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후거래소-2 >
수잔은 파라엔진 알고리즘을 준에게 보였다.
자기장 위에 뿌려진 철 가루처럼 끊임없이 복잡한 구성이었다.
사방팔방 열려있지만, 출구 없는 미로.
누적된 데이터를 영양분으로,
뿌리내린 생명력의 추상화였다.
“준 대표님. 블랙마켓에서 팔리는 스키마 알고리즘이 구석기 작품이라면, 제가 만든 파라엔진 알고리즘은 정보화 시대랍니다. 건강 가이드라인을 잡는 게 가장 어려웠어요. 알고리즘 잘 못 잡으면, 자아붕괴가 일어나거든요. 자아붕괴 된 실험동물을 봤는데, 끔찍했어요. 살아 있는 채로 구더기에 잡아먹히는 꼴이었죠. 제가 만든 파라엔진 알고리즘은 완벽해서 ···.”
“손 볼 곳이 없다.”
“탁월하신 판단이십니다.”
수잔은 두 손을 비비며 즐거이 아부했다.
학부 시절과 연구원 시절, 그리고 직장인 시절에도 유감없이 아부 떨었지만, 준에게 흔드는 아부가 가장 즐거웠다.
진심을 담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그녀는 그녀보다 못한 사람을 상대로,
나이 많고 직위 높다는 이유만으로,
결정권이 상대에게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부해왔다.
상황이 그랬고, 세상이 그랬다.
그러나 준은 달랐다.
준은 어마어마하게 똑똑하고,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강하다.
그는 인류 최강이다.
최강자에게 하는 아부와 평범한 레벨의 인간에게 하는 아부는, 같은 말과 표현일지라도, 깊이와 맛이 달랐다.
‘아부는 준에게 하는 게 최고야! 내일도 해야지!’
“다 버린다.”
“네?”
“파라엔진 알고리즘에 스키마가 있다. 스키마를 뺀다.”
수잔은 ‘그건 말도 안 돼요!’라는 말을 삼켰다.
스키마는 파라엔진의 핵심이었다.
그 핵심을 빼낸다고? - 절대 불가능하다.
준이 최강이란 건 인정하지만, 불가능한 건 불가능한 거다.
아부할 기회만 엿보던 그녀였지만, 이번만큼은 꼬리를 흔들 수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준의 손끝에서 뉴버전 파라엔진 알고리즘이 춤췄다.
생명 탄생을 연주하는 장엄한 오케스트라였다.
초반부가 지나자, 수잔도 이해하지 못하는 울림이 시작되었다. 이제 그녀는 그저 느낄 뿐이었다.
느끼는 것만으로도 물에 빠진 것처럼 숨을 쉴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걸, 태연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해내는 거지?’
수잔은 허우적거리면서도 준에게 감탄했다.
쓰나미 같은 감탄이 마구 밀려와서, 아부할 틈이 없었다.
푸리에 구조방정식 - 기후예측모형의 근간이자, 고밀도 지식 생태계 열두 꼭짓점 중 하나.
준은 5분 만에 알고리즘을 완성했다.
뉴버전의 탄생이었다.
“이렇게 해야 ···. 국가안전국과 프로메타의 특허를 피한다.”
“준 대표님 ···. 이건 특허를 피한 게 아니라, 아예 뛰어넘은 겁니다. 어떻게 해야 준 대표님처럼 할 수 있죠?”
“공허감을 길들이고, 뉴런의 소리를 들어라. 힘들겠지만, 아부는 좀 줄이고 ···.”
굿데이의 파라엔진은 손톱 크기의 단백질 칩으로 종이처럼 얇았다.
파라엔진은 인체 재생력과 면역력을 최적화하여 건강을 유지했다.
수잔은 로봇수술대에 올라, 구 버전 파라엔진을 떼어내고, 뉴버전 파라엔진을 이식했다.
몇 분 만에 예전보다 몸 상태가 좋아진 게 느껴졌다. 그녀는 설레는 마음으로 체중계에 올라섰다.
역시! 살이 빠졌다.
흥분을 감추며 키도 재봤지만 ···. 그대로였다.
파라엔진은 반도체처럼 싸게 찍어낼 수 있었다.
킹스덤 의료 센터에서 굿데이와 함께 임상시험을 했다.
류머티즘 관절염 환자 - 완치 판정.
2형 당뇨병 환자 - 완치 판정.
뇌종양부터 무좀까지 줄줄이 완치 판정이 나왔다.
임상 수행 스텝과 참여 환자들은 너무 놀라서, 화가 날 정도였다.
“이런 걸 왜 이제야!”
임상결과는 굿데이 페이지에 그대로 올려졌다.
파라엔진 알고리즘과 제작법도 공개되었다.
파라엔진 효능은 40세가 절정이었고, 점점 감소하다가 75세에는 사라졌다.
산비탈 곡선 - 파라엔진 알고리즘은 숙주의 나이가 75세가 되면 자동 소멸했다.
준이 일부러 제한한 것이 아니었다.
수잔이 만든 구 버전 알고리즘 한계는 63세까지였고, 블랙마켓의 스키마 알고리즘은 60세까지였다.
노화는 질병이 아니었다.
분열 거듭의 법칙 - 세포가 분열을 거듭할수록 살아야 할 이유보다 죽어야 할 이유가 많아진다.
노화는 죽음이라는 운명으로 가는 과정이었다. 속도를 느리게 할 수는 있어도, 멈출 수는 없다.
사람이 자동차라면, 질병은 교통사고였다.
자동차가 교통사고 없이 달려도, 시간이 지나면 멈춘다.
킹스덤 대학 내분비 특화 센터의 수간호사는 하루가 다르게 줄어드는 환자를 보며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헷갈렸다.
그녀의 심정은 기쁨과 슬픔을 뒤섞인, 기묘한 칵테일이었다.
환자 병이 나았다는 것에 기뻐해야 했지만, 특화 센터 손님이 줄어들면 ···. 월급이 막막해진다.
그녀에겐 아이가 있었고, 아이를 키우려면 돈이 필요했다.
파라엔진으로 병이 나은 사람이 다시 병들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의사와 다른 직종의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목수와 운전사부터 영양사와 실험동물 사육사까지 80종의 직종과 1,300명의 직원이 근무했다.
그동안은 아픈 사람을 도와주는 대가로 월급을 받는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많은 사람이 독하게 아파야 일자리가 보장되고 월급이 오르는 구조였다.
슬금슬금 구조조정 소문이 흘러나왔다.
“노조에서 피켓 들고 굿데이 앞에서 시위하겠다는데, 수간호사님도 가실 거죠?”
주임 간호사의 가슴에는 ‘굿데이가 책임져라!’라는 배지가 달려 있었다.
“안 가. 농성 때문에 굿데이가 파라엔진 사업을 그만두면, 책임질 수 있어?”
“가만히 있으면 우리 일자리를 잃어요!”
“우리 같은 사람이 일할 기회가 없는 건 좋은 거야. 아픈 사람이 없다는 거잖아.
우리 일자리가 넘치면 그게 더 문제지. 전쟁이나 재난이 터졌다는 거잖아.”
“수간호사님! 한가한 소릴 하실 때가 아니잖아요. 이번 달 월급이 막힐 줄도 몰라요!”
“받아들여.”
“네?”
“일자리에 목매고 산 우리가 바보야. 일자리는 중요한 게 아니었어. 중요한 건, 소득이야.”
“일자리가 소득이잖아요.”
“지금까지는 그렇게 보였지. 소득은 ···.”
수간호사는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 흐름입니다.”
준이었다.
그가 직접 센터에 온 것이었다.
준 뒤에는 에바와 로켈 그리고 호세와 세이턴이 있었다.
그들은 나들이 온 사람처럼 한가해 보였다.
“무슨 일로 오셨죠?”
“막힌 곳을 뚫려왔죠.”
준은 내부 인테리어를 천천히 살폈다.
센터에 준이 왔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병원장이 뛰어 내려오고, 노조 지부장이 달려 올라왔다.
병원장과 노조 지부장은 각자 패밀리를 거느리고 있었다.
8층 리셉션에서 삼국지 같은 형세가 연출되었다.
동쪽 복도의 병원장, 서쪽 복도의 노조, 그 가운데 준.
농성을 준비하던 노조 지부장은 구호를 외쳤다.
“굿데이가 책임져라!”
준은 흥미로운 눈길로 노조 지부장을 쳐다보았다.
‘남 탓 쩐다!’
살길이 막막한 건 인정한다.
신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많은 이들이 직장을 잃었다.
냉장고 때문에 얼음장수가, 자동차 때문에 지게꾼이 사라졌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냉장고 회사와 자동차 회사 앞에서 농성하고 있을까?
“굿데이가 책임져라!”
노조 지부장은 가열차게 외쳤다.
“무고한 수잔이 반역죄로 몰려, 교도소에 있었을 때, 당신은 뭘 하셨습니까?”
채찍 같은 질문이 노조 지부장의 귀를 내려쳤다.
“그걸 왜 나한테 ···.”
지부장이 더듬거렸다.
“제가 뭘 하길 바라십니까?”
“고용승계.”
“당신이라면, 당신 같은 사람을 직원으로 고용하시겠습니까?”
“ ···. 하고말고.”
지부장은 굉장히 힘들게 답했다.
“잘됐네요. 당신이 당신을 고용하세요. 취업 축하합니다.”
준의 논리는 막힘이 없었지만, 에바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인간관계가 논리로 결정되지 않고, 옳고 그름과 상관없고, 오직 감정에 크게 좌우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굿데이의 에바입니다. 원하시는 고용승계는 약속할 수 없습니다. 저희가 온 이유는 이곳의 리모델링 때문입니다. 킹스덤 대학이 우리에게 자문을 맡겼습니다. 소득 지출 중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내용이 뭔지 알려주시겠습니까?”
“ ···. 주거비와 교육비요.”
“그럼 ···. 이곳을 가정집과 학교로 리모델링하겠습니다.”
“그걸 ···. 누구 돈으로 합니까?”
“여러분의 돈입니다.”
“장난하쇼!”
에바가 눈짓하자, 로켈이 손 빠르게 서류를 보여줬다.
굿데이 시즌 4 ···. 파라엔진 시즌.
지부장 눈에 확 띄는 문구가 보였다.
‘일자리의 시대는 가고, 소득의 시대가 왔습니다. 소득을 위해 투자하세요.’
수간호사가 로켈의 서류를 받았다.
그녀는 대충 읽어보며, 지부장에게 말했다.
“제가 타고 다니는 신형 자동차를 부러워하셨죠? 그거 헬하운드 시즌에 투자해서 번 돈으로 샀어요. 백 달러 투자했는데, 주택 대출금을 다 갚고 집도 넓혀갔죠. 제가 추천하고 싶네요. 파라엔진 시즌 투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했다.
“왜 이런 일을 하는 겁니까?”
지부장의 목소리는 따듯한 양초처럼 누그러져 있었다.
준의 대답은 늘 그랬듯이 짧았다.
“굿데이다.”
*
노벨상 시상식 만찬에 1,500명의 귀빈이 초대되었고, 날씨는 화창했다.
앙리 백작은 약속을 지켰다.
모두가 걱정했던 영하 70도의 강추위는 스웨덴을 비켜갔다.
1,500명이 블루 홀에서 함께 식사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그들은 스웨덴 고위 관료거나 왕실 가족이었고, 전 노벨상 수상자거나 그들의 가족이었다.
노벨이사회의 돈을 관리하는 스웨덴 중앙은행 중역들도 보였다.
웨이터 500명, 요리사 140명, 관리자 57명이 동원되었다.
따듯한 커피와 수프가 끊임없이 오갔다.
블루 홀의 계단은 넓고 낮았는데, 드레스를 입고 하이힐을 신은 여자들을 배려한 디자인이었다.
시상식에 초대된 유럽 연합 관계자들은 성공적인 날씨를 축하했다.
“신탁으로 불리는 굿데이의 예언을 깬 겁니다. 내년 노벨상은 유럽 기상청의 겁니다.”
“기후거래제도는 아직 걸음마 단계입니다. 갈 길이 멉니다.”
앙리 백작은 겸손했다. 기후 조절이 가능하지만, 세상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정치가 중요했다.
경제학에서 진리로 받들어지는 금리, 대출 상환, 파생상품, 보험, 국제 무역 ···. 모든 것이 처음에는 정치적인 문제였다.
앙리 백작은 굿데이의 테이블을 눈여겨보았다.
스웨덴이 추워서, 오지 않을 거라던 준이 참석했다.
‘꽉 막힌 고집불통은 아니었군.’
에바와 로켈, 호세와 카이도 보였다.
앙리 백작은 요즘 핫한 수잔을 찾아봤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재판이 끝나지 않아서, 비행기를 탈 수 없었답니다.’
앙리 백작의 수행비서가 손등 메모를 보여주었다.
앙리 백작이 손등 메모를 읽자, 수행비서는 즉석에서 손등 메모를 지웠다.
노벨 시상식의 분위기는 평소와 달랐다.
평소라면 모든 관심이 노벨상에 쏠렸겠지만, 이번에는 노벨상이 아닌 다른 주제가 이슈였다.
기후거래제도와 파라엔진이었다.
카이는 노벨시상식이라고 해서 잔뜩 기대했는데, 와보니 별거 없었다.
음식도 굿데이만 못했고, 자리도 비좁았다.
디너쇼가 끝나고 무도회가 시작되었다.
초등학생 학예회를 보는 느낌이었다. 너무나 점잖게 춤추고 놀았다.
노벨 시상식 정식 프로그램보다 밖에서 열리는 축제가 훨씬 재밌었다.
노벨상은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가 시상했는데, 수상자들에게 메달이 든 작은 상자를 건네는 것이 전부였다.
예전에는 국왕이 수상자의 목에 직접 메달을 달아줬지만, 개목걸이라는 비난이 있어서, 그 후 절차를 간략화했다.
기자들은 스웨덴 날씨를 집중 보도했다. 앙리 백작이 바라던 바였다.
유럽 기상청은 스웨덴 스톡홀름에 따듯한 날씨를 이식했지만, 노르웨이 오슬로는 손대지 않았다.
오슬로의 현재 기온은 영하 68도.
컵에 담은 물을 허공에 뿌리면 땅에 닿기 전에 눈처럼 얼었다.
분위기 좋은 스톡홀름과 동토의 왕국이 된 오슬로는 좋은 대조를 이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