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 준-58화 (57/141)

< 파라엔진-8 >

에바는 불길한 육감이 스쳤다.

랜달의 능력을 알아내려고, 그를 만나는 건 ···. 위험하다.

발자취의 정체를 밝히겠다고, 발자국을 따라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꼴이다.

그러나 준은 결정을 내렸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

“포시즌은 줄리아와 데이트했던 곳이고, 저도 자주 가죠. 먼저 가서 안전 확인하겠습니다.”

“저도 따라가고 싶지만 ···. 디아나. 에바를 모셔라.”

로켈은 에바를 따라가지 못했다.

그는 토끼굴에서 할 일이 있었다.

랜달은 호세의 컨실슈트를 가졌다.

전자파 왜곡 컨실슈트는 유령 그 자체였다.

방비가 필요했다.

로켈의 방법은 거미줄 스프레이였다.

눈썹 길이의 얇은 거미줄을 흩뿌리면, 허공에 거미줄이 떠다니고, 떠다니던 거미줄은 컨실슈트에 붙게 된다.

거미줄의 위치를 파악하면 유령을 찾아낼 수 있다.

“그림자 기사단에서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로켈은 거미줄 스프레이를 보여주었다.

준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가 덧붙였다.

“잃어버린 컨실슈트는 저의 책임입니다. 지금 당장 랜달 빌딩으로 쳐들어가 회수하고 싶었지만, 준짱이 직접 해결하신다니, 믿고 따르겠습니다. 스프레이 사용은 허가해주십시오.”

“너저분해서 안된다.”

“1시간 후에 자동 분해됩니다.”

“카본 프로테인 알파 섬유. 공기 중에 노출되면 탄소와 알부민으로 분해되지만, 끈적거림이 남고 나중엔 곰팡이도 핀다.”

“아!”

로켈은 할 말을 잃었다.

거미줄 스프레이는 시온의 비밀이었다. 그런 비밀을 어젯밤 날씨처럼 읊어대다니! 더없이 훌륭하긴 하지만 ···.

“준짱. 죄송하지만 ···. 스파이더웹이 없으면 은폐슈트에 대응할 방법이 ···.”

“카이.”

준이 이름만 불렀는데, 카이에겐 준의 본뜻이 명확하게 보였다.

“거미줄 스프레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요? 가시광선, 적외선, 라디오파 그리고 음파와 초음파까지 왜곡하는 필름을 검출하려면 ···. 중력파?”

“중력파 잡으려면 방 전체에 마이켈슨 레이저를 채워야 해. 눈시럽다.”

“중력파가 아니라면 ···. 준 형아, 나는 잘 모르겠는데?”

“물체라고 생각하지 말고, 이미지를 캡처한다고 생각해.”

준 답지 않게 친절한 말투였지만 ···.

“이미지? 형아가 그렇게 말하니깐, 더 모르겠어.”

카이는 보았다. 준의 한숨을. 그 한숨은 엉망이 된 호세를 봤을 때보다 더 짙었다.

호세의 희생은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운명이었다.

로켈도 보았다. 준의 위대함을. 그 위대함은 세이턴을 살릴 때보다 더 컸다.

사선을 넘나들던 로켈은 준의 말을 되새겼다. - ‘더 좋은 호세.’

어리석음을 극복하면 운명을 벗어날 수 있다. - 준이라면 호세를 되살릴 수 있다!

그냥 원상복귀가 아닌, 한계를 뛰어넘는 더 찬란한 생명이 가능하다.

그 증거가 바로 세이턴이었다.

로켈의 생각은 그의 몸짓으로 새어나왔고, 세이턴은 로켈의 보디랭귀지를 읽었다.

“멍!”

세이턴도 준을 믿었다.

준이라면 호세를 죽음 속에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결연한 공감대가 방 안을 꽉 채웠다.

“준 형아. 몰라서 미안해. 가르쳐주라.”

“보여줄 테니, 훔쳐라.”

준은 에어스크린을 불러냈다.

기본적인 자기장 패턴이 보였다.

준이 손짓에 따라 자기장 패턴이 바뀌었다.

자기장은 돌림노래를 하듯이 출렁였다.

자기공명은 무선충전과 영상의학에서 자주 써먹는 수법이었지만, 준이 만들어낸 자기공명은 질감이 달랐다.

무교병과 케이크의 차이 - 준은 자기장을 밀가루 반죽처럼 다루고, 숙성시키고, 구워냈다.

카이는 리듬미컬한 준의 손짓과 그에 따라 변하는 신세계를 보며, 준 형아에겐 요리사의 재능도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준이 만들어낸 수많은 변화 속에서 푸리에 구조방정식이 모습을 드러냈다.

푸리에 구조방정식으로 오차항을 보정한 다변량 회귀식은 기후예측모형이 되었고,

푸리에 구조방정식으로 굴린 입자가속기는 입자농축 장치가 되었다.

푸리에 구조방정식으로 재구조화된 자기장은 세상을 보는 ···. 새로운 창窓이 되었다.

전자현미경보다 더 정밀하게 세상을 그려내고, X선보다 더 선명하게 투사되었다.

자기공명 장치를 이용한 MRI는 강력한 초전도 자석을 이용하지만, 준이 만들어낸 구조화된 자기장을 사용하면, 스피커에 붙어 있는 자석으로도 MRI 보다 우수한 영상장비가 가능했다.

MRI가 원시시대 퉁퉁 북소리였다면, 구조화된 자기장은 웅장한 오페라였다.

카이는 오페라가 보이고, 들리고, 느껴졌다.

주르륵 - 눈물이 흘러내렸다.

진정한 감동은 슬픔을 능가한다. - 엉망이 된 호세를 봤을 때보다 더 많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푸리에 구조방정식 ···. 이렇게 만나니깐, 느낌이 또 다르네.’

카이는 해탈한 느낌이었다. 아직 섹스를 해보지는 못했지만, 그 이상이 분명했다.

요빅을 처음 만들 때만큼이나 가슴이 벅차올랐다.

“형아. 뭔지 알 거 같아. 이런 거라면 ···. 사람의 생각도 보이겠어.”

뇌파로 드론을 조종하거나, 꿈 영상을 저장하는 장치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런 제품들은 뇌파를 얼마나 정확하게 측정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품질이 결정되었다.

준의 구조화 자기장을 사용하면, 뉴런 단위의 전기변화는 기본이었고, 뉴런 미토 콘드리아의 미세한 이온채널까지 감지한다.

카이 옆에 있는 로켈은 카이처럼 감동하고 싶어도, 내용을 몰랐다.

“이봐. 나도 좀 느끼자. 준짱이 보여준 게 뭐였어?”

“이제 우리는 ···. 인간이 느끼는 의식보다 더 깊은 무의식까지 선명하게 볼 수 있어요.”

“뭐 그런 거였어? 컨실슈트는? 컨실슈트도 디텍팅하는 거지?”

*

“은폐슈트라고요? 확실합니까?”

블랙스타의 제5 사단장 에이단은 곰 같은 덩치를 들썩였다.

랜달은 호세에게 벗긴 슈트를 보였다. 컨실슈트는 비닐처럼 얇았다.

에이단의 눈이 매처럼 날카로워졌다.

“성 기사단의 최고 아이템 ···. 컨실슈트가 맞군요.”

“옷은 있는데, 입을 줄 아는 사람이 없어.”

“로크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지난번 에어퓨마에게 당했던 멍청이는 사양하겠어.”

“랜달 회장님. 로크의 패배는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에어퓨마의 기갑슈트가 말도 안 될 정도로 강했던 겁니다.”

“동의할 수 없군. 컨실슈트를 입고 침실에 들어왔던 놈이 에어퓨마의 리더 호세였다.”

“!!”

에이단은 놀란 토끼(!!)처럼 귀가 쫑긋 섰다. 랜달 회장이 블랙마켓에서 능력을 얻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에어퓨마의 호세를 제압하다니!

떠오르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 닥터 칼라니티.

그 악마라면 얼간이 랜달을 재앙으로 뻥튀기할 수 있다.

“회장님. 로크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십시오. 그는 좋은 로크입니다. 성 기사단 출신으로 컨실슈트를 자유자재로 사용합니다.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

에바는 포시즌 입구에서 아르크스를 맞이했다.

리무진의 성배 아르크스는 대통령의 리무진으로 통했다.

문이 열리고 준이 나왔다.

“준 회장님.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에바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해서, 평소보다 더 깍듯하게 준을 대했다.

파루시아, 헬하운드, 유진 악마, 요빅까지 ···. 준은 엄청난 거물이었지만, 아직 너무 젊었다.

젊디젊은 준의 위엄을 세워주려면, 주위 사람들이 자세를 낮춰야 했다.

준이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에바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이 원했다.

준이 입은 옷은 길거리에서 산 것들이었다. 운동화도 인도네시아 제품이었지만, 뭔가 달라 보였다.

포시즌 귀빈실에서 준과 에바 그리고 랜달과 잔느와 마주 앉았다.

굿데이와 선데이의 최정상 만남이었다.

랜달은 마음껏 아이컨텍을 했다.

승부는 이미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어떻게 즐길까? 정도였다.

“내 능력이 궁금하다고? 그런 건 예측모형으로도 알아낼 수 없나 보군.”

“이제 궁금하지 않다.”

“지금 블러핑을 치다니! 확실히 아직 어리군. 내 능력이 궁금하지 않았다면, 네가 여기 나올 리 없어.”

랜달은 그의 추리력을 맘껏 뽐내며, 준의 머릿속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준의 머릿속을 꽉 채운 생각은 - ‘따분하다.’였다.

‘뭐지? 이 녀석? 지금 느긋하게 심심함을 느낄 때가 아닌데 ···.’

“마인드 해킹. 네 능력은 이미 알고 있다.”

가장 놀란 사람은 다름 아닌 랜달이었고, 그다음이 잔느였다.

“어떻게 ···.”

“호세가 알려줬다.”

“말도 안 돼! 그는 죽었어.”

“트라우마에 갇혀 있었을 뿐. 죽은 건 아니었다. 호세는 트라우마를 극복했다.”

“그럴 리가! 그의 호흡과 심장이 멈춘 것을 확인했다.”

“호세.”

준이 명하자, 귀빈실 문을 열고 호세가 들어왔다.

영화 속 타잔의 재림이었다.

랜달이 서둘러 아이컨텍을 시도했지만, 호세는 이미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등에 작은 배낭을 멨다.

“보이느냐.”

“창문 쪽에 있습니다.”

“가져가라.”

준이 명하자, 호세가 몸을 날렸다.

수많은 전투 경험과 노가다 경력이 농축된 원펀치!

컨실슈트를 입고 창문 쪽에 숨어 있던 로크도 만만치 않았다.

지난번에는 기갑슈트의 성능 때문에 개먹이가 될 뻔했지만, 이번에는 정직한 승부가 가능했다.

따지고 보면 컨실슈트를 입은 로크가 조금 더 유리했다.

퍽!

로크를 어깨를 세워서, 호세의 펀치를 막았다.

‘내가 보인단 말인가!’

로크는 호세의 왼쪽을 파고들면서, 팔꿈치로 명치를 찍었다.

로크의 기술은 ‘링컨의 곡괭이’로 불리는 일격필살이었다.

“아머 슈트가 후져서 느린 줄 알았는데 ···. 원래 느렸구나!”

호세는 로크가 똑똑히 보였다. 그의 선글라스에는 구조화 자기장 센서가 있었다.

세상이 흑백영화처럼 보였지만, 선명했다.

링컨의 곡괭이는 허공을 갈랐고, 호세의 원펀치는 로크의 관자놀이에 박혔다.

호세는 능숙하게 로크가 입고 있는 컨실슈트를 벗겼다.

바나나 벗겨지듯이 로크의 알몸이 드러났다.

호세가 배낭에서 커튼을 꺼내 로크를 가려주었다.

“준 대장. 명령대로 회수했습니다.”

“가봐라.”

준이 말했지만, 호세는 가만히 서서 선글라스 너머의 랜달을 노려보았다. 호세의 거친 분노가 모두에게 전해졌다.

“호세. 이번 일은 내가 해결한다.”

“알겠습니다.”

호세는 준 대장에게 자세를 갖춘 후, 유유히 밖으로 나갔다.

잔느는 고릴라 같은 호세를 가볍게 다루는 준을 보며, 가슴이 뛰었다.

그녀의 흥분이 랜달에게 보였다.

“준. 내 능력을 알면서 나와 아이컨텍을 하다니 ···. 이 자리에서 철저하게 파괴해주겠다.”

바로 그때 에바는 오전에 느꼈던 불길함이 반복되었다.

랜달을 만나는 건 위험하다.

랜달의 마인드 해킹이 시작되었다.

준은 랜달의 마인드 해킹을 간단하게 평했다.

“따분하다.”

구조화 자기장을 디자인하는 것에 비하면, 랜달의 마인드 해킹은 하품이 날 정도 헐거웠다.

“랜달 ···. 전두엽과 시각중추에 마그넷 뉴런을 이식받았군.”

준이 손가락을 튕기자, 에어스크린이 튀어 올라왔다.

스크린에는 랜달의 두개골과 그 안에 있는 뇌가 3D로 그려졌다.

전두엽과 후두엽 시각중추에 빨간색 점이 반짝였다.

랜달이 마그넷 뉴런을 이식받은 부위였다.

에어스크린의 자료는 호세가 랜달을 노려봤을 때, 촬영된 영상이었다.

“준! 어째서 너의 뇌는 해킹되지 않는 거지!”

랜달은 이를 갈았다.

“속도의 차이다.”

ps 고지라가님이 보내주신 팬아트입니다. 랜달과 준의 이미지가 확 와닿습니다.

고지라가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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