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 준-34화 (33/141)

< 요빅-9 >

어둠의 성자 - 프란츠는 상대가 가진 죄의식과 죄책감이 보였다. 잿빛 실루엣.

그는 준의 죄의식과 죄책감을 찾으려 했다.

없다!

그는 눈을 깜빡거렸다. 죄책감이 없으면, 수치심이라도 찾고 싶었다. 수치심은 시체처럼 창백한 실루엣으로 보인다.

없다!!

‘오늘 내 컨디션이 좋지 않나? 왜 안 보이지?’

죄의식은 타고난 본능이다. 그것은 그림자와 같다. 빛의 끝, 생명의 종착지, 죽음을 깨닫는 순간 밀려드는 파도다. 인간은 그 거친 파도에서 살아남으려 신을 창조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준에겐 죄의식 따위는 없었다.

‘순수하다!’

어처구니없는 결론에 도달한 프란츠는 침을 삼켰다. 준은 최소한 열두 명을 죽이거나 다치게 했다.

포스마일 암살단과 요새 습격.

그런 준이 순수하다니!

난처했다. 적당히 고민을 들어주면서 어른 노릇을 하려 했는데 ···.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프란츠는 경쾌한 리듬으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처음부터 그의 목적은 준과 한팀이 되는 것이었다. 세이턴을 리무진에 가둔 것도 그의 ‘능력’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범죄 세계는 그 어느 곳보다 능력 위주 시스템이었다. 능력자가 모든 것을 가진다. 조직, 돈, 명예, 그리고 파트너까지.

프란츠는 세이턴을 통해서 말하고 싶었다.

‘나는 너의 친구가 될 자격이 있다!’

프란츠가 갑자기 손을 내밀자, 디아나와 토그는 바짝 긴장했다. 그들은 신호를 기다리는 사냥개처럼 프란츠를 노려보았다.

그들 머릿속에서 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대지 마.’

너무나 선명한 메시지였다. 디아나와 토그는 준을 쳐다보았다. 준은 무표정하고 시크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입은 열지 않았다.

뇌파 통신 - 고도로 활성화된 뉴런의 저주파 신호. 주위 사람에게 들키지 않고, 일대일 대화가 가능하다.

디아나와 토그는 조용히 물러나서,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프란츠는 내민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손을 잡아라. 그러면 이 리무진과 세이턴을 선물로 주마. 그리고 나의 우정까지 얻을 것이다.”

프란츠의 미소는, 물 위에 뜬 기름처럼, 번들거렸다. 리무진 안에서는 세이턴이 거칠게 날뛰었다.

의자를 물어뜯던 세이턴이 움찔했다. 세이턴의 머릿속에서 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똥개. 티 내지 마.’

분명 준의 목소리였다. 이 세상에서 세이턴을 똥개라고 부를 수 있는 자는 오직 준뿐이었다. 세이턴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그 자리에 얌전히 궁둥이를 붙였다.

준은 프란츠가 내민 손과 느끼한 얼굴을 보며, 프란츠의 생각을 그대로 읽었다. 프란츠의 반지가 흥미로웠다.

모세의 길잡이. 그것은 준이 처음 보는 ‘심판의 도구’였다. 프란츠는 선물과 우정을 들먹거렸지만 ···. 그냥 항복하러 온 것이다.

프란츠가 말했다.

“로베르는 내가 처리했다. 앞으로도 너를 귀찮게 하는 녀석들은 내가 손봐주겠다.”

“네가 제일 귀찮아.”

“아!”

프란츠는 손을 내리고 몸을 낮추며 비켜섰다. 머리가 절로 낮아졌다.

그는 도서관 쪽으로 멀어져가는 준을 보며, 넥타이를 헐겁게 풀었다.

‘굉장한 놈이다.’

범죄자 수만 명의 고해성사를 듣고 수천 명을 상대했지만, 준과 같은 압도적인 존재감은 처음이었다. 하느님을 만났을 때의 임펙트와 맞먹었다. 까닭 없이 작은 감동이 밀려왔다.

리무진 운전사가 말했다.

“보스. 하얀 악마는 어떻게 할까요?”

*

로켈은 ‘블랙블러드’의 직원이었다.

블랙블러드는 석유 이권에 개입하는 전쟁 주식회사였다. 석유는 새로운 질서를 요구했고, 분쟁은 그치지 않았다.

블랙블러드는 분쟁지역을 빠르게 정리했다.

로켈은 블랙블러드가 이 세상에 꼭 필요하다고 믿었다. 석유가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었다.

악랄하고 잔인한 솔루션을 수행할 때도 있었지만, 세상은 본래 그런 것이라 여겼다.

로켈에게 블랙블러드는 진리였다.

그 진리가 파산했을 때, 로켈은 산사태로 굴러떨어지는 바위에 얼굴을 맞은 것 같았다.

블랙블러드의 파산은 석유 가치가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석유의 40%가 사용되던 내연기관 자동차를 전기자동차가 대신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상용화된 ···. 자기장냉각 장치.

자기장 열교환 효과를 이용한, 냉장고와 에어컨은 예전 촉매 방식 전력의 20%로 같은 효과를 냈고, 더 조용했다.

이제 가정집에서도 풍력발전기와 태양패널로 냉장고와 에어컨을 돌린다.

로켈은, 석유 사용량이 극적으로 줄어든, 평화로운 세상을 목격했다.

그 평화는 20년 일찍 올 수도 있었다.

석유패권을 쥔 기업들이 전동장치와 자기장 냉각 연구를 방해했기 때문에 늦어진 것이었다.

시온은 전기차와 자기장 냉각과 관련된 씨앗과 새싹을 보호했지만, 석유패권 기업들이 한 수 위였다.

그들에겐 블랙블러드가 있었고, 블랙블러드는 로켈에게 일을 맡겼다.

로켈은 뒤늦게 자신이 시온의 씨앗과 새싹을 짓밟았음을 깨달았다.

시온이 그를 스카우트할 때, 그는 모든 조건을 받아들였다.

시체들의 숲.

수사관들은 시체 상태와 실종자 자료를 비교했다.

킹스덤 대학이 있는 오렌지 시티는 유동인구가 많다.

하루에서 수십 명의 실종 신고가 접수된다. 이 중 99.6%는 이틀 이내에 자동 해결되지만, 0.4%는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았다.

“먹고 살기도 힘든 세상인데, 왜 사람을 죽이고 지랄이야.”

카리 형사는 넘치는 서류 더미를 보고 짜증을 냈다. 범인을 잡으려면 사망자 신원 확인이 필요했다.

“참고하세요.”

로켈이 얄팍한 서류철을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저도 잘 모르는데 ···. 이벤트 함수로 지형지리 데이터를 분석한 내용이랍니다. 용의자가 있는 곳이 나와 있죠.”

“어떻게 이런 ···.”

“굿데이니깐.”

로켈은 밝게 웃었다. 속이 다 시원했다.

시온 그림자 기사단 규칙에 따르면, 씨앗과 새싹을 보호하는 일 외에는 나설 수 없다. 그러나 이번 일은 굿데이의 직원으로 한 것이다.

로켈은 그림자 기사로 일하면서, 자신이 범죄를 저지르기보다 범죄를 막거나 잡는 타입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방패 타입의 프로페셔널.

처음 시체를 찾아냈을 때, 그는 연쇄살인범을 직접 응징하려 했다. 그러나 준은 경찰에 넘기도록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시체 네가 다 치울래?”

준은 청소부와 경찰을 동일시했다. 로켈이 판단하건대, 어마 무시한 통찰력이었다.

범인은 30분 만에 검거됐다. 지하실에는 여자 한 명이 갇혀 있었다.

*

귀싸대기와 욕을 한 바가지 먹은 리처드.

그가 에바에게 받은 암호명은 ···. 짐꾼 1호.

에바는 노가다 1호부터 8호까지 거느리고 화려하게 페루를 밟았다.

굿데이는 땅거지가 아니다. 채굴권에도 관심 없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준과 에바뿐.

호세와 리처드 심지어 누네즈까지 뭔가를 기대했다. 에바는 이들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럴 의무가 없다. 그리고 ···.

그녀의 경험으로 보면, 진드기는 진드기의 착각 속에서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그녀는 한없이 밝게 웃는 누네즈와 관련자들을 보며, 생각했다.

‘행복해라. 이것들아.’

그러나 선 긋기는 필요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세요. 굿데이는 자선 단체가 아니에요!”

“그럼요! 그럼요! 알고 말고요!”

누네즈는 다 안다면서도, 잔뜩 기대하는 눈치였다.

‘아! 진드기!’

에바는 욕설본능을 억누르며 그녀가 할 일을 했다.

굿데이는 샤나이슈카, 아쿠타미 부대, 리처드, 카멧 납치로 이어지는 사건으로 ‘비용’이 발생했다.

준은 예방접종으로 쿨하게 넘어갔지만, 에바는 그럴 수 없었다.

비용환수 - 그녀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녀는 마치 채굴권에 입찰할 것처럼 행동했다.

리마 호텔 카페에서 키노시타가 에바를 기다렸다. 에바가 도착하기 5분 전 노가다 3호와 4호가 카페 안을 살폈다.

에바가 들어서자, 키노시타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직접 그녀의 의자를 빼주었다.

“만나주셔서 영광입니다.”

“시간이 없어요. 용건만 간단히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키노시타는 3천만 달러를 카리브 계좌에 넣겠다고 제안했다. 이 정도 제안이라면 누구나 흔들린다.

키노시타가 원하는 것은 입찰 포기가 아니라, 입찰 금액을 살짝 알려주는 것뿐이었다.

3천만 달러 ···. 비용환수로 충분했다.

에바는 속으로 생각했다.

‘비용환수는 끝났고 ···.’

그녀는 비용환수를 넘어, ‘기회비용 창출’ 단계로 넘어갔다. 돈 뜯는 기회는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었다.

“굿데이가 입찰에 참여하면, 다른 기업들도 뭔가 있다고 느끼고 달라붙겠죠. 그 점은 생각해 보셨나요?”

“각오하고 있습니다만 ···.” 키노시타는 에바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피를 탐하는 뱀파이어처럼 탐욕스러웠다. “ ···. 입찰 포기 조건이라면, 5천만 달러를 더 드리겠습니다.”

에바는 일부러 창밖 너머의 성당을 바라보았다. 금으로 도금된 라미니아 성당은 햇빛을 받아 오랜지 빛으로 반짝였다.

성당 옆 아툰파 식당은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감자튀김을 판다.

“2천 더.”

키노시타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쳤다.

에바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 기회비용 창출 성공! 감자튀김 사 먹어야지!

룸으로 돌아온 그녀는 식사도 하지 않고, 슬픔에 잠긴 모습으로 일주일을 보냈다. 본래 다이어트 기간이기도 했지만, 시련 당한 여인의 모습을 연출한 이유는 ···.

“처음부터 무리한 부탁인 줄 알았어요. 그래도 애써줘서 정말 고마워요.”

누네즈가 에바를 위로했다. 호세와 리처드는 찡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에바는 양껏 먹은 감자튀김의 힘으로 사흘을 굶었다.

가련한 에바를 본 사람들은 한목소리로 합창했다.

“샤나이슈카는 잊으세요! 건강을 챙기셔야죠! 당신과 굿데이는 할 만큼 했어요!”

에바는 돈은 돈대로 챙기고, 인심까지 얻었다. 그리고 다이어트까지 성공!

트리탄과 미다스 그룹은 채굴권을 따냈다. 본래 그렇게 될 일이었다.

*

준은 학술 데이터에 접속했다.

몇 달 전, 그는 입자가속기로 고분자 화합물의 분자 구조를 바꾸는 방법을 올렸다.

제목은 ‘입자 가속기 단위의 소화과정’이었다.

조건은 간단했다. 섭씨 35도, 1기압, 45 기가테슬라, 960rpm, 기초물질 탄소복합체.

최선을 다해 쉽게 풀어썼다. 공정설계보다 풀이과정을 설명하는데 더 많은 수고를 들였다.

‘이 정도면 누구나 이해하겠지.’

준은 확신했다.

푸리에 구조방정식이 맛보기 정도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의견란에는 한 줄의 논평도 실리지 않았었다.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푸리에 구조 방정식을 사용하면, 일단은 농담이나 장난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제목이 안티네. 입자가속기 단위의 소화과정이라니! 내용을 보니, 그냥 입자농축이네. 3기가 플라즈마 사이클론으로 해보니, 되긴 되네. 님 좀 짱인 듯. 얼른 특허 신청하삼.’

반가운 한 줄 논평. 그리고 논평한 사람은 실제로 3기가 플라즈마로 분자구조를 바꿨다. 고분자 스틸렌을 파라핀으로 바꾼 것이었다.

*

임모디피아 - 쓰레기의 마을.

임모디피아의 아이들은 쓰레기 매립장에서 일하며 논다. ‘발가락’으로 불리는 매립지는 100만 달러가 든 돈 가방을 주웠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었다.

카이는 다른 매립지보다 발가락을 좋아했다.

멕시코 국립 공과대학의 쓰레기들이 이곳에 버려졌고, 덕분에 실험 도구가 많았다. 돈이 되는 건 아니지만, 좋은 장난감이었다.

카이는 화학약품으로 전자제품에서 금을 뽑아내는 방법을 찾아냈다. 덕분에 사는 게 편해졌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임모디피아의 갱들이 엄청난 전자제품을 쏟아내면서, 카이에게 일을 시켰다.

카이는 어리지만 영리했다. 혼자 모든 일을 다 하지 않고, 작업반을 만들었다. 많은 사람이 달라붙어서 쥐똥만 한 금덩이를 추출해냈다.

카이는 매립장의 고철을 고치고 다듬어서, 금 추출 과정을 자동 시스템으로 바꿔버렸다.

골든 보이 - 카이의 별명이었다.

카이는 학교 다니고 싶었지만, 갱의 보스 가디날은 허락하지 않았다.

“임모디피아의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는다. 이곳이 너의 집이고 무덤이다.”

임모디피아에서 가디날의 말은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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