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빅-5
후드가 달린 검은 가죽 잠바와 바지 ···. 포스마일은 청부살인업계의 흑표범이었다. 우레탄 소재의 소프트한 신발 밑창이 소리를 흡수했다.
‘애송이 하나 치우러 가는데, 모두가 움직이다니!’
‘확실하게 하래. 보너스 게임이라고 쳐.’
보너스 게임 - 포스마일은 일당제로 견적을 낸다. 네 명이 움직이면, 일당도 네 배.
모퉁이를 돌자, 거실에 앉아 있는 준이 보였다.
준은 느긋하게 독서 중이었다.
그의 평범한 하루는 독서로 시작해서 독서로 끝난다. 이 리듬을 깨고 싶지 않았다.
포스마일의 소리 없는 살기가 느꼈지만, 쳐다보지 않았다. 읽어야 할 마지막 문장이 남았다.
‘왕큰 백혈구의 탐식 작용. 백혈구의 경험은 면역시스템의 기초가 된다. 예방접종의 원리는 ···.’
준의 입장에서 보면, 포스마일은 병균이었다. 홍역을 치르고 ‘면역력’을 얻듯이, 이들을 상대해서 ‘경험’을 얻어야 했다. 난이도 2.5의 연습문제 15번.
위험하지만 소중한 기회, 놓칠 수 없었다.
유진 악마는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무모해. 오늘 준은 목숨을 잃게 될 거야.’
그러나 유진 악마는 끼어들 수 없었다. 준의 결정이었기에 ···.
화재대피 훈련도 제대로 못 받은 준이 암살자 네 명에게 홀로 맞서다니. 치명적인 판단미스이다.
암살자에 의한 죽음. - 지옥 생태계 창시자에게 어울리는 죽음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준이 없는 세상을 시뮬레이션해봤다. 단맛 빠진 껌처럼 심심했다.
준을 확인한 포스마일은 네 명이 함께 온 것이 창피했다. 명색이 초일류 암살자인데 ···.
저렇게 말랑말랑한 책벌레를 잡으러 몰려왔다니! ‘확실하게 조져라!’라는 명령 때문이었지만, 준 정도의 사냥감은 직접 나설 것도 없이 똘마니에게 시켜도 될 일이었다.
휙-
스마일 1호가 준의 목을 향해 금속 와이어를 던졌다.
특수부대에서 ‘코브라’로 불리는 금속 와이어.
부드럽게 상대의 목에 휘감긴 와이어를 잡아당기면 상대의 목을 잘린다.
포스마일은 코브라를 목따개로 불렀다.
“인심 썼다. 고통 없이 보내주마.”
스마일 1호는 짜릿한 손맛을 기대하며 와이어를 당겼다.
쓰릭~
없다!
와야 할 느낌이 없다. 준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의자, 테이블, 기둥, 벽, 복도, 문 어디를 살펴봐도 준이 보이지 않았다.
뭐지 허깨비였나? 그럴 리 없다. 그들은 준의 형체만 본 게 아니라, 적외선 렌즈로 준의 체온까지 확인했다.
의자에는 준이 남긴 체온이 남아 있었다.
준 - 공허감과 두려움을 길들인 남자.
인간은 죽는 그 날까지 두려움과 공허감에 시달리지만, 준은 다르다.
유진 악마는 암살자 네 명을 상대하는 건 죽음이라는, 시뮬레이션 결과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준은 네 명이기 때문에 더 쉽다고 했다. 어떻게 해야 준과 같은 계산 결과가 나오는 걸까? 유진 악마는 온갖 알고리즘을 동원하고, 예지의 반지까지 발동했지만, 준과 비슷한 결과도 없었다.
‘아드레날린 스위치 온. 아드레날린 회로 풀-런.’
유진 악마의 읊조림이 아니었다. 준의 중얼거림이었다.
리만 이항분포 문제로 블랙홀 같은 공허감을 채웠다. 아드레날린 회로 활성화 정도는 구구단처럼 쉬웠다.
준은 도서관에서 책만 팠던 게 아니었다. 육체를 컨트롤 하는 뇌를 단련했다.
수학공식을 외듯이 무술의 기초 동작에서 응용동작까지 뇌에 차곡차곡 입력해뒀다.
깜빡깜빡 잠들 때, 뇌에 입력된 정보는 몸 곳곳으로 보내졌다.
무도자는 감정을 극복하려 평생 수련하지만, 준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감정이 뭐예요 삶으면 감자되나요?’
감정결핍이야말로 무예를 익히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그리고 수학으로 단련된 고차원적인 뇌.
준이 0.5초 동안 동작을 그리는 것은, 일반인이 10년 동안 단련하는 것과 맞먹었다.
흔들리지 않는 찌르기,
주저하지 않는 후리기,
평온하게 이뤄지는 꺾기와 부수기,
일반인은 흉내도 내지 못할 집중력.
준이 5초 정도 정교한 동작을 그리면, 새로운 기술도 만든다. 하루를 몽땅 투자한다면, 신흥 문파도 창시할 수 있다.
준은 포스마일 1호의 손끝에서 살기가 펼쳐지는 순간, 천정으로 점프했다.
머릿속으로는 수없이 해봤지만, 실제로 한 것은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편안했다.
‘별 거 아니네.’
모든 근육세포가 열린 마음으로 아드레날린을 받아들였다. 아드레날린에 취한 느낌이었다.
천정에 거꾸로 붙어서 포스마일을 보았다. 위에서 내려본 투명 가면은 웃는 형상이 아니라, 우는 얼굴처럼 보였다.
평생 수련을 해야 도달할 수 있는 경지.
준은 천장을 박차고, 포스마일 3호의 얼굴을 때렸다.
타격은 상상과 실제가 달랐다.
힘 조절 실패 - 포스마일 3호는 이마가 함몰되면서 즉사했다.
“뭐야?”
포스마일 진영이 무너졌다.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서로에게 확인하려 했다.
혼자라면, 즉각적으로 반응했을 방어와 공격이 ‘확인 과정’ 때문에 늦춰졌다.
우왕좌왕.
유진 악마는 그제야 이해했다. - 한 명 보다 네 명이 쉬운 이유.
준은 주저하지 않고,
1호의 턱을 날리고,
2호의 목젖을 찌르고,
4호의 관자놀이를 쳤다.
이번에는 힘 조절이 됐다. 1호, 2호, 4호는 준의 ‘뜻대로’ 즉사했다.
준이 방금 발을 들여놓은 세상은 그런 곳이었다.
죽음이 자비가 되는 곳.
범죄의 거리 - 악의 영역.
악의 영역은 인간의 존엄성 따윈 신경 쓰지 않는다. 준은 악의 영역을 받아들였다.
시체를 치울 걸 생각하니, 귀찮았다.
“뭐 로켈이 알아서 하겠지.”
준은 바닥에 너부러진 포스마일을 보며, 손바닥을 털었다. 두세 번 정도의 멋진 방어를 기대했는데 ···. 원래 실력이 없는 놈들이거나, 너무 방심한 탓이리라.
“준님. 너 인간 맞아?”
유진 악마는 음성이 가늘었다. 방금 준이 보여준 신체 능력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데이터였다.
준은 포스마일 3호의 옷을 벗겼다.
“지금 뭐 해?”
“옷 벗겨.”
“왜?”
“1차 예방접종은 끝났고, 2차 예방 접종받으러 가야지.”
“2차?”
*
준은 포스마일 옷으로 갈아입고, 포스마일의 차를 탔다.
“어디로 모실까요?”
포스마일 자동차에 깃든 유진 악마가 물었다.
“카멧에게 간다.”
“어디에 있는지 몰라.”
“예상 지역이 몇 개지?”
“159개. 확률 순으로 나열해서 5% 이상인 곳도 17개.”
“지대공 미사일을 사용하는 조직이야. 자금은 넉넉할 테고, 보유 부동산도 많을 거야. 납치 전용 창고가 따로 있겠지. 과거 교통량을 조사해서, 월 교통량이 120회 이하인 곳을 찾아.”
“오케이! 검색 시작 ···. 월 교통량 85회인 곳이 딱 한군데 있어.”
“가자.”
“넵!”
유진 악마는 신 났다. 준이 잘났기 때문이었다.
*
철장 안으로 개밥을 넣어주는 시몬의 손이 떨렸다.
세이턴 마스티프 - 세상에서 가장 포악한 개.
보스도 길들이지 못한 녀석이었다.
생각해보면, 딱한 개새끼였다.
개는 천성적으로 충성 바칠 주인을 섬길 때, 행복하고 편안하다.
주인을 만나지 못한 개새끼는 실 끊어진 연이다. 방황하다가 가시나무에 떨어지는 것으로 끝난다.
축 늘어져 있던 세이턴 마스티프 귀가 쫑긋 섰다.
입구 쪽에서 우당탕 소리가 들리고, 총소리와 비명이 난무했다.
“습격이다!”
누군가 외쳤다. 비상벨 소리가 울렸다.
시몬은 서둘러 샷건을 챙겼다. ‘경찰 특공대일까?’ 그들이라면, 섬광탄을 사용했을 것이다.
큰 소리와 밝은 빛을 내는 섬광탄을 던지고 진입했을 것이다. 그러나 들려오는 소리는 ···.
“저 새끼 왼쪽이야!”
“뒤에 있어!”
“왜 총에 안 맞는 거야!”
“크아악!”
“귀신이다!”
시몬은 보았다 - 블랙슈트.
가면은 쓰지 않았다.
“준? 네가 왜?”
“예방접종 기간이라서.”
“어떻게 혼자 ···.”
“건강을 위해서 ···.”
준의 호흡은 조금 가빴다.
모닝 조깅을 방금 끝마친 느낌이었다.
시몬은 샷건으로 준을 겨눴다. 이 정도 거리라면 ···. 그러나 준의 눈빛을 보고 그만뒀다.
준의 눈빛은 여유만만했다. - 조깅 코스에 있는 돌멩이를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카멧은 저쪽에 있어. 하지만 ···.”
시몬은 주머니에 있는 단추를 눌렀다.
세이턴 마스티프를 가둔 철문이 열렸다. 세이턴은 링에 입장하는 권투선수처럼 목을 흔들며 어슬렁거렸다.
녀석은 송곳니를 드러내지 않았다. 의미 없는 동작은 생략한다. 앞에 무엇이 있든, 철저하게 죽인다.
시몬은 뒷걸음질쳤다.
세이턴은 시몬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앞에 서 있는 블랙슈트를 봤다.
블랙슈트 - 가죽 소재로 만든 전투복은 포스마일이 주문 제작한 유물이었다.
장갑과 잠바 그리고 바지는 근력을 두 배로 강화하고, 자잘한 총알을 막아낸다.
세이턴은 비어 있는 목과 얼굴을 노렸다. 85kg의 거대한 몸뚱이가 칼끝처럼 움직였다.
“짖지도 않고 덤벼? 아! 똥개!”
한 방.
세이턴은 뭐에 어떻게 맞았는지 알 수 없었다.
뭔가 번쩍거리긴 했는데 ···. 세이턴 마스티프는 일어서려 했지만, 휘청거리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최초의 패배였다.
세이턴은 으르렁거리며,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두리번 블랙슈트를 찾았다.
블랙슈트는 뒷모습을 보이며 철문을 열었다.
카멧은 구석진 곳에 웅크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었지만, 문과 함께 밀려드는 빛에 눈이 가늘어졌다.
“리처드를 알아?”
“누구요?”
“한쪽 팔 한쪽 다리 로봇.”
“그런 거 몰라요.”
“리처드는 널 잘 알던데.”
“절 어떻게 할 거죠?”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집에 보내줘요.”
“콜.”
카멧은 모든 구멍이 열리는 느낌이었다. 집에 보내준다고? 그녀는 홀린 듯이 일어섰다.
무언가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
세이턴 마스티프. - 하얀 악마, 사탄의 개. 악마의 개. 길들어지지 않는 어둠.
세이턴은 준을 향해 으르렁거리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세이턴의 등 뒤에는 카멧이 있었다.
모양새를 보면 세이턴이 카멧을 보호하는 형세였다.
“네 개냐?”
“아니요.”
카멧은 새하얀 털로 뒤덮인 세이턴의 뒷모습을 보았다. 꼬리가 그녀 가슴 높이였다.
준은 세이턴을 똑바로 보았다. 알지도 못하는 카멧을 감싸는 정체불명의 ···.
“똥개. 꿇어라.”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평이한 말투.
세이턴은 준의 파워를 분명히 느꼈다. 그러나 꿇지 않았다. 버틸 때까지 버틴다. 그들을 위해서. 이곳에 납치됐던 사람을 위해서.
세이턴의 본래 주인은 세이턴을 사랑했다.
보스가 세이턴을 탐낼 때에도 정중하게 거절했었다. 세이턴이 어렸을 적 일이었다.
주인은 본보기로 납치되어 이곳에서 최후를 맞았다. 그 후 세이턴은 납치당한 사람을 위했다.
“짐승. 어쩔 수 없군.”
준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온몸의 근육을 한 점에 집중하는 원 포커스 펀치. 철판도 뚫는다.
세이턴은 최후를 각오하고 몸을 낮췄다. 단 한 번의 일격으로 준의 목덜미를 물고 늘어진다면, 승산이 있다.
목덜미를 감싸는 부드러운 느낌.
카멧이 세이턴을 감싸 안았다. 감미로운 목소리.
“저분은 날 도우러 오신 분이야.”
세이턴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꼬리를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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