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 준-56화 (55/141)

< 파라엔진-6 >

가파른 P파와 부드러운 Q파에 이은 평행선 D파가 나타났다.

생명의 매듭이 풀릴 때 나타나는, D파는 죽음을 뜻한다.

‘삐-이-이-’

D파는 3분 넘게 계속되었다.

박동이 사라진, 죽음의 오마주 같은 곧은 직선이었다.

“역시 준짱이 진리야.”

곡선을 지켜보던 로켈은 나직이 감탄하며, 작은 감동까지 느꼈다.

준짱의 예상대로 찰스와 키노시타의 뒤처리는 랜달이 직접 했다.

계속 이어지는 D파가 그 증거였다.

로켈이 직접 처리했다면, 시체 처리와 같은 잡무가 늘었을 것이다.

에바가 ‘처리 수당’을 지급했겠지만 ···.

돈이 전부가 아니다. - 로켈은 살면서 무수히 느꼈고, 굿데이 정직원이 되고서 더 실감했다.

돈의 가치를 삶의 우선순위로 따지자면,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평균 5위 정도

였고 ···. 굿데이에 와서는 그 순위가 25위까지 떨어졌다. 24위는 ‘건널목 신호등 지키기’였다.

로켈은 찰스와 키노시타를 돌려보낼 때, 그들 몸에 바이탈 마커를 붙였다.

바이탈 마커에서 보내오는 신호를 보면, 둘은 2시간 전에 렘수면에 빠졌고, 3분 전 최종적으로 숨을 거뒀다.

자다가 죽었으니 운 좋은 것일 수도 있지만, 바이탈 마커의 신호를 보면, 극심한 정신적 충격에 시달렸던 징후가 보였다.

겉보기에는 평온했겠지만, 정신의학적인 측면에서는 극한 고통에 의한 죽음이었다.

고통은 몸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 뇌가 느낀다.

시그널은 말한다. - 찰스와 키노시타의 뇌는 온갖 고통을 맛봤다. 더는 감당하지 못하고 ‘고통 소화불량’으로 시스템 다운되었다고... 그 둘의 뇌는 고통으로 배 터져 죽은 개구리 꼴이 난 것이었다.

찰스와 키노시타는 랜달을 무서워했다.

로켈은 그 이유를 몰랐는데, 이제 조금 감이 왔다.

- 랜달 회장은 능력자다. -

찰스와 키노시타는 실버 드래곤의 본부장으로 능력자의 영역에 들어선 인물들이었다.

보통 사람은 까무러칠 정도의 고통에도 침착하게 대응한다.

그런 능력자를 동시에 두 명이나 처리했다는 것은, 랜달 회장의 능력이 탁월하다는 증거였다.

로켈은 이 사실을 에바에게 알렸다.

“부족해!”

그녀는 순발력 빠른 탁구선수처럼 말했다.

“뭐가?”

“히스토리가 없어. 평범했던 랜달이 뜬금없이 능력자가 되었다고?”

“에바도 어느 날 갑자기 슬랭파워가 터졌잖아. 갑자기 욕으로 뇌혈관도 막 터트리고 ···.”

“계기가 있었어. 트리탄이 준 회장님을 위협했을 때, 목숨 걸고 욕 날렸는데, 그때 새롭게 태어났어. 욕쟁이 이전과 이후의 경계점이었지. 히파티아를 만나서 뇌출혈 농축 주파수도 경험했어. 히파티아 같은 잡년도 상대하지 못할 바엔 죽겠다는 각오였지. 너를 스카우트 할 때에도 나는 하이힐을 벗고 ···.”

“그만! 무슨 말인지 알겠어. 랜달의 뒷조사를 해볼 게.”

“랜달도 우리처럼 한계 상황을 뛰어넘으면서 능력을 얻었을까?”

“조사하면 나오겠지.”

“알았어. 이제 가봐.”

에바는 자연스럽게 로켈에게 말했다. - ‘알았어. 이제 가봐.’

로켈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내가 이러려고 굿데이 직원이 된 게 아닌데 ···.

에바는 다채널 웹 쇼핑에 집중했다.

돈 있는 사람에겐 살기 좋은 세상이었다. 멋진 물건, 스마트한 제품, 아름다운 상품, 환상적인 서비스, 황홀한 요리와 볼거리 ···.

로켈은 뭔가 손해 보는 느낌이었다.

‘일은 내가 했는데, 에바는 놀면서 ···. 일만 시키고 ···. 이런 게 직장 생활인가? 다들 이러고 사는 건가?’

“왜 안 가고 있어? 할 말 있어?”

에바는 포시즌의 풀코스 식사를 예약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 그냥 ···.”

“가기 전에 스노우캣 커피 좀 가져와.”

“왜 갑자기 ...”

“직장 생활에서 커피 심부름은 기본이거든.”

‘뭐지? 이년이 이제 독심술도 하나? 아니면 그냥 하나 얻어걸린 건가?’

로켈은 에바도 준처럼 리미트리스 테크를 타기 시작한 게 아닐까? 불안했다. 준의 리미트리스 테크라면, 세계 평화에 별로 위협적이지 않겠지만, 에바의 리미트리스 테크라면 앞날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녀의 레즈 성향과 남성 혐오증이라면, 바이러스 기술로 모든 남자를 거세할지도 모른다.

“뭐 그렇게 놀래? 나 독심술 못해. 커피시럽은 시나몬 시럽으로 부탁할 게.”

‘그렇다는 거지. 나 같은 고급 인력에게 커피 심부름이라! 좋아 커피에 고급진 침을 거하게 뱉어주마.’

“커피에 이상한 짓 하지 마. 아밀라아제 검사 할 거야. 검사 결과에 따라 널 거세할지도 몰라!”

*

준은 언제든 편하게 살 수 있었다. 파루시아 시즌에 이미 평생 먹고살 돈을 벌었다.

풍족하게 즐기며 살다가, 죽기 전에 ‘아! 좋은 삶이었다.’라며 눈감을 수 있었다.

편안한 삶 - 누구에게나 보이는 큰길이었고, 쉬운 선택이었다.

준은 그 큰길을 스스로 막았다.

그는 즐거움과 쾌락을 버리고, 탐험을 시작했다.

지식 세계의 탐험 - 그가 선택한 첫 번째 세계는 도서관이었고, 탐색 방법은 ‘뉴런 독서’였다.

준은 왜 편안한 삶을 잡지 않고, 사막을 홀로 걷는 고행을 택한 걸까? - 카이는 항상 궁금했다.

“나에겐 블랙홀과 같은 공허감이 있어. 예전에는 리만 함수 이항분포로 굶겼는데, 요즘은 그 약효도 다 떨어졌어. 공허감을 달래는 방법은 충만감뿐이야. 편안한 삶에서는 얻는 충만감으로는 부족해. 블랙홀을 상쇄하는 강력한 충만감이 필요해.”

준은 카이가 모를 소리만 늘어놨다. 카이는 침을 삼켰다.

‘이 형아의 병맛 ···. 갈수록 심각해지네.’

준에겐 지구 정복이라든지 신세계 창조 같은 야심이 없었다.

오히려 40세 이후의 ‘마법’을 믿을 정도로 순진했다.

카이는 준에게 요빅을 만든 이유를 물었는데, 준의 대답은 ‘하면 될 거 같아서’ 였다.

요빅이 세계 경제에 미친 파장에 비하면, 이슬처럼 싱거운 이유였다.

‘이 형아! 엄청 머리 좋은데, 엄청 바보다! 그런데 ···. 항상 진리다.’ - 카이의 결론이었다.

준에게 제대로 된 야심이 있었다면, 정치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세상을 관리하고, 지배하고, 통치하고 것은 결국 정치였다.

자본주의를 가능케 한, 신용화폐제도도 경제 시스템보다는 정치 시스템에 가까웠다.

우주의 빅뱅처럼, 자본주의의 팽창도 신용화폐제도에서 시작된다.

“준 형아는 무슨 생각으로 살아?”

“그런 거 묻는 거 아니다.”

“왜?”

“생명에는 목적이 없다.”

“그럼 뭐가 있는데?”

“본능.”

“그냥 산다는 소리네. 형아라면 거창한 이념이나 비전이 있을 줄 알았는데 ···. 형은 사춘기 때 어떤 생각 했어?”

“취직 걱정으로 밤 지새웠지.”

“정말? 굿데이 회장이 사춘기 때 일자리를 걱정했단 말이야.”

“굶는 연습도 했지.”

“왜? 인체 광합성으로 에너지 얻는 실험이었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집에서 쫓겨나면 ···. 노숙자가 되어야 했다.”

“오! 이거 대박이네! 파루시아를 예측하고, 헬 하운드 시즌으로 돈을 긁어모으고, 요빅 생태계로 세계 경제를 뒤엎은 형아가 노숙자가 될 뻔했다니! 형아는 노숙자가 되었어도 잘했을 거야!”

“고맙다.”

먹고 살기 위한 한 점 돌파 - 수학.

아버지가 수학으로 살길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준은 자폐아들과 함께 포장지 공장에서 박스 모양을 만들고 있을 터였다.

아버지가 함께 밤새워주지 않았다면, 프로그램으로 수학문제를 만들어주지 않았다면, 문제집을 사주지 않았다면 ···. ‘너는 할 수 있어!’ 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 준의 현재는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과거를 떠올리던 준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카이가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형, 지금 무슨 생각해?”

“아빠 생각.”

“형아는 좋겠다. 나는 아빠가 누군지도 몰라.”

“카이. 생각할 수 없으면, 상상해라. 그것이 너의 권리다.”

*

잔느는 끈적거리는 꿈에서 간신히 깨어났다.

노리개가 되는 지저분한 꿈이었다.

꿈속에 나타났던 그녀의 주인은 랜달이었다.

그녀는 무서웠다.

찰스도 키노시타도 그리고 다른 직원들도 랜달을 무서워한다.

현실 속의 랜달은 운 좋게 성공한 풍운아였지만, 꿈속의 랜달은 난폭한 폭군이었다.

거의 모든 사람의 꿈속에 같은 캐릭터의 랜달이 나타나는 것이 우연의 일치일까?

그럴 리 없었다.

잔느는 옆에 누워 있는 랜달을 보았다. 꿈이 아니었다.

그녀와 랜달은 어젯밤 같이 잤다.

“내 꿈에 왔었어?”

그녀는 랜달을 흔들어 깨웠다.

랜달의 눈이 반쯤 떠졌다.

“실제로 하는 것보다 꿈에서 하는 게 더 낫더군.”

“변태!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 있어!”

“나한테 할 소리는 아닐 텐데. 나는 너의 생각과 꿈을 환히 보았어.”

랜달은 보았다. - 그녀가 준 앞에서 자청해서 옷 벗는 것을.

그녀는 항상 준과 랜달을 비교했고, 선택 가능할 때마다 준을 골랐다.

준은 그녀의 백마 탄 왕자였고, 우상이었으며, 종교였고, 소망이었다.

그녀는 주문을 외듯이 했다.

“날 위해 준을 부숴줘!”

“그것도 봤어. 파괴된 준을 네가 구원하더군. 만신창이가 된 준이라도 너의 것으로 하려는 거지? 준이 그렇게 잘난 놈이야?”

“그는 ···. 모든 여자가 꿈꾸는 존재야.”

“달 표면처럼 메마른 감정의 소유자인데도?”

“아름답잖아.”

그녀는 창문 밖 보름달을 보았다.

“너는 준을 구원할 기회가 없을 거야. 내가 철저하게 파괴하겠어.”

“그렇게 된다면 ···. 네가 나의 종교가 되는 거야. 부디 그렇게 해줘.”

그녀는 랜달의 품에 안겼다.

“이래서 현실이 싫어. 무거워 비켜.”

잔느는 농담이겠거니 여기고 웃었지만, 랜달의 차가운 눈빛을 본 순간, 피가 얼어붙었다.

처음 랜달을 만났을 때에는 얼간이었고, 잘 보이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개 같았는데 ···. 랜달은 능력을 얻으면서 변했다. 그는 점점 차가워졌다.

‘얼마든지 차가워져도 좋아. 꼭 준을 파괴해줘.’

"약속하지."

랜달은 잔느에게 얇은 홑이불을 덮어주며,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창문 밖 보름달은 평소보다 커 보였다. 지구와 달의 거리가 38년 만에 가장 가까워지는 시기였다.

“은폐슈트 한 장으로 블랙스타의 보안을 뚫다니. 굿데이에서 납셨군. 이름이 ···.”

그의 시선은 창문 왼쪽 벽 모서리로 향했다.

잔느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얼굴과 눈이 동그래졌다.

랜달의 육체는 그리스 조각처럼 완벽했다.

블랙마켓에서 능력을 이식받은 후로, 점점 더 몸이 좋아졌다.

그녀도 언젠가는 블랙마켓을 찾을 생각이었다.

아름다움과 변치 않는 젊음, 그리고 능력을 얻기 위해서.

“호세였군. 부끄러워 말고 모습을 드러내지.”

랜달의 시선은 아무것도 없는 벽 모서리에 고정되었다.

호세는 난감했다. 그는 굿데이의 컨실슈트를 입고 잠입해 있었다.

랜달과 잔느를 해치려는 목적은 아니었고, 자료 수집을 위해 마커를 심어둘 계획이었다.

‘첨단 보안 장비도 감지하지 못한 나를 어떻게 알아낸 거지?’

컨실슈트는 얇은 랩이었다.

‘판타지늄-액정섬유’로 만들어진 컨실슈트는, 감싼 물체의 곡률값에 따라 가시광선과 전자파를 그대로 통과시키는 효과를 낸다.

레이더로도 잡아낼 수 없었고, 초음파 탐지기도 의미 없었다. 인간의 눈으로도 허방을 짚을 뿐이었다.

“몰래 엿보다니 악취미군. 홍보영상을 보면, 더할 나위 없는 진짜 사나이 같았는데 ···. 내가 무섭나?”

랜달의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렸다. 사실 그에게도 컨실슈트를 입은 호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호세의 생각이 보였을 뿐이었다. 그 생각을 통해, 랜달은 호세가 있는 곳을 그려낸 것이었다.

호세는 조용히 사라져야겠다고 판단했다. 랜달의 감지능력은 의외였지만, 장단 맞출 생각은 없었다.

그는 침실 문을 향해 바람처럼 움직였다.

“하는 짓을 보니, 날 죽이러 온 건 아니군. 그런데 이를 어쩐다 ···. 나는 이 자리에서 너를 파괴하겠다. 준을 위한 예고편이라고 해두지.”

슬며시 움직이던 호세가 멈췄다.

‘뭐? 나를 어쩐다고?’

혈압이 올랐다.

아직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루베르 장군에게 요빅 격함을 의뢰한 개자식이 랜달일 확률이 지나치게 높았다.

요빅은 호세에게 친자식과 같은 존재였다.

랜달은 호세의 생각이 선명하게 읽혔다.

“호세. 좋은 기회잖아. 한 판 붙자고. 그렇지 않아도 네놈들의 홍보 영상을 보고, 한 수 가르쳐주고 싶었거든. 너무 기갑슈트에 의존하더라고 ···. 전투라는 건, 정신력이 우선이야. 친자식 같은 요빅의 복수도 해야지.”

“아! 정말 그냥 가려고 했는데.”

호세는 더는 참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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