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 준-59화 (58/141)

< 파라엔진-9 >

랜달은 뒤처진 사냥감을 노리는 하이에나처럼 에바를 노려보았다.

강력한 아이컨텍!

“어디서 눈깔을 들이대! 눈깔 힘 풀어! 나 렌즈 입고 왔어!”

에바는 다크 렌즈를 끼고 있었다.

그녀는 더 찰진 욕을 퍼붓고 싶었지만, 준 회장 앞이었다.

이 정도 선에서 정숙하게 표현하는 게 무난했다.

생각 같아서는 슈퍼노바 쌍 연발을 날리고 싶었지만, 굿데이와 선데이 대표끼리의 만남이었고 ···.

준이 해결할 것이다. 이미 컨실슈트도 회수했다. 그녀는 준의 곁을 지킬 뿐 나댈 수 없었다.

다급해진 랜달이 잔느를 쳐다보았다.

잔느는 랜달의 능력은 알지만, 그 내용은 몰랐다.

아이컨텍에서 이어지는 마인드 해킹.

그녀는 무방비 상태였다.

‘준 마음의 빗장을 풀어라. 그렇지 않으면 잔느를 날리겠다.’

랜달은 뇌파 통신으로 준에게 전했다.

고밀도 지식 생태계를 가진 준이었지만, 랜달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잔느를 위협해서 날 협박해?’

잔느와 랜달은 같은 편 아니었나?

확실하게 해둘 필요가 있었다.

“에바.”

“네! 준 회장님.”

“잔느가 우리 편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그렇지. 나는 혹시나 해서 ···. 랜달이 ···.”

준은 말을 끊고, 랜달이 보낸 뇌파 통신 메시지를 에바와 잔느에게 보냈다.

‘준 마음의 빗장을 풀어라. 그렇지 않으면 잔느를 날리겠다.’

“병신.”

에바는 자연스럽게 욕이 나왔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전혀 욕 같지 않았다. 단순 지시대명사처럼 들렸다.

랜달은 ···. 병신이 맞다.

“살려줘요! 랜달이 나를 육체적으로 학대하고, 정신적으로 강간했어요!”

잔느가 폴짝 뛰었다.

“미친년! 자랑이다.”

이번에도 욕처럼 들리지 않았다.

잔느는 ···. 미친년이 맞다.

병신과 미친년이 만나 꽃피우는 기괴한 사랑.

준은 둘을 위해 해줄 말이 하나 있었다.

“뭔 짓을 하든 너희 자유지만 ···. 애는 낳지 마라.”

준은 커튼을 덮고 쓰러진 로크를 힐끔 보았다.

호세의 원펀치는 강했다.

“쓰레기는 쓰레기가 치운다.”

준이 일어나자, 에바가 센스 있게 출입문을 열었다.

랜달과 잔느는 손댈 가치가 없었고, 손대더라도 포시즌 귀빈실은 적절한 장소가 아니었다.

커튼 밑 로크를 누군가 치워야 하는데, 랜달과 잔느까지 녹아웃 시키면 잡일만 늘어난다.

준은 이곳에서 얻고자 하는 것을 모두 얻었다.

컨실슈트를 회수하고, 랜달의 바닥을 확인했고, 잔느의 위기대처 능력도 보았다.

준은 굿데이 직원으로 잔느를 뽑지 않은 게 다행스러웠다.

위기 상황이 닥칠 때, 그녀가 할 줄 아는 건 ‘팔짝 점프’ 정도였다.

“준! 무서워서 도망이냐!”

랜달이 깐죽거렸다.

호세로 하여금 은폐 모드를 해제하게 했던, 유치찬란한 깐죽거림이었다.

준이 멈춰 섰다.

“준 회장님. 무시하세요.”

에바는 안개처럼 뿌연 불길함을 다시금 떠올랐다.

랜달을 만나는 건 위험하다. 그것은 발자취를 따라 ···.

준은 천천히 뒤돌아섰다.

랜달의 눈에 화색이 돌았다.

“네가 따분해하는 걸 안다. 모든 게 시시하겠지. 너처럼 머리가 빨리 돌아가면 우주 만물이 유치하게 느껴지겠지. 그 무료함을 내가 파괴해주겠다! 빗장을 열어라.”

그는 릴낚시를 하는 심정으로 지껄였다.

그의 눈은 충혈되었다.

“랜달. 속도를 늦췄다. 들어와라.”

랜달은 걸렸구나! 하며 뛰어들어갔다.

얇은 사과 껍질 같은 마음의 지평선이 열렸다.

준의 지평선은 무료함과 따분함으로 채워진 무미건조한 공기층이었다.

감정결핍 지평선은 본디 무미건조했고, 그 밑에는 공허감이 활화산처럼 들끓었다.

랜달은 공허감의 지표면을 통과하면서, 준이 무서운 놈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공허감을 견뎌내고 있다니!

보통 사람이었다면, 마약이나 범죄 혹은 스릴 넘치는 어떤 짓에 ‘중독’되었을 것이다.

중독은 공허감을 치료하는 가장 흔한 처방이었다.

지표면 밑 ···. 고밀도 지식 생태계가 나타났다.

랜달은 킹스덤 대학을 졸업한 뛰어난 인재였지만, 고밀도 지식 생태계는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내비어-스톡스 방정식은 악의 화신처럼 보였고, 호지 차원은 지옥처럼 느껴졌다.

밀스의 질량분석기는 모래 괴물이었고 푸리에 구조 방정식은 야생마였다.

랜달은 겁을 먹고 조금 물러섰는데, 곧바로 우주 밖으로 밀려났다.

페렐만 다양체 공간.

‘스 ···. 스케일이 다르다.’

랜달의 의식이 몽롱해졌다.

우주 공간에 떠 있는 느낌이었다.

모든 사건, 의미, 기억들은 별처럼 빛났다.

의미와 기억이 충돌하면서, 강렬한 이미지로 융합했다.

에너지를 내뿜는 이미지가 작아지는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고밀도 지식 생태계는 팽창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랜달로부터 멀어졌다.

‘이것이 준의 머릿속인가!’

고밀도 지식 생태계에서 랜달은 먼지에 불과했다.

마인드 해킹 ···. 하긴 해야 하는데 ···.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랜달은 돌아가려 했지만, 고밀도 지식 생태계의 팽창 속도는 침입속도를 능가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 안 돼!!

그의 의식이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에 응답하듯이 ···.

슈퍼노바 쌍 연발 - 랜달을 쌍코피를 흘리며 정신을 차렸다. 양쪽 뺨이 얼얼했고,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났다.

준과 에바는 보이지 않았다. 잔느만이 경멸에 찬 눈으로 내려볼 뿐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넋이 나갔어.”

“그랬을 거야. 준의 머릿속에 갇혔으니깐. 어떻게 내가 돌아온 거지?”

“에바가 슈퍼노바를 처방한다며, 싸다귀를 때렸어.”

“에바가? 그렇군. 그녀에겐 굿데이 자격이 있어.”

“그게 무슨 소리? 나도 따귀를 때릴 수 ···.”

잔느가 힘껏 손을 날렸지만, 랜달은 쉽게 잡아챘다.

“준의 머릿속을 보았다. 무서운 놈이야.”

“인제 와서 꼬리를 말고 내빼려고?”

“놈의 머릿속엔 우주가 있어···. 블랙마켓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 준은 무릎 꿇은 트리탄도 용서하지 않았어. 우리도 저 꼴이 될 거야.”

랜달은 커튼 밑 로크를 가리켰다.

로크는 깃털 빠진 닭 같았다.

“도망가려고?”

“바보 같은 소리. 준은 머릿속에 우주가 있는 괴물이라고! 그런 놈에게서 달아나는 게 가능할 거 같아! 놈을 철저하게 파괴해야 해! 그것만이 살 길이야.”

“아파! 손 놓고 말해!”

“놈의 정신을 파괴하지 못했지만, 나는 놈의 머릿속에 들어갔어. 내가 받은 능력은 ‘악몽의 암살자’야. 준의 꿈속에 들어가서 놈을 죽이면, 놈은 죽고 말지.”

“할 수 있겠어?”

“잔느 날 믿어. 나는 강해. 닥터 칼라니티에게 받은 능력은 악몽의 암살자뿐이야. 마인드 해킹은 내가 스스로 눈 뜬 능력이야. 마인드 해킹이 준에게 안 통했지만, 호세에겐 통했어. 나는 진화하고 있어. 그리고 꿈속에서는 그 누구든지 죽일 수 있어. 내일 해가 뜨기 전에 준은 죽는다.”

*

랜달과 잔느의 대화는 로켈에게 수집되고 있었다.

‘징한 놈들이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로켈은 대화 내용을 에바에게 보고할지, 아니면 직접 랜달을 정리할지 고민했다.

랜달은 선데이의 회장이었고, 놈을 지우면 아무래도 시끄러워질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준을 만나고 나서 바로 정리되면, 의혹의 눈길은 굿데이에게 쏠리게 된다.

준짱도 이런 이유로 랜달의 목숨을 남겨놓았을 것이다.

준짱을 믿자!

준짱에게 랜달의 계획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악몽의 암살자라 ···. 확실히 찰스와 키노시타는 그런 식으로 죽었지. 렘수면에서 돌연 D파가 발생했어. 준짱이 호세를 얼렸던 마인드 해킹만 염두에 두고 있었다면, 악몽의 암살자 랜달에게 역습을 허락했을지도 몰라.’

에바에게 연락하려 할 때, 스마트 폰에서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울렸다.

‘시온?’

스마트 폰에는 청색 테두리 후드를 입고, 거울 가면을 쓴 인물이 보였다.

시온에서 로켈을 이끄는 청색의 선지자였다.

“로켈! 청색의 선지자를 뵙습니다.”

그는 양손으로 스마트폰을 받쳐 들고 무릎 꿇었다.

“판결이 나왔다.”

판결 - 준은 트리탄을 박살 냈다. 트리탄은 시온의 씨앗이었던 인물이었고, 개척자 레벨까지 오른 영웅이었다.

트리탄이 사라졌던 날, 로켈은 계율에 따라 시온에 보고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트리탄이 먼저 와서 준을 공격했었다. 현행법으로 따져도 정당방위가 성립했다.

“준을 방치한다.”

청색의 선지자가 엄하게 말했다.

로켈은 쉽게 납득했다. 방치 정도라면 받아 들이만 했다.

“로켈은 판결에 따라, 지금 이 순간부터 준에게 이로운 정보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

“유효기간을 알려주십시오.”

“한 달이다.”

“감사합니다.”

“로켈.”

“네.”

“랜달의 정보도 알리면 안 된다.”

청색의 선지자는 통신을 끊었다.

로켈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설마 했는데 ···. 블랙마켓에서 랜달에게 능력을 심어준 닥터 칼라니티는 시온과 인연이 있는 인물이었다.

랜달이 운 좋게 능력자가 된 거일 수도 있지만, 시온에서 준을 자연스럽게 제거하기 위한 도구로 선택된 것일 수도 있다.

랜달은 굿데이의 짝퉁이었고, 굿데이의 지분을 욕심냈다.

‘그런 건가? 준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랜달과 선데이를 세울 생각이었던가!’

시온은 세상을 바꿀 천재들을 키우고 보호하는 인큐베이터였다. 그런 시온이 준을 버리다니!

로켈의 고민은 깊어갔다.

“로켈님. 표정이 안 좋으십니다. 무슨 일 있으세요?”

디아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음 ···.”

“저 때문이시죠? 이번에도 제가 잠입했어야 했는데 ···.”

“디아나. 우리는 좋은 호세를 되찾았고, 컨실슈트도 회수했다. 더는 자책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하지만 ···. 로켈님의 얼굴이 너무 고통스러워 보여요.”

“이번엔 내가 한 게 너무 없어서 그렇다. 키가 작아도 할 일은 해야 하는데 ···.”

고민만큼이나 깊은 한숨이 뒤따랐다.

그는 결심을 굳혔다.

“디아나 ···. 나는 나쁜 로켈인 거 같다.”

*

준은 평소와 다름없이 책을 읽었다.

독서는 고밀도 지식 생태계를 비추는 태양이었다.

책 제목은 ‘평면 기하학의 탐구문제들’ - 준에겐 한심할 정도로 평면적인 수준이었지만 ···.

준은 몇 번이고 이 책을 빌렸다.

이 책의 대출 대기자 명단에는 항상 준의 이름이 있었다.

새 책을 살 수 있었지만, 새 책에는 없고 이 책에만 있는 것이 있었다.

낙서.

준은 책 여백에 적힌 낙서를 보는 재미로 이 책을 빌렸다. 최근에는 반납일을 지키지 않았지만, 줄리아가 대출자를 찾아가서 직접 책을 받아냈다.

원에 관한 위대한 발견 - 파프스 정리에서 시작된 낙서는 사영기하학을 지나 시공간을 꿰뚫었다.

낙서 끝에서 ‘미네르바의 우주’로 불리는 듀아멜 공간이 나타났다.

‘세상에는 천재들이 많구나.’

듀아멜 공간은 준이 최근에서야, 그것도 매우 어렵게 도달한 차원이었다.

준이 수백 개의 곱셈과 아흔두 개의 미분, 서른다섯 개의 적분으로 듀아멜 공간을 찾아냈지만 ···.

낙서를 한 사람은 두 개의 덧셈으로 공간에 도착했다.

노력으로는 매울 수 없는 재능의 차이!

준은 도서관 책을 볼 때, 책 내용보다 밑줄과 낙서를 더 살폈다.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천재를 만났다.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99.9999%는 자신의 색을 잃고 평범함에 묻혀버린다.

준도 그럴 뻔했다.

바쁜 하루였다.

준은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가볍게 눈을 붙였다.

조금이라도 자둬야 했다.

깜빡 잠이 든 순간, 검은 옷을 입은 사신이 나타났다.

사신은 랜달이었다.

그의 손에는 사신의 낫으로 불리는 ‘이즈라일의 낫’이 들려 있었다.

악마처럼 웃으며 중얼거렸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군. 꿈속에서는 널 죽일 수 있다!”

랜달은 있는 힘껏 이즈라일의 낫을 휘둘렀다.

이즈라일의 낫 - 악몽의 암살자가 가진 핵심 아이템이었다.

준의 목은 두부처럼 싹둑 잘려나갔다.

“기어이 내가 준을 죽였다!”

랜달은 소리쳤다.

준의 죽음은 바람에 날리는 모래처럼 스르르 사라졌다.

“뭐지? 준이 죽었는데 왜 풍경이 그대로지?”

랜달은 후드를 벗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느리다.”

준은 멀쩡한 모습으로 앞에 서 있었다.

‘헉! 분명 베어지는 느낌이 있었는데 ···.’

“네가 벤 것은 내 그림자였다.”

스르르 사라졌던 모래가 준의 발밑으로 모여 그림자가 되었다.

“내가 낫을 피할 때, 나의 그림자가 따라오지 못하고 베였다.”

도대체 얼마나 빨리 움직이기에 ···. 그림자가 따라붙질 못한단 말인가!

랜달은 이즈라일의 낫을 휘둘렀다.

준의 평가가 메아리처럼 들렸다.

“느리다.”

“느려.”

“점점 더 느려지고 있다.”

준은 검지 끝을 랜달의 이마에 가져갔다.

“이것이 속도의 차이다.”

준의 손톱이 랜달의 이마에 닿는 순간, 랜달은 오징어가 뿜은 먹물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

준은 잠에서 깨어 독서를 계속했다.

에바가 스노우캣 커피를 가져왔다.

“준 회장. 사실은 부정 탈까 봐, 아무 말 안 했는데, 어제 하루 내내 불길했어. 모든 게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에바. 너의 육감은 정확했다.”

“뭐? 무슨 일이야. 아까 오면서 호세랑 디아나, 토크, 세이턴, 카이를 만났는데 ···. 맞다! 로켈이 안 보였어! 로켈에게 무슨 일 있어?”

“그런 게 아니라 ···.”

“뭔데 빨리 말해!”

“어젯밤 잠을 설쳤다.”

“커피를 너무 마셔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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