’
‘올림포스에 기후거래소가 세워진다.’
‘준 회장아, 그걸 어떻게 알아? 앙리 머릿속이라도 들여다본 거야?’
악몽의 암살자 랜달은 상대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능력이 있었다.
랜달 따위가 해냈다면, 준은 이미 오래전에 터득했을 것이다.
에바는 그렇게 생각했다. - ‘나의 준이 랜달보다 못할 리 없어.’
‘에바. 다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