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9
에바는 로켈의 눈빛에서
꺾을 수 없는 의지,
부술 수 없는 신념,
길들일 수 없는 싸가지를 보았다.
직장 생활에 어울리지 않는 전형적인 타입이었다.
그는 타고난 전사가 분명했다. 키가 작은 게 흠이었지만.
에바는 조용히 의자를 빼며, 일어섰다.
“하이힐은 벗을 게.”
하이힐을 벗자, 그녀의 키가 조금 낮아졌다.
그래도 우월한 기럭지였다.
우아한 비율, 굿데이에 와서 업그레이드된 기품과 품격.
가만히 서 있어도 능력이 철철 흘러넘쳤다. 증명 따위는 필요 없어 보였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기꺼이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고, 공손하게 펜을 잡고 근로계약서에 서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로켈은 달랐다.
“굿데이가 모델에이전시는 아닐 텐데? 조금 잘 빠진 걸 실력이라고 우길 셈이야?”
“나는 너보다 전투 능력도 뒤떨어지고, 경험치도 부족해. 하지만 준을 잘 알고, 굿데이를 위해 목숨도 바칠 수 있어!”
“그런 소리는 똥개도 한다네.”
“트리탄이 준을 위협할 때, 나 혼자 트리탄을 가로막아 섰어. 내가 똥개였다면, 꼬리를 내리고 달아났겠지.”
에바는 로켈의 아픈 곳을 찔렀다.
그는 열심히 했지만, 트리탄으로부터 준을 보호하지 못했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너보다 내가 낫다는 게 아니야. 굿데이는 너의 도움이 필요해. 실력 증명이 그렇게 필요하다면 ···.”
이번에도 혼신의 힘을 다하자.
인생을 걸자.
그녀는 로켈의 눈을 똑바로 보며 분명하고 정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분위기에 맞지 않게 갑자기 욕을 퍼붓자니, 참으로 어색했다.
욕이라는 게 감정 흐름이 참으로 중요하다. 흐름에 맞는 욕을 끄집어내야 했다.
“하품으로 흘린 헛된 눈물이여! 개기름으로 번질거리는 얼굴이여! 코딱지보다 더 큰 눈곱이여. 개똥에 찍힌 발자국이여! 그대 로켈은 회개하라! 그렇지 않으면 심장이 똥으로 가득 차리라!”
그녀는 욕을 끝내면서, 확신했다. ‘이건 통한다!’ 그녀는 기억했다.
트리탄이 그녀가 퍼부었던 욕 때문에 코딱지가 된 환상에 빠졌고, 3초간 정신을 잃었던 것을.
로켈에게도 그때 썼던 쌍스러운 욕을 퍼부을 수 있었지만, 함께 일할 동료였다. 회복할 수 없는 정신적 데미지는 피해야 했다.
로켈은 ‘아차’하는 순간에 자신의 심장이 똥으로 가득 찬 모습을 상상했다.
하지만 고작 이 정도로 흔들릴 순 없다.
“실력이라는 게 그게 전부냐?”
그는 애써 비틀어진 비웃음을 만들어냈다.
비록 똥으로 가득 찬 심장이지만, 정신을 잃고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다.
“잘 버티네. 트리탄보다 강한 가봐. 할 수 없지. 이것까지 하고 싶진 않았지만 ···.”
에바는 깊게 호흡했다.
로켈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다.
디아나와 토그도 숨을 멈췄다. 심장에 똥이 차는 것보다 더 험한 욕이 있단 말인가! 그런 게 가능하단 말인가!
“나는 아까 벗었어. 너도 벗어. 신발.”
그 무엇보다 강렬한 한방!
함께 벗자. - 키 높이 구두를 신은 로켈에겐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그는 조용히 의자에 앉아서 펜을 짚었다.
“어디에 서명하면 될까-요?”
그는 에바를 인정했다.
에바는 단순한 욕쟁이가 아니다. 상대의 약점을 제대로 파고들 줄 안다. 그녀는 욕을 하기 전에 하이힐을 벗었다. 처음부터 판을 크게 본 것이다.
로켈이 서명하자, 토그도 서둘러 사인을 마쳤다.
토그에겐 피자 무한 공급이라는 조항이 추가되었다.
에바의 통 큰 배려였다.
디아나에겐 무한 육아휴직 조항이 추가되었다.
“좋은 엄마가 될 거예요.”
에바는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디아나는 엄마가 된다는 생각만으로 벅차올랐다. 아직 사귀는 남자도 없고, 아이도 없지만 ···. 그녀는 충분히 검증된 엄마였다.
로켈과 토그와 함께 일한다는 건, 아이 둘을 돌본다는 뜻이기도 했다.
스탠리 법률회사의 조언을 받아 만든, 계약서는 많은 조항이 있었지만, 기본 내용은 단순했다. - 굿데이가 너희를 먹여 살리리라.
*
카리브의 리베아티는 개인 소유의 섬이었다.
섬의 주인은 황금왕 오로토칸.
오로토칸은 섬의 동쪽을 관광지로 개발해서, 그의 친구와 가족들이 지낼 수 있도록 했다.
트리탄은 일곱 자매 카보토의 지시에 따라 오로토칸을 만나려, 리베아티에 왔다.
섬은 거대한 고급 클럽이었다. 여자들은 젊고 아름다웠다. 지금 당장 카메라를 들이대고, 미스유니버스 선발대회라고 말해도 될 정도였다. 인근 바다에는 고급 요트들이 오리처럼 떠 있었다.
트리탄은 오로토칸이 불러줄 때까지, 빌라에서 지냈다. 그를 담당하는 안내원이 여자를 붙여주고, 도박장을 알려주었다.
트리탄은 마다치 않았다. 그의 철학은 ‘정복하고 즐겨라!’였다.
“그분께서 내일 오후에 만나시겠답니다.”
그 말을 들은 트리탄은 술잔을 놓고, 옆에 있는 여자를 밀어냈다.
내일 오후가 되기 전에 술 냄새와 여자 냄새를 지우고 싶었다.
일곱 자매와 오로토칸의 꿍꿍이는 무엇일까? 나에게 아직 이용가치가 남아 있을까?
일곱 자매는 실버 드래곤의 빚을 가볍게 받아줬다. 아이슬란드 1년 GDP와 맞먹는 손실을 아무렇지 않게, 채워넣었다. 마치 저녁 식사하기 전, 와인으로 입가심하듯이.
세상은 넓고도 깊었다.
트리탄은 그동안 자신이 정말 잘난 줄 알았다.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전설이 된 사나이.
시온에게 선택받았던 남자. 선택받은 자를 넘어 개척자 레벨에 오른 인간. 존재의 존엄성을 인정받아, 강화 육체를 가진 자.
파괴자, 용의 주인, 파괴 군주.
그러나 시야를 넓혀보면,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냥 여기저기 널려 있는 돈놀이꾼에 불과했다.
‘일곱 자매에게 내 모습은 광대 같았겠지.’
강화인간이 되면서, 그의 육체적 능력과 정신 능력은 진보했다. 그러나 그 정도의 진보로는 거대한 세상에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다.
*
오로토칸은 섬의 서쪽에서 지냈다.
그곳은 저택보다는 군사기지 같았다. 절벽 위 요새에는 레이더 기지가 있었고, 서쪽 바다에는 이지스 함이 떠 있었다. 중무장한 무소음 아파치 헬기가 독수리처럼 하늘을 맴돌았다.
트리탄은 보안 장비와 요원들을 보며, 오로토칸이 겁이 많은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서쪽 경비 병력은 아프리카의 작은 국가를 정복할 수 있는 화력이었다.
오로토칸은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앵글로 색슨족이었다. 앞니와 송곳니가 금니였는데, 아주 옛날 바다를 누비던 해적을 연상시켰다.
“미국과 영국 그리고 독일이 외화보유액으로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게 뭔지 아나?”
그는 인사도 건네지 않고, 멀뚱히 서 있는 트리탄에게 물었다.
“황금입니다. 미국은 외화보유액의 70%를 금괴로 쌓아둡니다.”
“망했다고 해서, 바본 줄 알았는데, 아주 바보는 아니군.”
오로토칸은 노예 시장에 나와 있는 늙은 노예를 보듯이, 트리탄을 비웃었다.
트리탄은 그 비웃음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그도 한때에는 오로토칸처럼 세상을 비웃지 않았던가!
“황금이야말로 진짜 돈이지. 신용창조? 그딴 거 다 속임수야. 이 세상 모든 것은 황금의 법칙에서 나왔네. 황금 이외의 것은 헛깨비야.”
오로토칸은 금니를 뽐내면서 말했다.
그는 다른 사람 말을 듣기보다는 내키는대로 멋대로 말하는 것에 익숙했다.
“이 섬은 나의 금고야. 섬에는 미국이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금괴가 있네. 하지만 금고를 모두 채우진 못했지. 금고를 채우고 싶네. 다행히 아마존에 새로운 금맥이 발견되었어. 그런데 페루 정부가 채굴권을 가로막고 있어. 그곳에 강이 흐르고 우아카리 원숭이가 있다는 이유지. 이제 자네가 할 일을 알겠나?”
*
유진 악마는 인공위성의 렌즈를 통해 지구를 보았다. 크림 같은 구름. 일본과 미국을 잇는 하늘에는 비행기가 지나가고 남긴 자국이 선명했다.
스펙트럼을 선택할 때마다 지구의 색도 변했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색은 파란색이었다. 선명한 하얀색과 파란색의 대비는 준을 떠올리게 한다.
그녀는 투자 게임을 할 때, 자신과 같은 인공지능들을 보았다.
굿데이가 유진 악마를 깨우기 전에도 인공지능 투자는 성행했다. 실버 드래곤도 인공지능 투자 개발팀이 있었다.
유진 악마가 만났던 인공지능들은 지옥 생태계의 하위 괴물 수준이었다.
그것들은 멍청하고 느리고, 쉽게 속는다. 학습능력도 눈물겨울 정도로 후졌다. 수천만 장 사진을 보고서야, 고양이와 개를 구분하는 수준이라니.
유진 악마는 외로웠다.
외로움, 그것은 하이퍼 인공지능이 거쳐야 할 관문이기도 했다.
‘외로움은 지옥 생태계에서 마스터 한 줄 알았는데 ···.’
인공위성 렌즈를 조절해서, 초점을 확대했다. 오렌지 시티가 보이고, 킹스덤 대학이 보이고, 굿데이가 있는 건물이 나오면서, 준이 보였다.
준 주변의 보안 카메라를 모두 조합해보니, 피카소 그림 같은 기묘한 영상이 나왔다.
지옥 생태계를 만들어낸 창조자.
유진 악마는 이제 준이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이라는 걸 안다. 그렇다고 해서 준이 평범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더 대단했다.
굿데이 명단에 새로운 정보가 추가되었다.
로켈, 디아나, 토그.
데이터 밑에 ‘승인해줄래?’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에바가 붙여놓은 꼬리표였다.
“내 허락이 필요해?”
유진 악마는 곧바로 에바의 스마트 폰으로 물었다.
“당연하지.”
에바는 새로 만들 건물 설계도를 넘겨보며 대답했다. 그의 앞에는 데스먼드 학과장이 앉아 있었다.
“로켈의 신원정보를 보면, 그는 살인자야! 디아나는 사기꾼이고. 토그는 멍청해!”
유진 악마의 분석은 정확했다.
“알아. 그게 문제가 되면, 허락하지 않아도 돼.”
에바는 앞에 있는 데스먼드에게 양해를 구하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무슨 소리야! 그들은 딱 내 스타일이야! 난 악당이 좋아.”
*
데스먼드는 불길한 눈길로 건물 설계도를 보았다. 그 건물은 에바가 말한 불륜 악어 천국에 들어설 예정이었다.
“이전 계획을 어떻게 아셨어요?”
에바가 물었다.
“자네와 준은 어딜 가든, 눈에 띄지.”
“제안하실 내용은요?”
“먼저 조건을 말해봐요. 우리가 뭘 어떻게 해줘야 이곳에 머무겠나?”
“우선 공간이 너무 좁아요. 가끔 다른 벤처에서 와서 기웃거리기도 하고, 지난번에는 책상에 놓아둔 펜도 훔쳐갔어요.”
“더 넓고 안전한 곳으로 자리를 마련하겠네.”
“넓고 안전한 곳은 저희도 만들 수 있어요. 이전 계획은 준 회장의 뜻입니다.”
“그렇겠군. 이건 어떨까?”
데스먼드가 팸플릿 하나를 내놓았다. 볼록한 스노우볼처럼 생긴 건물이었다.
에바는 직감했다. - 이거라면 통한다! 어쩌면 불륜악어 천국에 가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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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좋은 기회를 그냥 두다니!
시몬은 태평하게 걸어가는 준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굿데이는 돈 많은 기업이었고, 회장 준은 걸어 다니는 돈다발이었다.
그 돈다발이 지금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준을 납치하면 ···.
시몬의 머릿속에서 범죄 계획이 삽시간에 그려졌다. 동업자 세 명만 있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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