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엠벨라-5 >
준이 자는 동안 ‘고밀도 지식 생태계’는 준의 상태를 분석했다.
호흡계 정상,
신경계 정상,
근골격계 정상,
소화계 정상 ···.
피로로 손상된 DNA 수리,
노화 세포 교체,
왕큰 탐식세포에서 노로바이러스 감지,
림프구 항체 생성 시작 ···.
수면 무의식 탐색 ···.
유혹하는 여성 등장 ···.
상의 가리개, 하의 가리개 확인 ···.
꿈의 해석 시작 ···.
테스토스테론계 PG 13등급으로 판정 ···.
꿈에 대한 신체 반응 정상 ···.
고밀도 지식 생태계는 준의 삶이었고, 영혼이었다.
아는 게 많을수록 위험한 세상이었다.
평범하게 살았다면, 트리탄을 만날 일도 없었을 테고, 엠벨라 살담과 말을 섞지도 않았다.
고밀도 지식 생태계의 확장은 새로운 적을 의미한다. 그러나 준은 두렵지 않았다.
이제는 안다.
세상에는 아이큐 75만이 풀 수 있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감정결핍 증후군은 장애가 아니라 가능성이라는 것을.
산뜻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꿈속에서 본능 설레는 질퍽한 내용이 있었고 ···. 꿈의 여파 때문에 움직임이 거북했다.
아침마다 단단해지는 그것은 원시시대의 유산이었다.
원시시대 수컷들은 아침 일찍 사냥을 떠났다.
사냥은 위험했다. 병신이 되거나 죽을 수도 있다.
수컷들은 사냥 떠나기 전, 자신의 유전자를 누군가에게 옮겨 놓아야 했다.
빳빳한 그것은 목숨 걸고 사냥터로 떠나는 조상들의 생물학적 징검다리였고, 일종의 보험이었다.
준은 비스듬히 누워서 ‘생물학적 보험’이 진정되길 기다렸다.
원시 수렵시대가 끝난 지 언젠데 ···. 심호흡했다.
아침 발기현상은 언제쯤 꼬리뼈처럼 사라지게 될까?
언제쯤 편안한 아랫도리로 아침을 맞이하게 될까?
“예티가 왔어!”
갑자기 에바가 들이닥쳤다.
그녀는 보았다. - 인디언 텐트.
준은 생물학적 보험이 무효화 되기를 기다렸지만, 에바의 눈에는 기를 쓰고 힘껏 세우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 아아! 저주받을 수컷이여!
준이 심호흡을 내뱉는 순간이었기 때문에 더욱 극적이었다.
그녀는 못 본 척하려 했지만, 그러기엔 인디언 텐트가 너무 노골적이었다.
준은 다리를 꼬고, 허리를 비틀어서 텐트를 가렸다.
역효과! - 에바를 자극하는 애매한 자세였다.
꼬인 다리의 허벅지를 따라 준의 엉덩이가 강조되었다.
그 자세는 여자가 여자를 유혹할 때 사용하는 레즈의 초자극 암호였다.
에바는 그녀 모르게 침을 삼켰는데, 그 소리가 좀 컸다.
딩동!
현관 벨이 울렸다. 1 라운드가 끝났음을 알리는 공소리 같았다.
“준 회장님 누가 오기로 했습니까?”
아침부터 지저분한 꼴을 본 그녀였지만, 그 꼴을 보고 잠깐 흥분했지만, 간신히 오피스걸 모드를 유지했다.
“아니.”
준은 다리를 꼰 고혹적인 자세였는데, ‘아니’라는 대답 자체가 이 집에 우리 둘뿐임을 강조하는 불순한 의도가 깃든 것 같았다.
준은 이 불편한 상황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며, 에어스크린으로 현관 앞 영상을 가져왔다.
줄리아였다. 해변에 어울릴법한 반 비키니 복장이었다.
‘쟤는 옷을 왜 또 저렇게 입었대.’
준은 머리가 아팠다.
현관 카메라는 약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각도였는데, 줄리아가 손 흔들 때마다 그녀 가슴의 미묘한 출렁거림이 일었다.
준이 뉴런 독서 모드였다면,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겠지만, 꿈의 여파와 갑작스러운 에바의 등장, 그녀의 침 삼키는 소리와 당장 덮칠 것 같았던 광기 어린 눈빛까지 ···. 시대에 역행하는 ‘생물학적 보험’은 뇌로 가야 할 혈액까지 몽땅 차지했다.
- 한마디로 무방비 상태였다.
“약속이 있는 줄 몰랐어. 오늘 나는 안 온 걸로 할 게. 방해해서 정말 미안해.”
“그런 거 아니야!”
“정말? 네 몸은 다른 말을 하는데?”
그녀는 경멸조로 인디언 텐트를 쳐다보았다.
텐트는 굳건했다.
준도 어쩔 수 없이 시시한 남자였던 거다.
줄리아 정도라면 외면하기 어려웠겠지. 최근에 요빅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뒀으니, 조금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어쩌면 성공한 남자의 권리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에바는 비록 말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경멸 가득한 눈빛이 소리쳤다. ‘에이! 빌어먹을 남자 개자식아!’
눈빛의 외침 - 뇌파 통신이 가능한 준에겐 생생하게 들렸다.
“그런 거 아니라고.”
준은 머리를 쥐어 잡으며 푸념 비슷하게 했다.
인터폰으로 줄리아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원하는 걸 보여줄게!’
반 비키니 복장의 줄리아는 미의 여신 그 자체였다. 그녀가 뭘 보여주든 엄청날 것이다.
“잘해봐. 네가 손짓만 하면 보여만 주겠어.”
에바는 괜한 심술이 났다.
준은 지그시 눈 감았다. - 혈액순환 시스템 제어. 해면체 칼슘 채널 오픈. 저주여! 풀려라!
그제야 중심에 뭉쳐 있던 혈액이 제대로 돌았다.
“줄리아는 내가 원하는 걸 알고 있어.”
“나도 알 거 같아.”
그녀는 그곳을 봤지만, 인디언 텐트는 사라진 후였다.
까닭 없이 사라진 인디언 텐트. 처음 인디언 텐트를 봤을 때보다 더 기분 나빴다.
뭐야? 나는 성에 안 찬다는 거야!
내가 맘에 안 들어도, 예의상 텐트는 유지해야지!
갑자기 수그리하면, 내가 얼마나 무안하겠니!
내가 뭘 해야 네 맘에 들겠니!
“책이다.”
“뭐?”
준은 설명 대신, 거실을 지나 직접 문을 열었다.
줄리아는 화사하게 웃으며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준이 몇 주 전부터 예약했던 도서였지만, 대출자가 반납하지 않아, 못 보았던 바로 그 책이었다.
“반납하는 걸 잊고 있었대. 내가 직접 가서 받아왔어.”
“고마워.”
용건 끝! - 준은 책만 받고 바로 문 닫으려 했다. 줄리아가 문틈 사이로 발을 넣었다.
“무슨 내용이야?”
“···. 성불구자로 사는 기쁨.”
“오! 내용이 아주 강하네.”
“요즘 내가 이런 게 끌려. 그럼 ···.”
“성 능력자로 사는 기쁨은 궁금하지 않아?”
그녀는 ‘이게 뭘까요?’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뿜었다.
분명한 의도가 담긴 강력한 미소였다.
“줄리아 ···.”
준은 뭔가에 홀린 듯한 표정이었다.
줄리아는 확신했다. 오늘이 그날이다.
“왜?”
그녀는 한마디만 더하면 ‘나는 네 꺼.’ 라는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했다. ‘준 생각해봐. 내가 반 비키니를 왜 입었겠니.’
준은 그녀의 메시지를 분명히 받았지만, 대답은 3년 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잘 가.”
*
줄리아를 보내고 나서, 준과 에바는 이마에 손댄 자세로 침묵했다.
오늘 에바가 준의 집을 급습한 것은, 아니 찾아온 것은, ‘예티’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한 달 전 굿데이는 북극진동이 느슨해져서, 제트기류를 타고 적도 지방에 쏟아진다는 예측을 했다.
북극 한파가 제트기류를 타고 적도를 얼어붙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인도, 베트남, 필리핀, 뉴기니와 미얀마까지 주로 동아시아 곡창지대가 위태로웠다.
언론에서는 이번 예측을 ‘예티’라고 불렀다. 예티는 히말라야에 사는 신비의 동물이었다.
과연 히말라야에서도 보기 힘든 예티가 적도에 나타날까?
제대로 나타났다!
“피해규모는?”
“현재까지는 60% 정도지만, 추위가 3일 이상 지속하면 90%가 넘을 거야. 우리 예측대로라면, 일주일 이상 추위가 극성을 떨 거야. 추수를 끝내지 못한 곳은 농사를 몽땅 망쳤다고 봐야지.”
“한 달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대비를 안 한 거야?”
“지역에 따라 비닐하우스도 치고, 천막도 쳤지만 소용없었어. 이번 한파를 막으려면 땅에 열선을 깔고 외풍을 모두 막아야 하는데, 그건 댐을 짓는 것과 맞먹는 대형 공사야.”
“뻔히 알고도 당했군.”
“막을 방법이 없었던 거야.”
“그래도 조금은 기댈 했는데.”
파루시아, 헬하운드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했단 말인가? 준은 인간의 변치 않는 어리석음과 무능력함에 기가 질렸다.
“요빅을 만들지 않고, 그들을 도울 수도 있었잖아.”
“그들의 땅이고, 그들의 농사야. 그들이 해야 할 일이야.”
준은 앞으로 일어날 일이 환히 보였다.
아열대와 열대에 들이닥친 한파는 곡창지대만 망가트린 것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이 죽었고, 지역 동식물도 예외는 아니었다.
죽음은 전염병을 부른다.
헬하운드에 물어뜯겼던, 영국은 2차 쇼크로 사하라 바이러스 독감에 시달렸다.
그때는 추운 날에 갑작스러운 더위가 닥친 것이었지만, 그래서 더위가 사라지고 다시 추워지면서, 전염병 전파 속도가 느려졌지만, 이번에는 정반대였다.
따듯한 곳에 추위가 죽음의 인을 찍었고, 추위가 물러가면 죽음과 더위가 멋진 하모니를 이루며 전염병을 연주할 것이다.
이번 일로 더 확실해졌다. 내가 살 길은 내가 챙겨야 한다.
준이 손가락을 튕기자, 눈앞에 홀로그램 지구본이 나타났다.
예티가 나타난 벵골만에는 바다가 언 곳도 있었다. 곡창지대뿐 아니라 양식업도 큰 타격을 받았다.
“세계 식량 재고량이 5% 미만이야. 쌀, 커피, 천연고무, 밀 가격은 이미 두 배 이상 올랐어.”
에바는 이번 기회에 뭔가 챙기고 싶었다.
그냥 구경만 하기엔 아쉬운 게 많았다.
많은 사람이 한파로 힘들어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었지만, 에바의 일은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수익을 내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미 곡물 가격 상승에 베팅한 롱포지션으로 짭짤한 이익을 내고 있었다.
“롱포지션을 버려.”
“왜? 이제 시작이야! 한두 달은 더 오를 거야?”
“이 지도를 봐.”
준은 홀로그램 지구본 위에 인공위성으로 촬영한 ‘광합성 지도’를 덧씌웠다.
예티가 온 곳은 하얀색이었고, 운 좋게 예티를 피한 곳은 초록색과 갈색이 섞여 있었다.
특이한 것은 고위도 지방에도 초록색 지대가 눈에 띄었다.
“기후 온난화로 캐나다와 러시아 그리고 노르웨이의 농업이 풍작이야. 당장 내일부터 캐나다에서 밀과 옥수수 추수가 시작돼.” 준이 덧붙였다. “시야를 넓히면, 살길이 보이는 법이야. 기후 온난화는 위기가 아니라, 기회야.”
*
살담은 구속복을 입고, 의자에 묶였다.
기관총처럼 강한 조명이 그의 얼굴을 쏘아댔다.
“몇 명이나 죽였지?”
카리 형사는 침착하게 반복했다.
벌써 두 시간째였다. 구속복을 입은 살담은 누에고치 같았다.
“초조해 보이는군.”
살담은 강한 빛 때문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지만, 느긋했다.
로켈은 살담의 뼈를 부숴서, 살담의 능력을 봉인했다.
살담은 로켈의 실력을 소문으로 듣고 알고 있었지만, 직접 경험해보니 소문 이상이었다. 덕분에 그림자 기사단의 레벨을 확실히 경험했다.
“빨리 끝내자고. 다 자백해. 그럼 너도 맘이 편해질 거야.”
“카리 ···. 널 보니, 고등어를 낚던 친구가 생각나. 그 친구 낚싯대에 참치가 걸렸었지. 바로 낚싯줄을 끊었으면 좋았겠지만, 친구는 욕심을 냈어. 바다에 끌려 들어가서 나오지 못했어. 카리 형사, 너는 날 감당하지 못해. 경찰은 엠벨라의 상대가 되지 못해.”
“네가 괴물인 건 인정하지. 너에게 맞는 교도소가 있어. 괴물들을 위한 지옥 같은 곳이야.”
“이해 못 하는군. 엠벨라는 단순한 살인집단이 아니야. 십 분 남았다.”
살담의 말대로였다. 십 분 후, 변호사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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