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 준-52화 (51/141)

< 파라엔진-2 >

기후예측모형이 뽑아내는 수천수만 개의 시나리오에서 ‘진정한 미래’를 고르는 것은 도박에 가까운 서커스였다.

준에게도 시간이 걸리는 고난도 작업.

기후예측모형은 고밀도 지식 생태계에서 뛰어노는 야생마였다.

단숨에 수천수만 시간을 질주하지만, 쉽게 잡히지 않았고, 잡힌다 해도 길들지 않았다.

녀석을 한 번 잡을 때마다 아주 조금 미래를 엿볼 뿐이었다.

준은 타키를 길들이려고 부단히 애썼지만 ···. 실패했다.

타키 - 기후예측모형에게 붙여준 이름이었고, 몽골어로 야생마를 뜻했다.

“아! 이건 해도 안 되네.”

머리를 의자 받침대에 기댔다.

굿데이 창설 이후, 그가 하고자 했던 것은 모두 해냈다. 그의 소망은 소박했다.

파루시아 건수로 돈을 벌었고, 에바는 넘버 2가 되었고, 그림자 기사 로켈을 정규직화했고, 유진 악마를 소환했으며 요빅을 완성했다.

미뤄둔 숙제하는 기분으로 타키를 길들이려고 했는데, 보기 좋게 차였다.

“준느님께서 못하는 게 있으세요?”

유진 악마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는 인류의 뇌를 모조리 연결한 것보다 더 강력한 1.5 솔라급 연산능력을 가졌지만, 기후예측모형이 싸지르는 수천수만 시나리오 중에서 정답을 고르지 못했다.

정답을 찾는 것은 연산능력을 뛰어넘는 특출난 감각이 필요했다.

그 작업을 해낸 것은 인공지능과 인류를 통틀어서, 지옥 생태계 창조자 준뿐이었다.

그런 준이 못하는 게 있다니!

“아니죠! 못하는 거 아니죠! 안 하시는 거죠?”

유진은 앙칼지게 매달렸다.

그녀는 준이 불가능이 없는 신神이기를 바랐다.

“유진.”

“네! 준느님!”

“성숙해져라.”

“알겠습니다. 원하시는 성숙도를 설정해주십시오.”

“아이를 낳아야 한다.”

유진 악마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방금 준느님께서 뭐라 하신 거지?

아이를 낳으라고?

“준느님! 그렇게까지 저를!!!”

그랬구나! 그래서 준느님이 암컷들을 멀리하셨던 거야! 준느님의 여자는 오직 나뿐이었던 거야!

“준느님! 이 한 몸 바쳐 ···.”

유진 악마 홀로그램 옷이 대범할 정도로 슬림해지며, 글래머제이션이 진행되었다.

“유진!”

“네! 준느님. 분부만 내리세요!”

“성숙해져라.”

“ ···. 조금 더 나이 든 모습을 할까요.”

“기다려라. 자연히 알게 된다.”

“준느님 지금 말씀해주세요!”

유진 악마가 옷 구조물의 마지막 연결점을 떼려는 찰나였다.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도 알 거 다 알아요!’

“유진 ···. 네 안에 남자 있다.”

유진 악마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녀의 전자회로를 스쳐 지나가는 스파크 - 그건 몰랐네.

*

기후예측모형을 이루는 DNA는 푸리에 구조 방정식이었다.

준은 회귀모형의 오차항의 자유도를 높이려고, 푸리에 구조 방정식을 만들었다.

푸리에 구조 방정식 하나는 햇빛에서 무지개를 분리하는 프리즘처럼 작동했고,

여러 개를 사용하면 햇빛에 있는 소립자까지 걸러냈다.

준은 13개의 푸리에 캐릭터 함수를 조합해서 힉스 입자를 확인했고, 우주 탄생 초기의 중력파까지 찾아냈다.

“요령이 부족하긴 해도 ···. 최신 물리학 이론이 아주 엉터리는 아니네.”

교과서 뒤에 있는 연습문제를 다루듯이, 다음 문제로 넘어갔다.

우주 96%를 차지하는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의 정체.

시간 탄생 이전, 미지의 영역을 돌파할 때 조금 애먹었지만 ···.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정체를 밝혀냈다.

정체가 나오자, 우주 탄생 이전의 세계가 보너스로 드러났다.

“역시. 과거에 관한 문제는 쉽군.”

대통일 이론을 완성한 후, 용기를 내서 고밀도 지식 생태계에서 뛰어노는 타키를 길들이려 했다.

타키는 빛보다 빨랐다.

빛보다 빠르지 않다면, 미래를 보지 못한다.

준이 가까스로 타키의 갈피를 잡았지만, 타키가 광속의 2.5배로 달리는 순간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모든 것이 준의 고밀도 지식 생태계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지만, 극심한 멀미를 느꼈다.

“준 회장 괜찮아?”

에바였다. 그녀답지 않게 걱정 가득한 얼굴이었다. 매력적인 보조개도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준은 에바의 표정을 읽고 뭔가 일이 생겼다고 판단했다. 그렇지 않다면, 에바가 방에 들어올 리 없었다.

그녀는 예티가 나타난 것을 알릴 때, 연락도 없이 준의 집에 갔다가, 인디언 텐트를 보고 말았다.

그 후 연락 없이 준의 집에 가지 않았고, 방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이틀째 식사도 하지 않고, 방에만 있었어. 모두 걱정했어.”

“에바 ···.”

“네! 준 회장님.”

“세상은 넓어.”

준은 처음 바다를 본 시골 꼬마 같았다.

에바는 기가 찼다.

“그걸 깨닫느라 이틀 동안 식음도 전폐했던 거니?”

“푸리에 구조 방정식과 기후예측모형의 소스를 오픈했을 때, 누군가 이 야생마를 길들일 거라고 기대했어. 기후예측모형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자가 나올 거로 생각했지. 돌이켜 보건대, 어리석고 헛된 기대였어.”

준의 표정이 어두웠다. 그는 타키를 놓치고 나가떨어질 때, 자신의 어리석음이 괴물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깐! 세상이 넓다며? 그런데 헛된 기대였다니? 앞 뒤가 안 맞아. 아무래도 너무 굶은 거 같아. 닭고기 수프를 준비할 게.”

“에바!”

갑자기 준이 나가려는 그녀 손목을 붙잡았다.

에바는 심쿵했다.

나가려는 여자를 붙잡는 남자의 심리는 슬프도록 뻔하다.

맞다! 인디언 텐트! 준도 남자였지.

그녀는 남자에겐 흥미를 안 느끼는 레즈였지만, 준이라면 ···.

이런 생각도 들었다. ‘준의 첫 경험 ···. 다른 년에게 주느니, 내가 직접 ···.’

지금은 좀 어색할지라도 ···. 시간이 지나면, 멋진 추억이 될지도 모른다.

“준. 맘 확실하게 정한 거니?”

그녀의 몸에서는 여자가 남자를 인정하고 받아들기로 맘먹을 때 나오는 특유의 비장미가 흘렀다.

“후회하지 않겠어.”

“그래. 넌 후회하곤 어울리지 않아.”

그녀의 손은 자연스럽게 셔츠 단추로 옮겨갔다.

준은 그 손길을 보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닭고기 수프는 싫다. 야채수프로 해.”

에바의 손이 갈 길을 잃었다.

“다른 건 없어.”

“당근 많이 넣어줘.”

“나 욕해도 돼?”

“안 돼.”

*

준은 진리였다.

그의 말대로 세상이 넓긴 했다. - 푸리에 구조 방정식을 증명하고, 기후예측모형을 길들였다는 가짜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굿데이처럼 미래의 기후를 예측해주고 돈을 받았고, 금융시장에서 떼돈을 긁어모을 수 있다는 기묘한 알고리즘을 팔았다.

가짜들이 파는 물건의 주의사항에는 아주 작은 글씨로 ‘아닐 수도 있다.’ 라는 책임 회피조항이 박혀있었다.

가장 큰 성공을 거머쥔 가짜는 ‘선데이’였다.

선데이는 그들만의 버전인 야빅도 만들어냈다.

필터를 장착한 야빅은 바닷물에서 염분을 걸러낸, 담수를 만들어냈다. - 그냥 필터형 정수기에 불과했다.

선데이의 회장 랜달은 킹스덤 대학 출신이었다.

그는 이 사실을 적절하게 이용해서, 자신이 준의 멘토인 양 행동했다.

선데이의 가장 뛰어난 능력은 투자금을 모으는 것이었다.

인터넷과 전화 온갖 커뮤니케이션을 돌아다니며 투자금을 모았고, 이게 통했다.

세상은 굿데이를 원했지만, 굿데이는 세상 모두를 만족시켜줄 수 없었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 - 굿데이가 채워주지 못하는 것을 먼데이, 튜즈데이, 웬즈데이, 떨즈데이, 프라이데이, 세렐데이 따위가 채워주었다.

‘떨이데이’들은 투자자들에게 엄청난 수익을 안겨주지 못했지만, 수수료를 챙기는 방식으로 이득을 보았다.

수수료는 고정 수입이었고, 투자자가 망해도, 확실하게 남는 장사였다.

모든 떨이데이를 합친 것보다 선데이의 규모가 압도적으로 컸다.

선데이의 회장 랜달은 플래시 패닉 원인으로 굿데이를 콕 짚은 스티브 교수를 영입했고, 실버 드래곤의 죽음으로 직장을 잃은 실력자들을 끌어왔다.

실버 드래곤의 설계자 찰스와 전략관리본부장 키노시타도 합류했다.

선데이는 마케팅 전략으로 온갖 환경 재난과 기후 재난 예측을 남발했는데, 운 좋게 아라비아 해 샤바훈 사이클론을 끼워 맞췄다.

슈퍼셀 동영상이 퍼지던 그 순간, 선데이는 아니면 말고, 식의 재난 예측을 했는데 ···. 그것이 적중한 것이었다.

엄청난 돈이 선데이로 굴러들어왔다.

선데이는 사이비에 가까운 유사 굿데이에 불과했지만, 자본력으로 몸집을 불리면서 금융계의 자이언트로 우뚝 섰다.

다국적 기업들도 여윳돈을 선데이에게 맡기기 시작했고, 학원 재단과 종교 재단 그리고 연기금과 같은 국영기업도 자금을 몰아주었다.

랜달 회장의 비서는 잔느였다.

그녀는 굿데이에 지원했었지만, 보기 좋게 떨어졌었다.

그 당시 데스먼드 학과장과 심리학자, 전직 경찰은 입을 모아 잔느를 추천했었다.

그녀는 길거리 출신 에바에게 밀려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 후 그녀가 들어간 직장은 ···. 실버 드래곤이었다.

딱 석 달 다니고 실직자가 되었다.

데스먼드 학과장이 그녀를 추천했던 이유는 그녀의 출중한 실력보다는 ···. 집안 배경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정치계의 실력자 루이스 상원의원이었다.

“묘한 일이야.”

루이스 상원의원은 송아지 가죽을 덧씌운 프리미엄 무중력 안락의자에 앉아 문 위에 걸어둔 레이피어 단검을 바라보았다.

팔뚝 길이의 레이피어는 집안의 가보였다.

가보의 이름은 킹슬레이어 - 루이스의 조상 퀴블러는 단검으로 왕을 죽이고, 직접 왕위에 올랐다.

“히파티아가 뇌출혈로 죽지 않았다면, 자네에게 기회가 왔을 텐데.”

“걱정마십시오. 이미 운명의 추는 선데이로 기울었습니다.”

랜달 회장은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뽐냈다. 최근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 들어오는 투자금이 미소의 근원이었다.

“약속할 수 있나?”

“네. 의원님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굿데이를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자넬 믿고 싶군. 굿데이는 노벨상 후보에 올랐어. 잘못 건들면 우리 기반이 흔들릴 거야.”

“제가 다 알아봤습니다. 굿데이는 입자농축 기술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습니다. 요빅에 적용된 기술이죠. 굿데이는 다섯 척의 요빅을 오만왕국에 팔았고, 열심히 기름 청소하고 있죠.”

랜달은 히쭉 웃었다.

“왜 웃나? 자네 말대로 ···. 세상은 굿데이를 구세주로 여기고 있어. 굿데이의 자산 구조는 피라미드보다 안정적이고, 뭐하나 흠잡을 게 없네. 히파티아가 있을 때에는 마이너스 언론 플레이로 코너에 몰았지만, 요즘 언론은 굿데이에게 아주 친절해. 그런 상대를 잡아먹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기에 잡아먹을 수 있는 겁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죠.”

*

얇은 기름 막이 뜬 바다는 햇빛을 받아 무지개 광택을 냈다.

격한 휘발성 냄새.

요빅은 시간당 700만 톤의 바닷물을 해독했다.

더러운 바닷물을 양껏 흡입해서, 입자농축으로 바닷물에 있는 메테인을 분리했다.

모든 기능을 바닷물 해독에 집중했기 때문에, 금과 같은 귀금속 농축량은 많지 않았지만, 하루 15kg의 금을 뽑아냈다.

오만 왕국 카다르 왕자는 자신의 유람선에서 요빅을 지켜보았다.

그는 단 한 번 수염고래를 본 적 있었는데, 요빅은 그 수염고래보다 훨씬 더 대단했다.

요빅은 탐욕스러워 보일 정도로 바닷물을 빨아들였다가, 뱉어냈다.

바닷물의 무지개 광택이 조금씩 옅어졌지만, 예전으로 돌아가려면 15년이 걸린다.

무너진 시추탑에서는 아직도 원유가 하늘로 치솟았다.

“드살보 석유는 아직도 저걸 안 막았군!”

카다르 왕자의 눈매가 거칠게 일그러졌다.

“파이프 섹션이 망가져서, 뚜껑을 닫는 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잠수팀이 고성능 폭탄을 설치해서 구멍을 메울 겁니다.”

하얀색 구트라를 쓴 수행원이 말했다.

“서둘게 해. 이곳에서 내가 지켜보겠어!”

15분 후 거대한 폭발음이 들렸지만, 치솟는 원유는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쿠르르 쾅쾅!

굉음을 내며 물속으로 사라지는 것은 검은 피의 원유가 아니라, 바닷물을 해독하던 요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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