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 준-29화 (28/141)

요빅-4

인질 구조 ···. 리처드의 일행이 오렌지 시티에 왔다면, 장소만 알려주고 끝날 일이었다.

재밌는 구경거리고, 멋진 취잿거리였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

“내가 구해야 하나?”

카멧에게 미안했지만, 준은 귀찮았다.

상대는 미사일로 비행기를 격추하는, 고도로 조직화 된 범죄집단이다.

이들은 자본주의가 정해놓은 머니게임 룰을 따르지 않는다.

흑마법을 사용하듯 테러와 납치 따위를 해댄다. 기분전환 삼아 상대할 레벨이 아니었다.

준은 그들이 무섭진 않았다. 놈들은 원래 그런 분들이다. 다만, 어떻게 다뤄야 할지 난감했다.

원숭이라면 바나나로 어떻게 해보겠는데 ···.

접수된 납치 사건마다 일일이 나설 수는 없다. 중요도로 평가해봐도, 관련 없는 납치 사건은 뉴스나 신문을 통해서 만나는 게 편하다.

준은 포지션을 정했다. - 철저한 관찰자가 되기로 했다. 그것은 굿데이의 기본이기도 했다.

현혹되지 말고,

나대지 말고,

지켜보아라.

삶은 외줄타기다. 한쪽으로 치우치는 순간, 균형을 잃고 나락으로 떨어진다.

굿데이가 세상에 나설 때에는 ‘외줄’을 대신할 ‘징검다리’를 만들 때였다.

새로운 기후예측 모형이 그랬고, 유진 악마의 돈놀이가 그랬다.

굿데이와 준이 추구하는 것은 ‘버전 업된 새로움’이었다. 구닥다리 진흙탕 싸움은 흥미 없었다.

진흙탕 - 학교에서도 부조리한 것을 자주 보고 겪었다. 그때 깨달은 것은, 일단은 ···.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받아들이지 않고, 일일이 흥분하고 반응했다면, 수학에 눈뜰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범죄는 엄연한 현실.

준은 그 현실을 받아들였다.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분신자살과 다르지 않다.

카멧이 좋은 예였다. 그녀가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적응 실패.

“탐색적 메타 분석 시행···. 카멧이 있는 곳을 찾고 있습니다 ···. 스크린 탐색 실패 ···. 분할분석 실패 ···. 경로 분석 실패 ···. 오렌지 시티를 빠져나갔을 확률이 있습니다. 범위를 넓혀서 다시 검색할까요?”

유진 악마는 자리를 안내하는 스튜어디스처럼 말했다.

“유진-.”

고삐를 당기는, 브레이크를 거는 말투.

“대기하고 있습니다. 말씀해주십시오.”

그녀는 방긋방긋 웃었다. 준이 무슨 말을 할지 기대되었다.

“뻐꾸기 왕관을 벗어라.”

“아! 아셨군요.”

그녀는 혀를 반쯤 내밀었다. ‘뻐꾸기 왕관’은 지옥 생태계 아이템으로 상대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알려준다.

거짓말은 안 하지만, 맥락과 내용을 적당히 후려치는 기술이었다.

유진은 준이 카멧에 흥미가 없는 것을 느끼고, 카멧의 위치를 ‘분석 실패’로 표현했다. 준이 편안하게 포기할 수 있도록.

준이 카멧에게 흥미를 느꼈다면, ‘분석 실패’ 대신 ‘근삿값 도출’이라는 표현을 썼을 것이다.

“내 생각 읽는군.”

“네. 준님은 철저한 관찰자를 선택하셨습니다.”

“이제 뭘 해야 할지 알겠지?”

“비행기 폭파에 사용된 미사일 루치페로 구입경로를 추적할까요?”

“아니.”

“납치 방지 보안 시스템을 개발할까요?”

“아니.”

“수집된 정보를 경찰에 넘길까요?”

“아니.”

“사건 관련자들을 주의관찰 할까요?”

“아니.”

“그럼 ···. 뭘 해야 하죠?”

유진은 팔짱을 꼈다.

준이 무엇을 하려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유진 악마의 연산능력은 DNA 컴퓨터를 메모장처럼 사용하는 1.5 솔라급이었다.

인류의 뇌를 모두 연결해도, 1.0 솔라를 넘지 못한다. 고작 한 사람의 생각을 읽지 못하다니! 유진은 작은 좌절을 맛봐야 했지만, 준이라서 맛있었다.

그녀는 예상되는 수천 개의 리스트를 만들었지만, 예상을 벗어났다.

“전쟁을 시작한다.”

“너무 적극적인 거 아니세요? 철저한 관찰자 시점은 어디로 간 거죠?”

유진 악마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팔짱을 더 단단하게 꼈다.

“비행기 폭파에는 여러 방법이 있어.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방법이 미사일이야. 최악의 선택이지. 놈들이 최악을 선택해야 했던 이유가 있어.”

그 이유는 - 철저한 관찰자 시점으로 봐야만 보인다.

리처드와 함께 있던 인물들은 특수작전 전문가였다. 범인들은 그 전문가가 누군지도 모르고, 어느 비행기를 탈지도 몰랐다.

리처드와 일행들은 비밀을 유지했다. 그런데도 격추당했다는 것은 ···.

“카멧 이미지 파일에 꼬리표가 있다. 리처드가 나에게 전화로 이미지 파일을 전송할 때, 위치가 드러났어.”

무모할 정도로 과감한 추리.

유진 악마는 곧바로 확인에 들어갔다.

“잠시만요! 이미지 파일 분석 ···. 태그 디택팅 실패 ···. 초정밀 분석 재시도 ···. 꼬리표 발견.”

준의 예상이 맞았다.

꼬리표는 어두운 배경 픽셀로 숨어 있었다. 너무 정교해서, 정밀 서치로도 찾을 수 없었다.

“범인들은 내 위치도 알아.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지.”

*

킹스덤 천체 관측소 - 골프공.

로켈은 느낌을 따라왔다.

이상하게도 그의 느낌 끝에는 항상 죽음이 있다. 시체 썩는 냄새는 흙 곰팡내에 덮여 있었다.

‘이쪽 기슭에만 일곱 구야. 도대체 얼마나 쳐 죽인 거지?’

머리가 아팠다.

그림자 기사단은 임무 이외 사건에 관여하지 않는다.

살인사건을 목격해도, 연쇄살인범의 정체를 알아도, 나서지 않는다.

‘선택받은 자’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인류 발전을 한 단계 끌어 올리는 인재들.

그들은 보통 사람 십만 명보다 중요하다.

시체는 교묘하게 은폐되어 있었다. 유진 악마가 적합한 업종으로 공동묘지를 꼽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죽음을 불러들이는 골짜기.

그림자 기사단의 규칙에 따르면, 지금 본 것을 잊어야 한다. 그가 나설 기회는, 이곳에 시체를 갖다버린 그 개자식이 준을 위협할 때뿐이었다.

‘하지만 ···.’

그는 그림자 기사이기도 했지만, 어엿한 굿데이의 직원이었다. 그리고 느낌을 따라온 이유도, 굿데이 회장의 지시에 따른 것뿐이다.

'느낌을 따라가라!'

준은 죽음의 골짜기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는 항상 놀라웠으니깐.

*

디아나는 간만에 극장에서 영화를 봤다. 그림자 기사의 임무는 씨앗과 새싹을 지키는 것이었지만, 모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림자 기사가 커버링하는 부분은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포인트였다.

준이 새로운 기후예측모형을 개발했을 때, 유럽왕실 기상청은 준을 스카우트하려 했다. 이건 좋은 징조였다. 위험신호가 아니다.

준이 파루시아로 돈을 벌고, 헬하운드 시즌에 투자금을 모으자, 실버 드래곤이 노여워했다. 이건 나쁜 징조였다. 분명한 위험신호였다.

그림자 기사단이 나서야 했고, 로켈 팀이 임무를 맡았다.

현재 준을 위협하는 세력은 없다. 킹스덤 재단은 굿데이에 온갖 특혜를 베풀었다. 길거리의 사람들도 준의 안전에 신경 쓰고, 지역 범죄조직도 준과 굿데이를 보호했다.

디아나가 휴가를 즐길 수 있는 타이밍이었다.

아쉬운 게 있다면, 함께 영화를 볼 친구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녀 옆에는 토그가 끊임없이 팝콘을 처먹었다.

여주인공과 남자가 만났을 때에도 팝콘을 처먹고,

여주인공과 남자가 헤어질 때에도 팝콘을 처먹었다.

끊임없는 먹는 토그도 놀라웠지만, 이 세상에 이렇게 많은 팝콘이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학창시절 때 배웠던 식량 위기는 다 헛소리처럼 느껴졌다.

여주인공과 남자가 다섯 번째로 키스할 때, 토그는 팝콘을 잠깐 쉬고, 콜라 한 잔을 단숨에 비웠다.

여주인공이 청순한 눈물을 흘릴 때, 토크는 거창한 트림을 했다.

주변 사람이 발가락을 오므릴 정도로 선명한 트림이었다.

디아나는 토그의 귀를 잡아당기며 영화관을 나왔다.

“미안. 참으려고 했는데 ···.”

토그는 유리병을 깬 아이처럼 시무룩했다.

“아니야. 영화가 재미없었어. 피자 먹으러 갈까?”

“오! 피자!”

시무룩했던 토그는 전등처럼 밝아졌다.

영화를 끝까지 보지 못했지만, 디아나는 행복했다.

그림자 기사단에 들어오기 전 그녀는 암살자였다. 가족의 따듯한 사랑 따위는 알지 못한다.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그림자 기사는 가족을 가질 수 없다.

선택받은 자들은 맘껏 재능을 뽐내고, 명예와 부 그리고 사랑스러운 가족을 가지지만, 그림자 기사는 그럴 수 없다. 예전에는 그림자 기사도 가족을 가졌다.

그것이 약점이 되었고, 보호해야 할 씨앗을 지키지 못했다. 결정적인 순간, 가족과 씨앗 중에서 가족을 택한 것이었다.

디아나는 어쩌면 가족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림자 기사로서는 불가능하지만, 굿데이 직원이라면 가능하다.

토그에게 양껏 피자를 먹이고, 그녀는 책방에 들렸다. 직장인 코너에서 가장 잘 팔리는 책을 샀다.

‘먹고, 노래하고, 사랑하라.’

*

보고를 받은 로베르의 입술에서 짧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지독한 악연이다!’

준이라니! 어떻게 준이 연결된 거지?

그는 머리를 싸잡았다.

실버 드래곤의 영향력과 인맥으로 페루의 고위 공무원과 정치가 심지어 대통령까지 구워삶았다.

완강하게 버틴 인물은 누네즈 장관뿐이었다. 아마존의 수호신으로 불리는 여자.

누네즈의 유일한 약점은 그녀의 딸 카멧.

로베르가 카멧을 손에 넣었을 때, 게임은 끝났다.

페루 정치계는 카멧을 살린다는 명분으로 채굴권을 허가하기로 했다. 채굴권을 결정하는 누네즈 장관은 침묵했다.

그녀는 실낱같은 희망, 아쿠타미 부대를 믿었다.

그녀의 남편이 납치됐을 때, 부패한 특수부대가 아닌 아쿠타미 부대가 나섰다면 남편을 구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그녀도 알았을 것이다. 그녀의 희망이 격추된 것을.

이제 오로토칸이 소유한 미다스 그룹은 채굴권을 얻을 테고, 리베아티 섬 금고는 가득 찰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준이라니!

“포스마일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의 부하가 나섰다.

정식대로 한다면, 리처드에게 연락받은 인물이 누구든 상관없이 지워야 한다. 준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순 없다.

“확실하게 조져라.”

“네.”

부하는 깍듯이 인사하고 물러났다.

*

새벽 네 시.

유진 악마는 접속 가능한 CCTV를 확보했다.

“한 블록 떨어진 곳에 검은 승합차 정차. 네 명의 남자가 내렸습니다. 영상 보시겠습니다.”

수정 구슬 같은 원형 스크린에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검은 가죽 바지와 잠바, 검은 장갑을 꼈다. 힘을 증강하는 ‘파이버 머슬’이 내장된 옷이었다.

메고 있는 배낭에 무기와 장비가 들어있었다. 그들은 투명 가면을 써서, 못생긴 코미디언처럼 보였다.

지금까지 위기의 순간 준을 구해낸 것은 놀라운 통찰력이었다.

실버 드래곤의 사냥개가 붙을 때에도, 트리탄이 쳐들어왔을 때에도, 통찰력 하나로 상황을 극복했다.

“경찰을 부를까요? 아니면 로켈에게 연락할까요?”

“혼자가 편해.”

“안전한 이동 경로를 보여드릴까요?”

유진 악마는 준이 걱정되었다. 중무장한 네 명의 킬러.

준에겐 승산이 없다. 달아나는 것이 정답이었다. 1.5 솔라 연산 결과가 그랬다.

*

애송이 하나를 잡는데 우리를 보내다니.

킬러들은 어이가 없었다. 토끼 한 마리를 잡는데, 탱크 부대가 동원된 꼴이었다.

‘포스마일’은 청부살인 업계에서도 확실한 옵션이었다. 그들은 작업할 때 쓰는 가면 - 투명하고 익살스러운 가면 때문에 포스마일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경호원으로 둘러싸인 요인 암살이 특기였다. 오늘처럼 경호원이 없는 타깃은 거저먹기였다.

킹스덤 블루 스트릿은 박물관처럼 조용했다. 잔디 위로 자동 분무기가 작동했다.

“확실하게 조지라는 주문이다.”

“머리를 잘라서 상자에 담아 올까요? 확실하게 -”

“그거 좋지.”

그들은 순찰차의 위치를 확인하고, 잔디밭을 돌아 뒷문을 열었다.

집마다 특유의 냄새가 있다. 샴푸, 비누, 화장품, 식사에 따라 그 집의 냄새가 달라진다.

준의 집에서는 오래된 책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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