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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 준-27화 (26/141)

요빅-2

그녀는 얇은 드레스를 입고 주방에서 요리를 만들었다. 드레스 밑으로 체리무늬 팬티와 브래지어가 비쳤다.

탄탄한 탄력이 느껴지는 아담한 몸매였고, 얼굴에는 갓 입학한 대학생의 순수함이 보였다. 그러나 준은 그녀가 학생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샤넬 K45 - ‘사이렌의 노래’로 불리는 향수.

사이렌의 노래 가격은 학생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고, 돈이 있다고 해서 구할 수 있는 물건도 아니었다.

얇은 드레스는 물 흐르듯이 몸에 착 달라붙었다.

엔젤 스킨 - 거미줄 같은 단백질 섬유로 섬세하게 짜낸 최고급 명품 원단이었다. 이 역시 학생이 즐겨 입을 만한 옷이 아니었다.

머리에는 큼지막한 리본이 달렸다.

준과 눈길이 마주친 그녀는 수줍게 웃었다.

“저는 그분께서 보낸 선물이에요.”

그녀 가슴이 도드라졌다. 한 치수 작은 사이즈의 브래지어를 한 것 같았다.

준은 그녀에게 어떻게 들어 왔는지, 따져 묻지 않았다. 로켈이 왜 막지 않았을까? 궁금하지도 않았다.

로켈은 저 여자가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녀 말대로 그녀는 선물이었다.

그녀가 말한 그분은 마음대로 보안장치를 해제하고 준의 허락 없이 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준은 그녀의 요리를 보았다. 간단한 샐러드였다. 재료는 서브 제로 냉장고에서 꺼낸 것이 아니라, 미리 가져온 것들이었다.

밖은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녀는 순종적인 미소로 준의 손길을 기다렸다.

손길은 닿지 않았다.

준은 로쉐 보보아 테이블에 노트를 펼치고 일을 시작했다.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이 상황에서 그것이 최선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나 지금 무시당한 거야?’

순종적인 미소가 의혹으로 변했다. 준은 그녀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그녀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준을 보았다.

혹시 불구? 아니면 변태?

불구였다면 행동에서 드러났을 것이다.

변태였다면 눈빛에서 읽혔을 것이다.

준은 불구도 아니고 변태도 아니었다.

그러면 ···. 참는 건가?

가끔 그런 남자가 있다. 깨끗한 척, 의로운 척, 참을 때까지 참다가, 짐승으로 변하는 ···.

‘가엾은 것. 더 자극해주길 바라는 거니? 욕심꾸러기!’

그녀는 준 옆에 앉았다. 정신을 어지럽히는 향기가 짙어졌다.

“저 좀 봐주세요. 선물이 외로와요.”

“메타암페타민 용량을 줄여.”

준은 노트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저는 중독자가 아니에요. 의사 처방을 받고 사용해요.”

“의사를 바꿔.”

섬뜩할 정도로 정확한 조언이었다. 그녀는 최면에서 깨어난 것처럼 준을 다시 봤다.

그녀는 고급 콜걸이었고, 하루 몸값이 아이비리그 대학원 등록금보다 비쌌다.

그녀는 신체 조건만 좋은 게 아니었고, 남자를 깊숙이 이해했다. 그들의 판타지, 본능, 욕구, 좌절, 절망, 기쁨 ···. 남자에 관한 백과사전을 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에겐 자부심이 있었다. ‘이 세상에서 이걸 나보다 잘하는 여자는 없어.’

그녀가 가진 선택의 폭은 넓었다. 영화배우, 모델, 아나운서도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선물’이 되어 남자를 직접 만나는 게 좋았다. 직접 만나야 더 강력한 영향력이 발휘된다.

그녀를 만났던 남자들은 그녀를 여신으로 섬겼다. 그녀는 남자에게 순종했지만, 남자를 지배했다.

수많은 스타일의 남자를 상대했지만, 준과 같은 스타일은 처음이었다. 그녀에겐 보기 드문 연구대상이었다.

혹시 나를 알고 있나?

“전에 우리가 만난 적이 있나요?”

“아니.”

“그런데 제가 먹는 약을 어떻게 알죠?”

“그냥 알아.”

“또 뭘 알고 있죠?”

“선물이라고 말했지만, 남자를 직접 선택하지.”

그랬다.

그녀는 형편없는 남자의 선물이 되는 건, 거부했다. 그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조사한 후에 일을 맡았다.

“그리고요”

그녀는 준의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지하 감옥에 봉인된 대마왕을 깨울 정도로 감미로운 테크닉이었다.

그녀의 별명은 서큐버스.

그녀의 유혹에 저항할 수 있는 남자는 세상에 없다.

무심했던 준의 얼굴이 빨개졌다.

보통의 경우에는 이쯤에서 남자는 모든 걸 포기하고, 그녀에게 매달린다. 그러나 준은 느슨해진 기타 줄을 죄듯이 호흡을 조절했다.

“놀라운 자제력이네요. 경험이 없으시죠. 제가 그 약점을 ···.”

“경험이 없는 건 결함이 아니라, 가능성이야. 선물. 내가 리본 풀기 전까지 쉬고 있어. 선물이 너무 나댄다.”

준은 다시 집중했다.

우연의 일치였지만, 준의 손등에서 정전기가 나왔다. 그녀 손가락 끝이 따끔했다. 그녀는 준의 몸에서 손을 뗐다.

해탈의 경지일까? 준의 몸에서 아우라가 나왔다.

준은 지배되지 않았다.

아침이 되었다.

준은 집중력을 유지하며 노트를 채웠다. 수메르 고대 문자 같은 기호가 가득했다.

현대 수학에도 없는 특이한 기호들.

준은 현대 수학을 저 멀리 뛰어넘는 패턴과 전개에 들어섰다.

새로운 패턴을 발견하면, 그것을 기록할 새로운 기호가 필요했다.

진한 커피 한 잔이 간절했다.

보보아 테이블 끝에는 풀지 않은 리본이 곱게 놓여 있었다. 메모가 보였다.

‘선물은 지쳐서 집에 가요. 리본 풀면 다시 올게요.’

*

로켈은 방안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가장 좋은 정장을 입었다. 그는 시간에 맞춰 창가 쪽에 스마트폰을 놓았다.

스마트 폰은 야베스 모드로 바뀌었다.

시온의 쌍방향 통신 시스템 - 야베스.

스마트 액정에서 아지랑이 같은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홀로그램 속의 사람은 청색 테두리 후드를 입고, 거울로 된 가면을 썼다. 선지자 레벨의 복장이었다.

그림자 기사인 로켈은 규칙에 따라 무릎을 꿇었다.

선지자의 변조 목소리는, 감기 걸린 고양이처럼, 중성적이었다.

“준의 등급을 올려달라고?”

“준은 크게 쓰일 씨앗입니다. 그는 개척자 트리탄의 박해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원하는 등급을 말해봐라.”

“마스터입니다.”

마스터? 새파랗게 젊은 놈에게? 선지자에게 거울가면 없었다면, 어처구니없는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을 것이다.

시온에는 선택받은 자, 씨앗과 새싹.

뿌리를 내린 자, 개척자와 시초자.

숲을 다스리는 자, 선지자와 권능자.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초월자가 있다.

마스터와 그랜드 마스터는 ···.

“예전에 사라진 레벨을 씨앗따위에게?”

“사라진 게 아니라, 20년 동안 마스터의 자질을 가진 자가 없었던 것입니다.”

“마스터로 인정받으려면 시련을 거쳐야 한다. 많은 천재가 시련을 이기지 못해 빛을 잃었다. 마스터가 되는 길은 험난하다. 우리는 준을 잃을지도 몰라.”

“청색의 선지자님. 시온에는 마스터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

로켈은 그다음 내용을 입에 담지 못했다.

시온 이외의 비밀조직들.

몇몇 조직은 시온보다 역사가 깊었다.

그림자 기사단이 씨앗과 새싹을 지키는 존재라면, 마스터와 그랜드 마스터는 시온을 지키는 존재였다.

예전에는 훌륭한 마스터들이 많았다. 시온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지금 시온에 남아 있는 마스터는 없다.

“로켈, 준에게 뭘 보았느냐?”

“세상의 중심입니다.”

“불가능해. 세상의 중심은 한 사람이 이룰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가문과 왕실이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은 수천 년의 역사가 쌓이고 쌓여야만 가능하다.”

“저는 본 것을 그대로 말했습니다.”

“잘못 본 것이다. 참회의 시간을 가져라.”

청색의 선지자는 서둘러 미팅을 끝내려 했다.

애송이에게 세상의 중심이라니! 불쾌했다.

선지자의 홀로그램이 사라지려는 순간, 로켈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이 선지자의 가면에 그대로 비쳤다.

“그가 말했습니다. 느낌을 따라가라고.”

“그게 어쨌다는 거냐?”

“그림자 기사단의 규율을 어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약하다. 참회하고 회개하라.”

*

킹스덤 중앙도서관은 새 단장을 마쳤다.

내부 공간은 현대 디자인으로 바꿨다. 예전에는 중세 시대 성당이었다면, 지금은 실내 공원이었다.

책보다 사람을 우선시한 디자인이었다.

도서관 사서 길버트는 뭔가 허전했다.

중력의 중심 - 보이지 않지만 모든 것을 결정짓는 포인트가 지워진 거 같았다.

도서관은 무중력 상태처럼 둥둥 떠 있는 길잃은 영혼처럼 보였다.

“뭔가 빠졌는데? 그게 뭐지?”

길버트는 여기저기를 둘러보았지만,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가 두리번거릴 때, 준이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무중력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다.

십 분이 지나기도 전에 그녀들이 몰려왔다. 그녀들은 불문율을 지키며, 준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게임이 다시 시작되었지만, 그녀들에겐 승산이 없어 보였다. 준은 더 강해져 있었다.

보아하니 그녀들도 꼭 이기려는 건 아니었다. 모두가 열심이었고 ···. 즐거워 보였다.

*

말벌처럼 큰 빗방울이 우수수 떨어졌다. 아마존 우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우기가 되면 원주민들은 밀림에 들어가지 않았다. 갑자기 불어난 빗물은 맹수보다 위험했다.

그러나 샤나이슈카는 예외였다.

건기 때에는 80도의 뜨거운 물이 흘렀지만, 우기가 되어 물이 늘어나면 20도의 미지근한 ‘놀이터’가 된다.

온천수는 유황과 같은 화산 물질을 함유하지만, 샤나이슈카의 물은 옹달샘처럼 담백하고 맑았다.

샤나이슈카는 맑은 강물이 지하단층을 통과하면서 지열효과로 뜨거워질 뿐이었다.

단순한 지열효과로 80도까지 뜨거운 물이 흐르는 곳은 지구에서 이곳이 유일했다.

원주민들은 넘친 물이 고인 웅덩이에서만 놀았지만, 불법채굴업자들은 강 본류에 배를 띄우고 헤엄쳤다. 강바닥에 있는 사금을 얻기 위함이었다.

구불구불 16km의 강줄기, 그리고 16차선 만큼이나 넓어진 강폭.

아쿠타미 부대는 원숭이처럼 삼나무 캐노피에 진지를 구축했다. 그곳에서는 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비가 올 때에는 시야 확보가 안 됐지만, 간간이 비가 그칠 때마다 불법채굴업자들을 쫓아냈다.

처음, 두 번, 세 번째도 봐주지만, 네 번째가 되면 지역 경찰에 넘겼다.

불법채굴업자들은 아쿠타미의 통나무배만 보여도 서둘러 달아났다.

“이해가 안 돼요. 먹지도 못하는 금이 뭐라고.”

호세 특무상사는 통나무배에 고인 빗물을 퍼냈다.

“그러게요.”

리처드도 바가지로 물을 퍼냈다. 그의 로봇팔은 200m 방수였다.

“금은 무른 금속이죠. 칼이나 창으로 만들지도 못해요. 그런데도 왜 금붙이 따위에 목숨 거는 걸까요?”

호세는 뱃머리에 앉았다. 그렇게 해야 두루 살필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빗줄기가 가늘었다.

“여러 설명이 있지만, 솔직히 말하면 아무도 몰라요. 인류가 공유한 정신병일 수도 있고, 저주일지도 모르죠.”

바위 뒤에 숨어 있는 불법채굴업자의 나룻배를 찾아냈다. 호세가 전기모터 프로펠러를 돌렸다.

호세의 통나무 배는 소리 없이 다가갔다.

‘지잉-지잉-지잉’

호세 특무상사 손등에 부착된 다기능 패널에서 소리가 울렸다.

소리마다 특별한 의미가 있었지만, 이번 것은 리처드가 처음 듣는 음이었다.

호세는 패턴 암호를 풀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오렌지 시티를 아세요?”

호세의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아마존 한복판에서 오렌지 시티라니?

“킹스덤 대학이 있는 곳이죠?”

“그곳에 가본 적이 있으신가요?”

“갑자기 그건 왜요?”

“급하게 갈 일이 생겼어요.”

놀랍게도 호세는 뱃머리를 돌렸다.

지척에 불법채굴업자를 놔두고 방향을 바꾸다니! 리처드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이죠?”

“전쟁을 취재하러 오셨죠? 새로운 전쟁터로 안내해드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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