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빅-15 >
준은 굿데이의 스크린 룸에서 가상현실을 로딩했다.
손짓 몇 번으로 원소주기율표를 불러내고, 원하는 원소와 조건을 골라서,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냈다.
5초도 되지 않아, 티스푼 분량으로 대륙 하나를 침몰시키는 위험한 물질이 만들어졌다.
블랙홀로 제련한 그 물질을 ‘시커먼스륨’이라 불렀다.
동전 크기의 시커먼스륨은 아프리카와 유라시아 대륙을 합친 것보다 더 무거웠다.
“그걸 어디에 써요?”
카이는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임모디피아에서 태어난, 카이는 실용적이지 않으면 가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극소량을 사용하면, 아령으로 만들 수 있어.”
“형 ···. 병신 같아.”
준의 뇌가 꿈틀거렸다.
책에 생명을 부여하고,
고밀도 지식 생태계를 탑재하고,
요새를 뚫고,
네 명의 암살자를 연습문제처럼 상대하는,
인류 최강의 남자일지도 모르는 준에게 ···. 병신 같다고 하다니!
준은 그런 카이가 맘에 들었다.
그는 천천히 폐 안의 공기를 내보내고, 홀로그램 부품 몇 개를 조립해서, 3기가 플라즈마 사이클론을 만들었다.
카이에게 익숙한 물건이었다.
임모디피아 시절, 라이코스 공업 대학교에서 폐품으로 버렸던 사이클론을 가지고 논 적이 있다. 사이클론을 잘 굴리면, 고철을 자석으로 만들 수 있다.
“스틸렌으로 파라핀을 만들어봐.”
준이 톡 치자, 드럼통 같은 사이클론 홀로그램이 카이 쪽으로 두둥실 이동했다.
“형이 학술 사이트에 올렸던 입자농축법을 사용할까?”
“다른 방법도 있어?”
“기본적으로 같은 건데 ···.”
카이는 에어 컨트롤러를 활성화해서 조건을 입력했다.
카이의 조건식이 전광판 점수처럼 깜빡거렸다.
초등학교 수학문제에 나올 법한 짧은 술식이었다.
나선형 감마 패턴 구조 자기장 ···. 변환율은 낮았지만, 속도가 빨랐다.
사이클을 반복하면, 준의 입자농축법보다 회수율이 높다.
변환율이 낮은 건 어쩔 수 없지만, 쉽고, 빠르고, 효율적이었다.
“입자농축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구나. 사람들이 푸리에 구조 방정식을 어려워해서, 천천히 농축되는 반응식을 올렸던 거야. 효율은 좀 떨어져도, 이쪽이 이해하기 쉽거든.”
“어쩐지 ···. 사실 입자농축법이라는 게, 독특하긴 했어도 엄청 답답해 보였거든요. 사이트에 올라온 입자농축법을 보면서, 이걸 만든 사람은 친구가 없겠다! 생각했다니깐요. 완전 제 착각이었죠. 형에게 친구가 없다는 게 말이 돼요?”
“나 친구 ···. 없어.”
“에바 누나는요?”
“나는 고용주, 에바는 직원.”
“로켈 아저씨는요?”
“그 역시 계약관계.”
“호세 아저씨와 부하들은요?”
“그들은 뛰어난 노가다꾼이지. 너도 알게 될 거야.”
“리처드 아저씨는요?”
“숙주와 거머리 ···. 내가 숙주고 리처드가 거머리야.”
“줄리아 누나는요? 형의 여자 친구 아니에요?”
“줄리아는 학생, 나도 학생. 한번 저녁 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정신세계가 아스트랄 했어. 무좀도 심했고 ···.”
“아스트랄이 뭐예요?”
“신비하다고 ···. 줄리아는 미친년이야.”
“형 여자들에게 인기 많은 건 알아요?”
“잘 모르지만 ···. 여자들이 가슴골 보여주려 안달하고, 몸 대주려고 몸부림치는 건 알아.”
“형 ···. 혹시 아직 한 번도 ···.”
“한 번 뭐?”
“짝짓기.”
“안 해봤어. 미리 말하지만, 경험이 없는 건 약점이 아니야 가능성이지.”
“마흔이 될 때까지 한 번도 안 하면 ···.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소문을 믿는 건 아니죠?”
“믿지 않아. 하지만 ···. 누군가 확인은 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게 혹시 형이야?”
“그게 가능한 남자가 나 말고 또 있을까?”
준은 본의 아니게 약간 뻐기듯이 말했는데, 카이의 대답은 용서가 없었다.
“형! 진짜 병신이구나!”
“말 많다. 집중하자.”
준은 유조선을 불러냈다.
길이 1km, 높이 100m, 선폭 200m의 초대형이었다.
손으로 간단하게 갑판을 뜯어내고, 입자 가속기를 넣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된 입자 가속기 사이 사이에는 준이 직접 설계한 장비들과 라인이 채워졌다.
입자가속기는 고래의 소화관처럼 구불구불 이어졌다.
인공심장을 이식하는 수술의사처럼 유조선을 봉합했다. 소독약을 바르듯이 태양전지 패널로 갑판을 코팅했다. 깃발 같은 풍력 발전기도 꽂혔다.
“잘 봐둬.”
“왜요?”
“네가 만들 거야.”
“그게 뭔데요?”
“요빅.”
“상상한 거랑 좀 다른데?”
“어렸을 때 바다를 보지 못해서 그래.”
“바다에도 쓰레기가 있어요?”
“땅 위에 있는 것보다 더 많지.”
“바다는 정말 멋진 곳이구나!”
*
카리 형사는 취조실 테이블에 플라스틱 생수를 올려놨다.
범인이 찬 수갑은 테이블에 고정된 쇠붙이에 물려 있었다.
플라스틱 생수는 범인이 쉽게 잡을 수 있는 위치였다.
카리 형사는 범인을 논스톱으로 단두대로 보내버리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오렌지 시티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살담 카메조. 특이한 이름이군.”
“내가 직접 지은 이름이지.”
“뜻이 있나?”
“외로운 늑대. 엠벨라 족의 언어지. 엠벨라 족을 아나?”
살담 카메조는 순박한 얼굴을 가진 평범한 남자였다.
길을 가다 마주쳐도 기억에 남지 않을, 평범한 인간.
카리 형사는 저런 사람이 ‘시체들의 숲’을 만들었다는 게 놀라웠다.
40명 이상을 죽인 연쇄살인범 - 살담 카메조.
킹스덤 경찰본부에서는 그를 도살자로 불렀다. 카리 형사는 엠벨라 족을 생각해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그는 살담에게 손바닥을 펴 보였다. 모른다는 뜻이었다.
“엠벨라 족은 지구에서 가장 위험한 곳에 살지. 어딘지 한 번 맞춰보게.”
“아마존?”
살담은 비릿한 미소로 고개를 저었다.
“남극?”
“아니.”
“사막?”
“아니야.”
“화산섬?”
“비슷하지도 않아. 자네처럼 꽉 막힌 사람이 어떻게 날 찾아낸 거지?”
“수십 명을 죽이고도, 안 잡힐 줄 알았나?”
“음 ···. 날 잡았다고 생각하는군.”
“네 꼴을 봐, 오렌지 색 죄수복에 금속 수갑을 차고 있어! 잡힌 게 아니면, 뭐야?”
“형사 양반. 흥분하지 마. 죄수를 심문할 땐, 흥분하는 거 아니야.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호기심 때문이야. 경찰은 날 잡을 수 없어. 어떻게 날 찾았는지 말해봐. 그 정도는 나도 알아야지.”
“시체 주변에서 너를 가리키는 증거가 왕창 나왔어. 이름, 주소, 증명사진까지 있더군.”
“거짓말. 법원에 사건기록부를 신청하면, 모든 걸 알 수 있어. 사건기록부를 보기 전까지 묵비권을 행사하겠어. 요즘 시간이 남아돌거든. 어쩔래? 묵비권을 행사하고, 사건기록부를 신청할까? 아니면 서로 솔직하게 터놓고 대화를 할까?”
“음 ···. 굿데이의 도움을 받았어.”
“역시, 그랬군. 굿데이라면 나도 인정하지. 6개월 후 날씨도 맞히는 자료 분석 능력이라면 ···. 사건 현장의 자료들로 날 찾아낼 수도 있겠지. 대화 즐거웠어. 솔직히 말하니깐, 얼마나 좋아. 서로 시간도 절약하고 ···.”
“이제 네 차례야. 왜 사람들을 죽였지?”
“워워! 죽인 게 아니라, 끝을 내준 거야. 일종의 서비스지.”
살담은 몸을 숙여서 손가락을 자신의 입 안에 넣었다.
“뭐하는 거야?”
“기다려. 입에 낀 걸 빼는 중이야.”
‘틱’ 소리와 함께 어금니가 빠졌다.
카리 형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심문 중에 이를 빼다니.
혹시 경찰에게 폭행당했다고 쇼하려는 게 아닐까?
하지만 헛짓거리다. 취조실의 모든 것이 녹음되고 녹화되고 있다. 쇼는 통하지 않는다.
“진짜 이빨은 아니야. 사랑니를 뺀 자리에 가짜를 심어뒀어.”
살담은 ‘씨익’ 웃더니, 뽑은 이를 씹었다.
“도대체!”
“후!”
살담이 입김을 내뿜자, 카리 형사는 주위가 ‘빙그르’ 도는 것처럼 느껴졌다.
몸에서 생명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는 곧바로 정신을 잃었다.
“굿데이라고? 준 녀석이겠군.”
살담은 다시 입안으로 손을 넣어 다른 치아를 빼냈다.
*
카리 형사는 녹음된 영상을 보면서, 이를 갈았다.
그가 기절한 후, 살담은 다른 치아를 빼고 길쭉하게 만들어 수갑을 풀었다.
살담의 입김에 닿는 사람은 속절없이 기절했다.
과학수사대에서 기절했던 사람의 혈액을 뽑아서, 가스분석을 하고 있지만, 성분을 알아낼는지 의문이었다.
살담은 기절한 사람의 옷을 입고, 지갑과 자동차 키를 챙기고 여유 있게 빠져나갔다.
살담 카메조의 프로필. - 그는 특수부대에 지원했지만, 정신감정 불합격으로 탈락했고, 몇 년간 세상을 떠돌다가, 5년 전에 이곳으로 왔다. 살담이 세상을 떠돌면서, 무엇을 배웠는지 아무도 모른다.
“엠벨라 족을 알아?”
카리 형사가 동료들에게 물었지만, 모두 고개를 저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도 옷가지 몇 개만 나올 뿐이었다.
놈을 다시 잡을 수 있을까?
느긋하게 경찰 본부를 빠져나간 저 괴물을?
하지만 꼭 잡아야 했다.
살담은 조용히 빠져나간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정신을 잃은 여자 직원의 팔을 꽁꽁 묶은 후, 오른손 약지를 잘라 갔다.
*
거대한 유조선 세 척은 삼각형의 꼭짓점이 되었고, 삼각형 안에는 인공섬이 떠 있었다.
작은 무인도보다 훨씬 큰 구조물이었지만, 하늘에서 바라보면 나뭇잎처럼 처량해 보였다.
대형 드론이 하늘을 날며, 장비와 부품을 옮겼다.
아쿠타미 부대원들이 갑판을 뜯어내고, 설계도에 맞춰 장비를 조립했다.
로봇과 드론의 도움을 받았지만, 아쿠타미 부대의 동작은 정교한 군사작전 같았다. 스위스 태엽 시계 같은 움직임이었다.
“일 잘한다.”
카이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비교 대상이 임모디피아의 좀비였지만, 카이가 직접해도 아쿠타미 부대원만큼 해낼 자신이 없었다.
굿데이는 요빅 제조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자본.
기술.
인력.
중고시장에 돌아다니는 입자가속기를 모두 사들여서, 델타 아일랜드에서 다시 뜯어고쳤다.
소립자 단위를 다루는 입자가속기는 쓸모가 없었다.
입자농축 하려면 에너지 레벨을 낮추고, 사이클 속도도 늦춰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원자단위로 쪼개진다.
아쿠타미 부대는 쉬는 시간을 철저하게 지켰다.
안전사고를 예방하려면 휴식이 필요했고, 전쟁은 마라톤이었다.
그들은 마라톤의 창시자처럼 끝까지 달린 후에 죽고 싶지 않았다.
카이는 ···. 쉬지 않고 일했다. 지금 만드는 것은 요빅이었다. 그가 평생 꿈꿔왔던 바로 그것이었다.
입자가속기를 분해해서, 다시 조립하고, 프로그램을 입력하고, 설계도와 아쿠타미 부대의 작업을 비교하고, 이음새를 체크하고, 규격에 맞는 제품이 사용되었는지 확인했다.
강화플라스틱을 사용해야 할 곳에 오스뮴합금 제품이 세팅되어 있었다.
카이는 잘못된 부분에 메시지 스티커를 붙였다. - ‘아저씨들. 제대로 합시다.’
호세는 카이에게 차가운 마떼를 가져다주었다.
“꼬맹이 쉬면서 해라. 어제도 밤샜지? 벌써 나흘째야.”
“쉴 수 없어요.”
“뭐가 걱정이야. 진행은 순조로워. 요빅은 완성될 거야.”
“계획보다 더 빨리 완성해야 해요.”
카이는 빨개진 눈으로 힘주어 말했다.
“이야기는 들었어. 꿈꾸던 것을 직접 만든다는 건 ···. 우주비행사가 꿈인 아이가 우주선을 탈 때와 비슷하겠지. 우주선 엔진이 점화하고, 진동이 느껴지면, 마음도 급해지겠지. 그럴수록 여유를 가져.”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 게 ···.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것도 있었구나. 방학에는 놀아야 하는데 ···. 준이 좀 잔인한 구석이 있어. 우리가 뺑이 치는 걸 보면 알잖아. 아쉽겠다. 첫 번째 방학인데.”
“방학이 끝나기 전에 ···. 요빅을 완성해야 해요. 그래야 늦지 않게 학교에 갈 수 있어요. 학교에 가고 싶어요.”
카이의 빨간 눈에 눈물이 고였다.
훌쩍이며 반복했다.
“학교에 가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