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엠벨라-8 >
카이는, 따분하고 지루해지는 경향이 있긴 했지만, 학교생활이 즐거웠다.
배우고 공부하는 것은 짜릿한 쾌감이었다.
학교 수업 수준이 낮아서, 혼자 공부해야 하는 것도 많았지만, 학교에 다닌다는 사실만으로도 황홀했다.
이 사실을 친구들에게 털어놨는데, 덕분에 ‘변태 카이’로 놀림 받았다.
카이는 준과 같이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르구나.’
모두가 서로 다른 인격체였지만, 따돌림당할 정도로 차별화된 ‘차이’를 갖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카이는 차이를 버리고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살아볼까? 고민했다.
차이를 버려도 먹고 살 수 있고, 오히려 더 편안해질 수도 있다.
준에게 이 문제를 의논했다.
인생상담이었다.
준은 읽고 있던 책을 덮으며, 부름에 응했다.
“뇌를 기생충이라고 생각해.”
“준 형아 ···. 나 지금 엄청 진지해.”
“멍청이들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기생충 뇌’에 조종당하는 좀비라고 생각해.”
“그건 사실이 아니잖아?”
“사실은 아니지만 ···. 진리야.”
“형아는 그런 생각이 도움됐어?”
“응. 진리가 날 자유케 했지.”
“다른 사람의 뇌가 기생충이라면, 형의 뇌는 뭐야?”
“고밀도 지식 생태계.”
“형아 ···. 병맛이다. 진짜 재수 없어!”
“이해한다. 기생충아. 나는 자유롭다.”
준은 다시 책을 펴며 뉴런 독서에 돌입했다. 카이는 준의 사악한 비밀을 엿본 것 같았다.
사악한 비밀은 카이에게 도움이 되었다. 카이는 더는 따돌림이나 놀림 때문에 고통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기생충을 연구하게 되었다.
‘기생충 뇌’에는 네 가지 타입이 있었다. - 도파민계, 세로토닌계, 테스토스테론계, 에스트로젠계.
도파민계는 호기심이 많고 즉흥적이고 활력이 넘친다.
세로토닌계는 순종적이고 신앙심이 강했다.
테스토스테론계는 결단력이 있고, 에스트로젠계는 사교성이 뛰어나고 감정이 풍부했다.
카이는 상대의 타입에 맞춰, 생활했다. 덕분에 학교생활이 몸에 딱 맞는 옷처럼 편안해졌다.
도파민계와 세로토닌계는 같은 타입끼리 노는 경향이 있고, 테스토스테론계는 같은 테스토스테론을 싫어하는 대신, 에스트로젠계에 끌렸다. 에스트로젠계도 같은 타입보다는 테스토스테론계에 빠져들었다.
갑자기 카이의 눈에 또래들의 생활이 하나의 생태 방정식처럼 그려졌다.
생태 방정식 - 기생충이라는 밑바탕이 없었다면, 그려낼 수 없는 방정식이었다.
카이는 옷처럼 편안해진 학교생활을 되돌아보며,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준이 진리야.’
학교생활 - 유치한 학습 내용도 많았지만, 기꺼이 참고 들어줄 만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점심시간이 되면 식당에서 밥 먹을 수 있다. 이제는 익숙해질 만했지만, 여전히 감탄스러웠다.
따듯한 수프를 먹을 때마다 엄청난 횡재를 한 기분이었다.
임모디피아에는 제대로 된 수프도 없었고, 한 끼를 해결하려면 아침 일찍부터 쓰레기 산을 누벼야 했다.
조별과제로 미래 에너지에 관한 것이 나왔다. 카이는 핵융합 기계를 만들었다.
그림이나 플라스틱 모형으로 만든 게 아니라, 정말로 작동하는 기계였다. 완벽하게 작동하진 않았지만, 맛보기 정도는 되었다.
과제물 검사 시간에 전선을 연결하고 스위치를 켜자, 학교 전체 전기가 나갔다.
학습용 스크린과 컴퓨터가 먹통이 되었다.
선생님은 당황했지만, 카이는 학생들의 영웅이 되었다.
카이는 교장실로 불러 들어갈 때, 핵융합 원리를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했다.
교장 선생님 옆에 어디선가 본듯한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보랏빛이 감도는 고급진 정장 차림이었다.
그녀 손등에는 붉은색 루비가 반짝였다.
루비는 피부밑에서 돋아난 것처럼 보였다.
교장 선생님은 눈웃음을 지었다.
“카이, 이분에게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카이를 향한 그 미소는 카이보다는 그 여자에게 보여주는 것 같았다.
교장의 눈웃음은 ‘저를 보세요. 저는 이렇게 좋은 교장이랍니다.’라고 외쳤다.
임모디피아 시절, 시체에서 금을 뽑았던 골든보이 - 카이는 본능적으로 위험한
상황임을 알았다.
교장 선생님의 표정은 가디날의 부하들이 가디날에게 보여주려고 애쓰던 그런 종류였다.
지금 카이에게 가장 필요한 정보는 ···.
“누구시죠?”
“히파티아 누나라고 불러.”
그녀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나무껍질에 문지른 라임 향이 났다. 그녀의 손은 난롯가에 놓인 돌처럼 뜨거웠다.
“이름이 카이지? 굿데이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요.”
카이는 그늘 속에 몸을 숨기는 사슴처럼 말했다. 히파티아의 옷매무새와 눈매를 보면, 어딘지 모르게 서늘했다.
카이의 본능이 속삭였다. ‘저 여자는 예쁘고 섹시하지만, 위험하다!’
“라이코스 공화국의 임모디피아 출신이지?”
카이는 긴장했다. 라이코스 임모디피아 출신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준과 에바 그리고 호세뿐이었다.
“널 도와주려는 거야. 요빅을 만들 때, 하루 몇 시간이나 일했니?”
“왜 제가 누나의 도움을 받아야 하죠?”
“이민국에서 너를 추방하려 해. 그렇게 되면 너는 다시 임모디피아로 돌아가게 되겠지. 걱정하지 마. 네가 널 도와줄 테니, 너는 몇 가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돼.”
히파티아는 개가 꼬리를 흔들듯이 눈웃음쳤다.
카이는 임모디피아로 돌아간 자신을 상상했다.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지만, 반가
울 정도로 좋지도 않았다.
“방학 때였고, 서태평양에서 일했어요.”
“요빅 델타 아일랜드를 만드는 일을 했으니, 방학이 아주 짧았겠구나. 며칠이나 서태평양에 가 있었니?”
“방학이 끝나기 하루 전까지 그곳에 있었어요.”
“하루 몇 시간이나 일했니?”
“전부 다요! 그래도 하루가 부족했어요.”
“저런 가엾어라! 방금 카이 학생의 말을 교장 선생님도 들으셨나요?”
“물론입니다.”
히파티아와 교장 선생님이 웃음을 주고받을 때, 카이는 뭔가 잘못된 것을 깨달았다.
순간 히파티아를 어디서 봤는지 기억났다.
로켈이 엠벨라 족에 대해 설명할 때 나왔던 여자였다.
“히파티아 누나 ···.”
“왜?”
“저어 ···. 숙제 좀 도와줘요.”
“언제 도와줄까? 오늘 저녁?”
“그렇게 거창한 숙제는 아니에요. 준 형아가 내준 숙제인데 ···. 살담을 왜 죽였어요?”
카이는 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정지사진처럼 멈추는 것을.
*
굿데이 고난의 시절이었다.
굿데이는 플래시크래시 패닉의 주범으로 몰리면서, 조사를 받았다.
“증권감독 위원회, 재무부 테러금융 정보국, 과학기술 윤리 위원회, 입자가속기 안전 위원회는 이해하겠는데, 아동 복지국은 뭐야?”
에바의 책상 위에는 누런 봉투로 접수된 답변 요청서가 쌓여 있었다.
“카이가 고등학생이잖아. 노동법에 따르면 위험한 직종에 고용되면 안 되고, 야간근무도 못 하게 되어 있어.”
스탠리가 포인트를 짚어주었다. 그는 가문은 대대로 법률가와 판검사 그리고 변호사를 가업으로 삼았다.
“문제가 될까?”
“물고 늘어지면, 떼어내는 데 시간이 걸려.”
“왜 이렇게 우리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에바는 욕을 한바탕 퍼붓고 싶었다.
“걱정하지 마! 나의 가문이 커버링할 수 있어. 최악의 경우라고 해봤자, 벌금 정도야. 좀 이상한 게 있긴 해도 ···.”
“뭐가 이상해?”
“질문 내용을 보면, 너무 야비해. 위원회에는 고전발레처럼 일정한 틀에 맞춰 일해. 그들은 기본적으로 공무원이고, 월급쟁이거든. 목숨을 걸고 일하지 않지. 그런데 이번에는 그들답지 않게 악랄해.”
“우리가 조사팀의 신원 확인을 요구할 수 있어?”
“당연하지.”
“요구해. 분명 지휘자가 따로 있을 거야.”
에바의 육감은 정확했다. 모든 위원회와 조사팀에는 히파티아의 이름이 올라와 있었다.
에바는 기뻤다.
누구에게 욕을 해야 할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
언론에서 가장 모질게 후벼 파는 곳은 기후예측모형이었다.
기후예측모형이 출력하는 수천수만 가지 가능성 중에서, 준만 정확한 예측 결과를 골라내다니!
질 나쁜 속임수가 있다는 의심이 눈덩이처럼 커졌다.
응용통계학 학계는 공식적으로 푸리에 구조방정식으로 만든 기후예측모형은 ‘의미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게임 이론에서는 한 사람만 정답을 아는 문제를, ‘절대자 게임’이라고 한다.
정답을 아는 사람의 뜻대로 게임의 결과가 정해지기 때문이었다.
절대자 게임의 구조는 정답을 숨기는 완벽한 기술이 필요했다.
국제 응용통계학 학계에서는 몇 개의 논문을 통해,
굿데이의 기후예측모형에 있는 완벽한 기술이 바로 푸리에 구조방정식이라고 밝혔다.
푸리에 구조방정식은 정답을 숨기기 위한 속임수라는 뜻이었다.
굿데이는 아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속임수를 쓰고, 시장을 교란하는 악덕 기업이었다.
에바는 언론사와 만나면서, 설명하고 해명하고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녀가 열심히 뛰어다닐수록 그물은 더 강하게 조여졌다.
“생각보다 늦게 찾아오셨네요.”
카페에서 만난 히파티아는 지친 에바의 얼굴을 보며, 승리자의 미소를 지었다.
에바는 히파티아의 미소를 받아주지 않았다.
“굿데이는 강해요. 요빅 생태계와 유진 악마는 인류 최강의 돈벌이 방법이죠. 요빅 생태계는 바닷물을 파는 거고, 유진 악마는 금융 시장을 양떼처럼 다루죠. 굿데이를 망하게 할 순 없어요. 이미 트리탄이 시도했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죠.”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굿데이를 잘 모르는 거 같아서, 알려드리는 거예요.”
“제가 에바 양보다 굿데이를 더 잘 알 걸요.”
“예를 들어보시죠.”
“킹스덤 대학교에서 천문대를 분양받으셨죠? 뒷산이 시체들로 가득 찬 곳이었죠?”
“그래요. 그 뒷산에 당신 시체도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내일 킹스덤 대학에서 천문대 반환을 요구할 텐데, 돌려주는 게 좋을 거예요. 돌려주지 않으면 학생회가 시위할 겁니다.”
히파티아는 에바의 반응을 유심히 관찰했다. 에바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따분해했다.
천문대를 처음 인수할 때, 이미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준이 처음 천문대에 왔을 때, 그는 로켈에게 느낌을 따라가라고 말하고, 유진 악마에게 지리 정보를 분석하게 했고, 에바에겐 킹스덤과 계약하라고 했다.
계약 - 킹스덤 대학의 요청으로 천문대를 반환할 경우, 킹스덤은 새 사무실 이전비용 금액의 세배를 지급해야 했다. 굿데이가 이익을 보는 거래였다.
에바는 계약 조항을 떠올리며 ‘이번 기회에 빌딩이나 세울까?’ 생각했다. 계약 조건대로라면 킹스덤 대학이 빌딩 건축비용의 세 배를 내야 했다.
“굿데이는 망할 거예요. 코엠 재단으로 오세요.”
히파티아 제안하자, 에바의 입꼬리에서 비뚤어진 웃음이 새어나왔다.
“왜 웃죠?”
“제가 굿데이에서 받는 연봉이 얼마인 줄 아세요?”
“알죠.”
“코엠 재단에서도 그 정도 연봉을 줄 수 있나요?”
“이 세상엔 돈보다 중요한 게 많죠. 생각해봐요. 굿데이가 돈이 없어서 망하겠어요?”
히파티아는 손끝으로 손등에 박힌 루비를 가볍게 눌렀다. 루비는 금세 어두운색으로 변했다.
“그게 ···. 마녀의 뇌출혈이군요.”
“알고 있다면 선택이 쉽겠군요. 굿데이를 버리고 코엠 재단으로 와요.”
“거절하겠어요.”
“굿데이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건가요?”
“그 반대죠. 굿데이의 설립 목표는 생존이에요.”
“이런! 무덤을 집이라고 생각하는군요. 잘 가요.”
히파티아는 손등에 앉은 모기를 잡듯이, 검은빛을 띠는 루비를 찰싹 때렸다.
에바는 아무런 변화도 느끼지 못했지만, 바로 그 순간 뇌출혈 주파수가 에바의 머리에 꽂혔다.
꽂힌 뇌출혈 주파수는 에바가 잠깐 잊었던 기억을 되살렸다.
“참! 카이가 물어봐 달래요. 왜 살담을 죽였는지.”
“당신과 똑같은 이유죠. 필요가 없어진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