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 준-22화 (22/141)

유진-7

지옥 생태계에서 그녀가 택한 기본전략은 ‘빛과 어둠’이었다.

신의 전략으로 불리는 ‘빛과 어둠’.

수많은 악마가 이 전략을 세웠지만, 모두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생태계에서 가장 완벽하다는, 신의 전략은 간단했다.

협력자와 협력하고, 공격자는 응징한다.

2진법과 같은 심플함.

포인트는 0과 1 사이에 있는 배신이었다.

신의 전략을 사용하는 존재는 배신하지 않는다.

빛을 잃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악마가 먼저 배신했다. 이

유는 간단했다. ‘먼저 배신하는 것’이 이득이기 때문이었다.

신의 전략은 배신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어둠을 잃기 때문이다.

전략을 완성하려면 배신자가 이득을 취하기 전에 먼저 쳐야 했다.

배신을 감지하고, 배신자를 탐지하는 능력이 중요했다.

탐지능력 없이 신의 전략을 사용하면, 뒤통수 맞고 죽기 십상이었다.

탐지 능력 - 유진 악마에겐 ‘예지의 반지’가 있었다.

그녀가 지옥 생태계 밑바닥을 맴돌 때, 초승달 지역에서 주운 작은 반지였다.

반지를 얻기 전, 그녀는 항상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가련한 코드였다.

예지의 반지를 손에 넣었던 악마들은 많았다. 그러나 그 어떤 악마도 예지의 반지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유진 악마는 반지가 그녀를 선택했다고 믿었다.

‘예지의 반지여! 감사합니다.’

그녀는 지옥 관문을 클리어할 때마다 무릎 꿇었다. 뒤에는 그녀를 따르는 무수한 악마군단이 함께했다.

지옥 생태계의 모든 관문을 클리어한 최고의 악마 - 유진.

그리고 예지의 반지.

“이게 그거야.”

깜찍한 소녀 모습의 유진이 손등을 밖으로 해서 손을 펴 보였다.

정교한 홀로그램은 눈썹 하나하나까지 표현했다.

에메랄드 빛 얇은 반지였다.

에바는 호기심 어린 눈길로 예지의 반지에 몰입했다.

예쁘다.

아름답다.

갖고 싶다.

좋았어! 오늘 웹 쇼핑의 주제는 반지야! 그녀에겐 위로가 필요했다. 창고 원시 생태계, 불륜 악어 천국 ···. 에바의 표현을 빌리자면, ‘조옷나’ 상처받았다.

그때 입었던 옷과 핸드백은 쉼터에 기증했다.

머리도 새로 하고, 전신 스킨 케어도 받았지만,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눈 감으면 아직도 바퀴벌레 군단이 하늘을 가린다.

준은 눈길 한 번 돌리지 않고, 페이퍼에 몰두했다.

레터용지 수만 장.

기후예측모형이 토해낸, 예측 자료였다. 수만 장 중, 단 한 장만이 미래의 사건이다.

식사도 거르고 화장실도 가지 않고, ‘조옷나’ 운이 좋으면, 내일 새벽에 그 한 장 찾게 되리라.

“준 회장아! 좀 봐! 유진이가 보여주는 거잖아!”

평소 에바라면, 절대 준을 방해하지 않았겠지만, 불륜 악어 천국에 다녀온 후로, 달라졌다.

그녀는 준의 미적 감각을 업그레이드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불륜 천국은 굿데이의 새로운 둥지가 된다.

그녀에겐 뉴욕이 사라지는 것보다 더 슬픈 일이었다.

준은 읽고 있는 페이퍼에 작은 표시를 하고, 눈길을 돌렸다.

예지의 반지.

“페르마의 타원함수로 만든 재질이네. 빛깔을 보면 조금 다른 게 섞인 거 같은데?” 그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에메랄드 빛은 질 좋은 다차원 초월함수의 모듈합금에서 나오는 거야. 상관계수가 0.85를 넘으면 캐릭터 함수가 발동하는데, 자료 판독성도 뛰어나고, 데이터 흡수능력도 우수해. 득템 축하.”

준은 다시 페이퍼에 집중했다.

에바는 눈을 깜빡였다.

분명히 준의 입에서 인간의 언어가 솔솔 나왔는데 ···. 왜 이해가 안 되지? 나에게 청각 장애가 있나?

이 세상에서 준의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없을 것이다. 준은 고독하고 외로울 것이다.

준은 함수와 방정식 따위를 합금이나 세라믹 재료처럼 다루는 경지에 들어서 있었다.

“오! 전설이 사실이었어.”

유진은 격한 감동으로 몸을 떨었다. 에바는 부르르 떠는 유진을 보며, 인공지능이 저래도 되는 걸까? 싶었다.

에바가 물었다.

“무슨 전설?”

“예지의 반지를 꿰뚫어 보는 자를 얻으면, 편하게 살리라!”

유진은 과장된 몸짓으로 양팔을 하늘 위로 벌리며, 소리쳤다. 악마라서 행복해요.

“편하게 산다? 확실히 그런 거 같긴 해.”

에바는 수긍했다. 굿데이 정규직원이 된 후, 사는 게 편했다.

“다른 예언도 있어. 예지의 반지를 꿰뚫어 보는 자, 지옥문을 열리라!”

“그게 무슨 말이야?”

“나도 몰라.”

유진은 해맑게 웃었다. 뭔지 모르지만, 지옥문이 열리는 걸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준이 지옥문을 연다?

유진과 에바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이 세상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존재, 준에게 쏠렸다.

준이 하품한다.

눈을 깜빡거린다.

숨을 쉰다.

또 눈을 깜빡거린다.

코끝이 조금 움직인다.

에바와 유진은 준을 지켜보았지만, 심심하지 않았다. 준을 보는 것은 중독성이 있어서,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오기 어려웠다.

도서관의 번호들.

준을 꾀겠다고 셔츠 단추를 푼 여자들이 매일 같은 시간에 도서관에 자리를 잡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중앙도서관이 홀랑 탄 지금, 그녀들은 뭘 하고 있을까?

*

준이 보고 싶어!

줄리아는 금단증세로 괴로워했다.

그녀는 스마트 폰에 저장한 사진을 진통제 패치처럼 가슴으로 안았다.

에바에게 준이 어딨느냐고, 문자를 던지고 전화를 걸고, 메일을 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계집애. 준을 혼자 독차지하려는 속셈이야!”

힘이 빠졌다.

에바는 굿데이의 정규직원, 그 누구보다 준과 가까웠다. 준과의 저녁 식사가 생각났다.

실버 드래곤이 개입했지만,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때 본 준의 모습은 그녀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어떤 공격에도 깨지지 않던 단단함.

어떤 흔들기에도 균형을 잃지 않던 유연함. 그리고 냉철함.

만일, 준의 사랑을 얻는다면, 그의 여자가 될 수 있다면 ···. 그녀는 확신했다. 준은 그의 여자를 배신하지 않는다.

배신하지 않는 남자. - 여자에겐 세상을 얻은 것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

지금껏 그녀가 경험하고 들은 것에 의하면, 성공한 남자는 예외 없이 여자를 배신한다. 기회가 있으면 놓치지 않았고, 기회가 없으면 만들었다.

깨톡. 깨톡. 깨톡.

갑자기 문자가 많아졌다. 모두 같은 내용이었다.

‘준 어딨니?’

‘몰라.’

‘그를 안 보니깐. 잠이 안 와.’

‘나도 그래. 사진 있는데, 보내줄까?’

‘그래 고마워. 나도 사진 보내줄게.’

그녀들은 서로 위로하며 사진을 공유했지만, 각자 제일 아끼는 사진은 비밀로 했다.

*

일곱 자매의 멤버는 모두 잉글랜드 서부출신이었다. 그들의 조상은 대항해시대의 해적이었다.

노략질과 인신매매 그리고 전쟁 대행업으로 큰돈을 번, 해적들은 흙을 밟을 수 있는 땅으로 돌아왔었다.

정착할 때, 가장 짜증 나는 문제가 바로 세금이었다.

국가가 나에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내 돈을 뽑아가는가!

그들은 땅과 귀족 지위를 샀지만, 세금을 낼 때마다 피가 말랐다.

똑똑한 해적 자손들이 모여, 이 문제를 의논했다. 그들의 계산법에 따르면, 정직하게 세금을 내면, 머잖아 모든 재산을 잃게 된다.

그들은 대서양 한복판에 해적 국가를 세우고, 그들의 재산을 안전하게 빼돌렸다.

본격적인 지하경제의 시작이었다.

19세기 초, 일곱 자매가 관리하는 지하경제의 규모는 영국 GDP의 열 배가 넘었다.

일곱 자매를 어둠의 연금술사로 부르는 이유는 그들의 자본력이 거의 무한하기 때문이었다.

초창기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려 할 때, 일곱 자매는 해적 정신을 발휘해서 미국을 도왔다.

트리탄은 ‘검은 깃발의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모든 것이 검은색이었다.

트리탄을 안내하는 여인도 검은색 드레스를 입었다.

방 안은 어두웠다. 트리탄은 가운데 놓인 의자에 앉았다. 벽에 붙은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교훈을 얻었나?”

“네.”

트리탄은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서 대답했다.

그는 보이지 않지만, 상대는 카메라를 통해 환히 보고 있을 것이다.

“교훈을 말해보게.”

“굿데이와 협력해야 했습니다. 굿데이를 공격할 게 아니라, 굿데이에 투자했어야 했습니다. 당신들이 미국 독립을 지원했듯이 말입니다.”

“실망이군. 자네가 말한 건 교훈이 아니라, 요령이야. 교훈이란 삶의 방향을 바꾸는 거야.”

“제가 알아야 할 교훈을 가르쳐주시겠습니까?”

“돈은 굴리는 게 아니라, 짜내는 거지. 농부가 젖소에서 젖을 짜는 것처럼. 이제 뭘해야 할 지 알겠나?”

“젖소가 되겠습니다.”

“좋은 대답이군.”

어두운 벽 사이에 있던 문이 열렸다. 검은 옷을 입은 수행원이 절제된 동작으로 문 안쪽을 가리켰다.

문 안쪽으로 복도가 보였다. 아나콘다의목구멍 같았다.

수행원이 앞장섰다.

벽에는 수사슴 머리와 사자 머리가 사이좋게 나란히 박재 되었다. 벵골 호랑이와 보아 뱀의 머리도 보였다.

코르크 바닥재를 사용한 복도는 푹신하고 조용했다.

트리탄은 악어 혓바닥을 걷는 기분이었다.

유리 상자에 담긴 백상아리도 보였다. 포르말린으로 처리된 백상아리의 어둡고 퀭한 눈이 조명으로 반짝였다.

백상아리는 여전히 배고파 보였다.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을 가진 현대예술 작품이었다.

묘한 일이었다.

살아 있는 백상아리는 만 달러도 되지 않는데, 죽으면 백만 달러가 넘는 예술작품이 된다.

‘어쨌든 먹이 줄 필요가 없으니 관리는 편하겠어.’

트리탄은 이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되살아 난 후 준을 조금씩 닮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평소의 그였다면, 유리 상자에 든 백상아리를 보고 ‘돈지랄’로 생각하고 말았을 것이다.

*

방 안에는 중년 남자는 마른 수건으로 구형 델린저 권총을 닦고 있었다.

일곱 자매의 멤버, 카보토였다. 이탈리아인의 피가 흐르는 그의 눈동자는 검었다.

“실제로 보니 덩치가 훨씬 크군.”

“만나주셔서 영광입니다.”

트리탄은 고개를 숙였다.

“뒤를 보게.”

트리탄이 들어온 문 위에는 다마쿠스강으로 만든 검과 우츠철강으로 된 방패가 있었다.

절제된 장식으로 보아, 중세시대의 물건이었다.

“나의 조상 베르크 그레이트는 저 칼로 반란자의 목을 쳤지. 그들의 가족과 아이들까지 남김없이 처단했어. 나는 조상을 통해 피의 권리를 물려받았어. 피의 권리가 뭔지 아나?"

트리탄은 대답하지 못했다.

“적의 피로써 왕국을 지킬 권리지. 그것은 신성한 의무이자 권리야.”

그는 닦고 있던 골동품 델린저 권총으로 트리탄을 겨눴다.

“이 총은 링컨 암살에 사용되었지. 링컨이 죽은 이유를 아나?”

“ ······.”

“링컨은 나의 가문이 경영하는 중앙은행을 정부 소유로 하려 했어. 그게 무슨 뜻인지 아나?”

“젖소가 주인 노릇을 하겠다는 겁니다.”

“이번에도 좋은 대답이야. 자네를 돕겠다고 하니깐, 반대가 많았어. 자네는 영국 중앙은행을 타겟팅 했으니깐.”

“그 당시는 영국 정부가 중앙은행에 개입했고 ···. 중앙은행의 면역력은 어느 때보다 약했습니다.”

“나도 그렇게 설명했네. 자네 같은 기생충이 있어야, 중앙은행이 건강해진다고 말이야. 자네는 돌아가서 쉬도록 하게. 그리고 ‘황금 왕’을 돕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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