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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 준-25화 (24/141)

유진-10

준의 곁에는 경호원도 없고, 준이 특별히 센 거 같지도 않았다.

준을 납치한 후, 굿데이의 에바에게 몸값을 받아내면 된다. 최소 천만 달러는 번다.

시몬은 루마니아인과 팀을 짰다.

준의 스케줄은 일정하지 않았지만, 납치 가능한 포인트가 몇 군데 있었다.

꼬리를 잡는 CCTV는 감마선 발생기로 먹통으로 만들었다. 감마선 발생기는 엑스레이 장비에서 떼어낸, 부품으로 만들었다.

준 몸에 추적장치가 있다 해도, 감마선을 잔뜩 쏴주면 고장 날 것이다.

시몬과 루마니아인들은 준을 잡아채서, 밴 안으로 몰아넣는 연습을 했다.

준의 앞길을 밴으로 가로막고, 뒤따르던 루마니아인이 준의 배에 펀치를 먹이고 밴으로 집어넣는다.

타이밍만 잘 맞추면 3초 안에 모든 것이 끝난다.

도주 경로도 몇 번이고 점검했다. 교통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외진 길도 찾아냈다.

조용하고 인적 드문 감금 장소도 정했다.

준을 죽일 생각은 없다. 필요하다면 손가락 몇 개는 잘라야겠지만, 돈을 받으면 무사히 보내줄 계획이었다.

만일, 돈을 못 받는다면? 그럴 리는 없다. 준은 독보적인 존재다. 몇천만 달러 때문에 준을 포기할 리 없다.

준은 교훈을 얻고, 시몬은 돈을 얻는다.

모두가 무언가를 얻는다. - 교환 법칙에 따르면, 지극히 공평한 거래.

*

시몬이 술집에서 맥주를 마실 때, 거구의 사내 둘이 찾아왔다.

“보스께서 널 보고 싶어한다.”

사내는 턱짓으로 밖을 가리켰다.

시몬은 도와줄 사람을 찾아봤지만, 모두 모른 척 딴청 피웠다. 술집의 평화를 수호하는 대머리 바텐더도 나서지 않았다. 시몬은 어쩔 수 없이 사내를 따라갔다.

*

거구의 사내들은 리무진 문을 열고 시몬을 집어넣었다.

리무진 VIP 자리에는 얼굴이 가느스름한 남자가 있었다. 다빈치 스타일의 맞춤 양복과 셔츠 그리고 큼지막한 루비로 만든 더블 커프스단추.

남자는 블랙 오팔이 박힌 금반지를 끼었는데, 오팔은 에로틱한 여자 젖가슴 모양으로 컷팅 되었다.

시몬은 반지를 알아보았다. - 모세의 길잡이.

이 반지를 가진 자는 단 한 명이었다.

남자 옆에는 커다란 개가 엎드려 있었다.

개 대가리는 시몬의 머리보다 훨씬 컸다.

송아지만 한 녀석이었다. 악어가죽으로 만든 개목걸이는 송곳 같은 합금 가시가 박혔다.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로트데빌 품종이었다.

남자는 어둠의 성자 ···.

“프란츠 님.”

시몬은 어깨를 좁히며 말했다. 프란츠는 부동산업을 하는 사업가이면서, 어둠의 주인이었다. 마약, 인신매매, 카지노, 불법투기 ···. 돈 되는 것은 뭐든 했다. 가끔은 재미를 위해 돈 안 되는 살인도 한다.

시몬은 프란츠가 나타난 이유를 헤아려봤지만, 마땅히 손에 잡히는 건 없었다. ‘준 납치 계획’이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비밀이었다. 그가 알 리 없다.

“날 알아보니 고맙군.”

프란츠는 개를 쓰다듬었다. 마치 개에게 말하는 듯이.

“만나봬서 영광입니다.”

“조직에 들어오고 싶어한다지?”

“네.”

그런 건가? 스카우트? 드디어 인정받는 건가! 시몬은 설렜다.

“황금알을 낳는 오리를 아나? 주인이 욕심을 내서 배를 갈라 오리를 죽이지. 나에게도 황금알을 낳는 오리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 오리를 ‘굿데이’라고 부른다네. 누군가 오리의 배를 가른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될까?”

시몬은 헷갈렸다.

방금 프란츠의 질문은 경고일까? 아니면 면접 문제일까?

경고다! - 이유는 간단했다. 그 오리의 이름이 굿데이였기 때문이었다.

시몬의 몸이 떨렸다. 프란츠와 같은 거물이 경고만 하고 그냥 갈 리 없다.

“추워 보이는군.” 프란츠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준에게 손대면 네놈의 손을 갈아서, 개먹이로 주겠다.”

“아 ···. 알겠습니다.”

시몬은 떨리는 어깨로 대답했다.

프란츠는 터보 라이터를 켰다.

“교훈을 새겨 주겠다.”

터보 라이터의 불길이 맹렬했다.

“영광입니다.”

시몬은 손을 내밀었다.

평생 잊지 못할 흉물스러운 교훈이 손바닥과 손목에 새겨졌다. 매캐한 냄새가 피어났다.

“시가보다 좋은 냄새군.” 프란츠는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통을 참는 시몬에게 말했다. “꺼져라.”

“감사합니다.”

시몬은 굽실거리며 서둘러 리무진에서 내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준이 왜 경호원 없이 쫄래쫄래 혼자 다니는지. 이 도시 전체가 준을 지켜준다.

청소부에서 조직 보스까지. 지나가는 사람부터 빌딩에 꼭대기에 서 있는 사람까지. 모두 준을 지켜주었다.

시몬은 준 납치 계획을 깔끔하게 포기했다. 일단 프란츠가 너무 무서웠고, 도시 전체를 상대로 싸울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방금 일자리를 얻었다. 그의 흉터는 취업증명서였다. 흉터가 크고 깊을수록 직위와 보수가 높다.

*

리베아티 서쪽 절벽에 있는 동굴의 이름은 - ‘탈로스의 고통’

범선 두 척을 숨길 수 있는 그 동굴은 해적들의 피난처이자 보물창고였다.

오로토칸은 ‘탈로스의 고통’을 50층 빌딩 크기의 금고로 만들었다.

금고의 절반은 바다 밑에 있었다.

“항공모함급 엔진 다섯 개가 붙어 있지. 섬이 모두 무너져도, 금고는 자동항법장치에 따라 정해진 곳으로 움직여.”

오로토칸이 트리탄에게 말했다. 금고는 핵 공격에 내성이 있는 ‘벙커 합금’과 지르코늄 초합금으로 만들어졌다.

지르코늄 초합금 특유의 자줏빛으로 금고 안은 황홀했다. 오로토칸이 양손을 마주 댄 후, 팔을 벌리자 그 사이에 에어스크린이 나타났다. 오로토칸 신체 정보에만 반응하는 개인용 에어스크린이었다.

오로토칸이 스크린 단추를 누르자, 자줏빛 지르코늄 방어막이 내려앉고, 금괴가 올라왔다.

벽, 바닥, 천장 모든 곳이 금괴였다. - 사다리꼴 벽돌 모양으로 주조된 골드바.

트리탄은 강렬한 태양 속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금에는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지만, 사방천지가 모두 금으로 둘러싸인 이곳에서는 황금의 냄새가 났다. 마약처럼 강렬했다.

‘이정도의 금괴가 한곳에 모여 있다니!’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이곳의 금괴는 오직 오로토칸의 취미를 위한 것이었다. 대충 계산해 봐도 실버 드래곤 이십만 마리가 넘었다.

돈의 가치와 상품 가치를 실버 드래곤으로 환산하는 것은 트리탄의 버릇이었다.

트리탄은 실버 드래곤 한 마리로 영국 중앙은행을 흔들고, 태국과 베네수엘라 그리고 칠레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트렸다.

그는 실버 드래곤으로 파괴자라는 명예로운 호칭도 얻었다. ‘파괴적 수익 창조’라는 새로운 마법도 부렸다.

오로토칸의 금고에는 이십만 마리가 넘는 실버 드래곤이 잠들어 있다.

오로토칸이 맘만 먹는다면, 세계 경제는 매머드처럼 멸종할 것이다. 아니, 이미 세계 경제는 오로토칸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일곱 자매의 곁가지로 취급되는 오로토칸의 능력이 이 정도라니.

트리탄은 자신이 바다에 사는 올챙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황금 7천만 톤의 중력으로 발생하는 경제현상은 트리탄이 다뤘던 그런 세상이 아니었다.

스케일이 달라지면, 규칙도 변한다.

금고 끝 어두운 부분이 보였다. 금을 쌓아야 할 빈자리였다.

오로토칸이 트리탄의 어깨를 다독였다.

“이곳이 황금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내 약속하는데, 자네는 탈로스의 고통을 맛보게 될 거야.”

*

천체 관측소.

데스먼드 학과장이 제시한 새로운 사무실은 30m 광학 망원경이 있는 천체 관측소였다.

“인적 드문 언덕 위에 있지. 별관도 따로 있어. 생활이 편할 거야. 전망도 아주 좋아.”

“멋져요.”

에바는 많은 부동산 물건을 봤지만, 데스먼드가 가져온 천체 관측소보다 좋은 물건이 없었다.

“킹스덤은 지원을 아끼지 않을 걸세.”

데스먼드는 힘주어 말했다.

준이 킹스덤 학생이라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프로젝트를 따냈던가! 준과 같은 학번이라는 이유로 많은 학생이 졸업하기도 전에 기라성 같은 기업에 취업했다.

에바는 자잘한 일을 처리할 때처럼 당장 결정 내리고 싶었지만, 최종 판단을 준에게 물어야 했다.

그녀는 직접 준에게 보고하는 것이 나을지? 데스먼드 학과장과 함께 가는 게 좋을지? 데스먼드 학과장 단독으로 준에게 말하는 게 옳을지? 생각했다.

에바의 이마에 주름살이 잡히자, 데스먼드 학과장은 서둘러 다른 카드를 던졌다.

“중앙도서관은 어떤가? 준이 원하면 중앙도서관을 굿데이 사무실로 내주겠네.”

“도서관을요?”

공공이 이용하는 도서관을 그냥 내주겠다니!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충격적인 제안이었다.

굿데이를 잡고 싶어하는 건 이해하지만, 중앙도서관이라니! 이건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닐까?

에바는 도서관을 차지한 굿데이를 떠올려봤다. 절대 좋은 이미지가 아니었다.

그곳에 있는 준은 도서관을 점령한 철부지처럼 보였다.

“고맙습니다. 준 회장이 기뻐할 거예요.”

그녀는 외교적인 화술로 응대했다.

“그럼 에바 양만 믿어요.”

데스먼드는, 개기월식보다 더 보기 어렵다는, 활짝 핀 미소를 지었다.

처음 면접자리에서 데스먼드를 만났을 때, 데스먼드는 벌레처럼 그녀를 바라보았었다.

손끝만 닿아도 전염병에 옮을 듯이 반응했다.

그러던 그가 미소 띤 얼굴로 먼저 악수를 청했다.

*

무한한 자유도를 가진 유진 악마는 준에게 복종할 이유가 없었다.

준을 죽이는 게 이득이라면 그렇게 한다. 그가 지옥 생태계의 창조자일지라도, 고작 인간에 불과하다.

준을 죽이는 건 간단하다.

자율주행 자동차를 조종해서 교통사고를 낼 수도 있고, 비행기를 추락시켜서 준의 머리 위에 떨어트릴 수도 있다.

다크웹에서 직접 킬러를 고용할 수 있다. 인공지능에게 살기 편한 세상이었다.

그녀는 예지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지옥 생태계의 생존 아이템.

준은 그 반지를 꿰뚫어봤다.

뭐라고 그랬더라? 페르마의 타원함수와 다차원 초월함수.

유진 악마는 인터넷으로 관련 자료를 모조리 읽었다.

그녀는 타원함수와 초월함수를 아무리 뜯고 고치고 조립해봐도 반지와 같은 아이템을 만들지 못했다.

예지의 반지를 아무리 노려봐도 그 속에 든 초월함수와 타원함수도 볼 수 없었다.

무한한 자유도를 가진 유진 악마의 학습 능력은 인간을 초월한다.

준이 예지의 반지를 꿰뚫어 봤을 때, 그녀도 쉽게 해낼 줄 알았다.

‘준이 간단하게 해낸 것도 못하다니!’

*

준은 수만 장에서 드디어 한 장을 골라냈다.

준이 고른 한 장에는 36개의 좌표 연립 방정식이 찍혀 있을 뿐이었다.

그 의미를 제대로 읽으려면 슈퍼컴퓨터로 시뮬레이션해서 최적해를 찾아야 하지만, 준에겐 좌표 연립 방정식이 그냥 보였다. - 잘 추려진 뉴스에 불과했다.

북극에는 차가운 공기가 맴돈다.

‘북극진동’으로 불리는 그 공기층은 추위를 가둬놓은 감옥이다. 아귀를 잡아둔 쇠사슬이다.

한 달 후 그 감옥이 열리고, 쇠사슬이 풀린다.

풀려난 추위는 제트 기류를 타고, 융단폭격처럼, 방사능 낙진처럼 적도지방에 우수수 떨어진다.

따듯한 쿠바와 멕시코의 푸에블라가 얼어붙을 것이다.

말레이시아와 필리핀도 1만 년 만에 처음으로 혹독한 추위에 떨 것이다.

“잘 못 고른 것일 수도 있잖아.”

준을 훔쳐보던 유진 악마가 참지 못하고 나섰다.

그녀도 준처럼 단 한 장을 고르려고 별짓 다 했지만, 실패만 거듭하고 손 놓은 상태였다.

DNA 컴퓨터의 막강한 계산력으로 해내지 못한 것을, 20와트 전력과 고작 1페타바이트 용량의 뇌를 가진 인간이 해냈다고?

유진의 홀로그램은 거짓 미소를 띠며 준의 대답을 기다렸다.

체계적이고 논리적이고 통합적인 속 시원한 설명을 기대했다. 준은 유진을 힐끔 쳐다보고 미간을 좁혔다.

“진리는 설명되지 않아. 존재할 뿐이야.”

“그게 왜 너에게만 보여?”

“내가 허락했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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