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 준-66화 (65/141)

< 파라엔진-16 >

티티카카 호수는 백만 년 동안 물이 마르지 않았다.

한때 바다였지만, 화산폭발로 높이 솟구쳐서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이 호수는, 알프스의 몽블랑 봉우리와 비슷한 높이인 해발 4,000m에 있었다.

호수의 길이는 동서 80km, 남북 190km였고, 넓이는 뉴욕과 맞먹었다.

티티카카 호수의 로스 섬은 갈대로 엮어서 만든 인공섬이었다.

갈대로 만든 섬이었지만, 풀과 나무가 자라고 뱀과 쥐가 산다.

호수에는 이런 섬이 수백 개 정도 흩어져 있었다.

크기도 제각각이었다.

배처럼 작은 것도 있었고, 옥수수 농사를 지을 정도로 큰 것도 있었다.

한 사람이 사는 곳도 있었고, 동네 전체가 들어선 곳도 있었다.

남녀가 결혼하면 두 섬을 연결해서 같이 살다가, 헤어지면 미련 없이 분리했다.

로켈은 플라스틱보트를 타고 로스 섬을 찾았다.

호수의 파도는 바다의 파도와 다를 바 없었다.

그가 보트를 섬에 묶을 때, 안개 같은 살기가 주위를 감쌌다.

“블랙블러드의 악귀는 꺼져라.”

로켈보다 세배는 더 크고, 여덟 배는 더 무거운 사나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쿠무의 최강자 왕리였다.

왕리의 눈은 콘도르처럼 날카로웠고, 근육과 피부는 청동 같았다. 그의 머릿결은 은빛이었다.

왕리의 별명은 실버 나이프.

그가 익힌 바쿠무는 길거리에서 발전한 무술로 치졸하고 비겁한 기술이 응축된 무예였다.

왕리는 바쿠무의 야비한 기술로 쿵후 마스터와 특공무술 유단자들을 종잇장처럼 찢어 갈겼다.

멋진 이론과 자세 그리고 전통을 자랑하는 무예일지라도, 그 근본은 결국 싸움이었다.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는 무예는 의미가 없었다.

중국인 왕리는 팽씨 태극권을 배웠지만, 바쿠무의 실전기술을 더 높게 평가했고, 바쿠무를 진정한 무술로 여겼다.

팽씨 태극권이 박제 인형이라면, 바쿠무는 살아 있는 야성이었다.

그는 한때 시온의 기사단이었고, 그 누구보다 로켈을 증오했다.

“네 뜻대로 승부를 하겠다.”

로켈이 코트를 벗었다.

왕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승부를 하겠다고?’

그동안 그는 로켈과 겨루려 했지만, 로켈은 의미 없는 피를 묻히고 싶지 않다며 승부를 피했다.

“이제야 죽을 맘이 생겼군.”

왕리의 섬뜩한 미소로 자세를 잡았다.

시온의 기사였던, 그는 로켈처럼 씨앗을 보호했었다.

세상에 이바지할 천재들을 돌봤다.

많은 천재가 재능을 꽃피우고, 제 몫을 하며 세상을 이롭게 했지만 ···. 재능을 꽃피우기 전에 목숨을 잃은 천재들도 많았다.

가장 많은 씨앗을 짓밟은 암살자가 바로 로켈이었다.

로켈은 블랙블러드 시절, 석유 패권을 위협하는 새싹들을 뿌리 뽑았다.

그 새싹들이 뿌리 내리고 생태계를 이뤘다면, 전기자동차와 플라즈마 엔진 그리고 자기장 냉각 장치가 10년은 더 일찍 보급되었을 것이다.

시온이 로켈을 스카우트할 때, 왕리는 격하게 반대했다.

수많은 씨앗을 짓밟은 암살자를 기사단에 들이다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시온은 능력 위주 시스템이었고, 시온의 선택은 옳았다.

로켈은 짓밟은 것보다 더 많은 씨앗과 새싹들을 지켜냈다.

그러나 왕리는 로켈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기사단을 떠났다.

떠나던 날, 로켈에게 결투를 신청했지만, 보기 좋게 거절당하고 말았다.

왕리도 로켈과 같은 강화육체의 소유자였다.

둘은 암살자와 수호기사로 현장에서 서너 번 맞붙었지만, 항상 무승부였다.

공기를 가르는 공격이 휘몰아쳤다.

왕리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섬 전체가 흔들렸고, 파도의 방향이 바뀌었다.

왕리는 예전보다 훨씬 강했다.

‘낚시나 하며 놀고먹을 줄 알았는데 ···.’

로켈은 거리를 벌리며 간신히 공격을 피했다.

작고 짧은 로켈은 거리를 좁혀야 공격 찬스가 나오지만, 그럴 틈이 없었다.

뺨과 어깨 팔목에 생채기가 나기 시작했다.

해발 4,000m.

평지에서 100도에 끓는, 물이 85도만 되도 끓어 넘친다. 이곳에 갓 도착한 사람은 낮은 기압으로 고산증에 시달린다.

티티카카 호수에 적응한 왕리와 간신히 호흡하는 로켈의 격차는 컸다.

로켈이 30kg이 넘는 납덩이를 짊어지고 싸우는 꼴이었다.

거리는 더 벌어지고, 상처는 늘어났다.

왕리의 비열하고 치사 찬란한 공격은, 피 냄새 맡은 피라냐 같았다.

로켈은 스톱을 외치고 따지고 싶은 순간이 몇 번 있었다.

‘와아! 손이 안 닿는다고, 더럽게 침을 뱉네!’

‘손톱 안 깎은 것 좀 봐!’

‘인간적으로 눈은 찌르지 말자!’

‘불알 차기 있기 없기?’

로켈은 갈대 섬에서 움직이는 것도 익숙하지 않았다.

통나무 연결체를 베이스로 만든 갈대 섬은 울퉁불퉁한 곳이 많았다.

갈대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왕리는 경험적으로 그 위치를 모두 알았고, 로켈은 발을 디딜 때마다 새로웠다.

기어이 로켈의 발목이 틈에 끼였다.

못 박인 것처럼 빼낼 수 없었다.

왕리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창처럼 무릎을 세워 로켈의 정수리를 내리찍었다.

로켈이 몸을 비틀자, 섬 전체가 회전했다.

섬은 믹서기에 들어간 과일 조각이었다.

통나무 연결체가 사방으로 떨어져 나갔다.

왕리의 공격 포인트는 빗겨나고, 그의 옆구리가 비었다.

로켈의 펀치가 왕리의 옆구리에 작렬했다.

‘뽀-깍’

큰 대나무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이럴 수가!”

왕리는 직접 맞으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섬 연결체가 뜯겨 나갈 정도의 회전력이라니!

로켈을 중심으로 동심원이 퍼지듯 섬이 산산조각이 났다.

나가떨어진, 왕리는 눈처럼 날리는 갈대 부스러기들을 봤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로켈의 2차 공격에 대비했다.

먼지들이 내려앉으면서, 로켈의 모습이 보였다.

로켈은 플라스틱보트에 올라탔다.

“승부는 끝났다.”

로켈의 말대로였다.

힘의 차이가 너무 컸다.

“업그레이드한 강화 기술을 이식받은 거냐? 비겁하다!”

“나는 굿데이에 있다. 언제든 도전을 받아주겠다.”

로켈은 유유히 멀어져갔다.

왕리는 이를 갈았다.

로켈과 같은 강화능력이 있었다면, 이번 승부는 그의 것이었다. 왕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난쟁이의 기술에 패했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로켈을 이기려면, 업그레이드된 강화능력이 필요했다.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닥터 칼라니티.

왕리는 곧바로 칼라니티를 찾아 떠났다.

*

로켈은 샤나이슈카 리조트로 돌아오면서, 마음이 복잡했다.

준은 트리탄을 묻었다.

이에 대한 시온의 판결은 ‘방치’였다.

로켈은 시온의 판결에 따라 준을 ‘방치’해야 했다.

기간은 한 달.

그동안 로켈은 준에게 유리한 정보를 주면 안 된다.

로켈은 알고 있었다.

랜달이 준의 꿈에 나타나 준의 목숨을 노리는 것을.

그러나 알리지 못했다.

그림자 기사로서 시온의 판결에 따라야 했고 ···. 무엇보다 준을 믿었다.

준이라면 랜달 따위에게 당할 리 없다.

로켈은 랜달 때문에 준이 잠을 설쳤다는 사실을 알고, 가슴 아팠다.

자미에 대통령의 딸 제인이 꽃다발을 전해줄 거라는 사실도 미리 알고 있었다.

준이 제인을 보고 당황할 때, 로켈은 같은 남자로서 미안했다.

페루 국가 정보원 그레고리의 개입도 알고 있었고, 미스 페루 작전도 예상했었지만, 로켈은 시온의 판결에 따라 정보를 알리지 않았다.

‘준짱. 고맙습니다.’

뼛속부터 우러나오는 강한 진심이었다.

준이 페루에 온 것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그대로 킹스덤에 머물렀다면, 방치를 틈탄 온갖 공격이 난무했을 것이다.

페루 국가 정보원은 우연의 일치겠지만, 로켈의 빈자리를 완벽하게 커버링했다.

준이 이 모든 것을 예상했다면, 엄청난 통찰력이었다.

예상했을 것이다.

로켈이 준을 처음 만났을 때, 준은 로켈의 정체를 꿰뚫어보았고, 시온이라는 단어까지 찾아냈다. 오직 통찰력만으로 모든 것을 알아냈다.

로켈은 시온을 의심하고 있었다.

준이 트리탄을 묻은 것은 그야말로 정당방위였다. 오히려 한 번 살려준 것에 점수를 줘서, 준을 시온의 마스터로 삼아야 했다.

그림자 기사가 씨앗을 지킨다면, 마스터는 시온을 지키는 영광스러운 직위였다.

로켈은 청색의 선지자에게 준을 마스터로 삼자고 제안했지만, 청색의 선지자는 노여워했었다.

어쩌면 ···.

마스터가 되려면 ‘시련’을 거쳐야 했다. 시온은 준을 시험하려고 시련을 준비한 것일까?

그렇게 믿고 싶지만, 시온은 흐리멍덩하지 않다.

내용이 엇비슷하다고 해도, 시련과 판결은 명백하게 다르다.

시온은 준을 방치했다. 그리고 닥터 칼라니티에게 능력을 받은 랜달이 지랄을 떨었다.

칼라니티는 강화 능력의 아버지였고, 시온의 선지자 중 한 명이었다.

칼라니티가 랜달에게 능력을 주었다는 것은 ···.

‘그는 준을 싫어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다.

시온은 준을 버렸고, 준을 제거하려 한다.

이유는 ···.

여러 가지가 가능했다. - 시기, 질투, 권력유지 ···.

리미트리스 준은 시온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

준이 계속해서 성장한다면 시온은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로켈은 블랙블러드에서 권력의 속성을 확실하게 보았다.

석유 패권을 유지하려고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죽였던가!

권력은 세계 평화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그것은 생명과 같다.

살아남으려고 한다.

더 많이 가지려 한다.

위대한 독립투사가 지배자를 몰아내고, 더 지독한 독재자가 되는 것은, 권력이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이었다.

로켈은 시온과 굿데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함을 깨달았다.

“잠깐 이리로 와봐.”

에바가 인사도 하지 않고, 턱으로 구석진 곳을 가리켰다.

로켈은 가볍게 눈인사하고, 그녀를 따랐다.

에바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상처는 뭐야?”

“옛 친구를 만났어.”

“여자?”

“아니야.”

로켈의 대답에 에바가 실망하는 눈치였다.

“너를 이 꼴로 만든 여자라면 한번 사겨보고 싶었는데.”

“여자 엄청 밝히네. 차라리 남자로 태어나지 그랬어.”

“재수 없는 소리!”

“재수 없는 소릴 해서 미안하다. 가서 좀 쉴 게 피곤해.”

“진짜 여자 아니야?”

“아니야!”

“이상하다. 요즘 여자 풍년이던데 ···. 너에겐 아무도 안 왔어? 호세와 아쿠타미는 이미 한 번 ···.”

“안 왔어!”

“오면 어떻게 할 거야?”

“양보할 게!”

“오! 의리 있네.”

로켈은 지겨운 표정으로 자리를 뜨려 했다.

“준 회장은 다 알아.”

“뭘?”

“판결.”

로켈은 총 맞은 것처럼 몸이 굳었다.

“무슨 판결?”

그의 눈매가 실처럼 얇아졌다.

“선데이의 성장 과정과 배후를 조사했어. 루이스 상원의원과 잔느가 배후처럼 보였지만, 더 큰 힘이 작용했어. 세상은 준을 원치 않아. 시온도 그렇고. 킹스덤에 자리 깔고 있었으면, 험한 꼴을 봤겠지. 안 그래?”

로켈은 놀랐다. 에바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보다, 그녀가 웃으면서 말하는 게 더 놀라웠다.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라는 뉘앙스였다.

로켈은 침을 삼켰다. 그는 준에게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준짱은 지금 어딨지?”

*

준은 아마존에서 밤을 맞이했다.

도서관에서 본 세상은 극히 일부였다.

격렬한 독서보다 더 강렬한 세상을 경험하는 중이었다.

아마존의 포식자들은 낯선 침입자의 냄새에 흥분했다.

악어가 입을 벌렸고, 아나콘다가 똬리를 틀었다.

굶주린 재규어가 준의 뒤를 밟았다.

‘포스마일을 상대할 때와 느낌이 다르네.’

준은 만족스러웠다.

홀로 아마존과 맞서는 짜릿한 필이 머리끝에서 발끝으로 관통했다.

독서로 구축한 고밀도 지식 생태계가 아마존에서도 통할까?

통했다!

불을 피우고, 악어 통구이를 해먹으면서 준은 원초적인 기쁨을 만끽했다. 살아 있다는 느낌. 그리고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모든 것이 흥미진진했다.

준은 덤벼드는 아나콘다의 따귀를 때렸고, 달려드는 재규어에게 꿀밤을 먹였다.

재규어가 고통으로 울부짖자, 아마존이 침묵했다.

재규어의 울부짖음을 더 멀리 알리려고 배경 소음을 없앤 것 같았다.

도서관에서 준을 본 여자들이 흡! 숨을 들이마시며 놀라듯이, 아마존은 준에게 놀랐다.

준은 방금 아마존이라는 거대한 책을 펼쳤고, 이제 겨우 한 페이지를 읽었을 뿐이었다.

새로운 독서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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