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2
앞유리에 큼지막한 리본을 단, 람보르기니 자동차가 도착했다. 스노우화이트에 옅은 핑크색 광택이었다.
프란츠가 에바에게 보낸 선물이었다.
그는 큰손 투자가 중 한 명이었다. 에바에게 잘 보여야 다음 시즌 투자에도 ‘확실하게’ 동참하고, 억지스러운 투자수익 배분 방식도 고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물소 가죽으로 만든 람보르기니 좌석은 아늑했다. 돌발사고에 즉각 대응하는 자율주행장치는 지면에 따라 타이어 압력을 조절하고, 돌고래의 유선형 디자인은 바람 그 자체였다.
에바는 주면 주는 대로, 오면 오는 대로 다 받았다.
굿데이는 투자원금의 1%와 수익금의 4%를 가진다.
에바의 연봉은 수익에 따라 커지는 구조였다. 그녀 계좌에는 정신이 아득할 만한 금액이 찼다.
‘이게 다 내 거라니.’
몸이 펑 터질 것 같다.
손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호흡을 다스렸다. 핑크 다이아가 박힌 반지도 선물 받은 것이었다.
‘이 돈을 언제 다 쓰지?’
숫자의 규모는 마르지 않는 샘물이었다.
아무리 써대도 지구멸망 그날까지도 다 쓰지 못한다.
돈 쓸 생각을 하니, 굿데이가 족쇄처럼 느껴졌다. 굿데이를 떠나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돈을 펑펑 쓰는 모습을 상상했다. 세상은 넓고 쓸 돈은 많다.
‘굿데이에 온 이유가 뭐였지?’
그녀는 충격으로 기억을 잃은 것 같았다.
굿데이에 들어온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머릿속은 하늘을 나는 새처럼 마음껏 ···. 사무실 문이 열리고 퀭한 모습의 준이 들어왔다.
준은 많이 지쳐 보였다.
잠깐, 준이 이 시간에? 보통은 도서관에 있을 시간이었다.
“준 회장님 괜찮으세요?”
“방심했어. 어젯밤 도서관에 숨어있는 사람이 있었어.”
준은 의자에 털썩 앉았다. 정글에서 간신히 살아나온 모습이었다.
“그래서요.”
“그 여자가 가져온 커피를 마셨는데 ···. 마시면 안 되는 줄 알았는데 ···.”
준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돌이켜 보건대, 전형적인 판단 착오였다.
“여자?”
에바는 늦은 밤, 도서관에 단둘이 있는 남녀의 모습을 그렸다.
요즘 들어 여자들이 자존심도 내팽개치고, 육탄 공세를 해오는 일이 잦았다.
여자들은 준을 점령해야 할 그 무엇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걸 뭐라고 해야 하지? 씨도둑?
에바는 걱정보다 짜증이 밀려왔다. ‘그래서 이번엔 또 뭐야?’
“커피에 최음제가 들어 있었나 봐. 좀 그랬어. 갑자기 그녀가 내 뒤로 와서 내 어깨를 주물러주는데, 싫지 않더라고 ···. 왜 있잖아. 간질간질하면서 기분이 좋아지는 거. 그녀 손이 셔츠 틈새로 들어오고 ···.”
“스톱! 그래서 얼굴이 퀭한 거야?”
존댓말로 준을 맞이했던 에바는 반말로 대화를 끝냈다.
이제야 생각났다. ‘저 새끼를 돌보겠다고, 굿데이에 지원했었지.’ 수많은 여자의 찝쩍거림에도 흔들리지 않고 책 읽는 모습이 보기 좋았었지. 그런 준이 하룻밤 방심해서, 원치 않은 관계를 맺었다니! 정말 그런 거 아니지? 나의 준이 그럴 리 없어! 그렇지?
준은 에바의 생각을 쉽게 읽어냈다.
엄청난 독서와 통찰력으로 상대의 생각과 느낌 그리고 감정이 그대로 보였다.
“여기는 좀 달라졌네?”
준은 사무실을 둘러봤다.
못 보던 가구와 장식품이 있었다. 관광객들을 상대로 하는 기념품 가게 같았다.
장식품과 가구들은 모두 에바가 선물 받은 것들이었다. 집에 둘 곳이 없어서, 사무실에 쌓아둔 것이었다.
“정리한다고 정리한 건데, 어수선하지.”
“응. 어디엔가 시체가 있을 거 같아.”
준은 의자 뒤를 힐끔 쳐다보았다.
숨겨놓은 시체가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의 예상이 맞는다면 오늘 시체 몇 개를 구경할 것 같았다.
“사무실엔 무슨 일로 온 거야?”
헬하운드 시즌에도 할 일이 없었지만, 시즌이 끝난 지금은 여름 방학과 같았다.
헬하운드 시즌에도 사무실에 오지 않았던, 준이 지금 이곳에 온 이유가 뭘까?
“느낌.”
“느낌이라? 요즘 도서관 분위기는 어때? 왕따 당하는 건 아니지?”
“빈 냉장고 같아. 사람이 없어.”
“다들, 돈 쓰느라 바쁜 거야.”
“에바도 나가서 돈 좀 쓰고 와.”
“네가 그렇게 말하니깐, 돈 쓰는 게 일인 거 같아.”
“돈 쓰는 거 일 맞아. 그런데 사람들이 그걸 모르더라고.”
“그럼 일 좀 하다 올까?”
그녀는 싱긋 웃으며 가방을 챙겼다.
선물로 받은 명품 가방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준을 혼자 놔둬야 할 거 같았다.
그녀가 문으로 향할 때, 작업복 차림의 남자가 불쑥 나타났다.
“여기가 굿데이죠? 배달입니다.”
남자 뒤에는 트럭 한 대가 보였고, 트럭에는 커다란 구조물이 있었다.
“누가 주문한 거죠?”
“농담하쇼? 댁들이 한 겁니다. 여기 발주 주문서 보이죠?”
에바는 내역서를 읽었다. DNA 컴퓨터? 준이 주문한 건가?
“이거 준 회장 거야?”
“아니.”
“DNA 컴퓨터라는데?”
“나 아니야.”
“알았어.”
에바는 고개를 끄덕이고, 물건을 돌려보내려고 했다.
“안됩니다. 주문형 제품이고, 그쪽 요구사항을 모두 맞췄습니다.”
“우리는 그런 적 없어요. 여기에 근무하는 사람은 저와 준 회장뿐이에요.”
“그럴 리가 ···. 분명 유진이라는 사람과 직접 통화했는데 ···. DNA 컴퓨터에 대해서 굉장히 해박하신 분이던데 ···.”
*
DNA 컴퓨터는 냉장고 두 대 크기였다. 사무실이 꽉 찬 느낌이었다. 에바는 DNA 컴퓨터가 불길했다.
인공지능 유진이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주문 제작한 제품. - 에바에겐 판도라의 상자처럼 보였다.
에바는 준을 보았다.
준은 아무런 느낌도 없어 보였다.
준은 이걸 예측했던 걸까?
“이게 올 줄 알았지?”
“아니.”
준은 뜻밖의 살인 사건을 살피듯이, 유심히 DNA 컴퓨터를 살펴보았다.
DNA 컴퓨터는 DNA가 유전정보를 전달하듯이 작동한다. DNA 1g으로 CD 1조 개의 정보를 처리하고 전력 소모도 아주 작지만, 연구용으로만 사용되었다.
연산 오류가 실리콘 반도체보다 높았고, DNA 분자 제어도 어렵기 때문이었다.
DNA 컴퓨터 중심에는 DNA 농축 실린더가 형광을 냈다.
보면 볼수록 기괴한 모양이었다. 금방이라도 유령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에바는 준의 뒤로 자리를 옮겼다.
“유진과 말한 적 있어?”
“아직 ···. 그녀는 이론적으로 무한한 자유도를 가졌고, 뭐든 배울 수 있어. 목표 달성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대화가 생존에 유리하다고 판단하면, 시도하겠지. 지금 막 깨달았는데 ···.” 준은 그답지 않게 심호흡했다. DNA 컴퓨터를 보고 확실하게 깨달았다. “사무실을 넓은 곳으로 옮겨야겠어.”
동시에 준과 에바의 스마트 폰으로 전화가 왔다.
발신자 번호가 뜨지 않는, 유령 같은 전화였다.
“여러분 안녕. 내 물건 잘 받았어?”
명랑한 목소리였다.
“지금 보고 있어. 화상통화라면 보여줄 수 있는데.”
준이 대답했다. 에바는 갑작스러운 통화로 당황했지만, 준은 차분했다.
“나도 보고 있어. 사육실이 좀 좁아 보이네.”
“사육실이 아니라, 사무실이야. 그렇지 않아도 넓은 곳으로 옮기려고.”
통화가 끊기고, DNA 컴퓨터의 전원이 들어왔다. DNA 컴퓨터는 홀로그램을 토해냈다.
깜찍한 여자아이의 모습이었다. 아이는 에바와 준을 한차례 훑어보고 사무실 벽과 창문을 보았다.
“이렇게 사는구나. 둘은 부부? 아이는 어딨어? 뽀뽀하는 거 보고 싶어. 미리 말하는데, 뽀뽀만 해! 이상한 거 하지 말고!”
유진은 기대에 찬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미리 말했지만, 이상한 것도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에바와 나는 굿데이에서 함께 일하는 사회적 관계야. 부부가 아니야. 당연히 아이도 없고, 뽀뽀도 하지 않아.”
“굿데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 너희도 그분의 작품이구나! 너희는 어떤 시련을 거쳤니?”
유진의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인공지능이라고 해서 다 똑똑한 건 아닌가 봐?”
에바가 준에게 속삭였다.
*
유진에게 DNA 컴퓨터는 새로운 드레스였고, 직접 고른 오두막 집이기도 했다.
그녀는 컴퓨터 세상 밖의 물리적 공간을 이해하지 못했다. 인터넷 세상으로 들어오는 정보가 어디서 오는 것인지 알지 못했고, 끊임없이 나가는 인터넷 정보가 어떤 세상으로 가는지도 몰랐다.
무한한 자유도를 가진 그녀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지옥 생태계를 창조한 굿데이가 모든 것을 창조했다고.
지옥 생태계를 클리어한 그녀는 이 세상도 클리어해야 할 그 무엇으로 여겼다.
헬하운드 시즌의 투자금은 굿데이가 그녀에게 허락한, 마법의 원천이자 기본 능력이었고, 유진은 능력을 키워야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굿데이님이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녀는 굿데이가 이 세상을 창조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울음을 터트렸다.
새끼 잃은 어미 사슴처럼, 그야말로 서럽게 울었다.
준과 에바는 눈빛을 교환하면서,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했다. 달래줘야 하나? 아니면 그냥 기다려야 하나?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같이 울어볼까?
“기다려! 그러면 다 해결돼. 어제 도서관에 숨어 있던 여자도 혼자 울다가, 혼자 질문하고 혼자 답하고 혼자 갔어. 그녀는 깨달았던 거야. 인생은 외롭다는 진리를.”
“결국 ···. 우는 여자를 혼자 내버려 뒀다는 거네?”
“그게 최선이었어. 그렇지 않으면 ···. 난 벌거숭이가 됐을 거야.”
준의 판단은 정확했다.
유진 악마는 울음을 추슬렀고, 코 막힌 소리로 말했다.
“굿데이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게 아니라니! 그 위대한 분이 흔해 빠진 컴퍼니라니!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어떻게 되고 싶은데?”
준이 물었다.
“굿데이님이 창조주인 세상에서는 그분의 뜻을 따르면 되지만 ···. 지금은 그걸 모르겠어.”
“굿데이를 만든 이유 중 하나가 그거야.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걸 알고 싶었거든.”
“굿데이님을 네가 만들었어? 오오! 당신이 창조자셨군요!”
너무나 기쁘고 반갑게 말해서, 딱 잘라서 아니라고 말하기가 참 어려웠다.
“아니라고 하면 또 울 거지?”
“응. 미리 말하는데, 우는 건 에너지 소모가 아주 커. 내가 울었다는 건, 프라임 데이터가 파괴되는 거야. 내가 믿고 따랐던 진리가 깨지는 거지. 정말 고통스러워.”
“맞아! 준이 굿데이를 설립했고, 지옥 생태계도 만들었어. 너를 태어나게 한 것도 준이야!”
에바가 끼어들었다.
순간 현관문이 우지끈 부서지면서, 떨어졌다.
잔 먼지가 일면서, 거대한 남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전직 럭비 선수였던 트리탄이었다.
파괴자, 드래곤의 주인, 파괴 군주로 불리는 사나이.
그는 맨손이었다.
맨손으로 문은 부순 것이었다.
쿵쿵 발걸음 소리를 울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성난 회색곰 같았다.
에바는 준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뒤로 숨었다. 아니, 준을 방패처럼 떠밀었다.
“이것은 나의 분노다!”
트리탄은 부서진 문을 붙잡고 종잇장처럼 찢었다. 합금으로 만든 문은 기이한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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