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 준-63화 (62/141)

< 파라엔진-13 >

꿈속에서 ‘이즈라일의 낫’을 맘껏 휘둘렸던, 랜달은 준의 손끝에서 끝났다.

잔느가 랜달의 죽음을 확인했다.

죽은 랜달의 표정은 ‘이럴 줄 몰랐네.’였지만, 살아 있는 잔느의 표정은 ‘이럴 줄 알았다.’였다.

‘악몽의 암살자’ 랜달은 강했지만, 준은 더 강했다.

랜달의 능력은 메이드 인 블랙마켓이었다.

‘그렇다면 준의 능력은?’

잔느는 아주 쉽게 블랙마켓을 떠올렸다.

그녀는 블랙마켓 이외의 ‘능력’ 공급원을 생각해낼 수 없었다.

상상을 뛰어넘는 준의 능력과 굿데이의 성공은, 블랙마켓이라는 변수를 넣으면, 그럴듯해 보였다.

잔느는 공식 장소에서 준을 두 번 만났다.

첫 번째는 굿데이 면접이었다.

그때 준은 어리바리했고, 흔한 수학 천재들처럼 현실적인 초점이 흐릿했다.

뜬구름 위에 떠 있는 느낌이었다.

당기면 끌려 올 남자였다.

두고두고 아쉬운 타이밍이었다.

‘그때 내가 뽑혔다면 ···.’

잔느의 가슴이 아려왔다. 그랬다면, 지금 에바가 누리는 영광을 가졌을 텐데 ···.

준은 잔느와 결혼하고, 퀴블러 가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아까운 기회였고, 악연의 시작이었다.

‘어떻게 날 두고 에바 같은 년을 뽑을 수 있어!’

생각만 해도 화가 났다.

퀴블러 가문의 여자는 남자를 사로잡는다.

퀴블러 가문의 여자는 원한을 잊지 않는다.

가질 수 없으면 파괴한다.

잔느는 준이 망하는 꼴을 보려 했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였다.

준과 에바 그리고 굿데이는 하루가 다르게 번창했고, 잔느가 있는 곳은 망했다.

잔느는 굿데이를 연구했다.

굿데이의 사업 규모는 글로벌 했지만, 전문 인력은 너무 부족했다.

에바, 로켈, 호세, 카이, 기타 등등···.

기술력은 초일류를 뛰어넘었지만, 정치적 기반이 없다.

굿데이 짝퉁들이 나타났고, 그 짝퉁으로 투자금이 몰렸다.

그만큼 세상은 굿데이에 목말라했다.

잔느에겐 기회가 보였다.

두 번째 만남은 포시즌의 귀빈석이었다.

굿데이 대표와 선데이 대표와의 만남이었다.

준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시종일관 주도권을 잃지 않았고, 랜달의 마인드 해킹까지 가볍게 튕겨냈다.

랜달에게 당했던, 호세가 컨실슈트를 챙겨 갔고 ···. 삼류 촌년이었던 에바는 랜달에게 싸다귀를 날렸다.

준은 뜬구름 위에 있는 이상주의자가 아니었다.

자신의 중력과 우주를 가진 진짜였다.

잔느는 확실하게 깨달았다. - ‘준은 강하다!’

깨달음과 함께 준을 파괴하겠다는 결심은 더 강해졌다.

준은 용서를 모른다. 트리탄과 랜달의 죽음이 그것을 증명한다.

‘준을 파괴하지 못하면 ···. 내가 당할 거야.’

선데이 회장 랜달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과로사로 알려졌다.

잔느는 장례식 내내, 선데이 회장 자리를 누구로 채워 넣을까? 고민했다.

선데이는 여러 섹터를 거느린, 거대 기업이었다. 정밀기계, 금융투자, 화학, 심지어 학원 재단과 종교까지 소유했다.

섹터의 대표들이 장례식장에 참석했다.

그들의 관심은 랜달의 죽음이 아니라, ‘누가 랜달의 후계자가 되느냐?’였다.

결정권은 선데이의 지분을 가장 많이 가진, 잔느에게 있었다.

이면계약으로 랜달의 지분도 그녀에게 넘어가 있었다.

선데이는 그녀의 소유였다.

눈에 불을 켜고, 랜달의 후임자를 찾아봤다.

좋은 스펙과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지만, 랜달의 뒤를 이을 만한 인물은 없었다. 모두 시시한 사람들뿐이었다.

랜달의 빈자리는 예상외로 컸다.

선데이의 목표는 굿데이를 집어삼키고, 준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 목표를 이루려고, 스테로이드로 몸집을 불리듯이, 무리한 확장을 해왔다.

굿데이를 흉내 내는 카피 전략으로 굿데이를 원하는 수많은 사람을 끌어들였다.

큰손 투자자와 기관 투자자 심지어 국가 프로젝트까지 깡그리 긁어왔다.

세상 사람이 보기에 굿데이와 선데이의 경계선이 모호했다.

선데이의 직원은 굿데이를 선데이의 하부 조직으로 여겼다.

그만큼 랜달의 쇼맨십은 화려했고, 카리스마도 뛰어났다.

랜달이 아니었다면, 실버 드래곤의 찰스와 키노시타를 부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찰스와 키노시타는 랜달을 두려워했고, 각 섹터의 대표들도 그랬다.

여러 섹터를 거느린 선데이의 구심력은 섹터 대표들이 가진 랜달의 두려움이었다.

랜달이 죽는 순간, 그들의 두려움도 사라졌다.

구심력도 약해졌다.

대표들은 후계자 자리를 노리면서, 선데이의 돈을 빼돌렸다.

선데이가 망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잔느가 랜달의 후계자로 떠올린 인물은 준이었다. 준이 아니라면 에바라도 ···. 에바가 바쁘다면 로켈이라도 ···.

굿데이의 소수 정예는 선데이 섹터의 대표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뛰어난 인물들이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녀는 스스로 화를 냈다. 그러다가 TV에서 퀸데이가 파산했다는 뉴스를 봤다.

퀸데이도 굿데이 짝퉁 기업이었고, 주로 여성 의류와 액세서리 사업을 해왔다.

퀸데이는 여성용 귀금속과 보석이 주된 수입원이었는데, 요빅이 귀금속과 보석을 공급하자 남는 거 없이 깔끔하게 망했다.

뉴스에서는 짝퉁데이에 대한 자료를 자세히 다뤘다.

먼데이, 튜즈데이, 세터데이 그리고 선데이.

선데이의 회장 랜달이 자금 압박으로 자살한 게 아닐까? 라는 추측도 했다.

잔느는 기자의 이름을 확인했다. - 리처드.

‘하필이면 이런 타이밍에 ···.’

선데이는 굿데이를 잡아먹으려고 과도하게 몸집을 불렸고, 누가 흔들지 않아도 위태로웠다.

위기를 돌파하려면 한 가지뿐이었다.

그녀는 섹터 대표들 앞에서 준이 랜달의 자리를 이어받을 거라고 장담했다.

대표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들은 선데이가 망할 줄 알고, 돈을 빼돌렸다.

그런데 준이 선데이를 장악하면 ···.

‘마녀 히파티아가 에바의 욕을 먹고 뇌출혈로 죽었다지.’

‘에어퓨마가 세상 끝에 있는 해적을 소탕했다지.’

‘준은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지.’

대표들은 헛웃음을 지으며 빼돌렸던 것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준이 선데이를 경영한다!’ 라는 소문만으로 다른 짝퉁데이와 달리, 잔느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녀는 심호흡하고 준에게 전화했다.

굿데이를 집어삼키고 준을 파괴해야 했지만, 준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으면, 선데이와 잔느가 먼저 나자빠질 위기였다.

최고의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그녀를 아름답게 꾸며주었다. 천사라고 해도 믿어질 정도였다.

준 얼굴 너머 아카시아 나무가 보였다. 그는 페루에서 아카시아 꿀을 맛보고 있었다.

“준! 저예요. 잔느. 랜달 회장님의 장례식은 오늘 끝났어요. 그분의 빈자리가 크네요. 선데이는 당신을 원해요.”

“내가 안 원해.”

통화는 바로 끝났다.

선데이는 ···. 망했다.

그러나 잔느는 크게 상처받지 않았다. 준을 팔아서 시간을 벌고, 기회도 되찾았다.

그녀는 섹터 대표들이 되돌려 놓은 자산을 빼돌렸다.

선데이는 망했지만, 그녀는 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준이 선데이를 버렸다는 투의 가련한 연기를 곁들이며, 주변 사람에게 위로까지 받았다.

모두 그녀의 계산대로였다.

그나저나 ···.

‘준은 왜 이렇게 강하지?’

그녀의 의문은 자연스럽게 블랙마켓으로 이어졌다.

얼간이 랜달도 블랙마켓에서 받은 능력으로 단시간 내에 거물이 되었다.

선데이의 성공에는 잔느와 그녀의 아버지 루이스 상원의원의 보이지 않는 후원이 있었지만, 랜달이 능력자가 된 후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잔느는 블랙마켓에 접속해서, 닥터 칼라니티를 찾았다.

그녀는 웹 쇼핑 실력으로 블랙마켓을 휘젓고 돌아다녔지만, 닥터 칼라니티를 찾을 수 없었다.

그녀가 포기할 즈음, 쪽지창이 떴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잔느는 한참이나 그 쪽지를 들여다보았다.

‘남자를 파괴하는 법.’

‘어떤 남자입니까?’

‘굿데이의 준.’

*

샤나이슈카를 흐르는 뜨거운 물은 옹달샘처럼 맑았다.

화산 근처의 온천은 유황의 독특한 냄새가 배어 있고 맛도 무거웠지만, 샤나이슈카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샤나이슈카의 강은 지하 3킬로 밑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온다.

화산과는 상관없는 단순한 지열효과만으로 강물 온도가 높아지는 것이었다.

지구에서 이런 구조의 강 흐름은 샤나이슈카가 유일했다.

샤나이슈카 주위는 따듯한 수증기 안개가 그치질 않았다.

끊임없는 수증기 때문에 샤나이 주변은 다른 곳보다 시원했다.

수증기는 작렬하는 태양을 막아주었고, 활발한 물분자는 땅에 있는 열기를 밖으로 뽑아냈다.

강물을 따라 걷던 준이 중얼거렸다.

“춥다.”

“이걸 드십시오.”

주술사가 동전 크기의 알약을 권했다.

그는 준에게 샤나이슈카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는 중이었다.

아주 쓴 맛이 났다.

“이게 뭐죠?”

“자이언트 수달의 쓸개입니다. 자이언트 수달은 악어도 잡아먹죠. 몸에 열이 많은데, 특히 쓸개에 많이 모여 있습니다. 추울 때 먹으면 몸이 따듯해지죠.”

주술사의 말대로 준의 몸은 금세 따듯해졌다.

샤나이슈카 리조트에는 아름다운 페루 여인들이 많았다. 페루 국가 정보원이 국운을 걸고 준을 꾈 여자를 풀어놓은 것이었다.

준과 헤어진 주술사는 정보원에 연락했다.

‘임무완수. 최음제를 먹였음.’

준은 발코니에서 변화무쌍한 샤나이슈카의 풍경을 감상했다.

샤나이슈카는 최근에 발견된 지역으로 킹스덤 도서관에 있는 책에는 실리지 않은 곳이었다.

아마존에 대한 책을 많이 읽었지만, 실제로 본 아마존은 책 속의 아마존과 전혀 달랐다.

준에겐 몇 가지 의문이 있었다.

고밀도 지식 생태계는 가끔 말도 안 되는 해답을 내놓곤 했다.

전 세계 주가지수가 이유 없이 폭락했던 ‘플래시크래시’ 사태 때, 기자들이 준의 집과 골프공에 몰려왔었다.

그때 고밀도 지식 생태계가 준에게 추천했던 대답은 ···. ‘엄마가 시켰어요.’ 였다.

그다음은 ‘이럴 줄 몰랐어요.’

‘내가 안 그랬어요!’도 있었다.

고밀도 지식 생태계가 요인분석으로 통합한 ‘엄마가 시켰는데, 이럴 줄 몰랐어요.’는 최강의 대답이었다.

다행히 준은 이 대답을 선택하지 않았지만, 그 후 고밀도 지식 생태계를 보완할 방법을 찾았었다.

아마존에 와서야 깨달았다.

책은 세상의 일부라는 것을!

책에는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빛의 속도라든지, 우주 팽창, 차원 탐색, 자료 분석 같은 지식이 농익어 있지만, 실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진 못한다.

이 세상에는 실제로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웨이트리스가 차가운 코코넛을 가져왔다.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그녀는 싱그러운 이슬처럼 말했다.

갈증 난 준에겐 너무나 탐스럽게 보였다.

준의 몸이 그녀에게 반응했다.

후끈 달아올랐다.

살다 보면, 모든 것이 인디언 텐트의 뜻대로 흐를 때가 있다.

준은 코코넛을 한 번에 들이마셨다.

분위기를 눈치챈 그녀는 자리를 지켰다.

그녀도 준의 위대함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리조트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모든 여자가 준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본부에서 들은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 본능적으로 그냥 느꼈다.

준은 책임지는 남자다! - 그녀들의 본능은 그렇게 소리쳤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엮여라! 그리하면 인생이 펴질 것이다!

“이야 ···.”

준의 목소리는 말린 파인애플처럼 끈적거렸다.

그녀는 설렜다. 그녀의 이름이 이야였다.

페루 속담에 따르면, 여자의 인생은 두 남자에 따라 변한다.

첫 번째 남자는 남편이었고, 두 번째 남자는 아들이었다.

이야는 그녀의 인생이 위대한 변곡점을 맞이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과감하게 준 곁으로 다가가서, 그의 어깨를 짚었다.

“무엇이든 말씀하세요. 당신 뜻대로 ···.”

“내 몸이 원한다.”

“당신 뜻대로 ···.”

그녀는 수줍게 눈을 내리깔았다.

맘 같아서는 지금 당장 준의 옷을 찢어 벗기고 싶었지만, 남자의 욕구에는 브레이크가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시간은 그녀 편이었다.

“격렬한 ···.”

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그녀가 침을 삼켰다. 조마조마했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뜸 들이지 말고, 빨리해라! 그냥 해라! 숨넘어가겠다!’

“ ···. 독서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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