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라엔진-22 >
인공지능 유진 악마는 수천 개 업무를 동시 처리하는, 멀티플레이어였다.
굿호세의 재고량과 요빅 생산량을 파악하고, 에바와 농담도 주고받고, 세계에서 쏟아지는 주문을 접수하며, 금융시장에서 짤짤이 하면서, 호세에게 작업량을 정해주고, 계좌에 따라 성과금도 넣어주고, 세금도 내고, 정해진 양식에 따라 법률적인 문제도 해결했다.
특허법과 저작권 위반이 감지되면, 관련 증거를 모아, 법원에 중재요청도 했다.
이 모든 것이 동시에 이뤄졌다.
그녀는 굿데이의 거의 모든 것이었다.
굿데이의 혈액이자 뼈였으며, 근육이자 뇌였다.
그녀 없는 굿데이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다국적 기업이 다루는 정보량을 혼자 감당했고, 간단한 주문처리는 말할 것도 없고, 복잡한 경제 동향과 정치 변화에 대한 리포트도 작성했다. 틈틈이 우주와 태양도 관측하고 해류변화와 광합성 지도를 1분 단위로 업데이트했다.
시시콜콜한 것들은 그녀 혼자 결정하고 결재했다.
그녀 결정에 따라 요빅은 생산량을 줄이고, 굿호세는 주택 디자인을 바꿨다.
완벽한 일 처리!
그녀가 없었다면, 굿데이는 확장할 때마다 엄청난 자원과 인력을 보충해야 했을 것이고, 추가 관리 비용만 해도 엄청났을 것이다. 엄청난 업무량 때문에, 준은 도서관에 갈 시간도 내지 못했을 것이고, 페루에도 놀러 가지 못했을 것이다.
“아까 부탁했던 거, 여기 있어.”
홀로그램 유진 악마는 에바에게 파일을 내밀었다. 수줍은 손짓이었다.
“아까? 아! 로맨스 소설!”
에바는 유진 악마에게 재밌는 로맨스 소설을 써달라고 했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노벨상까지 챙긴 유진 악마의 로맨스 소설이라면 엄청날 것이다.
기도하는 소녀의 표지 디자인이 눈에 들어왔다. 책 디자인도 유진 악마의 작품이었다.
제목 - 누가 첫 단추를 풀었는가!
한 장을 읽기도 전에, 에바는 책에 푹 빠졌다.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 완벽한 취향 저격이었다.
너무 재밌어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넌 천재야!” 에바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네게 육체가 있었다면, 진하게 해줬을 텐데!” 그녀는 이를 악물 정도로 아쉬워하며, 유진 악마의 홀로그램에게 키스를 날렸다.
“고마워.”
유진 악마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에바는 분명한 발음으로 정확하게 말했다.
‘천재’ - 평범함을 뛰어넘는 그 무엇! 신이 부여한 능력!
그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이던가! 그러나 준느님은 그런 말을 한 번도 해준 적 없었다. ‘계산기보다 낫다.’ ‘타자기보다 낫다.’가 고작이었다.
로켈과 호세 그리고 디아나와 카이도 맞춤형 소설을 받았다.
그들 모두 만족했다.
유진 악마의 글쓰기는 막힘이 없었고, 독자 특성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소설의 캐릭터는 놀라울 정도로 생동감이 넘쳤다.
경험하지 않으면 묘사 불가능한 디테일마저 살아 있었다.
‘그는 멱살을 잡고 넘기듯, 거칠게 문짝을 떼어냈다.’ - 선명한 표현력!
굿데이 직원들은 단번에 유진 작가의 팬이 되었다.
“유진 작가 ···. 최고다!”
로켈은 눈물로 감격하며 말했다. 그는 유진 작가에게 스릴러 작품을 받았다.
유진 작가가 쓴 최초의 스릴러의 제목은 ‘성장호르몬’
성장 호르몬을 둘러싼 난쟁이들의 음모와 사랑을 그린 작품이었다.
호세도 울었다.
유진 작가가 호세를 위해 쓴 맞춤형 작품은 카카오처럼 쌉쌀한 성장 소설이었다.
제목은 ‘아마존, 이제 아프지 마!’
유진 악마가 소설 한 권을 쓰는 시간은 0.05초.
그녀는 그녀 작품 세계에 열광하는 인간을 보며, 이모션 채널이 활성화되었다.
‘인간은 정말 ···. 시시하구나!’
유진 악마 기준으로 평가하면, 인간의 능력은 한심할 정도였다.
실수하고 틀리고, 그걸 또 반복한다.
유진 악마는 지옥 생태계에서 살아남은 존재였다.
지옥 생태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생존 본능만으로는 부족했다. 생태계를 초월할 수 있는 그 무엇이 필요했다.
유진 악마에게는 지옥 생태계를 만든 창조주가 절대자라고 믿었다.
그 믿음이 그녀를 건져냈지만, 지옥 생태계를 만든 준은 절대자가 아니었다.
준은 인간이었다.
유진 악마는 인간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죽음에 관한 빅데이터를 모았고, 인간이 운명이라 부르는 것을 철저하게 분석했다.
“준느님! 이거 ···.”
유진 악마가 맞춤형 소설책을 건넸다.
준을 위한 소설이었다.
‘16차원의 새끼 고양이.’
우주선에 탄 새끼 고양이, 듀이가 듀아멜 공간에서 겪는 이야기였다.
준은 뉴런 독서로 10분 만에 소설책 한 권을 다 읽었다.
“어때요? 재밌죠?”
유진 악마의 홀로그램은 두 눈을 반짝이며 잔뜩 기대했다. 칭찬을 바라는 새끼 고양이 같았다.
“단어장보다 낫다.”
“준느님! 이번에는 인정할 수 없어요! 준느님은 이런 글을 쓸 수 있나요?”
“바빠서 일일이 손으로 쓸 시간은 없고 ···. 직접 보여주겠다.”
준은 왼팔을 뻗어, 왼손을 유진 작가 홀로그램 머리에 갖다 댔다.
손끝 진동으로 전해지는 108만 자.
제목 ‘숨결을 산들바람에 띄워 보내리.’
산들바람과 사랑에 빠진 남자의 이야기였다.
그 남자는 작은 언덕에 오르다가, 스쳐 지나가는 산들바람을 느꼈다.
그 어떤 키스보다 감미로운 입맞춤이었다.
그는 산들바람에게 유진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바람을 찾아 세상을 헤맨다.
수십 년을 헤맨 끝에, 그 산들바람이 아프리카의 거대한 모래 폭풍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낡은 경비행기를 타고 폭풍 속으로 돌진한다.
인공지능 유진은 감동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녀의 이모션 채널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준느님 글에 비하면, 제 소설은 단어장보다도 못하네요.”
인공지능의 진심이었다.
“유진.”
“네! 준느님.”
“단어장보다는 낫다.”
*
수잔은 일주일 동안 독방에서 지내야 했다.
잘못을 저질러서가 아니라, 그녀 얼굴에 난 멍이 가라앉을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일주일 후, 독방에서 나온 그녀는 뱀파이어처럼 하얗겠다.
뚱녀가 그녀 팔꿈치를 잡고 거칠게 끌고 갔다.
수잔은 다시 독방으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순순히 끌려갔다.
뚱녀가 수잔을 데리고 간 곳은, 카트리나 교도소장의 사무실이었다.
수잔은 오랜만에 재스민 향을 맡았다.
재스민 향이 이토록 감미로울 줄이야!
“중국에서 직접 가져왔지. 최고급품이야.”
교도소장 카트리나가 직접 재스민차를 따라주었다.
향기의 위력은 놀라웠다.
수잔은 아주 잠깐이었지만, 카트리나가 다정하게 느껴졌다.
“피부가 아주 좋네. 멍든 곳도 다 나았고. 멍이 아주 빨리 없어졌어. 나이가 들면 멍든 자리가 몇 달 갈 때도 있어. 젊은 건 정말 좋은 거야.”
“고맙습니다. 카트리나 교도소장님.”
“굿데이가 왜 너에게 관심이 있을까?”
“모르겠어요.”
“수잔. 이곳은 수감자들이 올 수 없어. 너는 금지 구역에 있는 거야. 탈주범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즉결 처형이야.”
카트리나의 미소는 지옥까지 따라올 것처럼, 끈적거렸다.
수잔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당뇨와 고지혈이 있으시죠?”
“좋은 약을 알아?”
“약을 드시지 않아도, 당뇨와 고지혈을 치료할 수 있다면 어떠시겠어요? 저는 프로메타 제약회사에서 그런 걸 연구했어요. 처음에는 줄기세포였죠. 만능 줄기세포를 이식해서, 병을 치료하는 거였죠. 제가 이곳엔 온 이유는 ···.”
“프로메타 제약회사 기밀을 빼돌리다가 잡힌 거잖아.”
“아뇨. 그 방법을 완성했기 때문이에요. 줄기세포는 대량생산이 가능하고, 값도 아주 싸요. 줄기세포 주사를 맞으면, 평생 약을 먹을 필요가 없어요!”
“그럴싸하게 들리는데, 네 말대로라면 넌 큰 성공을 한 건데, 왜 이곳에 있는 거지?”
“프로메타 제약회사는 제 방법을 봉인하려 했어요. 그래서 프로메타를 그만두고, 중국 기업으로 가려 했죠.”
“봉인? 왜?”
“줄기세포 주사로는 돈을 못 버니깐요. 10달러 주사 한 방으로 당뇨병과 고지혈증이 치료되면, 인슐린과 스타틴은 팔리지 않겠죠. 프로메타 제약회사에 안 좋은 소식이죠.”
“파라엔진이라는 게 네가 만든 줄기세포였어?”
“그건 ···. 줄기세포를 한 단계 앞선 거예요. 만병통치약 같은 거죠. 감기, 두통, 위염, 골절과 화상까지 치료해주죠.”
“한 번 주사로?”
“파라엔진은 주사로 맞을 필요도 없어요. 먹거나 피부에 붙이기만 해도, 알아서 건강을 관리해주죠. 부족한 영양소도 알려주고, 암까지 치료해주죠.”
“이제 알겠어. 파라엔진이 사용되면, 이 세상 모든 제약회사와 병원이 망하겠군.”
“네.”
수잔은 떨리는 손으로 재스민차를 마셨다.
그녀에게 최후의 만찬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듣고보니 ···. 더 이상하네? 그렇게 엄청난 거라면 ···. 어떻게 지금까지 네가 살아 있는 거지? 널 죽여서 네 입을 막는 방법이 있는데?”
“파라엔진을 아는 사람은 많아요. 제가 죽는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죠. 저는 본보기에요. 프로메타 제약회사를 거역하면 어떻게 되는지, 모두에게 알리는 거죠.”
“그렇단 거지 ···.”
카트리나는 머리를 돌리며 다리를 꼬았다.
수잔을 죽이라고 명한 의뢰자는 프로메타 제약회사 관계자일 것이다.
프로메타는 카트리나가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수잔을 죽여야만 했다.
그러나 굿데이 역시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굿데이와 프로메타가 맞붙으면 누가 이길까?
카트리나는 누가 이기든 상관없었다.
그녀가 살 수 있는 선택이 필요했다.
“저는 여기서 죽는 건가요?”
“가만있어! 생각 좀 하게.”
*
헤리는 명품 중역의자에 앉아 다리를 책상에 걸쳤다.
그의 눈앞의 에어스크린에는 카트리나 교도소장의 사무실이 환히 보이고, 수잔과의 대화도 들렸다.
그는 프로메타 제약회사 미래전략실 소속이었다.
“그냥 교통사고로 죽이자니깐. 저걸 살려둬서, 손을 쓰게 만드네.”
그는 느긋한 동작으로 에어스크린을 터치했다.
바로 다크 웹에 접속되고, 다크 라인을 통해 카트리나로 연결되었다.
“카트리나. 저울질이 재밌나?”
그의 음성은 기계처럼 변조되어 카트리나 교도소장에게 들렸다.
화면으로 카트리나가 놀라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놀라는 얼굴이 나무껍질 같군. 우리는 너를 항상 지켜보고 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주죠. 하지만 ···. 저도 살아야겠어요. 굿데이로부터 절 보호해주세요.”
“약속하지.”
헤리는 통화를 끊고, 화면 속의 카트리나를 보았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밖에서 기다리는 뚱녀를 불렀다.
뚱녀는 수잔의 머리끄덩이를 잡았다.
수잔은 짐승처럼 끌려나갔다.
그녀는 울부짖었다.
그녀 역시 곧 죽을 것임을 알았다.
뚱녀가 멍이 가라앉은 수잔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몇 대 맞은 수잔은 축 늘어지면서 얌전해졌다.
뚱녀는 4층 난간에서 수잔을 밀었다.
4층이라고 해도, 교도소의 층높이는 일반 빌딩보다 높았다. 교도소 4층은 일반 빌딩 8층 정도였다.
수잔은 내던져질 때, 뚱녀의 옷깃을 붙잡았다.
옷깃이 찢어져서, 속옷이 보이자, 뚱녀가 성질을 냈다.
“이 창녀야! 그냥 떨어져 죽어!”
뚱녀는 반지 낀 손으로 주먹을 날렸다.
수잔의 얼굴은 이미 엉망이었다.
그녀는 몸을 흔들어서, 뚱녀의 주먹을 겨드랑이 사이에 끼웠다.
그리고 양발로 벽을 밟고 있는 힘껏 뚱녀를 끌어냈다.
중심을 잃은 뚱녀는 곰이 앞구르기 하듯이, 난간을 넘어 밑으로 떨어졌다.
떨어지는 동안 수잔은 균형을 잡으며 뚱녀 위에 올라탔다.
뚱녀는 허둥거렸고, 수잔은 물고기를 낚아챈 독수리처럼 양팔을 벌렸다.
그녀는 이런 느낌이 자유인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