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 준-71화 (69/141)

< 파라엔진-21 >

로켈은 수잔의 주황색 죄수복과 하얀색 운동화에서 티베트 라마승을 떠올랐다.

규칙적인 라마승의 생활과 교도소의 삶이 크게 다를 거 같지 않았다.

의식 공유라고 할까?

종교에 갇힌 삶과 죄에 갇힌 삶이 만들어낸 패션은 놀랍도록 닮았다.

로켈은 신은 믿었지만, 종교는 섬기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은 믿지 않았지만, 준은 섬겼다.

준의 인간성이 훌륭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준에겐 인간성이 결핍되어 있고, 그것이 준 최대 강점이었다.

준에게 인간성이 충만했다면, 이미 오래전에 성공에 도취해, 너무나 인간다운 그래서 짐승 같은 삶을 누렸을 것이다.

그렇게 달가운 상상은 아니지만, 에바가 준의 아이를 낳았을지도 모른다.

로켈은 하루에도 몇 번씩 준이 인간 같지 않아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수잔의 키는 로켈과 엇비슷했다.

여자치고도 작은 키였다.

로켈은 참으로 오랜만에 눈높이가 맞는 상대와 마주 앉았다.

“이곳 생활 어때?”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아서 잘 모르겠어요.”

“왼쪽 눈이 멍들었는데 ···.”

“자다가 벽에 부딪혔어요.”

“벽에 부딪힌 자국이 아닌데요? 반지 자국이 있는데.”

“정확하게 벽에 부딪힌 자국이에요.”

수잔은 지나치게 강조했는데, 겁에 질린 눈빛이었다.

이곳은 흉악범과 테러범 그리고 국가 반역자의 집합소였다.

바퀴벌레만큼이나 폭력이 흔했다.

수잔은 30년 형을 받았다. 그녀가 출소할 즈음에는 볼품없는 할머니가 되어 있을 것이다.

“어쩌다가 국가 기밀에 손댄 거지?”

로켈의 질문에 수잔은 입을 꾹 다물었다.

억울함으로 가득 찬 침묵이었다.

그녀는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그녀가 믿었던 동료들에게 제대로 배신당했고, 사랑하던 회사와 국가로부터 반역자라는 낙인까지 찍혔다.

로켈은 시계를 봤다.

컴팩트한 디자인의 초고급 손목시계였다.

인터뷰 시간이 3분 정도 남아 있었다.

“굿데이에서 오셨다고 하셨죠? 절 도와주실 수 있나요?”

“영치금과 사식을 넣어주지. 그 이상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 우리가 탐낼만한 것이 수잔 양에게 있어야겠지.”

로켈은 시계를 힐끔거렸다.

“저는 누명을 썼어요.”

“알아.”

“아신다고요?”

“교도소는 죄지은 사람이 오는 곳이 아니야. 누명을 쓴 사람이 오는 곳이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 사람들의 피난처야.”

“정말 굿데이에서 온 게 맞나요? 굿데이는 사람을 돕는 ···.”

“헛소리야. 우리는 누굴 돕거나 하지 않아. 굿데이는 ···. 오직, 준 회장을 위해 일해.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않지. 원래는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는데 ···. 수잔 양이 괜한 기대를 품은 거 같아서 확실하게 하는 거야.”

“그럼 여긴 왜 오신 거죠?”

“준 회장이 수잔 양의 낙서에 관심이 많거든. 굿데이에는 시즌이 있어. 첫 번째 시즌은 파루시아였지. 유럽을 개박살 낸 허리케인. 굿데이는 그걸로 돈을 벌었어. 두 번째 시즌은 헬하운드였어. 제목과 달리 글로벌 가뭄으로 돈을 벌진 않았지만, 노벨상을 챙겼지. 요빅 생태계라고 요즘 아주 핫한 주제지. 입자 농축 같은 것은, 학구적인 수잔 양이 평소처럼 연구소와 학교를 오갔다면, 커피를 마시며 음미했을 거야. 수잔 양에게 아직 기회가 있다고 생각해. 다음 시즌이 파라엔진이거든.”

“방금 뭐라고 하셨죠?”

“들었잖아.”

로켈은 시계를 힐끔거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이 열리고 뚱뚱한 교도관이 들어왔다.

뚱녀는 반지를 끼고 있었는데, 수잔 눈 위에 있는 자국과 같았다.

수잔은 돼지의 놀잇감이었다.

“기다려요!”

수잔이 헬의 손을 잡으려 하자, 뚱녀가 수잔을 때렸다.

“면담은 끝났어! 이 창녀야!

로켈은 뚱녀를 말리지 않았다.

수잔이 억울한 일을 당한 건 확실했다.

본래 이 세상은 좀 그렇다.

수잔은 인생을 송두리째 잃었고, 뚱녀의 놀잇감으로 살아야 한다. 다이나믹하긴 해도 재밌는 삶은 아닐 것이다.

그녀에게 기회가 있을까?

로켈은 그녀가 절실하지 않다고 느꼈다. 기회가 절실했다면, 10분 면담 동안에 그녀가 가진 것을 보였어야 했다.

억울함을 호소할 것이 아니라, 그녀의 가치를 드러내야 했다.

보여줄 게 아무것도 없었다면, 옷이라고 벗었어야 했다.

법원도 구제해주지 않은 억울함을 굿데이가 챙겨줄 이유가 없었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 로켈은 키 작은 여자가 별로였다.

*

킹스덤 거리는 축제 분위기였다.

샴페인이 끊임없이 터지고, 여자들은 자청해서 웃옷을 벗어 던졌다.

모두 대담한 방식으로 굿데이의 노벨상 수상을 축하했다.

공짜 피자, 공짜 맥주, 공짜 섹스까지 ···.

기자들이 몰려들었고, 인근 초등학교는 휴교까지 했다.

아이들 질문에 답하려면, 선생님들이 이번 노벨상에 대해 알아야 했고, 그러자면 시간이 필요했다.

기자, 학자,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굿데이로 참고자료를 요청해왔다.

유진 악마가 메시지 내용에 따라 자료를 보내줬다.

그녀가 쓴 ‘지옥에서 살아남는 법’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노벨상 위원회는 ‘지옥에서 살아남는 법’의 작가를 준이라고 믿고 있었다.

인공지능이 쓴 사실이 알려지면, 사람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을 것이다.

환락의 거리 - 킹스덤.

춤추고 노래하고 술 마시고 ···.

준은 성경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가 이렇지 않았을까? 싶었다.

‘노벨상은 굿데이가 받는데 ···. 왜 저들이?’

엄청난 독서로 인간 심리와 감정을 어느 정도 파악했지만, 아직도 헷갈렸다.

진화론적으로 봤을 때, 저런 행위가 생존에 도움이 되는 걸까?

공동체 의식과 결속력 강화에는 긍정적이었지만, 생존이라는 측면은 모호했다.

번식률은 높일 것 같았다.

리무진 운전석에 앉은 에바가 뒷거울로 준을 보았다.

준은 줄리아에게 기습 키스 당했지만, 그녀의 손이 바지춤을 공략하기 전에 빠져나왔다.

에바의 눈에 준은 무척이나 ···.

“피곤해 보여.”

사실, 그녀도 노벨상 때문에 죽을 맛이었다.

여기저기에서 미팅 제안이 끊이질 않았다.

몸이 백 개가 있어도 모자랐다.

굿데이는 소수인원으로 유지되었고, 노벨상과 같은 외부 충격에는 좀 약했다.

에바는 이번 기회에 굿데이 인맥과 맨파워를 확장할 계획이었다.

감정 결핍증 준의 최대 약점은 혼자 너무 잘났다는 것이었다. 스티븐 교수에게 찍힌 이유도, 준이 혼자 너무 잘났기 때문이었다.

준은 앞으로도 계속 혼자 잘날 것이고 ···.

“리만 함수의 Z값은 쉽게 구하겠는데 ···. 사람을 이해하는 건 어려워.”

“줄리아가 미안하대. 너무 흥분해서 어쩔 수 없었대.”

에바는 운전석에 앉아 있었지만, 운전하진 않았다.

리무진 아르크스의 자동 모드로 운행 중이었다.

준은 생각에 잠겼다.

그가 집중력을 발휘할 때마다 주위는 잔잔해졌다.

준은 어렸을 때부터 다른 아이와 달랐다.

준의 아버지 데이빗은 항상 말했다.

‘준아! 넌 다른 아이와 다르다.’

그리고 강조했다. 다른 것은 틀린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고, 잘못된 것도 아니라고!

언제나 덧붙여지는 말 한마디.

‘아빠는 널 사랑한다.’

“에바 ···. 부모님은 지금 괜찮으실까?”

“아까 통화했어요. 꽤 흥분하셨더라고요. 기자들이 몰려왔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셔서, 사람을 보냈어요. 카이도 학교에서 데려왔고요. 한동안 시끄러울 거예요.”

“부모님들이 나 때문에 힘드실까?”

“그럼요. 부모님들이 조용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을 알아볼까요?”

“그래야 해?”

“준 회장님이 원하는 대로 할게요. 우선은 뒤에서 쫓아오는 기자들 좀 떨어낼게요.”

에바는 경찰서장에게 전화했다. 곧바로 순찰자가 나타나 아르크스를 쫓는 차량을 세웠다.

아르크스가 불카누스 토끼굴 입구에 도착하자, 참새 크기의 드론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게 보였다.

드론들은 침입자들에게 경고를 보내는 중이었다.

‘당신은 불카누스 사유지를 침범하셨습니다. 사유지 보안법에 따라, 당신은 촬영되었습니다. 이 영상은 법적 증거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바로 나가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고 엄중히 처벌하겠습니다.’

드론의 경고를 무시한 침입자가 있었지만, 세이턴이 나타나면 꽁지 빠지게 도망갔다.

에바의 스마트 폰으로 카이의 메시지가 들어왔다.

‘에바 누나! 케이크 준비했어.’

에바는 흠칫 놀라며, 바로 답장했다.

‘하지 마! 준 회장 기분 안 좋아.’

‘왜?’

‘원래 시크 하잖아. 준 회장님께서 노벨상으로 감동 먹겠어! 케이크 빨리 치워! 평소처럼 하는 게 준 회장을 돕는 거야.’

‘준 형아 재미없다.’

토끼굴에는 모두 모여 있었다.

로켈, 호세, 카이, 디아나, 토그, 아쿠타미 부대원들 ···.

그들은 준비했던 케이크와 파티용품을 모조리 치웠다. 그리고 평소와 다름없이 뭔가를 했다.

그들의 가족과 친구 그리고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에게서 축하 메시지가 날아왔다.

일하는 척 메시지에 답장했다.

준은 사무실이 들뜬 분위기를 눈치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 ···. 딸기 케이크 정도는 기대했었다.

직원들은 노벨상으로 가벼운 흥분상태였지만, 주된 관심은 파라엔진이었다.

준은 다음 시즌 투자금 모집 타이틀을 파라엔진으로 정하면서,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직원들은 함께 머리를 모아, ‘신형 전기 자동차엔진일까?’ 라고 추측했다.

파라엔진이 조금씩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로켈을 통해서였다.

평면기하학에 낙서를 남긴 수잔이라는 범죄자.

그녀도 파라엔진이라는 단어에 반응했었다.

인터뷰 룸이 도청되지 않았다면, 로켈이 수잔에게 차근차근 캐물었을 것이다.

“그러니깐, 이 세상에서 파라엔진의 참뜻을 아는 사람이 준 회장님과 수잔 두 명이라는 거지?”

에바는 로켈의 보고를 들으며 내용을 정리했다.

“최소 두 명이야. 수잔은 프로메타 제약회사의 기밀을 빼돌리다가 잡혔어. 그 기밀 속에 파라엔진이 포함되었겠지. 기밀과 관련된 사람은 파라엔진을 안다고 봐야지.”

“기밀을 언제 알 수 있지?”

“스노우 교도소에서는 어려워. 출입과 동시에 감시자가 붙더라고. 그러지 말고, 준 회장님에게 직접 물어보면 안 돼?”

“준 회장은 친절한 성격이 아니야. 내일 내가 직접 수잔을 만날 게.”

“안 돼!”

“왜?”

“준 회장이 나에게 시킨 일이야. 중간에 손 바뀌는 건 싫어.”

“내가 네 상사인 건 알지?”

“네가 준 회장의 명령에 따를 때는 그렇지. 준 회장의 뜻을 거역하면, 용납하지 않겠어!”

로켈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에바는 골프공을 살피는 골프선수처럼 로켈을 뜯어봤다.

“시온의 판결에 따라 준 회장을 방치한 주제에 잘도 지껄이네.”

“그에 대한 처벌은 충분히 받았다.”

로켈의 귓가에는 제인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 ‘재수 없어!’

*

카트리나 교도소장은 다크 웹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다크 웹을 통하면, 개인 신분을 감출 수 있다.

그녀의 의뢰인은 수잔에게 관심이 많았고, 수잔과 접촉하는 인물을 궁금해했다.

액정화면에 문자가 하나둘 나타났다.

‘굿데이의 로켈?’

카트리나는 대답 대신, 교도소 출입문에서 촬영된 로켈의 이미지를 보냈다.

‘대화 내용은?’

이번에도 도청 내용을 전송했다.

화면 저편에 있는 정체불명 의뢰자의 고뇌가 보이는 듯했다.

한참 후에 낫을 든 사신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수잔을 죽이라는 뜻이었다.

카트리나 교도소장은 양손 검지로 코끝을 살짝 눌렀다.

평소라면 별 부담 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수잔을 지우는 건 아주 쉽다.

걱정거리가 있다면, 굿데이였다.

그녀도 블랙마켓에서 떠도는 소문을 들었다.

굿데이는 마녀 히파티아를 잡고, 용의 주인 트리탄을 묻고, 악몽의 암살자 랜달까지 잠재웠다. 최근에는 페루 도살자들까지 처리했다고 한다.

페루 도살자들은 납치, 고문, 강간, 살인에 능통한 집단이었다. 그들은 비밀리에 움직였고, 페루 정보부가 더듬지도 못할 정도로 정도로 은밀했다.

그런데도 굿데이에게 발렸다.

그녀의 일 처리는 ‘묻지 마.’ 식었지만, 이번에는 의뢰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굿데이가 수잔에게 원하는 게 뭡니까?’

통신이 바로 끊어졌다.

화면에 남아 있는 것은 두 장의 사신 카드뿐이었다.

한 장은 수잔의 것이었고, 나머지 한 장은 카트리나의 것이었다.

의뢰를 수행하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노골적인 경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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