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엠벨라-7 >
유진 악마의 손가락에서 에메랄드 빛 얇은 반지가 반짝였다.
페르마의 타원함수와 다차원 초월 모듈합금으로 만들어진, 예지의 반지였다.
그녀는 지옥 생태계의 초승달 지역에서 얻은 이 아이템으로 알파가 되었다.
예지의 반지는 앞날을 알려줬고, 유진 악마는 반지에 따라 투자 포지션을 정했다.
금융시장을 떠도는 돈의 75%는 프로그램이 움직인다.
유진 악마와 비교하면, 단세포 수준의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이었다.
유진에게는 하찮은 상대였지만, 프로그램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조심 살살 수익을 챙겼다.
맘만 먹으면 단숨에 엄청난 수익을 뽑아낼 수 있지만, 그런 짓을 했다간, 금융 시장이 급성 빈혈로 그로기 된다.
금융생태계가 망가지면, 유진도 손해였다.
예지의 반지에서 탁한 빛이 새어나왔다.
추세 반전을 예고하는 시그널이었다.
유진 악마는 모든 포지션에서 빠져나와서, 인버스와 VIX의 영역으로 몸을 옮겼다.
인버스는 주가지수와 역상관 계수를 가진 인덱스 상품이었다.
주가지수가 오르면 인버스 가격이 떨어지고, 주가지수가 떨어지면 인버스는 오른다.
VIX는 공포지수로 불리는 상품이었다.
변동성 계산 공식으로 만들어진 VIX는 인버스처럼 주가지수와 역상관 관계였다.
유진 악마가 포지션을 청산하고 영역을 옮기고 나서, 0.7초 후에 전 세계 주가지수가 폭락해서, 7분 만에 10% 이상 무너져내렸다.
패닉!
이유도 없었다. 전쟁이 난 것도 아니고, 소행성이 나타난 것도 아니었다. 지진이나 화산활동도 없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놀랍도록 평화로운 하루였다.
그러나 전광판의 주가지수 숫자는, 미친 곰에게 살육당하는 송아지처럼, 뭉텅이로 뜯겼다.
플래시크래시! - 시장 붕괴!
경제 채널 TV에서 온갖 전문가들이 나와 떠들었지만,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루가 지나고 나서, 원인이 밝혀졌다.
가장 먼저 원인을 찾아낸 사람은 킹스덤 응용통계학과의 스티브 교수였다.
“프로그램의 쏠림 현상입니다. 프로그램은 손절 라인이 정해져 있죠. 데드라인에 닿으면, 손해를 보더라도 포지션을 청산하죠. 주가지수에 하방 가속도가 붙으면, 대부분 프로그램이 손절매합니다. 디지털 전염병 같은 거죠. 이번 글로벌 시장 붕괴는 대략 0.7초 동안 발생한 하방 가속도가 원인입니다.”
스티브 교수 뒤로 그리스 낙소스 섬 시가지가 보였다.
낙소스 섬은 파루시아로 큰 피해를 본 곳이었고, 그 상처가 남아 있었다.
영국인 기자는 잠시 화제를 돌려서, 스티브 교수가 안식년에 낙소스 섬에 와서 자원봉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늘어놨다.
투트랙 사이클 - 낮에는 봉사활동, 밤에는 연구활동.
“그러니깐 어젯밤 교수님 분석에 따르면 ···. 나그네쥐처럼 앞에 가는 쥐를 따라 다른 쥐들이 절벽으로 떨어졌다는 거군요.”
“적절한 비유군요.”
“맨 처음 절벽으로 몸을 던진 프로그램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물론입니다. 하지만 ···.”
스티브 교수는 손등으로 이마를 닦았다.
낙소스 섬의 햇빛은 탈모작용이 탁월했다.
스티브는 이곳에 오기 전보다 이마가 더 넓어져 있었다.
고뇌하는 표정 - 이런 표정을 지어줘야 메시지 전달력이 높아진다.
“교수님!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저도 이번 플래시크래시로 큰 손해를 봤습니다.
돈을 되찾지 못하더라도 이유는 알고 싶습니다.”
“음 ···. 재난이 생길 때마다 돈을 챙기는 곳인데 ···. 잘 아시죠? 굿데이라고 ···.”
*
기자들이 굿데이 골프공과 준의 집 앞으로 몰려왔다.
에바는 홀로 기자 앞에 나섰다.
기자들은 그녀가 인사하기도 전에 질문을 쏟아냈다.
“하방 가속도 패닉 사건과 가속도 수익분배 방식에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이번 액셀레이션 패닉으로 얼마나 버셨습니까? 원하는 만큼 버셨나요?”
“요빅 쇼크로 금 시장이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번 사건으로 요빅 쇼크보다 더한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하시고 싶은 말씀 없으세요?”
“앞으로 사용할 굿데이의 폭탄은 몇 개나 남았습니까?”
“재무부의 테러금융 정보국에서 굿데이를 조사할 예정이라는데 알고 계십니까?”
“증권위원회에서 굿데이의 투자 라이센스를 박탈한다면, 받아들이실 건가요?”
“굿데이의 설립 목적이 뭔가요? 금융시장 혼란인가요?”
“헤지펀드 전문가들은 굿데이가 시장 조작을 했다고 하는데, 동의하십니까?”
에바는 인내심을 갖고 기자들이 조용해지기를 기다렸다.
야생마처럼 설치던 기자들이 조용해졌다.
“파루시아로 큰돈을 벌어놓고도, 재난복구 성금으로 한 푼도 내지 않았다는 게 사실입니까?”
누군가 다시 질문을 던지자,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그 사람을 노려보았다.
다시 조용해졌다.
사실 에바는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할 일이었다.
‘여기서 욕을 하면 사태가 더 나빠지겠지.’
“굿데이 설립 목적은 생존입니다.”
“성공하신 거 아닙니까? 돈이 넘치도록 잘살고 있잖습니까? 굿데이 때문에 금융시장이 무너져야 합니까?”
에바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한 템포 늦췄다.
실수를 줄여야 했고, 상대의 리듬에 휘말리기 싫었다.
그녀가 대답하려 할 때, 누군가 그녀 어깨를 잡았다.
강하고 따듯한 손이었다.
준이었다.
“제가 직접 말하겠습니다.”
기자들의 마이크가 준을 향해 일제히 움직였다.
준의 고밀도 지식 생태계가 빛보다 빠른 속도로 회전하며, 최적화된 대답을 출력했다.
고밀도 지식 생태계가 추천하는 최적화 대답 1 - ‘엄마가 시켰어요.’
고밀도 지식 생태계 추천 최적화 대답 2 - ‘이럴 줄 몰랐네.’
최적화 대답 3 - ‘내가 안 그랬어요!’
고밀도 생태계는 요인분석을 거쳐, 세 개의 대답 중 두 개를 융합시켰다.
‘엄마가 시켰는데, 이럴 줄 몰랐어요.’
준은 깨달았다. 뉴런 독서를 통해 구축해놓은 고밀도 지식 생태계가 갓난아기 수준이라는 것을.
실제로 최적화 네 번째 대응은 그냥 우는 것이었다.
“절벽 밑 세상이 궁금해서 내려갔는데, 어떤 사람이 나를 따라 몸을 날렸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도 덩달아 몸을 날렸습니다. 왜 그들은 제 허리에 묶은 안전 로프를 보지 못했을까요? 굿데이는 가능성을 탐색하고, 방법을 찾아냅니다. 이번 패닉으로 금융시스템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누가 새로운 솔루션을 만들 수 있을까요? 남을 따라 절벽으로 몸을 던진 사람일까요? 아니면 안전 루프를 하고 최초로 절벽 밑을 내려가려던 사람일까요?”
준은 평소와 다른 모습이었다. 아니, 평소 모습이 원래 이랬던 건가?
에바는 옆에 있는 준의 키가 더 커 보였다.
흉기 같은 질문들이 날아들었다.
살상무기에 같은 원색적인 질문도 많았다.
준은 특유의 무표정한 표정으로 ‘아니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적 없습니다.’ 짧게 받아치고, 빠져나왔다.
질문이 날카로울수록 대답도 짧아야 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습니까?”
준은 짧게 ‘아니오.’라고 대답하려다가, 지루함을 달랠 생각으로 약간의 설명을 곁들었다.
“금융시장 예측은 기후예측보다 어렵습니다. 인간의 광기를 다뤄야 하죠. 이번 패닉은 시스템 에러였고, 일종의 메타 프로그램 오류였지만, 프로그램과 시스템을 만든 것은 인간입니다. DNA처럼 인간의 광기가 시스템과 프로그램에 새겨져 있죠.”
“앞으로도 이런 일이 계속 생길 거란 말입니까?”
“없길 바랄 뿐입니다. 하지만 안전 루프는 항상 착용할 겁니다. 그 점이 아쉽습니다. 왜 절벽으로 내려가는 것만 보고, 안전 루프는 보지 않았을까요? 어리석음이었을까요? 욕심이었을까요? 굿데이 때문에 패닉이 온 게 아니라, 굿데이라서 패닉을 피해간 겁니다.”
기자 회견을 끝내고, 에바가 말했다.
“준 회장님. 고마워요.”
“뭐가?”
“그냥 다.”
“나도 고마워.”
“뭐가요?”
“욕 안 해서.”
*
준은 평소와 다름없이 생활했다.
집 사무실 도서관 - 트라이앵글 궤도.
거의 형벌과 같은 수준의 반복이었다.
그러나 준은 반복의 의미를 확실하게 알았다.
아이큐 75의 지적능력으로 고급 수학에 통달하려면, 기본적으로 오체투지와 같은 반복이 필요했다.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일수록 그의 일상은 시계처럼 단조로운 법이었다.
“오늘은 안 돼요!”
갑자기 디아나가 준의 앞길을 막았다.
그녀의 표정은 겁에 질린 새끼 원숭이 같았다.
“수십 명의 사람이 교문 앞에서 항의 시위를 하고 있어요. 중앙도서관에 꼭 가야겠다면, 아르크스를 타고 가세요.”
아르크스는 프란츠가 선물한 최고급 리무진이었다.
“디아나. 멍청한 사람을 상대할 때에는 비결이 있어.”
“그게 뭔데요?”
“나도 모르지만, 이제 곧 알게 되겠지.”
준은 평소와 같은 속도로 걸었다.
시위대는 확성기로 목소리를 높이고, 플래카드를 흔들며, 커다란 에어스크린을 띄워서 ‘굿데이는 물러가라!’라는 메시지를 터트렸다.
준이 나타나자, 출입문을 가로막았다. 길가에는 안전사고에 대비한 경찰들이 있었다. 좋은 구경거리였다.
동영상을 찍는 학생과 일반인들도 여럿 보였다.
상점 앞에는 방송국 차량이 주차되어 있었다.
하늘에는 방송국에서 날린 드론이 맴돌았다.
“굿데이와 준은 액셀레이션 패닉을 책임져라!”
시위대 리더가 소리치자, 시위대가 따라 했다. 유치원생이 했다면 귀여웠겠지만, 어른들이 하니깐 꼴사나웠다. 최소한 어울리지는 않았다.
준의 머릿속에서 고밀도 지식 생태계가 가동했다.
‘엄마가 시켰어요. 이럴 줄 몰랐어요.’
다행스럽게도 준은 제대로 된 질문으로 시위대 리더의 입을 막았다.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준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지만, 겸손했다.
“책임지시죠!”
“방법을 말씀해주세요.”
“책임져야죠!”
“어떤 방법이 좋겠습니까?”
“네가 한 일이니, 네가 알아서 해야지! 서로 좋은 쪽으로 방법을 찾으면 ···.”
‘서로 좋은 쪽으로?’
시위대의 목적은 굿데이 타파가 아니라,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상부상조였다.
평소에도 준의 주변에는 기부금을 ‘요구하는 사람’이 끊이질 않았다.
아프리카 구호기금, 재난 복구 기금, 아동복지 기금 ···.
모든 요구를 다 들어줬다면, 굿데이는 일찌감치 파산절차를 밟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적당한 선 긋기가 모호하다는 것이었다.
성공한 자산가들이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고, 구별되는 라이프 스타일을 누리는 이유 중 하나도, ‘요구하는 사람’을 멀리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준은 피해 달아나지 않았다. 그것은 준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는 일찍이 공허감을 길들이고, 두려움을 벗어난 남자였다.
놀리던 친구와 선생님의 판단을 믿고, 스스로 노숙자가 되려 했던 아이.
먹고 살려고, 취직하려고, 절실하게 수학에 매달렸던 아이.
놀림감이었지만, 자신의 판단을 믿고 굿데이를 창업했던 청년.
시온이 인정한 씨앗.
굿데이는 트리탄의 박해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벤처이기도 했다.
굿데이 이전에는 트리탄의 눈 밖에 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준은 실버 드래곤을 죽인 용 사냥꾼이었고, 암살자 포스마일을 지우고, 요새를 깬 사나이였다.
그런 그 앞에 은근히 상부상조를 바라며, 시위 깃발을 펄럭이는 일당이 나타났다.
“굿데이는 책임져라!”
시위대 리더가 목청을 높였다. 준의 귀에는 ‘돈 좀 주라!’ 뜻으로 번역되었다.
준은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깨달았고, 돈에 매달리는 삶이 어리석다는 것을 안다.
노숙자 ···. 일자리 ···. 예전에는 준도 어리석었다.
세상에는 어리석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 가르치고, 알려주고, 도와줘도 어리석음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오히려 더 깊게 빠져들고, 도우려는 사람을 증오한다.
준은 시위대를 보며 생각했다. ‘이 녀석들, 엄마가 시킨 걸까?’
시위대 뒤로 새로 증축된 중앙도서관이 보였다. 그가 가야 할 곳이었다.
시위대가 준을 쫓아 도서관에 들어와 구호를 외쳤지만, 15초 만에 쫓겨났다.
도서관 제1 규칙 - 조용히 하시오.
준이 하고픈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