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 준-14화 (14/141)

헬하운드-11

프로파일러, 래리는 실버 드래곤이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준을 분석했다.

성장배경,

생활반경,

잠자는 시간,

음식,

도서 목록,

만나는 사람,

휴식 공간,

해킹으로 빼낸 일기장과 메모들 ···. 준은 직접 요리하는 걸 좋아했고, 혼자 걷는 걸 즐겼다. 자신을 끊임없이 의심했고, 최근에는 세상까지도 의심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르치는 것은 대부분 거짓이었고, 가끔 있는 진리는 방사능에 오염된 밀가루처럼, 의미를 잃은 지 오래다.

그는 외로움에 익숙했고, 매일 매일 새로운 사실과 놀라운 발견을 맞이했다. 더 많이 알게 될수록 더 외로워졌다.

래리는 준을 전형적인 은둔형 천재로 평가했다.

서류 더미에는 줄리아의 사진도 있었다.

오늘 밤 줄리아와 준이 저녁 식사를 한다.

래리는 준의 이상형을 알아내야 했다. 그가 이상형을 찾아내면, 패션 디자이너들과 메이크업아티스트가 줄리아를 꾸며 줄 것이었다.

그는 에바와 준의 관계를 의심했다.

굿데이에 하나뿐인 직원과 회장.

그 둘 사이에 로맨스가 번창할만하다.

돈,

시간,

젊음의 세 박자가 맞아떨어지면, 관계는 불꽃처럼 타오른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놀랍도록 깔끔했다.

“그년이 레즈비언이잖아.”

건너편에 앉은 찰스가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실력 좋은 프로파일러라고 해서, 모셔왔는데 에바가 레즈라는 것도 모르다니! 이미 서류에 다 나와 있는 내용인데 ···.

“여자는 남자라는 존재보다 권력에 더 쉽게 이끌리죠. 레즈비언에게도 준의 권력과 재능은 매력적으로 보이죠. 지금은 준의 이상형을 찾는 거니깐 ···.”

그는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

몇 장 넘기지 않고도, 준의 어머니가 바람둥이 기질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지금도 남편 몰래 남자친구를 만날 확률이 높다.

‘얘가 많이 불안했겠어. 다행히 아버지가 중심을 잡아줬군.’

아마도, 준이 공부할 때 곁에서 함께 밤샘한 것도 아버지 쪽이겠지.

어렸을 적 준은 왕따였고, 놀림감이었다.

멀쩡한 천재도 바보로 만드는 그런 환경이었다.

자료를 보면 준은 바보로 살 각오도 했던 거 같다. 제대로 된 방향을 잡아준 것은, 그러니깐 준의 재능을 꽃피워준 것은 아버지였다.

“잠깐 ···. 이게 뭐야?”

래리는 고기 굽는 냄새를 맡은 비글처럼 허리를 폈다. 찰스도 덩달아 몸을 들썩거렸다.

“왜 그러는데?”

“데이빗은 준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그런 내용이 있어? 유전자 감식 결과는 못 봤는데 ···.”

“서류에는 없죠. 그래도 정황상, 그는 준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래리는 확신했지만, 찰스는 믿어줄 수 없었다. 그에겐 증거가 필요했다.

“데이빗이 진짜 아빠였다면, 준을 그냥 그대로 키웠을 겁니다. 아이큐 75의 덜떨어진 동네 바보로 살고 있겠죠. 데이빗이 준에게 수학을 직접 가르친 건, 그의 DNA를 물려주진 못했지만, 정신적 DNA를 남기려는 본능 같은 거죠.”

“그가 준에게 직접 수학을 가르쳤다고?”

찰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억을 더듬어도 서류 어디에도 그런 내용은 없었다.

“분명히 그랬을 겁니다.”

“그렇다고 치고 ···. 준의 이상형은 어떤 거지?”

“아직 유년시절만 파악했어요. 기다리세요. 사춘기는 이제 막 시작했거든요.”

“빨리해! 데이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감정결핍 증후군은 일반인보다 더 극심한 공허감을 경험한다.

그 공허감에서 벗어나려고 쾌락에 찾는다.

감정결핍 증후군이 알코올 중독자나 마약중독자가 되는 이유도 쾌락추구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었다. 섹스 중독자도 흔했다.

준도 공허감에 시달릴 테고, 추구하는 쾌락이 있을 것이다. 그 쾌락의 정체를 찾아야 했다.

“감정결핍 증후군은 환상에 매달리죠. 준도 마찬가지예요.”

“환상이라니?”

“하나님, 부처, 알라, 창조주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준이 신을 믿는다고?”

“신에 대한 믿음과는 다릅니다. 종교적인 환상 같은 건데 ···. 예를 들면 부활 같은 거죠. 준은 젊은 나이에 수천만 달러가 넘는 재산을 만들었고, 성공과 명예도 가졌어요. 그런 젊은이가 아침에 일어나 토스트를 구워먹고, 도서관에서 종일 책이나 파며 지냅니다. 파티에도 가지 않죠. 주위에 미녀들이 넘치는데도, 눈길조차 주지 않습니다. 이런 삶이 성립 가능 하려면 ···. 종교적인 무언가에 몰입해야 하죠. 뭐랄까? 현실을 능가해야 하죠. 종교가 추구하는 인간형은 섹스, 술 같은 쾌락에 초월한 모습이죠. 맞네요! 준은 초월하려는 겁니다. 그에겐 돈을 버는 것도 초월을 위한 수단에 불과할 겁니다.”

“이봐, 내가 원하는 건 준이 어떤 여자를 좋아하느냐는 거야. 놈이 고속도로에서 추월하든, 정신적인 해탈을 하든, 천국과 지옥을 믿든, 악마를 불러내든 관심 없어. 오늘 그 새끼와 데이트하는 여자가 그놈을 완전히 홀려서, 홀딱 벗겨 먹어야 해. 그 새끼가 환장하는 이상형을 알아내서, 그놈 앞에 갖다 놓을 거야! 놈은 거부하지 못할, 완벽한 이상형이 필요해! 사랑에 눈이 멀어서, 모든 걸 내놓고 노예로 살겠다고 애걸복걸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그래서 제가 이미 말했잖아요. 아직도 모르겠어요? 놈은 초월적인 여자에게 빠져들 겁니다.”

“초월적인 여자?”

찰스는 악취를 맡은 것처럼 찌푸렸다.

초월적인 인간이라면 준 하나로도 짜증 나는데, 하나가 더 있어야 한다고? 그것도 여자 버전으로?

위장이 뭉쳤다.

*

준은 포시즌 레스토랑 예약석에 앉아서, 상대를 기다렸다. 중간고사 첫 시험시간에 시험지를 기다리는 느낌이었다.

에바의 표현을 빌리자면 ‘업무의 연장’이었다. 그녀는 줄리아가 실버 드래곤의 사냥개에게 정보를 얻어냈고, 저녁 식사는 그 보답이라고 했다.

‘줄리아와 사귀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거야. 그녀는 똑똑하고 재치있고, 무엇보다 널 사랑하거든. 그녀에게 잘 해줘. 너에겐 별거 아니겠지만, 그녀에겐 정말 중요한 일이야.’

에바는 이렇게 말하면서, 준의 복장을 점검했다.

준은 오늘을 위해 슈트를 새로 맞췄다. 에바도 잠깐 설렐 정도로 준의 모습은 멋졌다.

준은 흐뭇해하는 에바를 보며 의아해했다.

‘줄리아라는 여자가 날 사랑한다고? 난 그녀를 알지도 못하고, 그녀에게 해준 것도 없는데? 그녀는 바보인가?’

‘맞아. 여자는 바보야. 그러니깐 오늘 하루만이라도 잘 돌봐줘.’

줄리아가 나타났을 때, 준은 ‘정말 잘 돌봐줘야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가톨릭 수녀복을 빼닮은 옷을 입었다. 스스로 ‘성모 마리아’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최고급 레스토랑보다는 정신병동에 어울리는 차림새였다.

줄리아의 렌즈는 카메라였고, 귓속에는 초소형 이어폰이 있었다.

남성 심리 전문가와 프로파일러 래리가 팀을 이룬 지원부대가 이어폰으로 말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겠지만, 확대 화면으로 보면 준의 동공이 커졌어. 관심이 있다는 증거야. 강하게 나갈 때야.’

남성 심리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 줄리아가 말했다.

“준, 그런 얼빠진 표정은 싫어.”

“이해해줘. 내가 가진 표정 중에서 가장 희귀하고 귀한 거였어. 너에게만 살짝 보여준 건데. 앞으로 세상에 다시 나오지 못하게 영원히 봉인할 게.”

준은 자연스러웠다. 이게 인생 최초의 데이트를 하는 남자가 할 수 있는 멘트일까?

‘뭐야! 이 녀석 완전 꾼이잖아!’

지원 부대 전문가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줄리아도 뜻밖의 모습에 놀랐다.

그냥 책벌레일 줄 알았는데 ···. 재밌는 남자였다.

‘줄리아! 줄리아! 여기는 콘도르. 들려요? 줄리아?’

줄리아는 왼쪽 엄지발가락을 움직여서, ‘네’라는 신호를 보냈다.

‘아까부터 불렀는데, 대답이 없었어. 신호에 집중해줘요.’

줄리아는 다시 왼쪽 엄지발가락을 움직였다.

준이 테이블에 깔린 데이터 필름을 톡 치자, 에어스크린이 떠올랐다.

에어스크린에 포시즌의 메뉴가 나타났다.

줄리아는 씨푸드 트러플 파스타를 골랐다.

준은 레몬과 파이를 곁들인 몽크피쉬를 시켰다. 줄리아의 지원팀은 렌즈 카메라로 모든 것을 보았다.

‘저 녀석 이번 데이트가 처음이 맞아? 놈이 고른 아귀요리는 줄리아가 고른 메뉴와 완벽하게 어울리는 음식이야.’

줄리아는 귓속 이어폰으로 지원팀의 감탄을 엿들었다. 그녀는 괜히 으쓱했다. 봤지! 바로 이 남자가 내가 점찍은 남자야.

“선물을 준비했어.”

그녀는 준비해온,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안에는 조지프가 작성한 보고서 카피본이 들어 있었다. 굿데이는 기후예측모형의 노하우를 공개할 의지가 없고, 영국에 위험한 존재라는 내용이었다.

조지프는 영국의 안전을 위해 굿데이의 노하우를 확보해야 하고, 만일 확보가 불가능하다면 관련 인물을 제거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 보고서를 쓴 사람의 이름은 조지프 펙스턴이야. 영국 첩보부 소속으로 정보 분석과 수집이 전문이지. 영국 전체를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노하우와 전략을 공개해야 해.”

그녀는 우아하고 신비로운 어투를 사용했다. 마치 신의 목소리를 전하듯이.

초월성을 중요시하는, 준이 혹할만한 말투였다. 이제 준은 줄리아가 어떻게 이 자료를 얻었는지 궁금해할 것이다.

남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데이트의 기본이었다.

“이걸 어디서 구했어?”

“실버 드래곤에서 빼냈어.”

“아! 미안해.” 준은 서류를 봉투 안에 넣었다. 가죽을 쓰다듬듯이 부드러운 동작이었다. “에바의 실수야. 그리고 에바의 실수는 나의 잘못이지. 에바가 너에게 그런 부탁을 했을 때, 이미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어.”

“무슨 소리야? 실수나 잘못 같은 거 없었어. 저녁 식사도 내가 원한 거야.”

“실버 드래곤의 사람들은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이야. 그런 사람을 상대로 정보를 캔다는 건, 역효과만 낼 뿐이지. 넌 실버 드래곤에 포섭됐어. 그들이 원하는 게 뭐였지? 투자전략? 아니면 내 맘을 빼앗는 거?”

“널 돕고 싶을 뿐이야.”

“왜?”

“그건 나도 모르겠어.”

지원팀이 끼어들 틈도 없이 빠르게 대화가 오갔다.

‘잘하고 있어! 이제 실버 드래곤에 포섭된 이유는 그들에게 더 많은 정보를 얻으려고 했다고 말해.’

지원팀이 가까스로 타이밍 잡았다.

“실버 드래곤이 위험한 조직이라는 것도 알아. 하지만 그들에게 정보를 빼내고 싶었어. 널 위해서.”

그녀는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말했다. 준은 묵묵히 그녀를 지켜보았다.

‘줄리아! 지금 인도네시아에서 지진이 발생했어. 머리가 아프다고 말해.’

“머리가 아파.”

“대화가 너무 거칠었지. 따듯한 물을 주문할까?”

“그런 거랑 달라. 어디선가 지진이 났어. 느껴져.”

지구와 교감하는 신비로운 여인은 준을 철저히 분석해서 만들어낸, 승부수였다.

준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 반짝였다. 확대화면으로 준의 동공확장을 확인한 지원팀은 성공을 예감했다.

준은 신비로운 줄리아를 보며 생각했다.

자신을 성모 마리아로 착각하고,

기밀정보를 식사 선물로 주고,

거짓말하고,

지구공학적으로 미쳤고 ···. 마지막이 결정적이었는데 ···. 그녀는 무좀이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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