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후거래소-1 >
황금 왕 오로토칸은 출생과 성장 과정이 알려지지 않은, 미스테리한 인물이었다.
그는 엄청난 황금으로 수많은 기업을 소유했고, 요빅으로 가장 큰 손해를 본 사람이었다. 워낙 많이 가져서 많이 잃었겠지만, 남은 것도 많았다.
프로메타 제약회사도 남아 있는 것 중 하나였다.
“오로토칸의 지시냐?”
로켈은 변두리 지역에 있는 안전가옥에서 헤리를 심문했다.
“그분의 지시였다면, 작전을 포기하지 않았겠지. 이번 작전은 나의 판단이었다. 나의 사명은 그분이 많은 돈을 벌도록 하는 거다.”
헤리는 편안하게 말했다.
그는 맘을 정했다.
모든 것을 자신의 선에서 정리할 결심이었다. 오로토칸에게 해가 될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로켈의 안전가옥은 작은 별장이었다.
나지막한 언덕 위 포플러나무가 보였고, 창문으로 따듯한 햇살이 들어왔다.
로켈은 헤리에게 빵과 치즈 그리고 버터를 주었다.
헤리는 커피를 홀짝이며, 로켈의 질문에 답했다. 그의 마음은 우울했지만, 분위기는 화창하고 평온했다.
헤리는 로켈에게 붙잡힐 때, 지하실에서 엄청난 고문을 당할 거라 여겼는데, 뜻밖에도 아담한 전원주택에서의 조촐한 ‘티파티’라니 ···.
“날 어쩔 거지?”
그는 로켈이 준 빵과 치즈를 최후의 만찬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맛있었고, 다른 해석을 적용하기에는 로켈의 소문이 너무 험악했다.
블랙블러드 시절, 로켈은 그 어떤 타켓이든 절대 살려두지 않은 '악귀'였다.
“그게 고민이야. 네놈이 앙심을 품고, 다시 작전 짤 수도 있고 ···. 네가 내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겠어?”
헤리는 무덤 판 자리처럼, 어두워졌다.
결국, 그런 건가? 뿌린 대로 거두는군.
프로메타 제약회사의 모든 비리를 다섯 임원에게 넘겨서 살아날 구멍을 만들었는데 ···. 나의 능력은 딱 거기까지였어. 에바 잡을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로켈을 만날 일도 없었을 텐데 ···.
그는 로켈을 해치우고 도망칠까? 생각했다.
순순히 목숨을 내놓을 바엔, 맞짱이라도 떠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바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60층에서 뛰어내려 ‘날개 옷’ 퍼덕거리며 달아날 때, 달라붙은 로켈에게 목을 죄었다.
실력 차이가 너무 난다.
발버둥 쳐봤자, 의미 없는 고통만 늘어날 뿐이다.
“알고 있는 건 다 말했다. 고통 없이 부탁한다.”
“그렇다면 ···. 바라는 대로 해주지.”
로켈은 헤리에게 손을 쓰려다가, 손을 바꿔서 에바에게 연락했다.
“에바 님. 쓰레기 분리수거 업무로 특근 신청합니다.”
“분리수거 할 정도야?”
“쓰레기가 그걸 원하네요.”
로켈은 헤리를 쳐다보았다.
“잠깐! 선택 가능한 겁니까?”
헤리가 손을 내저었다.
“로켈, 쓰레기 좀 바꿔봐.”
“연결하겠습니다.”
로켈의 눈에만 보이던 통화용 에어스크린이, 헤리의 눈에도 보였다.
에바는 겁먹은 헤리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로켈에게 타락 천사 헤리의 정보를 받았고, 로켈과 헤리의 대화도 듣고 있었다.
“내가 죽으면 오로토칸이 돈을 더 많이 벌어?”
“그렇습니다. 당신이 없으면, 파라엔진 사업이 불투명해지죠. 파라엔진이 늦을수록 프로메타 제약이 이익 보는 구조입니다.”
“블랙마켓에서 스키마를 팔잖아?”
“스키마 시장과 프로메타 제약회사의 시장은 다릅니다. 스키마는 돈 많은 갑부를 상대하지만, 프로메타 제약회사의 제품들은 일반 대중용이죠. 그리고 굿데이가 파라엔진 시장에 뛰어들면, 스키마 시장도 사라집니다.”
“이상해 ···. 왜 우리처럼 파라엔진으로 돈 벌 생각은 하지 않지?”
“했습니다. 파라엔진으로 벌 수 있는 돈은 프로메타 제약회사 매출액의 10%에 불과합니다. 파라엔진 효과가 너무 우수해서 ···.”
“치료는 되지만, 돈은 안 된다는 거지?”
“정확합니다. 굿데이도 파라엔진으로 큰돈은 벌지 못합니다. 솔직히 당신들이 왜 파라엔진에 관심 있는지 모르겠어요. 열심히 해봤자, 남 좋은 일만 될 텐데 말입니다.”
“나도 그게 궁금해서, 준 회장에게 물었지. 준 회장이 기후예측모형을 프리웨어로 공개하려 했거든. ‘기후예측모형을 오픈하면 어떻게 돈을 벌어?’라고 따졌어. 그때 준 회장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나. 그런 멍청한 소리는 처음 듣는다는 표정이었어. 그리고 말했지. ‘굿데이에 들어온 순간 돈을 위해 사는 삶은 끝났다고.’ 준 회장은,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과 앞으로 살아야 할 삶이 다르다는 걸, 미리 말하지 않아서 미안하다고 했지. 하여튼 네 말은 이 모든 것이 다 돈 때문이라는 거지.”
에바는 한 템포 쉬고, 혀와 입을 우악스럽게 움직였다.
바른말과 격식 있는 표현으로 굳어진, 입을 푸는 중이었다.
로켈은 마음속으로 슬랭 파워에 대비했다.
“야, 이! 망할 개자식아! 돈이 그렇게 좋으면, 네놈 피부를 싹 다 벗겨서, 돈으로 발라 주랴! 두개골을 깨고 뇌를 쪽쪽 뽑아내고 동전으로 가득 채워 주랴! 몸속에 지폐를 가득 넣어서 돈 허수아비로 만들어 주랴! 모공 모공마다 동전을 박아주랴! 앉은 자리에서 백만 달러 다 처먹게 해줄까!”
“에바 님 그만 하세요. 이 녀석 눈 돌아가고, 거품 물었어요.”
헤리는 바닥에 쓰려져서 몸을 떨었다.
“어이쿠! 이 녀석 오줌도 지리네! 내가 잘못했다. 그냥 내 손으로 끝냈어야 했는데, 에바 님에게 물어본, 내 잘못이다. 내가 끝냈으면 이렇게 험한 꼴 안 보고 곱게 갔을 텐데 ···. 이를 어째.”
한 시간이 지나서야 헤리의 정신이 돌아왔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저릿한 느낌만 오고 움직여지지 않았다.
거울을 보니, 입이 돌아가 있었다.
“총체적 난국이야. 뇌출혈에, 심장과 신장 췌장도 맛이 갔어.”
로켈은 약이 가득 든 상자를 내려놓았다.
“증세에 따라 잘 골라 먹고, 너무 독한 맘 먹지 마. 자살하고 싶으면, 음독자살이나 목메는 거 추천이다. 타락천사랍시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떨어져 죽으면, 청소하는 사람 힘들어.”
“저어늘 아니 죽이일 간가요?”
입이 삐뚤어지니, 말도 삐뚤어졌다.
“아니 죽일 거다. 몸 귀한 거 알고 깝치지 말고 살아라.”
“느에에. 고마아삽니다.”
“이으그. 병신 새끼. 굿데이에서 파라엔진 나오면 꼭 사고. 네꼴을 보니, 파라엔진만이 희망이다.”
“네에에. 아으게쌉니다.”
“그냥 고개만 끄덕거려. 자꾸 말하니깐 너무 가엾어 보이잖아. 이를 어쩜 좋아. 타락 천사가 병천사가 됐어. 그냥 죽는 게 낫지 않아? 내가 특근 수당 안 받고 그냥 묻어줄까?”
“아흐닙니다.”
헤리는 겁먹은 얼굴로 손발을 비틀었다. 병신이 되었지만, 살고 싶었다.
살아 있으면 희망은 있다.
*
12월 10일은 노벨이 사망한 날로, 스웨덴에서는 노벨 시상식이 열린다.
그러나 올해에는 시상식이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굿데이의 기후예측으로는 역대급 강추위가 예상되었다.
영하 70도의 한파.
당장 노벨 시상식이 문제가 아니었다.
굿데이의 예측으로는 영하 70도의 한파가 일주일 동안 이어질 것이다.
나이아가라 폭포도 얼리는 무서운 추위였다.
“바다가 꽁꽁 얼 겁니다.”
앙리 백작은 유럽기상청 대표로 스웨덴 의회에 출석했다.
영하 70도에 노출된 국가는 스웨덴뿐이 아니었다.
노르웨이와 핀란드 일부도 피해 예상 지역에 포함되었다.
앙리 백작의 발언은 노르웨이와 핀란드에도 바로 전해졌다.
“영하 70도는 남극과 화성보다도 추운 날씨입니다. 기온이 1도 떨어질 때마다 면역력은 2%씩 낮아집니다. 어린이와 노인의 면역력은 더 떨어지죠. 굿데이의 예측대로라면, 전체 인구의 5% 이상이 얼어 죽게 될 겁니다.”
“앙리 백작. 유럽 기상청에서 솔루션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찬성해주신다면, 노벨시상식은 봄 날씨처럼 화창하게 진행될 겁니다.”
앙리 백작의 머리 위로 대형 에어스크린이 떠올랐다.
스크린에는 인공위성으로 본 발트 해와 스웨덴 영토가 보였다.
“유럽은 기후 온난화에 가장 취약합니다. 파루시아로 프랑스의 에펠탑은 무너졌습니다. 더 강한 파루시아와 헬 하운드로 유럽은 사하라 지역처럼 불모지가 될 겁니다. 100년이 지나기도 전에 유럽 인구의 50% 이상이 기후 난민이 될 겁니다. 얼어 죽거나 목말라 죽겠죠.”
앙리 백작은 유창했다.
“유럽연합은 기후 온난화를 늦추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탄소배출권 제도도 만들고, 국제 협약도 이끌어냈죠. 이제는 기후 에너지 주권을 생각할 때입니다. 국가는 시민이 안전하고 풍족하게 살 수 있도록 기후 에너지 주권을 가져야 하죠. 기후 에너지 주권의 핵심은 정부가 필요에 따라 기후를 선택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스웨덴 의회의 의원들은 하나둘 몸을 꼼지락거렸다.
그들은 앙리 백작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핵심 자료를 받아보았고, 정당대표들이 모두 모여 의논을 끝마쳤다.
스웨덴 국왕도 비밀리에 찬성한 내용이었다.
“유럽 기상청은 구조 자기장으로 날씨를 진정시키는 방법을 개발했습니다.”
‘진정시키는 방법.’ 앙리 백작이 고심해서 만든 표현이었다.
날씨조작은 국제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국제법의 핵심은 날씨 조작 기술을 군사용으로 연구하거나 응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인도적인 차원의 연구는 열어뒀지만, 날씨는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중요변수였다.
인도적인 차원의 연구는 국가이익에 따라 언제든 군사용으로 바꿀 수밖에 없다.
“효과가 있습니까?”
“크레타 섬에서 1차 시험 성공했습니다. 하루는 비를 내렸고, 다음 날은 화창했죠.”
“우리가 알아야 할 문제가 있다면 빠짐없이 알려주십시오.”
“여러분이 따듯해지면, 누군가는 춥게 됩니다. 기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자원입니다. 지속가능하고 안전한 기후를 원하신다면, 그에 맞는 성의를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성의라는 게 뭡니까?”
“날씨를 진정시키려면, 기술집약적인 자본이 사용됩니다. 비구름과 기온 그리고 바람 세기에 따라 비용을 계산했습니다.”
앙리 백작의 머리 위 에어스크린에서 숫자가 나왔다.
125억 유로.
스웨덴 국가 총생산액의 2%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일주일 동안 들이닥치는 한파를 막아주는 비용치곤 너무 크군요.”
얀 린드홀름 위원장이 나섰다.
“이 금액은 일주일 치가 아닙니다. 일 년입니다.”
“그래도 좀 과하군요. 기후 온난화는 그리스와 이탈리아 같은 남유럽에 심각한 가뭄을 가져오지만, 우리나라와 노르웨이와 같은 북유럽에는 약간의 이득을 준다고 알고 있습니다. 동아시아 곡창 지대를 얼렸던 ‘예티’ 시즌에 곡물 가격이 크게 오르지 않았던 이유는 러시아의 밀 농사가 풍작이었기 때문입니다.”
얀 린드홀름 위원장은 기후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스웨덴과 관련된 문제라면, 스스로 이해할 때까지 파고드는 성격이었다. 대놓고 떠들진 않았지만, 기후 온난화가 항상 나쁜 것은 아니었다.
머잖아. 프랑스 와인은 사라지고, 스웨덴 와인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위원장님 말씀대로입니다. 기후 온난화에 취약한 곳이 따로 있습니다. 그들은 기후거래에 응할 겁니다. 응하지 않는 국가는 ···. 기후 온난화에는 별 영향받지 않더라도, 기후 거래에서 불이익을 당하게 될까, 걱정스럽습니다.”
은근한 협박이었다.
얀 위원장의 표정이 심각했다. 당장 인구의 5%가 얼어 죽을 기후재난이 코앞이었다.
“노벨상 시상식 시즌의 날씨만 관리하는 비용은 얼마입니까?”
그는 물건값을 깎는 심정이었다. 그가 쓸 돈은 시민들이 힘들게 낸 세금이었다.
허투루 쓸 수 없었다.
“작은 성의만 보여주시면 됩니다.”
“그렇다면 ···. 제 만년필을 받아주시겠습니까? 아주 비싼 건 아니지만, 제법 잘 써집니다.”
얀 위원장의 진심이 우러나와서 회의장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앙리 백작은 얀 위원장이 맘에 들었다.
얀 위원장은 청렴한 스웨덴 정치인 중에서도 청렴한 인물이었다.
그는 25세에 평의원에 당선되고, 5선 의원을 지냈지만, 55세가 된 지금도 단칸방 월세에서 살았다.
“받겠습니다.”
앙리 백작은 의장석에 앉아 있는 얀 위원장에게 다가가 두 손을 내밀었다.
얀 위원장은 만년필을 건네며, 기대의 찬 표정으로 숨을 골랐다.
“그럼 이것으로 ···.”
“알겠습니다. 굿데이가 예측한 기후 재난을 상쇄해드리겠습니다.”
앙리 백작은 이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기후 거래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