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 준-61화 (60/141)

< 파라엔진-11 >

래리는 2층 카페 창가에서 거리를 보았다.

프로파일러인 그는 사람의 몸짓과 그들이 남긴 흔적을 읽었다.

사람들은 건널목 신호를 기다리며 많은 몸짓과 표정을 방출했고, 래리는 곤충학자처럼 그들을 관찰했다.

몸짓은 언어보다는 여운을 남기는 ‘냄새’에 가까웠다.

- 곤충의 페로몬처럼.

인간의 가장 어두운 흔적이 새겨진 범죄현장에 베인 ‘냄새’는 지독하고 잘 빠지지도 않았지만, 일상적인 냄새는 쉽게 희미해진다.

래리는 눈으로 그 냄새를 즐겼다.

건널목에서 서로 훔쳐보던 남녀는 신호가 바뀌자 천천히 다가가며 교차했다.

그 둘은 딱 한 번 눈빛을 주고받았지만, 몸짓은 끊임없이 주고받았다. 같은 줄에 묶여 있는 것 같았다.

거리는 멀어지고, 줄은 끊어진다.

래리는 인연에 대해서 생각했다.

‘나는 어떤 줄에 묶여 있을까?’

곱씹을수록 솔로의 아픔만 커졌다.

래리가 솔로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 이 세상 여자가 너무나 환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들을 이해하고 분석하고 평가할 수 있었지만, 사랑할 순 없었다.

그 어떤 여자든 그에겐 너무 뻔했다.

카페에 양복 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고급 양복은 아니었지만 단정했고, 몸에서 돋아난 것처럼 넉넉한 사이즈였다. 구두도 말끔하게 광이 났다.

래리와 눈이 마주친 남자는 가볍게 눈인사하고 다가왔다.

“페루 대사관에서 왔습니다. 의뢰할 일이 있습니다. 준을 아시죠?”

래리는 실버 드래곤 의뢰로 준을 분석했었다.

실버 드래곤은 준에게 여자를 붙이려 했고, 래리의 분석에 따라 줄리아는 초월성을 연기했었다.

“준은 저에게 끈 같은 존재죠.”

“네?”

“그는 저의 연구 주제입니다. 어떤 의뢰죠?”

“그 전에 이걸 먼저 ···.”

남자는 비밀서약서를 들이밀었다.

페루 정부가 총력을 다해서 준을 꾀려 한다는 사실은 알려지면 안 된다.

굿데이와 준을 가로채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국제 문제가 된다.

래리는 페루 정부가 엄선한 여자들의 사진을 넘겨보았다.

그중에서 준이 좋아하는 타입을 골라줘야 했다.

우아한 여자, 청순한 여자, 아름다운 여자, 산뜻한 여자, 발랄한 여자, 분위기 있는 여자 ···.

준은 어떤 여자에게 빠질 것인가?

“다 이해가 되는데 ···. 이건?”

래리의 눈동자가 멈춘 곳에는 침팬지를 닮은 여자가 있었다.

“자미에 대통령의 딸입니다.”

“준에겐 얼씬하지 못하게 하세요. 준도 남자입니다. 이런 여자가 접근하면 엄청

난 모욕감을 느낄 거예요!”

*

자미에의 딸 제인이 준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준은 꽃다발을 받지 않고, 뇌파 통신으로 전원에게 명했다.

‘쿠스코 카카오는 ···. 포기한다. 즉각 돌아간다!’

뇌파 통신은 준이 느낀, 그 무엇으로 가득 차 있었다.

준이 처녀 귀신을 만났어도 제인보다 더 반가워했을 것이다.

페루 출신 좋은 호세는 민망했고, 로켈은 미안했고, 디아나는 창피했고, 토그는 배고팠다.

카이는 ‘혹성 탈출’이라는 영화가 생각났고, 세이턴은 공격 신호를 기다렸다.

에바가 준과 제인 사이에 끼어들며 꽃다발을 받았다.

자미에 대통령은 준의 방문을 정치적으로 이용했고, 주변에는 고성능 카메라를 어깨에 짊어진 보도진이 수두룩했다.

방송국 헬기들이 잠자리처럼 날아다녔다.

준이 꽃다발을 내팽개치고 떠나면, 엄청난 입방아에 오르고, 페루 애국 암살 청년단이 국가 자존심을 내걸고 달려들지도 모른다.

제인의 형태학적 분류는 논하지 않더라도, 그녀는 자미에 대통령의 딸이었다.

못생긴 건 아니었다. 그냥 선입견 없이 보면 침팬지와 닮았을 뿐이다.

침팬지와 짝짓기한다 상상하면, 준의 기분을 조금 맛볼 수 있다.

남자로서 준의 행동은 자기보호본능이나 종족보호 본능으로 쳐줄 수도 있었지만, 국제 언론이 퍼렇게 눈뜨고 있는 현장에서는 전쟁포고에 버금가는 행동이었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에바는 결코 준의 뇌파 명령을 거역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굿데이와 준 그리고 세계평화와 페루를 위해서 제인을 포옹했다.

수류탄 위로 몸을 던지는 느낌이었다.

사방에서 플래시가 터졌다.

제인을 껴안은 에바는 눈빛으로 말했다.

‘준 회장! 내가 희생할 게. 그동안 행복했어.’

준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0.3초 동안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분석했다.

활주로에 착륙하고, 기간트에서 내리자마자 보도진에게 둘러싸인다니!

고밀도 지식 생태계가 작동하면서, 모든 것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에바! 너의 희생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 순간 ‘준의 결심’이라는 위대한 사진이 탄생했다. - 감정결핍 증후군 준이 눈을 질끈 감는 모습을 찍는 것은 주판으로 비트코인 암호를 푸는 것과 같은 기적이었다.

눈을 질끈 감은 준을 배경으로 제인을 껴안은 에바. - 긴급속보로 전 세계로 전해졌다.

‘굿데이 페루에 오다!’

단, 5분 만에 페루 주식시장이 폭등하고, 채권시장 금리가 하락하고, 페루 화폐 솔의 가치가 올라갔다. - 페루의 금융경제가 살아난 것이었다.

굿데이 효과 - 되살아난 금융시장도 놀랄 정도로 무서운 영향력이었다.

준이 꽃다발을 내팽개치고 떠나갔다면, 페루는 지옥을 맛봤을 것이다.

자미에 대통령이 준에게 악수를 청했다.

대통령의 악수만큼은 에바도 대신 받아줄 수 없었다.

만일 준이 대통령의 악수를 무시한다면, 그 파급효과는 소행성 충돌과 맞먹을 것이다.

자미에 대통령은 허허로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위기의식을 느꼈다.

준은 상대방의 장단에 맞춰주는 성격이 아니라는, 페루 정보국의 조언이 있었다.

페루 국가 정보국은 준을 위한 환영행사는 역효과를 낼 거라고 경고했지만, 자미에 대통령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두 달 후면 임기가 끝나지만, 준과의 친분을 하면 재임도 가능했다.

자미에 대통령의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준은 자미에 대통령 마음을 낱낱이 읽어냈다.

준이 자미에 대통령의 악수를 받아주었다.

자미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퍼렇게 젊은 놈의 악수를 받지 못해서, 긴장하다니!

준은 페루에 와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누네즈를 만나러 왔습니다. 그녀는 어디에 있습니까?”

사방에서 플래시가 터지고, 다시 한 번 긴급 속보가 타전됐다.

‘굿데이 누네즈를 만나러 오다!’

자미에 대통령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준은 자미에 대통령을 눈앞에 두고, 누네즈를 선택했다.

굿데이의 선택- 누네즈.

자미에 대통령은 사형선고를 받은 것처럼, 멘탈이 흔들렸다.

준은 무너지는 남자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자미에는 온갖 권모술수가 판치는 정치판에서 대통령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그는 노련했다.

새파래진 얼굴을 수습하고 미소를 띄웠다.

“아마존의 어머니는 샤나이슈카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누네즈의 대리인으로 당신을 모시러 왔습니다.”

누네즈와 한팀이 되는 것 - 자미에의 최선이었다.

“고맙습니다만, 편치 않습니다.”

자미에는 눈앞에 있는 젊은 새끼가 만만한 놈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모든 스케줄이 취소되었다.

*

아마존의 어머니 누네즈는 간소하게 준 일행을 맞이했다.

카멧을 본 세이턴이 멍! 하며 그녀에게 달려갔다.

카멧은 준보다 세이턴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녀의 의지라기보다는, 준이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다.

누네즈는 준과 카멧을 가깝게 하려 했지만, 마음을 고쳐먹었다.

TV로 준이 자미에 대통령을 박살 내는 모습을 보았다.

누네즈는 교훈을 얻었다. - ‘건들면 다친다! 준은 작전이 통하는 레벨이 아니다.’

“와줘서 정말 고마워. 자미에 대통령의 행동은 내가 미안해.”

누네즈는 맘 좋은 옆집 할머니 같았다.

결혼도 했고, 아기도 낳고, 아이도 키웠다.

그리고 샤나이슈카도 지켜냈다.

호세의 표현을 빌리자면, 참 좋은 여자였다.

그녀는 준에게 카카오로 빚은 술을 권했다.

섬세한 발효기술이 필요한 술이었다.

준은 코코아 향이 강한 그 술을 마시고, 기분이 풀어졌다.

자미에 대통령의 깜짝 등장이 있었지만,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느긋한 기분으로 발코니에 앉아, 망고나무 밑에서 자라는 카카오나무를 감상했다.

나무줄기는 무화과나무 같았고, 열매는 쪼그라든 럭비공 같았다.

카카오 술을 마시며 안주로 초코릿과 쿠스코 닙스를 먹었다.

달달한 술과 달곰한 초코릿 그리고 씁쓸한 닙스.

취기가 금방 올라왔다.

“엄마 좋은 기회 아니에요?”

카멧이 누네즈에게 속삭였다.

“카멧. 준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남자가 아니란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엄마가 항상 그랬잖아요. 여자보다 똑똑한 남자는 없다고.”

“준은 이미 남성을 초월했어. 잘 생각해봐라. 네가 준에게 끌리는 게, 남자라서 그러니? 아니면 준이라서 그러니?”

확실히 누네즈의 말대로였다.

카멧은 준이 남자라서 끌리는 게 아니라, 준이라서 끌렸다.

카멧은 모기 퇴치 스프레이를 만지작거렸다.

준이 앉은 발코니에는 모기장이 있지만, 완벽하지 않았다. 술기운으로 준의 체온은 올라갔고, 호흡에 이산화탄소량도 늘어났다.

모기들의 파티 시간이었다.

카카오나무 주위에는 모기가 특히나 많았다.

카카오 꽃가루를 옮겨주는 곤충이 바로 모기였다.

카멧은 발코니 모기장으로 들어가서, 준 옆에 앉았다.

“와 줘서 고마워. 아까 TV에서 말하는 거 봤어. 이번 대통령 선거에 엄마가 나가시려나 봐. 우리 엄마의 어떤 점이 그렇게 맘에 들었어?”

준에게서는 짙은 초코릿 냄새가 났다.

“좋은 호세가 말했어. 그녀는 좋은 누네즈라고.”

“그 좋은 누네즈의 딸이 나야. 나는 ... 네가 좋아.”

카멧이 준의 술기운을 빌어 고백했다.

“고맙다.”

“너는 어때? 나 좋아해?”

“너는 좋은 카멧이다.”

좋은 카멧은 준에게 입맞춤했다.

그녀는 준의 반응을 기다렸다.

“카멧. 의미 없다.”

준은 무표정했다.

하룻밤 쾌락으로 즐길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뻔한 선택은 ···. 의미 없다.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

카멧은 순순히 자리를 떠났다.

그녀에겐 준을 원망하는 마음보다 고마워하는 마음이 더 컸다.

시시한 남자였다면, 카멧의 감정을 갖고 놀았을 것이다.

준은 꾸벅꾸벅 졸면서, 아마존의 밤과 섞였다.

태양은 저물었지만, 땅에는 아직 열기가 남아 있다.

“준 회장님 고맙습니다.” 호세가 준에게 납작 엎드렸다. “이곳은 좋은 페루입니다. 버리지 않아서 정말 고맙습니다.”

“호세.”

“네.”

“더 좋은 호세가 될 준비가 되었느냐?”

“네.”

“더 좋은 호세는 더 좋은 페루를 만든다.”

“저기 ···. 준 회장님 술에 취하신 거 같습니다.”

“오면서 많이 봤다. 도끼 자국과 구멍 ... 손대고 싶다.”

“네?”

호세는 화들짝 놀랐다.

준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원초적인 뉘앙스로 가득했다.

아마존 하늘에 뜬 보름달.

남아 있는 열기와 취기.

오늘 이동 경로에는 놀랍도록 아리따운 그녀들이 많았다.

호세가 평생 보아온 미녀보다 오늘 본 미녀가 더 많았을 정도였다.

그녀들은 몸에 착 달라붙는 옷을 입었는데, 도끼 자국 같은 여자의 심벌이 강조되곤 했다.

그런 여자들을 보고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면, 남자가 아니다.

‘준은 남자였어.’

호세는 준이 그녀들 중 누구를 원하는지 알려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연락처를 알아낼 결심이었다.

동물에겐 거역할 수 없는 자극이 있다.

아이는 엄마의 젖가슴을 거역할 수 없다.

가시고기 암컷은 수컷이 만든 완벽한 보금자리를 거역할 수 없다.

누에나방 수컷은 암컷의 페로몬, 봄비콜을 거역할 수 없다.

술에 취한 준은 ···.

“호세.”

“네. 말씀하십시오. 모든 것은 준의 뜻대로.”

“스물둘.”

“맞습니다. 이동 경로에서 본, 그녀들은 모두 스물두 명이었습니다.”

“그녀라니?”

“여자 말하는 거 아니신가요?”

“여자를 왜?”

“글쎄요? 왜일까요?”

“이곳으로 오면서 본, 폐쇄 광산과 버려진 벌목지역 ... 모두 스물두 개였다. 그냥

두면 위험하다. 방치된 구멍도, 근처 환경도, 내가 사는 지구도. 좋을 게 없다. 더 좋은 호세가 될 좋은 기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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