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 준-75화 (73/141)

< 파라엔진-25 >

수잔은 파라엔진 자료를 에어스크린에 띄웠다.

수십 장의 에어스크린이 떠올랐다.

촘촘한 글씨와 복잡한 수식, 그리고 고리디우스 매듭처럼 복잡한 그래픽.

“파라엔진의 기본 개념은 ···.”

“다 봤다. 넘어가라.”

“네?”

수잔은 눈을 깜빡거렸다. 수십 장의 파라엔진 자료를 다 봤다고?

“준 대표님. 제가 교도소에 있을 때 보신 건가요?”

“아니.”

“그럼 언제 ···.”

“지금.”

“방금 띄운 이 자료의 내용을 파악하셨어요?”

“그래.”

수잔은 빨려 들어갈 것처럼 준의 눈을 보았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에어스크린 내용은 그녀가 몇 년 동안 노력해서, 겨우 통달한 것들이었다.

평면기하학에 천재적인 낙서를 남긴 수잔이었다.

그녀도 하나씩 짚어봐야 할 정도로 복잡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런 고난도 얼개를 부팅과 동시에 이해했다고?

그런 게 가능해?

준의 눈을 보니, 거짓이 아니다.

그녀는 의아해하면서 다음 자료를 띄웠다.

준의 눈빛은 번개처럼 자료를 꿰뚫었다.

“그랬군. 그래서 국가반역죄가 성립했군.”

준은 정확하게 핵심을 짚었다.

“네 그렇습니다. 준 천재님.”

파라엔진은 수잔의 창작물이 아니었다.

파라엔진의 프로토타입은 국가안전국 스키마 프로젝트였다.

스키마는 모로 섬 기생충 이름이었다.

스키마의 생존 전략은 숙주를 강하게 해서, 수명을 연장하는 것이었다.

스키마에 감염된 사람은 강해진다.

이런 이유로 스키마를 기생충보다 공생충으로 부르기도 했다.

“안전국의 스키마 프로젝트는 자금 부족으로 폐기됐고, 모든 정보를 프로메타 제약으로 넘겼어요. 프로메타 제약은 파라엔진이라는 이름으로 스키마를 연구했죠.”

자금 부족은 무슨 ···. 국가 안전국은 중앙은행 지원으로 항상 돈이 넘쳐. 보나 마나 프로메타 제약회사의 커넥션이 작동했을 것이다.

"연구는 성공했나?”

“네. 준 대표님. 제가 그 증거입니다.”

“부작용은?”

“사소합니다.”

준은 수잔의 몸속을 보듯이 그녀에게 집중했다.

“키는 원래 작았어요.”

그제야 준이 안심하는 눈치였다.

“기생충을 이용한 건강 프로젝트라 ···.”

“기생충만큼 숙주의 면역력을 잘 알고 있는 생물도 드물죠. 기생충의 협력을 얻어낸다면 ···.”

“전문의보다 낫겠군.”

“훌륭하신 비유이십니다. 준 천재 대표님.”

수잔은 타고난 아부쟁이이었다.

준은 그녀에게 아부 근성만 없었다면, 엄청난 업적을 이뤄냈을 거로 생각했다.

아부의 본질은 상대를 높이고, 자신을 죽이는 것이었다.

수잔 같은 본태성 아부쟁이가 왜 프로메타 제약회사의 규칙을 어긴 걸까?

그녀는 수줍게 고백했다.

“키 클 줄 알았어요.”

*

스탠리 법률 사무소는 수잔의 무죄 증명에 총력을 다했다.

수잔을 위한 일이 아니었다.

파라엔진으로 사업하려면, 파라엔진이 합법적인 상품이어야 했다.

파라엔진이 국가 기밀로 취급되면, 기밀 해제될 때까지 손가락만 빨아야 한다.

블랙마켓으로 유통할 수 있지만, 그건 굿데이 스타일이 아니었다.

국가 권력을 상대하려면, 뛰어난 법 지식만으로는 부족했다.

정치력 - 모든 법의 할아버지.

스탠리가 온갖 증거를 법원에 갖다 바쳐도, 정치력이 뒤받쳐주지 않으면, 곧장 쓰레기통으로 간다.

스탠리가 모은 증거는 법원으로 가기 전에, 리처드를 거쳤다.

리처드는 준을 최초로 인터뷰하고, 굿데이와 기후예측모형을 세상에 알린 기자였다.

그는 에바에게 욕먹긴 했지만, ‘리미트리스 준의 귀환’이라는 표현을 만들어낸, 스타 기자이기도 했다.

굿데이에게 유리한 기사를 써내는 편파 성향이 짙었지만, 그걸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자랑스러워했다.

그의 펜 끝에서 수잔과 파라엔진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리처드는 사람들이 관심 가질 만한 제목을 뽑았다.

‘국가안전국과 프로메타 제약회사의 부적절한 관계.’

‘프로메타 공화국, 우리는 누구를 위해 약을 먹나?’

‘스노우 교도소의 청부 살인. 국가 기관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

‘국가와 프로메타 제약회사는 왜 수잔을 두려워하는가?’

‘파라엔진은 달리고 싶다.’

‘여러분은 건강하면 안 됩니다. 프로메타가 돈을 못 벌거든요. 여러분은 꾸준하게 병들어야 합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이슈를 찾아 헤매던 언론들도 즐거운 마음으로 동참했다.

*

루이스 상원 의원은 반가운 마음으로 에바를 맞이했다.

그는 한때 선데이를 후원하고, 굿데이의 경영권을 노렸지만, 보기 좋게 헛짚고 말았다.

에바가 독한 마음으로 그를 파멸하려 했다면, 루이스는 꼼짝없이 나락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마녀 히파티아처럼 뇌출혈로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준의 뜻대로 ···.”

루이스 상원 의원은 절대 권력자에게만 보여주는 끝없는 미소로 에바를 대했다.

굿데이는 자폐아 준이 이끄는 괴짜 그룹이 아니었다.

그들은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거대 권력이었다.

“의회는 국가안전국과 프로메타 제약회사의 관계를 밝히는 청문회를 준비 중입니다. 카트리나 교도소장에게 살인을 의뢰한 범인도 찾아냈습니다.”

그는 믿음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뢰자를 찾았다고?’

에바는 뜻밖의 사실에 조금 놀랐다.

“프로메타 다섯 임원이었습니다. 그들은 급성 뇌염으로 숨졌지만, 모든 증거가 그들이 범인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수잔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것도 ···.”

“알겠어요.”

에바의 머릿속에서 큰 그림이 완성되었다.

케냐 웨스트 나일 바이러스 뇌염으로 사망한 다섯 임원은 처음부터 버리는 카드였다.

“짧은 시일 안에 수잔의 무죄 판결이 나올 겁니다. 프로메타 제약회사의 대대적인 세무 조사도 준비 중입니다.”

그는 에바 앞에서 착실했다.

에바가 지휘하는 언론과 법조계 그리고 정치계는 놀랍도록 조화로운 화음을 낸다.

루이스 상원 의원은 에바의 합창단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루이스 상원 의원님 감사합니다.”

“도움이 되어서 오히려 기쁩니다. 어제 페루 대통령 선거에서 누네즈가 당선되었더군요. 굿데이와 에바 님은 우리나라와 페루 관계에 긴밀한 역할을 해주실 수 있습니다.”

“루이스 상원 의원님은 정말 훌륭하신 분이세요.”

에바는 상류사회의 예법에 맞춰 작별 인사를 했다.

권력을 가진 후로, 그녀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예전에는 많은 이들이 그녀의 손등에 있는 문신을 찌푸린 얼굴로 보았지만, 지금은 순결함의 상징이나 고귀한 예술 작품처럼 바라보았다.

누가 알겠는가! 불도그란 별명의 루이스에게 푸들 꼬리 같은 미소가 있다는 사실을.

그녀가 루이스 상원 의원 사무실에 나와, 핑크 람보르기니에 탈 때, 로켈이 곁으로 왔다.

“에바 님아, 잠깐.”

로켈은 거리 끝을 노려보았다.

그는 본래 준을 경호했지만, 준이 토끼굴에 있을 때에는 에바를 지켰다.

명색은 에바를 보호하는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일반인을 에바로부터 보호하기도 했다.

에바의 슬랭파워와 잡식성 섹스는 주의사항이었다.

에바는 로켈의 눈길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녀도 느껴졌다.

그러나 그 기운은 슬며시 사라졌다.

“이제 됐습니다.”

로켈이 직접 람보르기니 문을 열어주었다.

“로켈 님 고마워요.”

“네?”

로켈은 살짝 놀랐다. 방금 에바가 나에게 존칭을 쓴 거 같은데 ···.

“수잔을 스노우 교도소에서 빼낼 때, 로켈 님의 직급도 올라갔어요.”

“아! 고맙습니다. 에바 님.”

*

헤리는 손끝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저것들 뭐지 ···.’

그는 CCTV 카메라를 통해 에바를 지켜보았다.

그뿐이었다.

그런데 로켈이 갑자기 나타나 길 끝에 있는 CCTV를 노려보았다.

마치 CCTV 뒤에 있는 헤리가 보인다는 듯이.

로켈의 눈빛에서 헤리는 그의 위치가 들켰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어.’

그는 스스로 말했다.

굿데이의 직원들이 모두 출중하고 기이한 능력을 지닌 것은 알지만, 맨눈으로 CCTV에 접속한 관찰자를 찾아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의 스마트 폰이 울렸다.

발신자 번호가 뜨지 않았다.

그의 스마트 폰은 등록되지 않은 번호를 자동 차단한다. 광고성 통화나 잘못 걸린 전화를 완벽하게 걸러냈다.

벨 소리는 계속되었다.

헤리는 직감으로 발신자가 로켈이라고 여겼다.

그는 통화 버튼을 누르고, 상대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통화는 바로 끊어졌다.

‘로켈이 맞구나.’

헤리는 의자에 머리를 기댔다.

지금까지 그는 사냥꾼이었고, 상대는 사냥감이었다.

“실장님. 세팅되었습니다. 시작할까요?”

스피커에서 부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화면에는 에바의 람보르기니가 보였다.

헤리는 오늘 에바를 암살하려 했다.

에바는 굿데이의 손발이었고, 그녀를 지우면 시간을 벌 수 있다.

기회를 봐서 준을 잡으면 파라엔진이 세상에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실장님?”

부하의 목소리가 결정을 재촉했다.

헤리는 에어 퓨마가 떠올랐다.

에어퓨마 - 블루아이 머신건과 에이탄 장갑차가 상륙한 요빅을 탈환했던 굿데이 특공대.

로켈에 관한 전설 같은 소문이 알고 있었다.

‘블랙블러드의 초특급 암살 요원이었다지. 에바는 ···. 엠벨라 족 마녀 히파티아를 끝장냈고, 준은 트리탄을 직접 묻었다지.’

헤리는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무모한 짓을 하는지 깨달았다.

“실장님?”

부하가 계속 채근했다.

“철수해라.”

“네?”

“철수하라고. 작전은 포기한다.”

헤리는 무겁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작전을 ···.”

부하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우당탕 소리가 들렸다.

꽁지깃 빠진 까마귀 같은 비명이 났다.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하겠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널리 알리겠습니다.”

부하는 울먹이면서, 누군가에게 목숨을 빌었다.

호세와 아쿠타미 부대가 그들을 접수한 것이었다.

헤리는 고개를 숙이고, 다가올 운명을 기다렸다.

몇 분 후에 문이 열렸다.

로켈이었다.

“오셨군.”

헤리는 의자를 돌려서, 로켈을 마주했다.

자포자기 심정이었다.

“굿데이를 상대로 작전을 걸다니. 미친 거 아니야?”

“당신도 나였다면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우리 같은 사냥개는 주인의 명령에 따라야 하잖습니까?”

“네 주인의 이름이 뭐야?”

“왜요? 신경 쓰이십니까?”

“기회를 주는 거야.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아는 방법은 많아.”

로켈은 책상에 걸터앉았다.

책상은 높았고, 그 높이에 힘입어 로켈은 헤리를 내려보았다.

‘위에서 밑을 보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간만에 탄산음료를 마시는 기분이었다.

“내가 기회가 절박한 사람으로 보입니까?”

헤리가 일어서자, 탄산음료는 사라졌다.

로켈이 아쉬워할 틈도 없이, 헤리는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65층에서 뛰어내린 것이었다.

헤리의 옷이 날개처럼 펴졌다.

그가 타락천사라는 별명을 얻은 이유는 하는 짓도 타락의 극치였지만, 위기의 순간 창문으로 뛰어내려 ‘옷 날개’로 달아났기 때문이었다.

헤리는 바람을 타며 방향을 오랜지 공원으로 잡았다. 오랜지 공원은 출입구가 많고, 오랜지 산으로 가면 그린벨트 지역으로 넘어갈 수 있다.

어깨가 무거워졌다.

그의 어깨에 로켈이 올라탄 것이었다.

로켈은 덕분에 오랫동안 탄산음료를 음미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키가 아니었다.

위치였다.

로켈은 헤리의 머리 위에 앉아, 도시를 감상했다.

로켈의 다리는 헤리의 목을 졸랐다.

헤리는 있는 힘껏 소리 질렀다.

“오로토칸이다! 프로메타 제약회사는 황금 왕 오로토칸의 기업이야! 나는 그를 위해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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