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 준-18화 (18/141)

유진-3

로켈은 3층 기둥 난간에서 아래를 바라보았다.

준의 자리가 한 눈에 보였다. 이곳에서는, 준만 바라보아도 성적이 오른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오늘따라 파리들이 많군.”

그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1층을 지나가던 남자와 눈이 잠깐 마주쳤는데, 그 남자는 징벌자로 불리는 실버 드래곤의 킬러였다.

징벌자는 킬러 중에서도 엄선된 킬러에게 쥐어지는 호칭이었다.

실버 드래곤에는 아홉 명의 징벌자가 있고, 그 아홉 명이 모두 이곳에 있었다.

징벌자는 가벼이 움직이지 않고, 혼자 행동한다. 그들이 떼거지로 나타났다는 것은 ···.

“우리랑 한 판 뜰 생각인가 본데요.”

도서관 밖을 지키는 디아나가 무전으로 말했다. 도서관 밖에도 징벌자가 서성였다.

다행이었다. 오늘 준은 도서관에 없다.

“역시 준짱이야. 촉이 좋아.”

로켈이 고개를 끄덕였다.

준에겐 불행과 위험을 피해 가는 본능 같은 게 있다.

“준짱이 오기 전에 정리할까요?”

디아나가 무전을 보냈다. 로켈과 디아나 그리고 토그는 준을 준짱으로 불렀다.

“준짱이 온다면, 정리해야지. 준짱 위치는?”

“굿데이 본사에 있어요.”

디아나는 ‘그 작은 사무실’을 본사라고 표현한 게 쑥스러웠다. 하지만 크기로 판단하지 않는 게 중요했다.

로켈에게 말할 때에는 크기가 작을수록 숨겨진 가치를 찾아내야 했다.

*

징벌자들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도서관을 방어기지와 공격기지로 삼았다. 로켈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고, 준이 왔을 때 징벌을 내릴 장소로 도서관을 택했다.

그들은 도서관 곳곳에 이런저런 장치를 해놓고, 기회를 엿봤다.

징벌자 한 명이 준의 자리에 작은 압정을 슬쩍 던졌다. 로켈의 훈련된 눈이 아니었다면, 놓쳤을 동작이었다. 압정에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 독약이 묻어 있을 것이다.

‘기어이 준을 지우려는 건가?’

로켈은 입을 앙다물었다.

아홉 명의 징벌자를 모두 동원했다는 것은 준뿐만 아니라, 수호기사 로켈까지도 쳐내겠다는 의미였다.

로켈 - 그는 한때 트리탄의 수호기사였다. 트리탄이 ‘선택받은 자’가 됐을 때, 그를 지켜준 가디언이 바로 로켈이었다.

트리탄은 신종 금융 기법으로 금융계를 흔들었다.

신종 금융기법 - 그전 시대에서 보지 못한, 비열하고 정교한 탐욕이었다. 그것은 인터넷 시대 이후에 나타난 독창적인 돈벌이 방법이었다.

트리탄이 등장하기 전에는 금융계에 뱅커로 불리는 최종 권력이 있었다.

뱅커 - 중앙은행과 중앙은행을 따르는 민간 은행들.

그러나 은행들은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인터넷 시대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시온은 트리탄이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결론을 내렸다.

무능하고 나태한 금융계의 활력을 불어넣을 존재라는 판단이었다. 이른바 ‘창조적 파괴’였다.

트리탄이 도발적인 전략으로 금융시장을 흔들자, 여유롭게 기득권을 즐기던 뱅커들은 그를 암살하려 했다.

로켈의 쉴드가 아니었다면, 트리탄은 열두 번도 넘게, 백 번은 고쳐 죽었을 것이다.

트리탄은 영국 중앙은행을 무너트리고, ‘선택받은 자’를 ‘졸업’했다.

돌이켜 보면, 트리탄은 시온 역사상 가장 많은 암살 위험에 노출된 인물이었다.

시온의 판단 기준은 좋고 나쁨이 아니었다. 좋고 나쁨의 판단 기준은 중세시대 마녀사냥을 재현할 뿐이다.

시온의 기준은 강함과 약함이었다. 더 강해질 수 있는데, 기존의 기득권 세력 때문에 밟혀서 사라진다면, 시온이 나서서 그 새싹을 보호한다.

새싹이 뿌리를 내리고 자생력을 가지면, ‘선택받은 자’를 졸업한다.

“굿데이 본사 쪽에서 파괴신호가 떴습니다.”

디아나가 급하게 말했다.

‘파괴신호?’

로켈이 되묻기도 전에 디아나가 다시 말했다.

“사무실 현관문이 뜯겼습니다.”

“그래? 지난번에 보니깐, 좀 낡았더라고. 경첩도 질이 나쁜 제품이던데.”

로켈은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실버 드래곤의 징벌자는 이곳에 모여 있다.

“벽 일부도 동시에 뜯겼는데요?”

“벽도 허술해 보였어.”

“굿데이 본사에 징벌자는 없지만 ···. 트리탄 회장이.”

디아나의 말이 끝나기 전에, 로켈은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징벌자는 준을 노린 게 아니었어! 날 붙잡아 두려는 거였어!’

그리스 건축을 흉내 낸 도서관 외벽은 대리석으로 층층이 쌓아올린 모양새였다. 수직이었지만, 잡을 곳과 발 디딜 곳이 많았다.

로켈은 긴팔원숭이가 나무를 타듯, 빠르게 벽을 타고 내려왔다.

밖을 지키던 징벌자가 정조준하고 총을 쐈다. 무수한 구슬이 든 산탄총이었다.

로켈의 겉옷은 단숨에 걸레가 되었다.

‘해치웠다!’

별거 아니네.

징벌자는 너무 쉽게 승부가 나서, 실망이었다. 그러나 시체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허공에는 걸레가 된 겉옷만이 나풀거렸다.

등 뒤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설마 내가 뒤를 잡힌 건가?’

징벌자는 산탄총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몸을 날리며 뒤를 겨눴다. 겉옷을 벗은 키 작은 로켈이 보였다.

‘나에게 두 번의 기회를 주다니!’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로켈이 움직였다.

산탄총의 총구가 로켈을 쫓았다.

징벌자는 정확하게 조준하고 로켈의 몸이 나무 뒤로 숨기 전에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로켈은 이미 나무 뒤로 숨은 후였다.

세 번째 기회가 필요했다.

징벌자는 자세를 바로잡고, 산탄총을 빠르게 장전했다. 손끝이 떨렸다. 확실히 로켈의 움직임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목이 따끔했다.

“날 잊으셨나 보네.”

등 뒤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디아나였다.

징벌자의 목에 디아나의 마취탄, 오즈21이 박혔다.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징벌자의 몸은 얼어붙은 듯 굳었다. 약효가 풀려도, 평생 손이 떨리고 발음이 어눌할 것이다.

*

로켈을 잡아라!

도서관 안의 징벌자들이 앞다퉈서 밖으로 나오려 했다. 의자와 테이블을 단숨에 뛰어넘는 그들을 보며 길버트는 체육과 학생들이라고 생각했다.

저들은 왜 도서관에서 날뛰는 걸까? 킹스덤에는 훌륭한 실내 운동장이 있는데 ···. 도서관 스포츠라는 새로운 종목이 탄생한 걸까?

입구로 통하는 계단에서 투구와 갑옷을 입은 거인이 올라왔다. 거인은 느낌표처럼 생긴 방망이를 들었다.

징벌자 한 명이 자동소총을 갈겼다. 투구와 갑옷에 불꽃이 일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총알은 갑옷을 뚫지 못했다.

방망이가 징벌자의 가슴을 후려쳤다. 징벌자는 홈런볼처럼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길버트는 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현대적인 총격과 원시적인 방망이의 대결. 누군가 연막탄을 터트려서, 환상적인 분위기까지 더해졌다.

입체적인 사운드,

박진감 넘치는 액션,

희뿌연 특수효과, 아쉬운 게 있다면 캐러멜 팝콘이었다.

토그는 평소에도 힘이 장사였지만, 전투갑옷을 입으면 천하무적이었다.

시온의 천재가 개발한 전투갑옷은 중무장한 장갑차의 위력이었다.

징벌자 한 명이 속효성 신경가스를 뿌렸다. 그러나 전투갑옷은 산소호흡기와 방독면까지 갖춘 장비였다.

징벌자들은 뛰어난 킬러였지만, 힘과 기술력의 차이가 컸다.

토그는 힘과 방망이로 징벌자를 때려눕혔다. 그는 생각했다.

“배고프다.”

다섯 번째 징벌자를 때려눕힐 때, 준과 함께 먹었던 피자가 생각났다.

‘피이~자!’

토크는 괴성을 지르며 더욱 힘을 냈다.

저항하던 징벌자들은 작전을 바꿔서 이리저리 날뛰다가 탈출을 시도했다.

운 좋게 밖으로 나온 징벌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디아나의 매끈한 마취총이었다.

*

로켈은 빠르게 굿데이로 향했다. 트리탄은 보통 인간일 때에도 괴력의 소유자였지만, ‘선택받은 자’를 ‘졸업’하고 개척자 레벨이 되었을 때, 최첨단 바이오 테크놀로지 기술을 이식받았다.

불의의 습격과 예상치 못한 암살에 대비하려는 조치였다. 트리탄은 인간 한계를 뛰어넘는 강화인간이었다.

*

준은 뻥 뚫린 현관문을 보며 이삿짐 옮길 때, 편하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눈앞에서 철제문을 찢은 트리탄의 점수로 C+을 주었다.

깜짝 놀랄 정도로 좋은 등장이었지만, 먼지가 너무 많이 났고 철제문을 찢지 않고, 공처럼 둥글게 말았다면 청소할 때 편했을 것이다.

준은 관대했다.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찢어진 문을 둥글게 뭉쳐준다면, B-까지 줄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B+ 이상은 줄 수 없었다. 메시지 전달능력이 너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저 덩치가 뭐라고 했더라? ‘이것은 나의 분노?’

이것이란 무엇일까? 이것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했다.

“이 망할 놈아! 갑자기 뭐하는 짓이야.”

위기에 처하자 욕쟁이 본능이 용솟음쳤다.

그녀는 수준 높은 쌍욕을 하며 꺼지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덧붙였다.

“준! 너는 내가 지켜줄 게!”

“에바 날 밀면서 말하지 마!”

준은 다리에 힘을 줬다.

“미안 나도 모르게.”

그녀는 준의 허리를 감싸듯 부여잡고 있는 양손을 풀었다.

에바는 준에게 뜻밖의 복근이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책만 보는 게 아니었다? 준이라면 비밀리에 특공무술 같은 걸 익혀두지 않았을까?

준은 놀랍도록 태연하고 의연했다. 갑자기 등장한 트리탄이 무안해질 정도였다.

준의 한마디가 트리탄의 심장에 꽂혔다.

“너는 누구냐.”

“나는 ···.” 트리탄은 이를 악물고 자기소개를 했다. “실버 드래곤의 주인 트리탄이다.”

치욕이었다. 최근 십 년 동안 자기소개를 한 적이 없었다.

“아! 실버 드래곤 펀드의 매니저?”

“매니저가 아니라 회장이다.”

트리탄이 어깨를 으쓱하자 승모근과 정맥이 도드라졌다.

“에바는 내보내지. 그게 너도 편하겠지?”

“좋다.”

“준 회장님! 저는 저 빌어먹을 개자식과 회장님이 ···.”

“에바를 걱정해서 그러는 게 아니야.”

“그럼 누굴?”

준은 대답 대신 트리탄을 빤히 쳐다보았다.

“상관없다.”

트리탄은 지그시 눈을 감고, 부푼 근육을 잠재웠다. 성난 늑대 같은 그의 표정은 비 맞은 빨래처럼 축 늘어졌다.

‘뭐지? 최후의 필살기인가?’

에바는 여자의 육감이 발동했다. 저 개자식은 최후의 필살기로 준 회장을 죽이려고 한다.

주마등처럼 계좌에 있는 돈이 생각났다. 제대로 써보지도 못했는데 ···. 준을 처음 봤던 그 날이 생각났다.

준은 정말로 그녀를 정규직원으로 채용했다.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준처럼 할 수 없다. 손등에 있는 그녀의 문신 ···. 뒷골목에서 막사는 여자의 상징이었지만, 굿데이의 이인자가 되면서 성공의 상징이 되지 않았던가!

준은 그녀가 기후예측모형을 훔친 것을 알았지만, 기후예측모형을 무료로 해서 그녀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준과 함께 일하면서, 굿데이의 일원으로서 ···. 그녀는 진정 행복했다.

준이 죽는다면, 그 행복은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준이 죽는다면, 그녀 역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준 앞에 섰다.

준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전혀 논리적이지 않았지만, 준이 살아야 내가 산다.

그녀의 심장과 뇌와 콩팥과 힘줄, 혈관, 자궁, 소장, 맹장 피부 심지어 머리카락까지도 그렇게 소리쳤다.

준을 살려라!

“이 나쁜 놈아! 이빨 사이에 낀 코딱지 같은 놈아! 준을 건들지 마!”

그녀는 애를 낳듯이 힘껏 소리쳤다.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