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 준-39화 (38/141)

< 요빅-14 >

중앙도서관으로 이어지는 첫 번째 계단을 밟자, 머릿속에서 책들의 화음이 들렸다.

우주창조만큼이나 웅장한 합창이었다.

준의 머릿속에서 - 그동안 읽었던 책들이 일제히 노래한다.

늘 있는 일이었다.

그의 손을 스쳐 간 책들은 리듬을 갖고, 생명을 얻는다.

책에 생명을 부여하는 능력 - 독창력(讀創力)!

독창력은 준의 머릿속에 있는 ‘고밀도 지식 생태계’의 근원이었다.

준은 도서관을 한번 휙 쳐다보고, 대출된 책과 반납된 책을 알아냈다.

도서관은 그의 일부였다.

그가 읽으려고 했던 책은 아직 반납되지 않았다. 대출 기간이 일주일이나 지났는데도, 책을 빌린 사람은 반납하지 않았다.

“대출자 신원은 알려줄 수 없어.”

길버트는 도서관 규칙을 지켰다. 그는 준을 인정하고 높게 평가했지만, 규칙은 규칙이었다. 그리고 ···.

준이라면 길버트의 도움 없이 대출자를 찾아낼 수 있다.

길버트는 심플한 솔루션을 제안했다.

“그냥 한 권 사라!”

“돈으로 살 수 있는 책이 아니야.”

“무슨 ···. 그런 책이 어딨어? 열람실에 있는 책들은 구매 가능한 책들이야. 3층 특수문서 보관소에는 구하기 어려운 것이 많지만, 1층은 ···.”

준은 길버트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자리로 가서 독서를 시작했다.

“아! 저 싸가지!”

길버트가 삐쭉거렸다. 준이 조금만 사근사근한 성격이었다면, 완벽했을 텐데.

준은 은근히 사람을 개무시했지만, 놀랍도록 자연스러웠다.

열람실에 있는 사람들은 힐끔힐끔 준을 쳐다보았다. 이미 소문이 다 퍼졌다.

준은 길거리에서 눈빛만으로 주정뱅이를 제압했다.

주정뱅이는 격투 감각을 타고난, 천재 킥복싱 선수였다.

술에 취했다고 해도, 건장한 장정 몇은 가볍게 녹다운할 수 있는 실력자였다.

술 취한 실력자는 길거리에서 남자 둘과 여자 둘을 단숨에 박살냈다.

준은 그런 상대를 손끝 하나 대지 않고, 눈빛만으로 얼렸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들의 경험을 오픈 사이트에 올렸다.

- 빙하기가 다시 온 줄 ···.

- 눈깔에서 냉동 빔이 후덜덜 ···.

- 아이스 타이탄의 기운 찬... 느껴졌음.

- 공기가 얼어붙는 줄 ···.

- 준의 몸집이 백배로 커지는 증강현실을 본 착각이 들었다.

- 준은 은빛 늑대다.

- 준은 에스퍼다!

- 준은 솔로다. 그 냉기는 솔로의 것이다. 솔로 만세!!!!

- 스노우 마왕이 납시었다.

사람들은 이런 소문에 매료되었다.

준이 성공한 사업가이고, 지독한 책벌레인 건 알았는데, 싸움까지 잘하다니!

사람들은 준과 권투 선수, 혹은 이종격투 선수와 싸우면 누가 이길까?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도서관의 번호들 ···. 준을 자신의 남자로 만들겠노라! 작정한 여자들.

그녀들은 사람들의 반응에 코웃음 쳤다.

‘호들갑 떨기는 ···. 준이 대단한 남자라는 걸 몰랐던 거니. 내가 괜히 준을 점찍은 줄 알아!’

준은 그녀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지만, 그녀들이 괜스레 으쓱해 했다.

‘역시 내 남자가 될 자격이 있어.’

*

길버트의 책상에 테이크아웃 밀크커피가 놓였다.

스노우캣의 커피였다.

스노우캣은 맹물 얼음을 사용하지 않고, 얼린 커피 조각을 사용했고, 얼음이 녹아도 맛의 농도는 변하지 않았다.

“길버트. 마시면서 일해.”

줄리아의 미소는 레몬처럼 상큼했다. 보는 사람의 입안에 침이 고이게 하는 미소였다.

“고마워.”

“아까, 준하고 무슨 얘길 했어?”

“준이 신청한 책이 아직 반납되지 않았어.”

“무슨 책인데?”

“개인정보에 해당하는 내용은 말할 수 없어.”

길버트에겐 원칙이 있었다.

줄리아가 눈짓으로 커피를 가리켰지만, 커피는 커피고, 원칙은 원칙이었다.

“가르쳐주라잉.”

줄리아의 손끝이 길버트의 손등에 닿았다.

그녀의 손끝은 물방울이 구르듯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길버트의 세포들이 홀린 듯이 일제히 섹스 호르몬을 방출했다. 모세혈관이 확장되면서, 그의 얼굴이 빨개졌고 피가 몸의 중심으로 몰렸다.

섹스 호르몬 옥시토신이 콸콸 쏟아지면서, 원칙이라는 바위산을 그대로 쓸어버렸다.

줄리아의 한 번 터치로 ... 원칙은 무너졌다.

“굉장하다.”

길버트의 몸이 가늘게 떨었다.

“나도 알아.”

줄리아의 미소는 한층 더 풍부해졌다.

준을 만나기 전까지, 모든 남자가 그녀의 손끝에서 놀아났다.

“준에게도 해봤어?”

“씨알도 안 먹혀.”

“준은 이걸 어떻게 견뎌낸 거지?”

“나도 몰라.”

줄리아는 뾰로통해진 입술로 준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와의 저녁 식사가 생각났다. 실버 드래곤 패거리가 끼어들긴 했지만, 정말 즐거웠다.

준은 도서관의 꽃, 번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녀들은 아름답고, 청순하고, 우아하고, 아무튼 끝내줬다.

그녀들의 흡입력은 블랙홀에 빗대어서, ‘플라워홀’로 불린다.

플라워홀 - 그녀들을 보려 도서관에 오는 남자가 수백 명이 넘는다. 개중에는 재벌 2세와 명문가문의 자제들도 많았다.

번호들은 준에게 집착하지 않아도, 그럴듯한 남자를 고를 수 있었지만, 준에게 한 번 빠지면 ···. 재벌 2세가 저능아처럼 보이는 착시를 경험한다.

재벌 2세, 명문가문, 엘리트 ···. 이런 것들은, 그녀들에게 실손보험에 불과했다.

번호들 사이에 암묵적인 합의가 이뤄져서, 준과의 신체 접촉은 자제하고 있지만, 그녀들의 눈길, 표정, 우연한 스침은 남자의 마음을 허문다.

열쇠와 자물쇠 이론. - 남자의 마음이 자물쇠라면, 그녀들의 미소는 열쇠였다.

놀라운 사실은 ···. 준은 번호들의 유혹을 견디는 게 아니라, 그냥 무시한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줄리아의 손끝을 맛본 길버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같은 남자로서 준이 대단히 존경스러웠다.

준은 어쩌면 ···. 인류 최강의 남자일지도 모른다.

*

킹스덤 중앙도서관 앞에서 ... 카이는 정신 줄을 놓았다.

세상 모든 책을 한곳에 모아 놓다니!

쌓여 있는 책을 보노라니, 거지 근성이 발동하려 했다.

“카이.”

항체 한 방울 맺혀 있는 주사침 같은 뉘앙스 - 에바가 카이의 정신 줄을 잡아주었다.

카이는 본능적으로 에바의 눈치를 살폈다.

“먼저, 준 회장님에게 인사하고.”

카이는 준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지만, 도서관에 있는 수많은 사람 중에서 누가 준인지 쉽게 찾아냈다.

책에 인쇄된 글자를 그대로 흡수하는 듯한 집중력 - 단 한 명이었다.

“회장님. 카이를 데려왔습니다.”

에바는 작은 목소리로 책 읽는 준에게 말했다.

그녀의 등장과 행동은 도서관에 있는 모든 이의 시선을 끌었다.

에바다! 굿데이 정직원 1호! 굿데이 넘버 2.

사람들은 생각했다. 에바 옆에 있는 남자는 그녀의 펫이라고 ... 레즈라고 하던데, 어린 남자로 취향을 바꿨나?

카이는 준이 봐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준의 시선은 책을 떠나지 않았다.

준은 책을 보며 짧게 말했다.

“읽어라.”

“준 형아 고마워요.”

카이는 굶주린 짐승처럼 책을 읽어댔다. 세상은 신비로 가득 찬 그 무엇이었다.

카이가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을 때, 준이 에바에게 물었다.

“카이 뺨에 손자국이 있던데?”

“적응 못 하길래, 노바파워 처방했어.”

“아직 어린아이던데?”

“어린아이 아니야. 고등학생은 되고도 남는 나이야. 그리고 증세가 심각했어.”

“왼쪽 오른쪽 둘 다 손자국이 있던데 ···. 다음부터 노바파워 처방할 때에는 반지 빼. 애 잡겠어. 쟤 입 돌아간 것 좀 봐.”

*

리스크 관리 본부장 찰스는 굿데이의 자금 흐름을 철저하게 분석했다. 약점을 찾는다는 느낌보다는 한 수 배우는 심정이었다.

지금은 오로토칸의 일을 처리하는 신세였지만, 머잖아 다시금 메이저 리그에 진출할 계획이었다.

배우고 익혀서 실천하면 통하는 게 메이저 리그였다.

금값 숏포지션. - 금값이 떨어질 거라는 베팅 포지션.

최근 들어 금값 숏포지션이 늘었다.

굿데이뿐 아니라 대부분 플레이어가 숏포지션에 기어들어와 있었다.

당연한 현상이었다.

샤나이슈카 지역의 금광 발견과 채굴권 허용은 금 생산량 증가를 뜻했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 - 생산량이 늘면 가격은 떨어진다.

“보통은 20% 이내에서 포지션을 잡습니다. 금값이 떨어진다고 해도, 단기간에 20% 이상 떨어지는 건 어렵거든요.”

찰스는 손바닥을 비볐다.

트리탄은 찰스의 말보다 행동에 집중했다.

찰스가 손바닥을 비비는 것은, 성공을 확신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굿데이의 숏포지션 레벨은 90%입니다. 단기간에 금값이 90% 이상 하락해야만 수익이 터지는 포지션이죠.”

“금값이 90% 이상 떨어진다고?”

트리탄의 미간이 좁혀졌다. 침입자를 발견한 멧돼지 같은 표정이었다.

트리탄은 금융투자 시장에서 잔뼈가 굵고 파괴적 창조 수익 이론을 개발한 엘리트였지만, 단기간 금값 90% 하락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오로토칸이 가진 금을 모두 내놓는다면, 가능하겠지만 ···.

“샤나이슈카의 금 매장량과 금 가격 추세를 분석해도, 최대 하락 폭은 28%에 불과합니다. 90%의 하락은 ···. 순금으로 된 3만 톤짜리 소행성이 사뿐히 내려앉아야 가능합니다.”

“투자자들의 패닉과 광기는?”

“그것도 확인했습니다. 금값이 15%만 하락해도, 중앙은행이 나서서 금을 사들일 겁니다.”

“그렇다면 90% 포지션은 굿데이의 페이크이겠군.”

페이크 - 자신의 포지션을 노출해서, 투자자들을 끌어들이고, 기회를 봐서 포지션을 청산하는 방법이었다. 스피드킬을 사용하는 굿데이라면 무난히 사용할 수 있는 수법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 포지션 설계를 분석해보니 ···. 딥루트 타입이었습니다. 딥루트 타입은 ···.”

“뿌리 내린 나무처럼 못 박힌 포지션이지. 오도 가도 못하고 제자리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거지.”

“지금까지 굿데이는 미꾸라지 같은 ‘스피드킬’로 시장을 휘저었습니다. 지금이 기횝니다. 놈들이 딥루트 포지션을 취하고 있는 지금이라면 모가지를 잡아 부러트릴 수 있습니다.”

“설계할 자금이 있나?”

“돈은 융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겐 금값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카드가 있습니다.”

“카드?”

“숏포지션은 샤나이슈카 금광에서 비롯된 겁니다. 우리가 채굴 일정을 한 달만 늦춰도, 금값은 쉽게 떨어지지 않습니다. 짭짤한 루머를 섞으면, 오히려 금값이 오르게 될 겁니다. 채굴 일정 연기와 샤나이슈카에 있는 것이 금이 아니라 황철석이라는 루머가 퍼지면 ···.”

찰스의 머릿속에서 가파르게 오르는 금값의 추세 그래프가 뚜렷하게 그려졌다.

“굿데이의 베팅 규모는?”

“엄청납니다. 올인입니다. 놈들은 한 달 이내에 금값이 폭락하지 않으면 쫄딱 망합니다.”

“상대는 굿데이야 ···.”

트리탄은 내키지 않았다. 굿데이와 엮여서 득 본 적이 없었고, 그 응징은 가혹했다.

“파괴의 군주여! 극복하셔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정화의 불길’이 필요합니다. 언제까지 오로토칸의 수하 노릇을 하실 겁니까!”

*

학교다! 학교!

카이는 고등학교 정문에 무릎 꿇고 입을 맞췄다.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타고난 본능의 이끌림이었다.

그토록 바라던 것을 얻었을 때, 인간은 키스한다.

‘내가 학교에 다니다니!’

카이는 첫날부터 중심인물이 되었다. 에바와 함께 교장 면담을 했고, 굿데이와 준이라는 배경이 후광효과를 냈다.

“준 형아가 이 학교에! 뭐 이 교실이었다고 자리가 ···. 바로 여기고?”

카이에게 준은 종교였고, 준이 거쳐 갔던 모든 곳이 성지였다.

카이는 성지순례에 나선 순례자처럼 학교에 다녔다.

경건하고 즐겁게.

태어나서 이처럼 행복했던 적은 없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카이는 분노했다.

“왜 내일부터 학교에 나오지 말라는 거죠!”

꼴사납게 찡그린 얼굴로 눈물 흘렸다.

에바에게 카이를 넘겨받은, 디아나가 가르쳐주었다.

“방학이란다.”

“누구를 위한 방학이란 거예요!”

“너 빼고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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