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 준-44화 (43/141)

< 엠벨라-3 >

세이턴은 간신히 숨만 쉬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다리와 꼬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짖지도 못하다니!

무거운 절망으로 호흡이 느려졌다.

주인의 손짓에 따라 달리지 못한다면, 죽음을 재촉하는 게 마땅하다.

느리고 가늘어진 명줄을 놓으려 할 때, 준이 세이턴의 머리를 짚었다.

“버텨라.”

세이턴은 움직이지 못했지만, 울컥 북받쳤다.

세이턴은 눈빛으로 말했다. ‘주인님아 ···. 나도 버티고 싶은데 ···. 좀 힘들다 ···. 나는 이미 ···. 짐이 될 바엔 차라리 ···.’

“넌 명령을 따랐다. 나와 끝까지 간다.”

준은 세이턴의 머리를 통해, 상태를 확인했다.

트리탄의 손에는 자비가 없었다.

세이턴의 숨이 남아 있는 결정적인 이유는 ···. 준을 믿고 따르는 세이턴의 의지였다.

그 의지가 없었다면, 그 믿음이 없었다면, 세이턴은 예전에 황천길로 쫓겨났으리라.

죽은 것과 다름없는 몽뚱이.

“너는 내가 살린다.”

준은 눈을 감고 세이턴을 살릴 방법을 살폈다.

그의 고밀도 지식 생태계에는 수많은 선택이 존재했다.

푸리에 구조방정식, 기후예측모형에서 수많은 시나리오를 토해내듯이, 고밀도 지식 생태계는 수천수만 가지 방법을 쏟아냈다.

이렇게, 저렇게, 요렇게 ···. 살리는 건 어렵지 않다.

세이턴에게 걸맞은 ‘새 삶’을 선택하는 게 어려웠다.

“유진!”

“넵! 준느님!”

유진 악마는 몸에 쫙 붙는 간호복 차림으로 나타났다.

짧은 치마에 토끼 꼬리 같은 액세서리가 붙어 있었다.

탐스러운 열대 과일 같은 표정과 몸매였다.

“뉴턴 세포 배양액, 트리트먼트 실린더, 스템셀 체임버, 스피널 뉴로 노우트, 리제널리티 필드. 스캐폴드 프로테인 ···. 한 시간 준다.”

“넵! 준느님! 굿데이 응급 패스트 트랙 가동!! 전 세계를 뒤져서라도, 요청하신 모든 물품을 시간 안에 확보하겠습니다.”

*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재생의학 연구소.

요네스 교수는 방금 전해 들은 내용을 곱씹었다.

포인트는 간단했다.

10분 전 연구소 전체가 통째로 팔렸다.

“굿데이에서 어마어마한 액수를 줬어. 재단 이사장이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규모였지 ···.”

국제법무 위원장이 선한 미소로 설명했다.

대학규칙에 따르자면, 주임 교수 회의를 거쳐야 했지만, 굿데이에서 내세운 첫 번째 조건이 ‘즉결계약’이었다.

규칙을 살짝 무시하긴 했지만, 손해 보는 거래는 아니었다.

굿데이가 제시한 액수는 같은 연구소 세 개를 짓고도 남았다.

“굿데이 ···. 돈만 잘 버는 줄 알았는데, 돈 쓰는 것도 엄청나군요.”

“우리에겐 고마운 일이지.”

“굿데이에게 인정받아서 좋긴 하지만 ···.”

요네스 교수는 뭔가 찝찝했다.

오슬로 재생의학 연구소는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소가 아니었다. 최근에 세포배양 실린더를 개발했지만, 손볼 곳이 많았다. 그리고 ···.

“ ···. 문서를 보면, 15분 이내에 연구소를 인수하겠다고 나와 있는데 ···. 15일을 잘못 쓴 거겠죠?”

“15분이 맞아. 내가 몇 번이나 확인했어.”

“굿데이는 대서양을 건너 다른 대륙에 있지 않나요?”

하늘에서 천둥이 들렸다.

초음속 수송기 ‘기간트’였다.

기간트는 추락하듯이 고도를 낮추다가, 헤라클레스 수송트럭을 투하한 후, 다시 솟구쳤다.

세 개의 낙하산에 매달린 헤라클레스 수송트럭이 운동장에 떨어졌다.

그 충격으로 오슬로 대학 전체가 흔들거렸다.

요네스 교수와 법무위원장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굿데이에서 나왔습니다.”

호세가 전자 패드 서류를 내밀었다.

서류의 내용은 간단했다. ‘이제 여긴 굿데이의 것!’

“확인했습니다. 제가 안내를 ···.”

요네스 교수가 오른손을 뻗어 연구소를 가리켰다.

“고맙지만, 시간이 없어서,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호세는 에어스크린으로 투시된 연구소 청사진과 앞에 있는 진짜 연구소를 대충 비교한 후, 소리쳤다.

“뜯어라!”

아쿠타미 부대는 도끼와 레이저 톱으로 필요한 부품과 장비들을 모두 발라냈다.

세포배양 실린더와 무균실, 콜라젠 스캐폴드 ···. 세이턴 치료에 필요한 장비들이 옮겨졌다.

총소요시간 3분 5초.

“굼벵이들! 3분이 넘었다. 남자는 여잘 요리할 때만 3분을 넘기는 거다!”

“특무상사님은 맨날 그 얘기야.”

아쿠타미 부대는 투덜거리면서도 손을 놓지 않았다.

그들이 일을 마치고, 헤라클레스 수송트럭에 올라타자, 기간트 수송기가 매처럼 수송트럭을 낚아챘다.

기간트는 수송트럭을 탑재하고, 초음속 모드로 돌입했다.

푸앙- 쿠앙 -파쿠앙-

단계적으로 속도를 높일 때마다, 질감이 다른 충격파가 울렸다.

요네스 교수는 아쿠타미 부대가 휩쓸고 간 연구소를 바라보았다. 회를 뜨고 남은 생선 뼈 같았다.

*

유로 제5 우주정거장

연구팀장 미첼의 표정은 3G에 노출된 것처럼 오묘했다.

그녀는 민소매 셔츠와 고무벨트 바지를 입고,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우주정거장이 회전하면, 원심력으로 약간의 ‘중력 효과’를 맛볼 수 있지만, 예산 절약 차원에서 중력 효과 옵션은 생략하며 생활했다.

스크린으로 전달된 내용은 간단했다.

제17 연구 섹터가 팔렸다는 것!

파루시아와 헬하운드 그리고 가속도 수익배분과 요빅 시스템을 경제에 이식한 굿데이의 돈 지랄이 대기권을 뚫고 우주로 진출한 셈이었다.

“17 섹터는 코스모 셀 연구실입니다. 굿데이가 왜 그런 연구에 관심을?”

“위에서 결정된 일이야. 자세한 건 나도 모르네.”

제3 통제센터장 피코 아이어는 커다란 코에 얹혀 있는 안경을 고쳐잡았다.

그는 지휘본부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앉아 있었다. 눈동자를 조금만 굴리면, 계단식으로 배치된 직원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피코 소장님, 코스모 셀은 실패한 프로젝트예요. 굿데이가 프로젝트 내용을 제대로 안다면, 절대 인수하지 않았을 거예요.”

미첼은 화면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센터 라인을 조절했다.

“미첼, 모든 통신은 녹음되지만, 방금 것은 백색 잡음으로 처리해주겠네.”

“알겠습니다. 주의하겠습니다.”

“이제 굿데이가 17 섹터를 인수할 거야.”

“도킹 준비를 하겠습니다.”

“도킹은 없네.”

“도킹 없이 어떻게 인수하겠다는 거죠?”

“굿데이가 원하는 건 ···. 찾아가는 서비스라네.”

유로 제5 우주 정거장은 정해진 궤도 좌표에서 17 섹터를 분리했다.

섹터는 2박 3일 동안 추락하다가, 지표 400m 높이에서 낙하산을 펼쳤다.

섹터가 떨어진 곳은 굿데이 골프공의 앞마당이었다.

준의 명령에 따라 유진 악마와 에바, 로켈, 호세가 총력을 다해 움직였지만, 모든 것을 한 시간 안에 마련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세이턴 소생 프로그램은 탈 없이 진행되었다.

물건과 장비들은 준이 사용하기 전에 모두 굿데이에 배달되거나 착륙했다.

“미 합중국 대통령이 총에 맞아도 이렇게는 안 할 거야.”

디아나는 방금 내려앉은 섹터의 문을 따며 중얼거렸다. 섹터에 보관된 코스모 세포는 코팅 과정을 거쳐서 세이턴에게 주입될 예정이었다. 코스모 세포는 실패한 프로젝트였지만, 준의 손길을 거치면서, 뛰어난 에너지 세포로 업그레이드했다.

코스모 세포의 주입 목적은 단순했다. - 기력보충.

굿데이는 세이턴을 살리려고 엄청난 자본과 기술을 쏟아부었다.

굿데이가 사들이거나 인수한 바이오 분야의 특허기술과 연구소 그리고 우주정거장 ···.

투자자와 다국적 기업 그리고 각국의 정보부는 굿데이의 의도를 알고 싶어서 몸이 바짝 타들어 갈 정도였다.

그 누구도 개 한 마리 때문이라고, 감히 생각하지 못했다.

*

세이턴은 트리트먼트 배양액 실린더에서 사흘 동안 지냈다.

감각이 돌아왔다.

뼈는 더 단단해졌고, 근육도 강해졌다.

질기고 유연해진 가죽과 부드러워진 털.

단순히 회복된 것이 아니라, 예전의 한계를 넘어섰다.

세이턴에게 적용된 바이오 테크롤지는 학계 최고 수준보다 수십 년은 앞선 것이었다.

준은 사흘 동안 세이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잠도 자지 않고, 세이턴을 돌봤다.

세이턴을 돌보는 동안, 책도 읽지 않았다.

모든 것을 세이턴에게 집중했다.

식사도 하지 않았다.

에바와 로켈 그리고 호세가 번갈아 가며 준을 지켰다.

“준 형아 ···.”

카이는 준에게 말을 붙이려다가, 그만두었다.

준은 배양액으로 가득 찬 실린더에 있는 세이턴을 바라보았는데, 놀랍도록 거룩했다.

감히 ···. 방해할 수 없었다.

카이는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에바는 이해한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준 형아, 감정 결핍 증후군이잖아? 지난번에 친구가 있냐고 물어봤는데, 분명히 없다고 대답했어. 그런데 지금 준 형아는 ···.”

카이는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랑이나 슬픔, 증오, 분노 따위를 느끼지 못하는 준이 왜 세이턴을 돌보는 걸까?

카이도 세이턴이 건강해지길 바랐다. 그것은 카이의 자연스러운 감정적 반응이었다. 그러나 준의 모습을 설명하려면, 논리적인 접근이 필요했다.

에바는 평생 연구한 내용을 단어 하나로 압축하듯이, 끊어 말했다.

“남자니깐.”

*

세이턴은 실린더에서 걸어 나왔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준에게 다가가 몸을 낮췄다.

준은 세이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세이턴에겐 지극히 영광된 순간이었다.

준의 손끝을 통해 세이턴의 생각이 읽혔다.

‘주인님 ···. 다시 돌아왔습니다.’

세이턴의 코끝이 찡해졌다.

개눈물 - 눈물이 거침없이 흘렀다.

“괜찮다. 전해질 농도 불균형 때문이다.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준이 말했을 때, 유진 악마가 주책없이 끼어들 뻔했다.

트리트먼트 배양액의 전해질 농도는 완벽했다. 전해질 농도 불균형이라니! 그런 데이터는 없다!

‘설마 내가 모르는 분석 방법을 쓴 건가?’

신중하게 데이터를 다시 분석하는 동안, 그녀는 세이턴의 바이탈 사인이 최적화되는 것을 보았다.

세이턴은 편안하게 눈물을 떨궜다.

행복해 보였다.

“에바 누나 ···. 누나는 태어나서 저렇게 편안하게 울어본 적 있어?”

창밖에서 준을 지켜보던 카이가 물었다. 그 자리에는 로켈과 디아나 토그, 호세와 아쿠타미 부대원들이 함께 있었다.

“세이턴 자식 개행복 하네.”

로켈은 깍지 낀 손을 머리 뒤로 가져가며, 밖으로 나갔다. 그는 눈물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한 명씩 빠져나갔다.

모두 같은 심정이었다.

눈물을 보이기 싫었다.

“너 학교 안가냐?”

에바가 카이의 등을 떠밀었다.

“오늘은 안 가.”

“일요일인가? 아닌데? 오늘 학교 기념일로 휴업이니?”

“그런 게 아니라 ···. 숙제를 안 했어.”

“그런 이유라니 ···. 학교 가고 싶어서 안달이었잖니?”

“학교라는 게 좀 빨리 질리는 거 같아. 여자아이들도 다 내 또래고.”

*

일주일 후, 로켈은 파묻히듯이 무릎을 꿇었다.

“준짱!! 저를 벌하여 주십시오!!!”

트리탄이 쳐들어왔을 때, 준짱을 홀로 둔 죄.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다.

“트리탄에게 기회를 주고, 세이턴을 위태롭게 하고, 준짱이 손을 쓰게 한 것 ···. 모두 제 잘못입니다.”

“트리탄이 기회를 잡은 것이 아니라, 내가 기회를 준 것이다. 일어서라. 안 보인다.”

안 보인다. 안 보인다. 안 보인다 ......

로켈은 헷갈렸다. 지금 ···. 난 용서받은 걸까? 아니면 벌 받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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