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 준-70화 (139/141)

< 파라엔진-20 >

리처드는 고민의 고민을 거듭했다.

그는 준이 킹스덤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먼저 알았다.

에바의 귀띔이었다.

그녀는 마녀 ‘히파티아의 여론몰이’와 ‘선데이의 확장전략’ 그리고 루이스 상원 의원에게 시달리면서, 정치와 언론의 중요성을 고통스럽게 깨달았다.

평소에도 알고는 있었지만, 그토록 통렬할 줄은 몰랐다.

지랄 맞은 악몽이 따로 없었다.

그녀에겐 굿데이를 빛내줄 믿을만한 기자와 언론인이 절실했다.

리처드라면 믿을 수 있었다.

그의 인품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리처드가 에바의 슬랭 파워를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리처드는 준에게 누네즈 장관의 딸이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

덕분에 준까지 미다스 그룹의 타켓이 되었다.

에바는 그 답례로 리처드에게 욕 바가지를 날렸다.

에바의 슬랭 파워를 아는 사람이라면, 굿데이를 깎아내리는 기사를 쓸 바엔 똥물을 마실 것이다.

‘멋지게 표현해야 해. 멋지게. 모두가 기다리던 준이 돌아오고 있어. 한 줄 표현으로 누구나 쉽게 말하고, 기억될 수 있는 표현이 필요해.’

그는 거실과 부엌을 끊임없이 오갔다.

“굿데이가 돌아왔다! 아니야. 이건 너무 약해. 굿데이의 회귀본능? 이건 너무 웃기고 ···. 킹스덤의 주인이 오신다! 이건 준이 독재자 같잖아. 임팩트 있으면서 오해의 소지가 없어야 해.”

섹스가 도움될까? 싶어서 록시봇을 작동했다.

록시봇은 체중 48kg 키 168cm의 C컵 가슴을 가진 섹스 전용 로봇이었다.

리처드의 본래 성 취향은 지극히 정상적인 휴먼 여성이었다.

그에겐 ‘영화 후 저녁 식사’처럼, 가볍게 섹스를 즐길 애인이 항상 있었다.

그러나 전쟁 취재로 한쪽 팔과 다리를 잃고서 상황이 변했다.

탐구심이 넘쳐나는, 그의 애인은 처음부터 로봇 팔과 다리를 흥미로워했다.

로봇손은 섬세하게 그녀의 피부를 애무하며 적당한 자극을 유지했다.

시작은 정말이지 너무나 좋았다.

흥분한 그녀가 나머지 팔과 다리도 로봇으로 바꾸는 게 좋겠다고 할 정도였다. 가능하면 ···. 그것도.

중간도 훌륭했지만, 절정을 앞두고 문제가 터졌다.

로봇 오작동으로 그녀가 다쳤다.

리처드는 멈추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로봇팔과 다리는 그녀만 공격한 게 아니라, 리처드도 공격했다.

인체 로봇 공학자들은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리처드는 그 후 안전한 섹스를 추구했고, 그 결과가 록시봇이었다.

리처드는 록시봇의 질 안으로 정액을 뿜어대다가, 표현이 떠올랐다.

- 리미트리스 준의 귀환 -

리처드는 에바에게 기사를 보냈다.

“맘에 들어?”

“기대 이상이야.”

“다행이네. 내 모든 걸 쏟아부으며 만든 표현이었어.”

“뭘 쏟아부었다고?”

“ ···. 자세하게 말할 순 없지만, 그런 게 있어. 남자들만의 비밀 같은 거지.”

“더러 ···.”

에바는 자세하게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여자만의 육감이었다.

가끔은 그녀 자신도 뛰어난 육감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혐오스러웠다.

*

킹스덤 중앙도서관 준의 자리는 여느 때처럼 비어 있었다.

준은 ‘평면 기하학’을 반납하고, 자리에 앉았다.

사람들은 숨을 멈추고, 준을 지켜보았다.

전설이 나타났다.

준은 25일 만에 주저앉은 페루 경제를 되살렸고, 정치 생명이 끝난 누네즈를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만들었다.

준이 한 일이라곤, 샤나이슈카 리조트에서 놀다가 아마존에 한 번 갔다 오고, 요소요소에 나무 심듯이 굿호세를 꽂은 것뿐이었다.

굿호세는 ‘가속도 수익배분’을 도입한, 새로운 개념의 기업이었다.

굿호세의 사업내용은 더 놀라웠다.

‘파차마마’로 불리는 거대 3D 프린터는 돈 되는 건 다 만들어냈다. 집, 병원, 비행기, 자동차, 벽돌, 컵과 빨대까지.

굿호세는 인간의 일자리를 모조리 휩쓸었지만, 소득을 가로채진 않았다.

굿호세 지역민들은 마음껏 주문할 수 있었다. 집, 자동차, 냉장고 ···. 뭐든 가능했다.

그곳에서는 돈 때문에 일하는 건 아주 유치한 짓이었다.

그들은 돈보다 더 원시적인 욕망에 따라 일했다.

바로 인정받는 것이었다.

이웃과 친구 그리고 가족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을 찾았다.

운 좋게 찾아낸 것은 노래하고 춤추는 것처럼, 일보다는 놀이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킹스덤 도서관의 학생들과 직원들 그리고 이용자들은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준의 존재는 거대했다.

엄청난 갑부, 세계적인 영향력, 그리고 신비로울 정도의 담대함.

‘어떻게 저게 가능하지?’

줄리아는 감탄의 감탄을 연발했다.

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소처럼 책을 읽었다.

아마존 햇빛에 피부가 탄 거 말고는 변한 것도 없었다.

이곳저곳에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위대한 예술작품처럼, 준을 직접 보는 것은 경탄 그 자체였다.

누군가 새 된 비명을 질렀다.

“야! 이 개새끼야! 너 너무 멋있어!”

평소였다면 소리친 사람에게 눈초리가 몰렸겠지만, 사람들은 서둘러 그들의 입술을 매만졌다. ‘혹시 내가 소리친 게 아닐까?’ 싶었다.

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독서에 집중하느라, 새 된 비명을 듣지 못했지만, 우연의 일치로 읽고 있는 부분이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대목이었다.

······. 그중에 으뜸이 사랑이니라.

‘사랑이라 ···.’

감정결핍 증후군 준에게 사랑은 K2 암벽이었다.

아무리 이해하려 노력해도, 닿지 않는 꼭짓점이었다.

‘도대체 사랑이 뭐길래 ···.’

그의 표정은 아그리파 석고상만큼이나 심각해졌다.

더불어 사람들의 자세도 움츠려졌다.

준의 기준에서 보면, 으뜸은 사랑도 믿음도 아니었다.

- 적응 -

적응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트리탄을 묻은 것도, 암살자 포스마일을 상대했던 것도, 도살자를 벌레 밥으로 만든 것도 ···. 적응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적응이야말로 생존의 절대 조건이었다.

적응 없는 생존은 성립 불가능했다.

준은 에어스크린을 띄워서 한 바퀴 돌렸다.

그를 지켜보던 모두가 스크린에 있는 문구를 읽었다.

- 적응하라. -

준과 같은 맥락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단번에 받아들였다.

‘맞아! 준은 점점 성장하고 있어. 평생 감탄만 할 순 없어. 그에게 적응하고 익숙해져야지.’

그들은 폭풍이 그친 바다처럼 잔잔해졌다가, 다시 출렁거렸다.

‘도서관 정숙’을 가훈으로 여기는 길버트가 ‘세상에!’ 중얼거리며, 이마를 쳤다.

뉴스 속보에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되었다.

굿데이는 4개 부문을 차지했다.

노벨 경제학상 - 가속도 수익배분.

노벨 물리학상 - 요빅의 입자농축.

노벨 평화상 - 기후예측모형.

노벨 문학상 - 지옥에서 살아남는 법.

“이얏호!”

누군가, 처음으로 들소를 사냥한 인디언처럼, 소리 질렀다.

준은 뉴런 독서로 집중력 넘치는 책 읽기를 했지만, 사방에서 터지는 고함을 외면할 수 없었다.

짜증이 확 밀려왔다.

여긴 도서관인데 ···. 왜들 저러는 거야?

준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하고 싶었다.

도서관에서 ···. 으뜸은 정숙이니라.

준의 에어스크린은 느린 속도로 회전했다. 문구는 똑같았다.

- 적응하라. -

갑자기 줄리아가 미친년처럼 팔을 내저으며, 준을 덮이고 키스를 퍼부었다. 준은 무방비 상태로 당했다.

“노벨상이라고 노벨상!”

준은 갑자기 축축해진 뺨과 입술 때문에 불쾌지수가 높아졌다.

쏟아지는 키스 공습 속에서, 왜 줄리아의 ‘공격’을 못 막았는지, 왜 피하지 못했는지 분석했다.

준에겐 키스를 중단하는 것보다 분석이 더 중요했다.

준의 육체 능력은 이미 인류최강 수준이었다.

도서관에 있는 모든 사람과 동시에 맞붙어도, 때려눕힐 수 있었다.

줄리아는 특수 능력자가 아니었다.

조금 예쁜 여자의 키스 어택을 막아내지 못하다니!

인체 생리학과 6시그마 밖에서 관찰되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동원해도, 설명할 수 없었다.

별안간 준의 머릿속에서 큰 북소리가 울렸다.

맞구나!

이거구나!

바로 이래서, 그 명제가 성립하는구나!

준은 이해되지 않았던 구절을 비로소 다가왔다.

···. 그중에서 으뜸은 사랑이니라.

10분 전에 읽었던 다른 명제가 덧붙여졌다.

···. 사랑은 미친 짓.

“그만해!”

분석을 끝낸, 준은 줄리아를 밀어냈다.

그러나 줄리아는 굶주린 거머리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하랴, 싶었다.

“알았어! 알았어! 해도 되는데 ···. 혀는 넣지 마!”

한참 후에 준이 다시 투덜거렸다.

“이건 뭐 ···. 인공호흡도 아니고 ···. 숨 좀 쉬자!”

준은 마음속으로 ‘에바 나 좀 구해줘!’를 외쳤지만, 그 시간 에바는 다른 여자와 ···. 인공호흡 ···.

*

로켈은 제인을 여자친구로 만들지도 못했고, 그녀 맘을 훔치지도 못했다.

그가 얻은 건, 엄청난 모멸감과 자괴감뿐이었다.

준의 형벌은 가혹했다.

로켈은 몇 번이고 다짐했다.

다시는 굿데이를 소홀치 않으리라! 만일 시온과 엇나간다면, 굿데이를 우선하리라!

그의 결심은 DNA에 새겨져서, 자손 대대로 물러줄 수 있을 정도였다.

교도소장은 노처녀 히스테리가 연상되는 깡마른 체형의 50대 여성이었다.

그녀는 금속으로 만든듯한 빳빳한 정장으로, 로켈을 맞이했다.

로켈은 그녀의 엉덩이가 아이를 낳아보지 못했고, 가슴도 수유경력이 없다고 여겼다.

굉장히 끔찍한 추측이었지만, 그녀는 아직 처녀일 것이다.

로켈은 굿데이의 대표로 교도소를 방문했고, 그에 따라 귀빈 대우를 받았다.

정치인들과 고위 공무원들은 굿데이가 페루에서 보여준 영향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준이 약간의 쇼맨십만 보여줘도, 다음 대통령 후보의 등락이 결정될 것이다.

그들은 성심성의껏 굿데이를 떠받들어야 했다.

“수잔은 국가반역죄로 수용되었습니다. 원칙적으로 면회가 되지 않습니다.”

교도소장이 내민 것은 수잔의 파일이었다.

수잔은 프로메타 제약회사의 기밀을 외국으로 빼돌린 혐의로 복역 중이었다.

로켈은 처음부터, 준이 이번 일을 그에게 명한 것이 의문스러웠다.

‘평면 기하학에 낙서를 한 사람을 찾아라!’

덧셈 문제만큼이나 쉬웠다. 그리고 사람을 만나는 일은 에바가 담당했다.

갈라파고스 해에서 표류하던 호세와 아쿠타미를 건져낸 것도 에바였고, 마녀 히파티아를 상대했던 것도 에바였다.

로켈은 연쇄 살인범, 살담 카메조를 으깼지만, 준의 경호 차원에서 이뤄진 실력행사였다.

인맥 쌓기나 스카우트는 전적으로 에바의 몫이었다.

로켈과 호세 그리고 카이를 스카우트한 것도 에바였다.

의문은 금방 풀렸다.

낙서를 한 사람은 수잔이라는 ‘젊은 여자’였다.

사진을 보니, 순수하고 청순한 이미지가 딱 에바 타입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여성 교도소에 있었다.

다양한 경험을 중요시하는 에바에게 맡기기엔, 좀 그랬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이었다.

“카트리나 교도소장님, 설마 종이 몇 장 주고 저를 돌려보낼 생각이십니까?”

“원칙은 원칙입니다. 국가 보안이 걸린 일입니다. 로켈 님이 이곳까지 온 것만 해도 상당한 특혜입니다.”

“카트리나 교도소장님, 오늘 수잔을 만나지 못하면, 내일 다시 올 겁니다.”

“내일 오신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있습니다. 당신은 그 자리에 없을 겁니다.”

깡마른 카트리나 교도소장의 입술이 극적으로 얇아졌다. 마치 얇은 볼펜으로 그려넣은 것 같았다.

“10분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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