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 준-37화 (36/141)

< 요빅-12 >

에바는 가디날을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임모디피아로 들어가려면, 어쩔 수 없이 가디날의 본거지를 지나야 했을 뿐이었다.

가디날에겐 시체 썩는 특유의 냄새가 났다. 할 수 있다면,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가 임모디피아의 ‘통치자’가 아니었다면, 에바는 눈길도 주지 않았을 것이다.

에바가 가진 자료는 위치정보와 이름뿐이었다.

“카이를 보러 왔어요”

“카이?”

가디날의 누런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렸다.

‘골든 보이’는 소중한 ‘도구’였다. 신의 목소리는 폭포처럼 웅장하게 울렸다.

‘저년을 죽여라!’

에바 뒤에 호세가 없었다면, 진즉 그렇게 했을 것이다.

안내를 맡은 부하가 에바에게 손대려 했을 때, 호세는 간단하게 그 부하를 찌그러트렸다. 고릴라가 침팬지를 다루는 것 같았다.

가디날은 호세와 에바가 어떤 조직의 메신저라고 짐작했다. 까딱 잘못 건들면, 전쟁을 치러야 한다.

저년을 죽이기 전에, 저년의 정체와 배경을 알아야 했다. 그리고 ···.

“카이를 ···. 어떻게 알지?”

임모디피아는 지도에도 없는 곳이다. 이곳의 사람들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카이의 이름을 알다니? 해괴하고 불길한 일이었다.

“그분께서 알려주셨어요.”

“그분? 너도 목소리가 들리나?”

“당연하죠. 그러니깐 이렇게 대화하는 게 아니겠어요?”

“내가 말하는 건 ···. 신의 목소리야.”

‘뭐지 저 병신은? 어떻게 저런 새끼가 꼰대가 된 거지?’ 에바는 임모디피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지만, 가디날이 미친놈인 건 확실했다.

미친놈에겐 미친 논리가 있다. 에바는 여러 사람을 상대하면서, ‘논리’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논리는 ···. 언어다.

그녀는 대화해야 했고, 결론을 끌어내서 목적을 이뤄야 했다. 그러자면 상대의 논리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목적 달성을 위한 대화 -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아직도 옷 벗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그녀는 항상 깨끗한 속옷을 챙겨입었다. 그리고 가끔은 상대가 원하는 해괴망측한 옷을 입어야 할 때도 있다. 이번에는 신의 목소리였다.

신의 목소리라니 ···. 까짓것 들어주지.

“들려요!”

에바는 셔츠 단추 하나를 풀었다. 마치 가슴을 보여주겠다는 듯이, 신의 목소리가 그렇게 시켰다는 듯이.

브래지어 레이스가 살짝 보였다. 남자들에겐 항상 통하는 수법이었다.

가디날은 조용히 끄덕였고, 에바 뒤에 있는 호세는 격한 헛기침을 했다.

“좋아. 그렇다면 날 원망하지 않겠군.”

가디날은 예리한 단검을 꺼내서, 그 끝에 혀를 댔다. 신의 목소리에 따르는 것은 숭고한 일이었다.

호세가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에바가 손짓으로 말렸다.

“신이 당신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알겠어요. 그 전에 카이를 봐야겠어요.”

가디날은 칼을 쥔 채, 한참 동안 에바를 쳐다보았다. 그냥 죽이기엔 좀 아까웠다.

흔들리는 가디날 - 에바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신의 목소리가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카이를 만나라고.”

“그렇게 될 거야.”

가디날은 에바의 시체를 카이에게 넘길 생각이었다. 신의 목소리는 위대하다! 에바는 카이를 만나게 된다.

칼끝이 에바를 향했다. 호세는 마음이 급해졌지만, 에바를 믿었다.

“지랄 염병! 누렇게 들뜬 개자식아! 귓구멍에 똥칠 했냐! 내 말 안 들려! 카이를 만나겠다고!”

곱고 예쁜 여자의 입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쌍소리는 강력했다. 가디날은 움찔했다. 호세도 마찬가지였다.

호세는 중얼거렸다. ‘오늘 에바 많이 참네. 지금 상황이 이 정도로 끝날 욕이 아닌데.’

가디날은 놀랐다.

‘저것인가! 저년이 듣는다는 신의 목소리가?’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을 통해 직접 전하다니!

*

신의 목소리는 너무나 흥분해서, ‘저년을 죽여라!’라는 말만 할 뿐, 에바가 찾아온 이유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가디날이 친히 에바에게 물었지만, 에바는 ‘그분의 뜻’이라고만 했다.

가디날에겐 익숙한 ‘반복’이었다. 신의 목소리는 뻔한 것을 직접 말하는 법이 없다.

에바가 카이를 찾아온 이유 - 가디날의 부하들이 임모디피아 곳곳에서 정보를 긁어모았다.

“카이가 발광해서 여자에게 환장했답니다.”

“음 그랬군. 발광은 참기 어렵지. 얼마나 많은 여자랑 했지?”

“셀 수 없이 많대요.”

소문은 항상 과장되기 마련이었다.

“하면 할 수록 목마른 게 발광인데... 그렇다면 저년도?”

“콜걸이 분명합니다. 뒤에 있는 남자는 기둥서방이고요.”

가디날은 바로 이해했다.

그는 기둥서방을 홀로 상대하는 알몸의 에바를 쉽게 떠올렸다.

신의 목소리를 듣고 뱉는 콜걸이라 ···. 딱 가디날의 스타일이었다.

“카이를 불러와라.”

*

호세는 상대가 미치거나, 돌거나, 환장하든 상관없었다. 그는 딱 한 가지만 봤다. 위험한 사람인지 아닌지.

그의 판단에 의하면 가디날은 확실하게 미쳤고, 더 확실하게 위험했다.

그 새끼는 단검을 꺼내 들었고 에바를 찌르려 했다.

은밀하게 움직이는 정찰조가 보고했다.

옥상과 감시탑에는 기관총을 든 보초들이 있고, 건물 안에도 총을 소지한 패거리가 있다고.

“움직임은?”

호세는 소형 헤드셋을 사용했다.

“밖으로 나갔던 무리가 다시 들어오고 있습니다. 인질이 보입니다.”

“카이?”

“모르겠습니다. 얼굴을 검은 천으로 가렸어요. 손도 묶였습니다. 얼굴이 보인다고 해도,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카이의 정보가 너무 제한적이어서 ···.”

“접근할 수 있나?”

“해보겠습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호세와 에바가 있는 곳은 본거지 복도 끝의 작은 방이었다.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발걸음 소리는 가까워지다가 다시 멀어지곤 했다. 호세는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두 놈이 우리를 지키고 있군.”

에바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사실 이런 상황은 그녀의 전공이 아니었다. 자료가 너무 부족했다.

위치 정보만 갖고 이곳에 왔는데, 와보니 완전 개판이었다.

준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물어볼까? 그러나 준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

카이의 얼굴도, 성별도, 키도, 나이도 모른다. 다행이라면, 에바가 카이의 이름을 말할 때, 가디날이 반응을 보인 것이었다.

카이는 존재한다.

“가디날은 광견병에 걸린 너구리보다 위험한 놈이야. 어디로 어떻게 튈지 모르는 놈이지. 작은 빈틈만 보여도 우리는 끝장나.”

호세가 추천한 전략은 조지고 보는 것이었다.

제정신을 가진 놈만 몇 추려서, 카이를 찾아내면 된다.

“카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함부로 움직일 수 없어요. 우리가 조진 놈 중에 카이가 끼어 있을 수도 있죠.”

“시간이 갈수록 더 불리해지고 위험해져.”

“기다려요. 가디날이 카이를 찾아내겠죠.”

“그가 카이를 죽이면? 그러고도 남을 놈이야.”

“카이를 믿어야죠. 그는 준이 택한 사람이에요. 살아남을 거예요.”

“너무 낙관적이군. 카이와 연락도 되지 않고, 카이는 우리가 누군지도 몰라.”

*

카이는 이제 죽었구나 생각했다.

검은 천 보자기로 얼굴을 가리고 손이 묶였다.

그리고 ‘탑’으로 끌려갔다.

탑은 가디날의 본거지를 일컫는 단어였다.

부하가 카이 머리를 덮은 보자기를 걷어냈다.

눈이 부신 카이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에게 황금을 주기로 했지!”

광기 충만한 가디날의 목소리.

카이는 놀랐다. 어떻게 알았지? 그건 레이시와 나만의 비밀이었는데 ···.

“네.”

“왜?”

“하고 싶었습니다.”

갑자기 가디날이 웃어댔다. 부하들도 곧장 따라 웃었다.

“그녀가 왔다. 가서 만찬을 즐겨라.”

가디날은 멍한 표정의 카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년은 멋진 골격 표본이 될 거야.’

*

카이는 레이시가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 어색한 만남이었다.

호세는 자리를 비켜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난 여기서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카이는 에바와 호세를 바라보며, 엉거주춤 바지를 벗으려 했다. 그에겐 마지막 기회였다.

에바는 카이가 어리다는 사실에 놀랐다. 준보다 더 어리다니! 신선했다.

아쉽기도 했다. 여자였다면 더 좋았을 텐데.

“동작 그만.”

“아! 직접 해주실 건가요?”

“지랄. 몇 분이지?”

“가디날이 3분 줬어요.”

“그 새끼는 3분도 넘치도록 긴 시간인가 보군. 네 이름이?”

“카이에요.”

“준 회장님이 요빅은 네가 필요하다고 하셨어.”

카이는 아드레날린이 마구 분비되는 것을 느꼈다.

요빅이라니! 어젯밤 보았던 오페라 같은 설계도가 좌르르 떠올랐다.

“계약할래?”

“무슨 계약이죠?”

“근로계약.”

“하지만 ···. 저는 ···.”

“알아. 아직 어리니깐, 보호자가 허락이 필요하겠지.”

“그게 아니라 ···. 저는 이곳을 나가지 못해요. 가디날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정말이야?”

“네. 그는 무서운 사람이에요. 재미로 사람을 죽이죠.”

“오오! 잘됐어!”

“그게 무슨 ···.”

“그 새끼를 밟을 구실이 필요했거든.”

“네?”

“굿데이를 방해하는 자 ···.”

호세가 에바의 말을 이어받았다.

“···. 박살 난다.”

*

3분 후, 에바는 깃발을 꽂듯이 짧게 말했다.

“카이는 내 꺼.”

가디날과 부하들은 에바와 호세 그리고 카이를 둘러싸고 있었다.

가디날은 방금 잠에서 깬 것처럼 눈을 크게 껌벅였다.

“뭐라고?”

“카이를 데려가겠어.”

“그분의 뜻이냐?”

“그래. 그러니, 알아서 찌그려져.”

에바는 아이를 혼내듯이 양손을 허리에 댔다. 그녀의 팔꿈치는 응징의 꼭짓점이 되었다.

“좋아. 뜻대로 해주지.”

가디날이 턱짓하자, 부하들이 길을 터주었다.

에바는 속으로 실망했다.

그녀에겐 가디날을 박살 낼 구실이 필요했다. 가디날이 너무 쉽게 길을 내주는 바람에 그 구실이 사라졌다. ‘신의 목소리가 바꾼 걸까?’

길을 터준 부하들은 손에 흉기를 숨기고 있었다.

그들 사이로 발을 내딛는 순간, 사방에서 흉기가 날아들 것이다.

상대를 방심하게 하고, 허를 찌르는 방법은 가디날과 부하들의 수법이었다.

에바가 멋모르고 밖으로 나가려 하자, 호세가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 동시에 수많은 흉기가 호세로 향했다.

“죽여라!”

“죽어라!”

“여자는 손대지 마라!”

에바는 가디날의 몫이었다.

호세가 만신창이가 되어, 바닥에 쓰러지면 에바는 깨달을 것이다. 누가 진짜 신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인지!

추풍낙엽.

호세는 아나콘다로 줄넘기하고, 악어를 징검다리로 삼던, 아마존 최강의 전사였다.

좁은 동굴 안에서 스무 명의 반군을 상대했던 때가 떠올랐다. 1 vs 20. 죽이지 않으면 죽었을 것이다.

추억을 떠올릴 만큼 가디날의 부하들은 형편없었다. 밖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아쿠타미 부대가 들어왔을 때에는 가디날이 무릎을 꿇고 우는 목소리로 목숨을 구걸했다.

“살려줘! 나는 치료가 필요해! 나는 환자야! 머리가 아파!”

*

카이는 임모디피아를 떠나기 전에 몇 가지 정리할 것이 있다고 했다.

그와 함께 임모디피아에 들어간 에바는 보았다.

가디날의 광기가 만들어낸 - 시체공장.

임모디피아의 환경이 나쁜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정도로 나쁠 이유는 없었다.

임모디피아 사람들은 어째서 가디날에게 휘둘린 것일까?

“신과 통하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깐요.”

카이는 담담하게 말했다.

배운 것이 없는 임모디피아 사람들에겐 제대로 판단할 기준이 없었다.

에바는 시체 공장을 보고 분노했다. 이런 것이 버젓이 굴러가고, 당연한 세상이라니!

그녀는 가디날의 뺨을 후려쳤다.

임모디피아 사람들이 구경꾼처럼 몰려들었다.

“그만! 나는 치료가 필요해! 때리지 마! 치료가 필요하다고!!!!”

가디날은 겁에 질린 개처럼, 깽깽거렸다. 신의 목소리가 옳았다. 저년을 죽였어야 했다.

“이게 나의 처방이다! 이 조잢것아!”

에바는 노가다 3호의 권총을 빼앗아, 가디날의 이마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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