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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 준-26화 (25/141)

요빅-1

조지프는 요청에 따라 메모도 하지 않고, 녹음도 하지 않았다.

“절대 비밀을 보장합니다.”

“게임이론 전문가에게 비밀보장이라니?”

스티브 교수는 묘하게 웃으며 왼쪽 눈을 치켰다.

그는 킹스덤 대학 응용통계학과 교수였고, 세부 전공은 비대칭 게임이론이었다.

비대칭 게임이론에 따르면 ‘비밀보장’은 언제든 벗길 수 있는 싸구려 코트였다.

스티브 교수는 약속 장소를 길거리 카페로 했다. 숨길 게 없고, 속이지도 않겠다는 의미였다.

오픈 된 장소였지만, 그리스 낙소스 섬에는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행여 있다 해도, 햇볕에 그을린 그의 모습은 교수보다는 목수처럼 보였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킥보드를 탄 청소년이 지나갔다. 거리는 깨끗하고 단정했지만, 길거리 건물 몇 개는 여전히 주저앉았고 외벽이 뜯긴 것도 있었다.

지중해 역사상 가장 잔인했던, 파루시아의 흔적이었다.

“준은 어떤 학생이었죠?”

조지프는 영국 첩보부 소속으로 굿데이의 정보를 모았다. 굿데이는 기후예측모형을 공개했지만, 여전히 비밀스러운 조직이었다.

굿데이의 이인자는 전직 해커였고 일인자인 준의 생활방식도 특이했다.

‘다른 건 위험하다.’가 조지프의 철학이었고, 굿데이는 일반적인 벤처 기업과는 너무나 ‘달랐다.’

“준은 파충류야. 죄책감이나 죄의식이 없어. 냉혹하고 잔인하고 모든 걸 계획하는 스타일이지.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한다면 놈에게 기횔 주면 안 돼.”

“그를 멍청이, 자폐아, 다운증후군으로 부르셨죠? 냉혹하고 잔인한 사람을 부를만한 표현은 아닌 거 같은데요?”

“개미 거미의 전략을 아나? 거미가 개미집에 숨어들어 개미 흉내를 내지. 개미처럼 행동하고 개미 같은 냄새도 풍겨. 늑대가 양의 가죽을 뒤집어쓴 꼴이지. 개미는 거미를 도우려다가 거미에게 먹혀. 준은 개미 거미의 전략을 사용해. 어리숙하고 아무것도 모르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 흉낼 내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끌어내서, 이용하는 사기꾼이야. 놈을 멍청이라고 부른 건 ···. 인정하지 내 실수야. 나도 놈에게 속았어.”

억울함으로 꽉 찬 표정이었다.

그는 준의 기후예측모형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고, 쓰레기통에 넣은 것 때문에 도망치듯이, 서둘러 안식년을 신청해야 했다.

안식년 동안에는 어려운 논문이나 새로운 프로젝트에 집중하는 게 관례였지만, 스티브 교수는 파루시아 피해 지역인 그리스에 와서 자원봉사활동을 했다.

“개미 거미라 ···. 준이 교수님을 노렸을까요?”

“노렸다기보다는 내가 걸려든 거지. 난 놈을 도우려 했어. 학생에겐 새로운 이론을 개발하는 것보다 예전 이론을 익히는 게 더 중요하거든. 핑계처럼 들리나?”

“계속해주세요.”

“놈은 냉혹한 사이코패스야. 히틀러 같은 놈이지. 파루시아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가족을 잃었지만, 놈은 돈을 챙겼어. 녀석이 파루시아 재해복구 성금을 얼마나 냈는지 아나?”

“아뇨.”

“땡전 한 푼 안 냈어! 지구촌을 휩쓴 폭염과 가뭄으로 돈을 벌고도, 기부금을 몇 푼이나 낸 줄 아나? 땡전 한 푼 안 냈다고! 놈은 탐욕스러운 악마야. 녀석은 파루시아와 헬하운드로 고통받는 사람을 보며 기뻐한다고! 셰익스피어가 말한 악마의 기쁨이라는 거지! 그런데 그거 아나? 악마는 만족을 몰라. 자연재해를 예측하는 것보다 더 재밌는 걸 하려고 할 거야.”

“그게 뭐죠?”

“축구 선수가 드리블하듯이 직접 재앙을 몰고 다니겠지.”

“재앙이라고 하면?”

“직접 나서서 뭔가를 파괴하겠지.”

스티브 교수는 확신했다.

조지프는 감정 섞인 스티브의 의견에 별 다섯 개를 주었다.

믿을 만한 정보에 따르면 실버 드래곤의 파산에는 굿데이가 관여했다.

그의 철학이 옳았다. 굿데이는 위험하다.

*

준은 에바와 함께 ‘골프공’을 살폈다. 골프공은 킹스덤 천체 관측소의 별명이었다.

아이보리색 관측소는 티 위에 올려진 골프공 같았다.

준은 출입금지 푯말을 지나며 에바에게 물었다.

“30m짜리 망원경이 있는 곳인데, 왜 폐쇄했지?”

“우주 정거장 망원경 때문에 이런 곳은 구시대 유물이 됐어. 한 달 내내 골프공에서 얻는 자료보다, 클릭 한 번으로 내려받는 자료가 더 많거든.”

관측소 안은 높고도 넓었다. 바오밥 나무를 심어도 될 거 같았다.

“외딴곳이고, 경치도 좋아. 지붕이 열리니깐, 밤에 별자리 구경하기도 딱이야.”

에바는 장점을 늘어놨다. 천체 관측소를 다시 디자인해서 사무실로 사용하는 건, 멋지고 운치 있는 일이었다. 굿데이의 좋은 이야깃거리였다.

“로켈의 의견은?”

준이 나직하게 말하자, 그늘 속에 있던 로켈이 모습을 드러냈다.

“침입 경로나 너무 많습니다. 여기서 별구경 하다간 목 잘립니다.”

“유진은?”

곧바로 에어스크린이 활성화되면서 유진이 나타났다.

“유동인구와 지형지물 ···. 지리정보 데이터 분석해서 가장 적합한 업종을 계산했어.” 그녀는 깜찍한 미소로 쉼표를 찍고 말했다. “첫째 공동묘지, 둘째 교도소, 셋째 정신병원, 넷째 송전탑이야. 왜 이런 곳에 관측소를 만들었대?”

그녀는 에어스크린을 회전해서 로켈과 에바 그리고 준과 눈을 맞췄다.

구체적인 답변을 원하는 표정이었다.

‘유진 악마가 원하노니! 인간이여! 응답하라!’

유진은 장난삼아 작게 중얼거렸는데, 볼륨 조절에 실패해서 엄청나게 크게 울렸다.

에바는 깜짝 놀랐고, 로켈은 공격에 대비했다.

오직 준만이 차분하게 답했다.

“공동묘지는 우울하고, 교도소는 위험하고, 정신병원은 꺼림칙하고, 송전탑은 걱정스럽지만, 천체관측소는 그럴듯하거든.” 그는 낱말 카드를 펼쳤다가 다시 정리하듯이 마무리했다. “인간은 시각적인 동물이야. 쓸모없고 어울리지도 않지만, 골프공처럼 보이잖아.”

에바는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굿데이가 이곳으로 올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데스먼드 학과장은 중앙도서관도 제안했어. 우리에게 대학 전체를 넘길 기세였지.”

준은, 데스먼드 학과장을 음미하듯이, 느리게 숨 쉬었다. 미세한 동작이었지만, 에바의 말을 이해했다는 신호로 충분했다.

터벅터벅 ···. 열두 걸음.

단지 걸었을 뿐이었는데, 강렬한 긴장감을 느껴졌다. 세상의 중심이 열두 걸음 옮겨진 거 같았다.

“로켈은 느낌을 따라가.”

“알겠습니다.” 로켈은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유진은 이벤트 함수로 지리정보 데이터를 분석해.”

“오케이.” 유진의 에어스크린이 팟 꺼졌다.

“에바는 킹스덤과 계약해.”

“계약?” 에바의 눈이 동그래졌다. 굿데이 본거지를 이곳으로 옮기려는 걸까?

“기회가 왔을 때 챙긴다.”

준의 말이 곧 굿데이의 규칙이었다.

*

리처드는 인생 처음으로 맘껏 쓸 수 있는 돈이 생겼다.

“굿데이는 위대해.”

팝콘처럼 커진 숫자가 위대함을 증명했다.

종군기자였던 그는 한쪽 팔과 다리를 잃고, 오렌지 시티에서 로봇팔과 다리를 이식받았다. 그리고 경제 섹션 기자가 되었다.

정교한 생체 공학으로 만든 로봇 시스템은 진짜 팔과 다리를 꼭 빼닮았다.

어떤 부분에서는 진짜보다 우수했다. 로봇팔에는 카메라와 전등 그리고 녹음기가 있고, 더 강하고 더 정교했다.

리처드는 로봇 부품과 생필품을 챙겨서, 페루로 왔다. 그는 불법 금광을 단속하는 아쿠타미를 취재했다.

아쿠타미는 ‘아마존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최정예 요원으로 구성된 특수부대였다.

“불법 금광에서는 돌에 붙어 있는 황금을 분리하려고 수은과 염산을 사용하죠. 금광이 들어선 곳은 3개월 이내에 나무가 죽고, 1년 이내에 폐허가 됩니다.”

특무상사 호세는 보호 장갑 손등에 있는 액정화면을 보며 말했다.

액정화면에는 그가 차단했던 불법 금광 사진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열대우림으로 꽉 찼던 곳이 사막처럼 변했다.

“아마추어 원주민들이 소규모로 하는 것도 문제지만, 진짜 문제는 금광 규모가 커지면 반군이 개입한다는 겁니다. 황금은 폭력을 끌어들이죠. 작년에는 기관총과 박격포 그리고 스팅거 미사일을 가진 병력과 싸워야 했죠.”

설명하던 호세의 턱밑으로 아릿한 통증이 지나갔다. 반군의 금광을 차단했지만, 두 팀을 잃었었다.

“그래도 상황이 좋아지고 있습니다. 금광의 규모가 커지기 전에, 우리가 재빨리 진압하거든요.”

호세 특무상사의 말은 사실이었다. 리처드는 아쿠타미를 따라다니면서, 고작 도끼와 정글도로 무장한 원주민들을 만났을 뿐이었다.

시시한 총격전도 있었지만, 언제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리처드는 압도적인 승리를 학살로 표현할 수도 있었지만, 호세 특무상사에게 해가 되는 짓은 하지 않았다.

호세 특무상사는 아마존에 필요한 인물이었고, 리처드는 아마존을 배신할 수 없었다. 기자의 중립 정신? 그딴 건 다 헛소리다.

전투가 시작된 지, 1분 만에 열두 명의 반군이 총에 맞아 죽었다. 나머지 아홉 명의 반군은 항복했다.

아쿠타미 부대는 금광 안에 갇힌 여자들을 구해냈다.

여자 몇은 임신한 상태였다. 반군들이 ‘병력생산’ 구실로 잡아온 여자들이었다.

“그나마 운 좋은 여자들이에요. 보통은 인신매매 조직에 팔리거든요.”

호세 특무상사는 반군에게 빼앗은 시가를 깊게 들이마셨다.

아쿠타미 부대원 한 명이 호세의 눈치를 살폈다. 리처드는 눈빛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제가 없었다면, 항복한 반군들을 즉결 처형했겠죠.”

“자비롭게, 고통 없이 보냅니다.”

금광 안쪽에서 지독하게 학대당한 여자의 시체가 나왔다. 풀려난 여자들은 울면서 그동안의 일들을 하소연했다.

분위기가 점점 즉결처형으로 흘러갔다.

“저는 종군기자입니다. 전쟁에는 관여하지 않죠. 모든 것을 기록하지도 않아요.”

리처드는 조용히 자리를 피해주었다.

깔끔한 총소리가 들렸다.

아쿠타미 부대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아홉 명을 동시에 처형했다. 아홉 발의 총소리가 화음처럼 하나로 어울렸다.

*

트리탄과 본부장들은 페루 정세를 분석했다.

실버 드래곤은 파산했지만, 인맥과 경험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페루는 뿌리를 단단하게 내린 나무처럼 안정기에 들어섰다.

원주민 출신의 대통령과 각료들,

환경 우선 정책,

시시한 범죄조직으로 몰락한 반군들.

중국 국영기업과 합작으로 제조공장이 들어섰고, 외화보유고도 든든했다.

“오로토칸이 원하는 금 매장지는 샤나이슈카 지역입니다. 물의 어머니라는 뜻이죠. 강물이 단층구조를 통과하면서, 뜨거운 물이 흐릅니다. 원주민들이 신성하게 여기고,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지형이라서, 국제학회에서도 관심이 많죠. 근방에는 술 취한 것처럼 얼굴이 빨간 우아카리 원숭이 서식지입니다.”

리스크 관리 본부장이었던 찰스가 상황을 요약했다.

“방해물은 제가 청소하겠습니다.”

시큐리티 본부장이었던 로베르가 나섰다.

그는 트리탄의 심장에 일렉나이프를 꽂았었다.

이번 미션으로 존재가치와 되 피어난 충성심을 증명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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