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8
소나기가 내렸다.
더위로 물렁물렁해진 흙과 바위와 나무들이 목을 축였다.
킹스덤 대학 건물에 부딪힌 빗줄기는 밧줄처럼 꼬이면서 굵은 물줄기가 되었다.
말벌처럼 두꺼운 빗줄기.
준은 빗속을 걸었다.
천재 그리고 성공한 젊은 사업가. 사생활도 깨끗하다.
현대 먹이사슬로 따지면, 최상위 계층. 여기에 약간의 인맥만 더해지면, 준의 후손들은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다.
영광, 할렐루 할렐루야.
보통 사람이라면 이정도에서 만족하고 인생을 즐기겠지만, 준에게는 부족했다.
그는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깨달았다.
‘대대손손 부귀영화’는 함정이다! 그것이 끝이어서도 안되고, 목적이어서도 안된다.
해야 하는 것을 할 때, 인간은 실수한다. 실수를 피하려면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
해야 하는 것은 언제나 함정이다. 그것은 죽음이다.
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도전이다. 그것은 생명이다.
준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가난하다.
준이 옳은 것을 따랐다면, 사회적 통념에 따라, 스티브 교수에게 복종했을 것이다.
스티브의 노여움을 자극하는 기후예측모형은 손도 대지 않았을 것이고, 푸리에 구조방정식은 폐기 처분하고, 굿데이는 개밥그릇 이름이었을 것이다.
준은 학교에서 숨 막힐 때가 있었는데, 이제 그 이유를 안다. 학교에서 가난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폭포 같은 소나기였다.
준은 홀딱 젖었다.
신발도 빗물로 가득 찼다.
믿을 수 있는 건 ···. 끊임없는 의심뿐이다.
준이 야자수 길을 걸을 때, 비가 그쳤다.
태양은 소나기 이전보다 더 강렬했다. 준의 몸에서 수증기가 피어났다.
흠뻑 젖은 옷 밑으로 알몸이 드러났다. 그의 성격만큼이나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몸이었다.
“이걸 쓰세요.”
여학생이 수피아 수건을 건넸다. 이집트 최고급 코튼으로 만든 명품 수건.
그녀는 한눈에 준을 알아봤다. 그렇지 않았다면, 젖은 옷으로 젖꼭지가 선명하게 비치는 남자에게 호의를 베풀지 않았으리라.
“고마워.”
준은 수건으로 얼굴과 머리를 닦고, 어깨에 걸쳤다.
“수건은 세탁해서 돌려줘.”
여학생은 이렇게 말하면서, 로맨틱한 만남을 꿈꿨다.
부러움에 찬 친구들의 눈길이 떠올랐다.
“알았어.”
준은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여학생은 황당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수건을 돌려준다는 거지?
그녀가 강의를 듣고, 자취방에 왔을 때, 문고리에 깨끗하게 세탁된 수건과 작은 선물상자가 걸려있었다.
손톱 깎기와 단추 실 바늘 따위가 들어 있는 에티켓 상자였다.
전율.
준은 다 알고 있다는 소문이 정말이구나!
그녀는 혹시 준이 뒤에 있지 않을까? 싶어서 뒤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
핑크광택 람보르기니가 멈췄다.
에바가 빠른 동작으로 차에서 내려, 핸드백에서 지폐를 꺼내, 길 안쪽에 있는 거지의 동냥 그릇에 넣었다.
빳빳한 고액권!
거지는 감사했다.
고액권이 들어오는 경우는 간혹 있었지만, 이렇게 빳빳한 지폐를 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 동전을 주거나 운 좋게 들어오는 지폐는 예외 없이 헌 것이었다.
거지는 최근 글로벌 경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동남아시아와 동유럽의 거지들이 이곳까지 몰려왔다. 그들은 노래와 기타를 치며, 혹은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진을 내세워서, 동냥질을 강화했다.
시민권을 가진 토박이 거지들은 극성스러운 외국 거지들과 경쟁해야 했다.
외국 거지들은 메뚜기 떼처럼 몰려다니면서, 마약 거래와 도둑질까지 저질렀다.
거지는 국가가 자동차 산업에 보조금을 주듯이, 정부가 나서서 시민권을 가진 거지들을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에바가 적선하고, 차에 올라타자, 옆자리에 앉은 준이 말했다.
“이차 유리 방탄이야?”
“아니.”
“방탄으로 바꿔.”
“알았어. 준 회장이 타는 건데, 내가 소홀했어.”
에바는 평소 굿데이 사무실에 들르기 전에, 적선했다. 좋은 일을 하면 좋은 운을 올 것 같았다.
그러다가 창고 원시 생태계를 보고 나서, 리듬이 깨졌다.
적당한 사무실을 직접 알아보려 다녔고, 굿데이에 도움이 될 인맥도 직접 관리해야 했다.
준은 돈 좀 벌었다고, 남은 인생을 ‘니나노’ 할 인물이 아니었다.
더 큰 일을 계획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헬하운드 시즌이 끝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지만, 이곳저곳에서 다음 시즌은 언제 시작되는지 궁금해했다.
거지는 핑크 광택 람보르기니가 그냥 지나가자, 엄청난 분노를 느꼈다.
‘저년이 내 돈을 훔쳐 가네!’ 라고 생각했다.
그는 예전에 에바에게 받았던 돈으로 권총을 사고, 기회를 기다렸다.
람보르기니가 신호에 걸리자, 그는 벌떡 일어서서, ‘내 돈 내놔라!’ 소리치며, 총을 쐈다.
팡! - 정확히 그녀 이마에 겨눠졌다.
팡! - 왼쪽 눈 밑에 겨눠졌다.
팡! - 왼쪽 가슴에 겨눠졌다.
방탄유리가 아니었다면, 처참한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소름이 돋았다.
발광한 거지가 계속 총을 쐈기 때문이 아니었다.
준의 통찰력.
이상한 일이었다.
눈앞에 총 든 거지가 죽이겠다고 난리를 치는데도 무섭지 않았다.
맞아.
준이 진리야.
준이 사무실을 옮겨야 한다면 ···. 그래야 해.
불륜 악어? 악어가 뭘 알겠어. 그것들은 꼴리는 대로 사는 거지.
기갑 바퀴벌레 비행부대? 이건 좀 문제이긴 하지만, 진리가 항상 깨끗할 순 없겠지.
거지는 계속해서 소리치고 총질하고 날뛰었다.
에바는 침착하게 그를 바라보며, 준을 만나기 전 내 모습이 저러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
굿데이는 비밀스러운 조직이었다.
기후예측모형은 오픈 되었지만, 비밀은 풀리지 않았다.
굿데이가 무엇을 할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세상이 아는 것이라곤, 굿데이가 무엇을 하든 엄청난 걸 하리라는 것뿐이었다.
굿데이 이사 계획도, 딱히 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비밀이었다. 그 비밀을 데스먼드 학과장이 알아낸 것은 행운이었다.
비밀리에 킹스덤 학과장 회의가 열렸다.
“간단하게 ‘굿데이 효과’라고 하겠습니다. 헬하운드 시즌에 투자했던 사람들은 큰돈을 벌었죠. 여러분처럼 저도 좀 벌었죠. 그 덕에 지역 경제가 호황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 킹스덤 대학 평가도 높아졌고요. 킹스덤 대학 지원자 숫자도 열 배 이상 늘었어요. 굿데이가 금융투자로 번 돈으로 로봇산업이나 소프트 산업에 진출할 경우, 그 영향력은 빅뱅 수준일 겁니다. 굿데이가 우리 대학을 떠나면, 썰렁해지는 수준이 아니라, 빙하기가 올 겁니다.”
데스먼드는 준이 킹스덤 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프로젝트를 따냈다.
다른 학과장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특히 경제학과와 MBA에서는 굿데이 효과로 큰 재미를 보았다.
헬하운드 시즌의 ‘가속도 수익분배 방식’은 가장 핫한 논문 주제였다.
마케팅 효과만 따져도 준의 존재는 노벨상 수상자 5명을 동시에 영입한 것과 맞먹었다.
학과장들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명감을 느꼈다.
‘굿데이를 떠나 보내면 안 된다!’
“브라이언 총장님도 굿데이 이전 계획을 알고 계십니까?”
“알고 계신 정도가 아니라, 걱정돼서 밤잠을 설치십니다.”
*
기묘한 풍경이었다. 소나기가 내리자, 학생들은 약속이나 한 듯 비를 맞았다.
준이 소나기를 맞으며 캠퍼스를 걸었다는 소문을 듣고, 준의 행적을 따르는 성지순례였다.
소나기 성지순례의 포인트는 다른 사람의 수건으로 얼굴과 머리를 닦고, 세탁된 수건을 돌려주는 것이었다.
브라이언 총장은 집무실에서 이 해괴한 풍경을 보며, 침을 삼켰다.
킹스덤 대학에 오는 학생들은 ‘탑오브탑’으로 불리는 인재들이었다.
킹스덤 대학은 전 세계 대학 서열 20위였고, 최근에는 굿데이 효과로 10위 안에 진입했다.
전 세계 대학 서열 10위.
브라이언 가문이 그토록 노력했지만, 이루지 못했던 성과였다.
기적은 단 한 명, 그것도 교수도 아닌 학생의 능력이었다.
브라이언 총장은 준의 잠재력이 두려웠다.
학생들로 하여금 소나기가 내리는 맨땅을 걷게 하는 카리스마.
피라미드처럼 착실하게 쌓아올린 통계학의 한계를 단숨에 뛰어넘는 천재성.
준은 금융투자 게임의 규칙까지 바꿨다.
‘그를 놓쳐서는 안 된다.’
브라이언의 손바닥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
‘킹스덤이 준을 감당할 수 있을까?’
감당해야 했다.
준이 다른 대학으로 편입하게 되면, 그 충격은 십 년을 후퇴하는 것과 맞먹는다.
이미 다른 대학교에서 준을 데려가려고, 전담팀을 꾸리고 있었다.
- 총장님 루이스 상원의원님이 오셨습니다.
인터폰에서 비서의 고운 목소리가 들렸다.
브라이언은 반가운 마음으로 루이스를 맞이했다. 브라이언은 학원 재벌 출신이었고, 루이스는 정치 재벌 출신이었다. 둘은 어려서부터 친구였다.
비서는 브라이언이 가장 아끼는 카파 커피를 내왔다.
루이스는 커피 향을 맡으며 말했다.
“아까 보니깐, 학생들이 넋 나간 좀비처럼 빗속을 걷던데 ···.”
“준 흉내 내기 놀이라네.”
“준이라면 굿데이 회장이겠군. 내 딸이 직원모집에 지원했었는데 ···.”
“그러게 말이야. 데스먼드 학과장과 평가위원들이 자네 딸을 강력하게 추천했지. 잔느는 요즘 어떻게 지내나? 좋은 곳에 취직했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좋은 곳에 취직했었지. 실버 드래곤.”
“아!”
한동안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
에바와 로켈 디아나 토크는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자못 심각한 분위기였다.
준은 중앙도서관 화재사건 같은 불상사를 피하려면, 로켈과 디아나 토크를 굿데이 직원으로 채용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준은 판단만 했을 뿐, 나머지 몫은 에바의 것이었다.
그녀는 오늘 중으로 채용 협상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내일은 중요한 약속, 전신미용 케어를 받는 날이었다.
굿데이의 직원이 되어라. - 시온의 그림자 기사단 로켈에겐 황당한 제안이었다.
여러 ‘씨앗’을 보호했지만, 그 어떤 씨앗도 로켈에게 부하직원이 되라고 권하거나 말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씨앗들은 로켈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들은 말 그대로 로켈의 보호를 받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씨앗’이었다.
로켈의 꾸겨진 얼굴을 본 에바가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굿데이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 시온을 떠날 필요 없어.”
“시온을 종교에 비유하다니.”
로켈은 혀를 찼다.
시온은 위대하다. 모든 종교와 과학 그리고 드래곤을 합친 것보다 다섯 배는 위대하다.
“자택 근무도 가능해. 매일 출근할 필요는 없어.”
에바는 근로계약서를 내밀었다.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거의 공짜로 월급을 받아가는 셈이었다.
로켈의 눈에 걸리는 것은 단 하나, ‘위급한 사건이 발생할 경우 업무지시를 따른다.’였다.
“이 업무지시는 누가 하는 거지?”
“나.”
“그럼 내가 네 부하냐?”
“응.”
“위급한 사건은 누가 판단하지?”
“나.”
“그럼 내가 네 쫄다구냐?”
“스스로 그렇게 부르고 싶다면, 말리진 않아.”
“실력을 증명해라.”
로켈은 의자를 뒤로 빼고, 일어섰다. 앉은키와 별다르지 않은 높이였다.
여자를 때리는 취미는 없지만, 실력도 없는 길거리 출신 밑에서 일할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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